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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Maria Callas. 1923년 12월 2일 미국 뉴욕에서 출생 ~ 1977년 9월 16일 프랑스 파리에서 타계 (향년 54세)
그리스어 풀네임은 '마리아 안나 소피아 카이킬리아 칼로게로풀루(Μαρία Άννα Σοφία Καικιλία Καλογεροπούλου)'. 하지만 예명으로 축약한 이 항목의 이름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클래식 오페라의 소프라노 가수들 중 그야말로 왕본좌 누님.
개인으로서의 카리스마, 예술적 성취, 화려함과 비극이 뒤엉켜 이야기 거리가 풍부한 개인사, 그리고 세대에 걸친 거대 팬덤을 모두 갖춘 전설적 아이콘
20세기를 대표하는 소프라노
La Divina(聖女)
오페라에서의 BC는 Before Callas.
2 생애
2.1 유년기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 있는 한 병원에서 그리스 이민자 부부였던 요르고스 칼로게로풀로스(미국으로 귀화하면서 조지 칼라스로 개명)와 에반젤리아 디미트리아두의 1남 2녀 중 막내이자 둘재딸로 태어났다. 조지와 에벤젤리아 부부의 사이는 유감스럽게도 꽤 막장이었다. 가족에 별 관심이 없었고 매사에 의욕이 없던 아버지 조지와 아이들의 장래에 지나치게 간섭하고자 했던 어머니 에반젤리아 사이에서 자식들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데, 칼라스의 경우 세 살때부터 노래에 재능이 있다고 여긴 에반젤리아의 강요 때문에 성악을 비롯한 음악 공부를 억지로 해야 했다.
실제로 칼라스의 노래 실력은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도 꽤 괜찮은 편이었고, 뉴욕에서 열린 어린이 노래 경연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칼라스는 훗날 이 시절을 보람없고 지긋지긋한 고생의 나날이라고 부정적으로 회고하며 "그런 짓을 못하게 금하는 무슨 법률이라도 있어야 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서 어린 시절을 빼앗아선 안 된다"고 말했다. 게다가 아이들에게 성악 공부시키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던 조지도 시도때도 없이 부부싸움을 일으켰고, 결국 1937년에 에반젤리아가 두 딸을 데리고 그리스로 귀국하면서 별거에 들어갔다.
2.2 그리스 시절
하지만 그리스에서는 그 동안 휘둘리고 살았던 딸들이 어머니와 자주 다투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내켜하지 않는 칼라스를 데리고 아테네 음악원에 입학 원서를 내 오디션을 보게 했다. 하지만 기초 성악 기교가 전무하다는 이유로 곧장 퇴짜맞았고, 이어 그리스 국립 음악원에서 두 번째로 오디션을 봤다. 오디션을 주관했던 성악 교수 마리아 트리벨라도 아직 다듬어지지 않아 거칠다고 인정하면서도, 가능성을 훨씬 높게 점쳐 입학 자격을 인정했다.
음악원에 입학한 칼라스는 트리벨라의 문하생이 되었는데, 트리벨라는 다소 어두운 목소리의 질감 때문에 종종 알토 음역이 적합하다는 주위의 평과 반대로, 소프라노 음역으로 테시투라[1]를 높이는데 중점을 두고 훈련시켰다. 칼라스는 이 과정에서 서양 성악의 기본 창법인 벨 칸토를 상당 수준까지 터득했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단히 서툴게 불렀던 어려운 오페라 아리아들도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또 어머니의 치맛바람이 불어닥쳤는데, 1938년에 공식 데뷰 무대에 출연한 직후 전에 뻰찌먹인 아테네 음악원으로 편입시킨다며 딸을 다시 데려가 오디션을 보게 했다. 이번에 오디션을 주관한 교수는 스페인 출신의 엘비라 데 이달고였는데, 교육 활동에 전념하기 전까지는 매우 뛰어난 기교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가수였다.
이달고는 칼라스의 목소리가 매우 열정적이고 극적이라고 긍정적인 평을 내렸고, 노래가 끝나자마자 합격 판정을 내렸다. 다만 즉시 입학하지는 못했고, 일단 그리스 국립음악원을 졸업하면 입학시켜달라는 어머니의 요구 때문에 1년 유예되었다. 아테네 음악원 입학 직전이었던 1939년 4월 2일에는 국립음악원 학생들이 제작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공연에 산투차 역으로 출연해 오페라 무대에도 데뷰했다.
같은 해 가을에 아테네 음악원에서 두 번째 성악 전공을 시작했는데, 물론 지도 교수는 오디션 때 만났던 이달고였다. 이달고는 칼라스의 기교가 매우 출중하고 표현력도 훌륭하지만, 고음역이 약간 모자란다는 판단으로 자신의 콜로라투라 창법을 집중적으로 전수해 주었다. 국립음악원 시절에도 그랬지만, 칼라스는 제일 먼저 등교해 제일 늦게 하교하는 일이 예사였고 다른 교수들의 수업도 빠짐없이 청강하는 등 독종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칼라스, 무서운 아이...
아테네 음악원에서 졸업할 때가 되자 이달고는 칼라스에게 그리스 국립오페라단 비상근 단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줄을 대주었는데, 아직 젖뉴비였던 10대의 나이에 오페라 무대에서 심각한 핸디캡이었던 고도근시까지 있었음에도 별 무리없이 무대 연기를 소화해내며 다른 단원들을 데꿀멍 시켰다. 상근 단원 자격을 얻어 처음 맡은 주역은 1942년 8월에 공연된 푸치니의 토스카 타이틀 롤이었고, 이어 그리스에서는 초연이었던 오이겐 달베르의 '저지(낮은 땅)'에서도 여주인공 마르타로 출연해 호평을 받았다.
1944년 여름에는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에서도 타이틀 롤로 열연했는데, 독일 비평가였던 프리드리히 헤어초크가 극찬했을 정도로 명연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추축국 측의 좋은 평가가 그리스 해방 후에는 오히려 악재로 작용했는데, 해방 직후 이어진 내전 상황 속에서 칼라스는 독일 협력자로 간주되어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달고는 이탈리아로 옮겨가 활동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는데, 칼라스는 오랫동안 못보았던 아버지도 다시 만나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활동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다시 미국에 돌아갔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본 오디션은 그리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매우 긍정적인 평을 얻으며 피델리오와 나비부인 역을 제안 받지만, 칼라스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 피델리오를 영어로 공연하는 것도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몸매로 나비부인을 연기하는 것도 모두 탐탁치 않았다는 것. 이후 에디 바가로지가 기획한 투란토트 공연에 주역으로 캐스팅 되기도하지만, 시작도 하기전에 프로덕션이 도산하는 바람에...[2] 하지만 바로 이 '투란도트' 준비 중에 베이스 바리톤 니콜라 로시-레메니를 만나고, 로시-레메니는 마침 뉴욕에서 그 시즌에 베로나의 로마 시대 원형 경기장인 아레나에서 개최되는 유명한 야외 오페라 페스티벌(베로나 아레나 페스티벌) 무대에 올릴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 조콘다'의 주연을 맡을 소프라노를 찾고 있던 조반니 제나텔로(왕년의 유명한 테너 가수로, 당시 베로나 아레나 페스티벌의 감독)에게 그녀를 조콘다 역으로 추천하였다. 오디션 결과에 만족한 제나텔로는 칼라스를 조콘다 역으로 캐스팅하였고, 그녀는 뉴욕에서 여객선을 타고 마침내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향했다.
2.3 이탈리아 활동기
1947년 베로나에 도착한 칼라스는 '라 조콘다' 공연의 지휘를 맡은,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 지휘계의 본좌였던 툴리오 세라핀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후 세라핀은 그녀의 멘토로서 그녀의 음악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47년 8월 2일 베로나 아레나 무대에 올려진 '라 조콘다' 공연에서 조콘다 역을 맡은 칼라스는 리허설 중 다친 다리에 깁스를 감고도 펼친 열연으로 성공적인 이탈리아 데뷔를 마친다. 이후 칼라스는 세라핀이 지휘하는 여러 오페라 공연에 출연하면서 경험과 명성을 동시에 얻기 시작했고, '라 조콘다' 공연을 계기로 만난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라는 사업가와 결혼했다. 참고로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아버지와 동갑이었다(...).
1949년 1월에는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 역사상 전설로 남을 만한 진기한 공연을 했는데, 원래 극장과 맺은 계약은 1월 8/12/14/16일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제2부 '발퀴레' 공연에서 드라마틱 소프라노의 배역인 브륀힐데 역을 노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비로 뒤이어 라 페니체에서 상연될 예정이었던 벨리니의 오페라 청교도에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배역인 엘비라 역으로 캐스팅된 소프라노 마르게리타 카로지오가 인플루엔자로 앓아누워 하차하자, 두 공연에서 모두 지휘를 맡은 세라핀의 요청을 받아들여 1월 16일 '발퀴레' 공연을 마치고 19/22/23일 엘비라 역까지 노래했다. 완전히 다른 성격의 음악과 창법, 연기를 막힘없이 소화해내는 이 가수에게 청중들은 그야말로 뿅가죽네 상태가 되었다. 유명한 오페라 연출가 프랑코 제피렐리도 이 때의 공연을 보고 경악했는데, 훗날 '그것은 마치 비르기트 닐손이 바그너 공연을 마치고 사흘 만에 베벌리 실즈의 대역을 노래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 일이 더욱 대단한 것은, 칼라스가 엘비라 역을 단 1주일 만에, 그것도 '발퀴레'를 계속 공연해가며 짬짬이 익혀 공연했다는 점이다. 다만 악보는 다 외웠어도 가사는 다 외우지 못해서, 무대 앞에서 가사를 읽어주는 프롬프터가 'Son vergin vezzosa'(나는 매혹적인 처녀)라고 읽어준 것을 잘못 알아듣고 그만 'Son vergin viziosa'(나는 사악한 처녀)라고 노래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러나 브륀힐데 역을 노래하고 사흘 만에 엘비라 역을 노래하는 '기적'을 마주한 관객들은 그런 실수쯤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다만 이 때의 경험은 이후 경력을 봐도 상당히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경우였고, 이후 칼라스의 주요 레퍼토리는 이탈리아 오페라, 특히 도니제티와 벨리니의 낭만주의 벨 칸토 위주로 확립되었다. 1950년 4월 12일 오페라 가수들의 환상향이상향이자 가장 가혹한 비평 무대로 손꼽히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에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의 아이다 역으로 데뷔하였는데, 이 공연은 당시 라 스칼라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던 (그러나 곧 칼라스에 의해 밀려나게 되는) 레나타 테발디의 대역으로 출연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주역으로 정식 계약한 라 스칼라 데뷔는 1951년 12월 7일 역시 베르디의 오페라인 '시칠리아의 저녁 기도'의 엘레나 공주 역으로 이루어졌고, 곧 이 극장의 레귤러 가수가 되었다. 동시에 HMV(이후 EMI)의 명 프로듀서였던 월터 레그에게도 발탁되었고, 본격적인 오페라 전곡 녹음도 시작했다.
2.4 세계 무대
칼라스가 이탈리아에서 연이어 거둔 성공은 다른 나라들의 오페라극장과 오페라단에도 신속하게 전해졌는데, 1952년 11월 8일 런던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극장에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의 타이틀 롤로 데뷔하여 절찬을 받았다. 이후 코벤트 가든에서 '아이다'의 타이틀 롤, '일 트로바토레'의 레오노라 역,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역, '메데아'의 타이틀 롤, '토스카의 타이틀 롤로 출연하였으며, 그녀의 마지막 오페라 무대도 1965년 7월 5일 코벤트 가든에서의 '토스카' 공연이었다. 1956년 6월 12일에는 빈 국립 오페라극장에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타이틀 롤로 데뷔하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칼라스는 자신의 뚱뚱한 몸에 대한 열폭 때문에 고민했는데, 결국 1953년 봄부터 다이어트에 들어갔다. 비록 남편인 메네기니나 그의 팬들은 칼라스의 몸집에 훨씬 관대했지만, 노래 뿐 아니라 연기하는 배역과 일체화되기 위해서는 더 날씬한 몸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행한 감량이었다. 1954년 초까지 약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칼라스가 뺀 살은 무려 36킬로그램이었고, 그야말로 하루 아침에 '북경오리에서 백조로 환골탈태한' 몸매를 얻게 되었다.[3]
1954년에는 시카고의 리릭 오페라단에서 첫 미국 공연을 성황리에 마쳐서, 1940년대에 아무 곳에서도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방황했던 미국 생활의 굴욕을 제대로 설욕했다. 그러나 이 오페라 공연 뒤 갑자기 사복경찰들이 대기실에 찾아왔는데, 미국 공연기획자인 에디 바가로지가 칼라스를 계약 위반으로 고소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고소 소식을 듣고 칼라스가 완전히 꼭지가 돌아서 고성과 욕설을 퍼붓는 모습이 기자들의 카메라에 찍혔는데, 완전히 뒤틀린 표정의 칼라스와 오히려 그 기세에 눌려 두려워하는 사복경찰의 모습은 그야말로 짤방 감이 되었다. 이 사진은 이후에도 칼라스 스캔들 관련 기사에 종종 등장하며 '성질 더러운 프리마돈나'라는 이미지 형성에 한몫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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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에 역시 노르마 역으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처음 출연했을 때도 스캔들이 일어났는데, 타임 지에서 칼라스와 라이벌이었던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 사이의 관계나 어머니와의 불화 등을 상당 부분 왜곡하고 부풀려 게재한 기사를 실은 것이 화근이었다. 이전에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지만, 칼라스에 대한 언론의 설레발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죽기 직전까지도 온갖 선정적인 기사와 그로 인한 소송드립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2.5 하락세, 불륜과 만년
하지만 칼라스도 신은 아니었고, 빡빡한 공연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목을 혹사하다 보니 예정했던 일정을 취소하는 사례가 늘기 시작했다. 1958년 1월 2일 로마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했던 노르마 역은 그야말로 흑역사였는데, 공연 전날 나이트클럽에서의 신년 파티에서 너무 과음하고 신나게 놀았던 탓에 공연 직전에 목이 부어오를 정도로 상태가 안좋아 의사나 매니저가 출연 취소를 간청했음에도 '누구도 칼라스를 대신할 수 없다'면서 억지로 무대에 올랐다가 제1막도 끝내지 못한 채 공연 취소를 선언하고 극장을 나가버렸다. 사실 극장측도 관객들이 칼라스의 노르마를 잔뜩 기대하고 있다며 대역조차 준비해 두지 않았고, 설령 대역을 쓰려 해도 감히 칼라스의 대역으로 노르마 역을 노래하려고 선뜻 나서는 이가 없어 그대로 공연을 강행했다가 사단이 나고 말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날 공연이 이탈리아 대통령 등 정계 고위층들이 임석한 중요한 이벤트였던 터라, 공연을 망친 칼라스에 대한 비난 여론이 대단히 빠르게 확산되었다. 당시 제작된 뉴스 필름의 아나운서 멘트도 비꼬는 투가 다분했을 정도.[4] 물론 여기에 가만히 있을 칼라스도 아니었고, 곧 극장과 언론사를 향해 분노의 고소장들을 날려버렸다.
사생활 쪽에서도 남편 메네기니가 자신의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수입(공연 출연료, 레코딩 개런티 등)을 시동생들의 사업자금 등 시가(媤家) 식구들을 위해 무단으로 써버린 사실을 알게 된 것을 계기로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1957년에 그리스의 선박왕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와 만나 눈이 맞으면서부터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었다. 칼라스와 오나시스가 비록 주변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면서 조용하게 관계를 가지려고 했다지만, 1959년에 결국 칼라스가 오나시스의 아이를 임신하는 단계까지 가게 되자 공개적으로 들통나고 말았다. 당연히 빡친 메네기니는 언론에 떠들어댔고, 칼라스는 불륜녀로 찍히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메네기니는 돈줄인 아내를 놓치지 않으려고 이혼만은 못해준다고 버텼고, 결국 칼라스는 지루한 공방 끝에 이탈리아가 아닌 그리스에서 이혼 절차를 진행시켜 메네기니와의 결혼생활을 청산했다.
그런데 오나시스는 '나의 아이를 낳은 여자에게는 욕정을 느낄 수 없다'는 이상한 핑계를 내세워 (실제로 그래서 본처인 아티나가 딸 크리스티나와 아들 알렉시스를 낳은 뒤 부부 사이가 냉각되었다고도 한다) 칼라스에게 낙태 수술을 강요했고, 결국 그녀는 뱃속의 아기를 낙태시키고 말았다. 칼라스와 오나시스 사이의 관계는 그 뒤로도 동거 형식으로 계속 이어졌지만, 그마저도 1968년에 오나시스가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미망인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에게 관심을 돌리면서 끝장나고 말았다.
외도와 그로 인해 빚어진 유산 후에는 다시 몸을 추스려 무대로 복귀했는데, 이미 목 상태도 예전같지 않아 거의 재활 훈련 급으로 강한 발성 연습을 거듭하며 컨디션을 유지해야 했다. 가사의 발음도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고, 다루는 작품도 노르마와 토스카, 케루비니의 '메데아' 정도로 극히 적어졌다. 결국 1965년 7월에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한 토스카를 마지막으로 오페라 무대를 영원히 떠났다.
이후에는 영화감독인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와 '공주 메데아'라는 영화를 찍기도 했고, 오페라 연출가로 활동해 보기도 했지만 모두 평은 좋지 않았다. 1971년부터 72년까지는 뉴욕의 줄리어드 음대에서 성악 마스터 클래스를 개최했고, 이 수업은 녹음되어 칼라스 사후에 음반과 녹취록으로 발매되었다.
1973년에는 자주 콤비를 이루어 공연했던 테너 가수인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세계 순회 투어를 개최했는데, 물론 둘 다 성악가로서의 생명은 사실상 끝난 상황이었고 평단의 여론도 매우 좋지 않았지만 원체 유명했던 이름값으로 매진 사례를 이어갔다. 투어의 마지막은 1974년에 한국과 일본에서 열린 공연으로 끝났다. 1976년에는 재차 컴백할 계획으로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 비밀리에 리허설을 했는데, 이 장면이 파파라치들에게 잡혔고 곧장 칼라스의 목소리 상태에 대한 폄하의 기사가 (한마디로 발성이 엉망진창이었다는 조롱의 내용) 프랑스 언론들에 떴다. 물론 이 역시 고소크리.
마지막 컴백 계획이 무산된 뒤에는 파리의 아파트에 틀어박혀 거의 고립된 생활을 했고, 우울증과 불면증을 이겨내기 위해 처방전도 없이 온갖 약품들을 다량 복용하면서 건강도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이때 집에 틀어박혀서 젊은 시절 전성기 때의 음반을 듣고 홀로 흐뭇해하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고 한다. "그래...그땐 넌 참 잘했어."
그렇게 쓸쓸히 1977년 9월 16일 아침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그리스 정교 의식에 따라 진행된 장례 후 화장되어 페르 라셰즈 묘지의 납골당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유골함은 극성팬들에 의한 도난 시도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후견인이라고 자칭한 바소 데비치라는 여인이 칼라스 생전의 유언이라며 유골을 에게해에 뿌렸다. 하지만 여기에도 또 다른 뒷이야기가 있었으니...
3 음악 성향
그리스 시절에는 상술한 대로 달베르의 저지와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공연한 기록도 있고, 이탈리아 경력 초반에는 하이든의 오페라나 오라토리오, 모차르트의 후궁 탈출, 바그너의 파르지팔을 공연한 기록도 있지만, 일단 본격적인 커리어가 시작된 이후에는 이탈리아 낭만파 오페라만을 중심 레퍼토리로 삼았다. 다만 리사이틀이나 녹음에서는 베토벤, 모차르트, 베버, 바그너 등 독일어권 작곡가와[5] 불어권 아리아들도 종종 불렀다.
음악사적으로 칼라스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로시니, 벨리니, 도니제티로 대표되는 이른바 벨칸토 오페라 레퍼토리를 20세기에 부활 시킨 일이 될 것이다. 칼라스 의 데뷔 당시 오페라의 대세는 푸치니를 위시한 베리스모 오페라였다. 벨칸토 오페라 중 노르마나 루치아 같은 대작들은 여전히 공연이 되었지만, 주로 가수들의 기교 과시용 작품 취급을 받던 상태. 칼라스는 안정된 고전적 벨칸토 창법과 타고난 음악성을 발휘, 구닥다리로 전락한 벨칸토 오페라의 음악적/극적 가치를 재인식 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칼라스의 벨칸토 오페라 편애가 얼마나 심했는지, 자신의 주요 레퍼토리였던 토스카마저 '그냥 일이니까 부르는 것'이라고 폄하했을 정도다.
레퍼토리는 이탈리아 오페라로 한정되어 있지만, 역할의 성격과 목소리 특성면에서는 칼라스만큼 폭넓은 영역을 선보인 가수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스타일적으론 케루비니나 스폰티니의 고전주의 오페라부터 푸치니의 베리스모까지, 성악적으로는 콜로라투라 기교가 넘치는 루치아부터 바그너의 브륀힐데와 쿤드리까지, 극적인 면에서는 연얀한 소녀 나비부인부터 사자처럼 포효하는 메데아까지 넘나든 것이다. 57년에 한 인터뷰에서, 칼라스는 호기당당하게 "제 라이벌들이요? 비슷비슷한 작품만 연달아 부르는 가수들을 제 라이벌이라 할 수 있나요?"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넓은 영역을 소화할 수 있었던 건 타고난 음악적 자질과 집착에 가까운 완벽주의, 그리고 일 중독 수준의 엄청난 노력의 결과였다. 그리스 시절 문단에 쓴 바와 같이, 칼라스는 그리스에서 본격적으로 성악을 배우던 시기부터 자신에게 의무적으로 주어진 수업 뿐 아니라 음악원 커리큘럼의 가능한 모든 과목을 청강해 가며 성악 뿐 아니라 음악 전반에 걸친 지식을 모두 습득하려고 했다. 흔히 칼라스를 연기력이 빼어난 가수라 칭하지만, 그녀는 철저히 음악을 바탕으로 드라마를 이해했지 음악적 이해의 부족을 연기로 메꾸는 가수가 아니었다.
칼라스는 각각 다른 음악적 성격과 작곡가별 스타일을 정확히 이해하는 지적인 가수였다. 1959년에 런던에서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녹음할 때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미숙한 영국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관악 단원들에게 벨리니와 도니체티의 스타일적 차이점, 각종 장식음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가르쳐 가며 녹음을 했을 정도였다. 요즘에는 성악가들도 다양한 음악 이론을 배우지만, 칼라스의 시대에는 성악가는 노래만 잘 하면 된다는 분위기였다 (무식하고 콧대만 높은 '디바'의 이미지는 그때문에 생겨났다).
또 오페라에서 비음악적 표현을 동원하는 것을 싫어하던 그녀의 성향은 생애 후반이었던 1970년대에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개최한 마스터클래스에서 잘 드러난다. 젊은 성악가들에게 칼라스는 끊임없이 텍스트의 이해, 정확한 기교, 몸에 앞서 목소리로 연기할 것을 강조하고, 악보에서 벗어난 장식음이나 한숨, 웃음 같은 비음악적 표현을 집어넣으면 가차없이 제지하고 있다.
칼라스는 이런 엄격한 잣대를 자신 뿐 아니라 다른 동료 가수나 극장 매니저 측에도 똑같이 요구했고, 이는 종종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칼라스를 '해고'한 것으로 유명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극장장 루돌프 빙은 훗날 인터뷰에서 "칼라스는 내가 만난 가수 중 가장 지적이었다. 그녀는 완벽한 공연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다른 가수들처럼 적당히 설득하고 회유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극장장으로서 그런 그녀와 일하기란 무척 어려웠다."라고 회고했다. 1950년대 초반에 칼라스와 함께 녹음과 공연을 했던 카라얀도 "리허설 첫 날부터 칼라스가 악보를 들여다 본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자기 역할 뿐 아니라 오페라 전체를 이미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건 지휘자에게는 큰 위협이었다."라고 언급했다.
이런 위대한 성악가의 목소리가 일반적인 미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건 기묘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칼라스는 자신의 녹음을 처음 들었던 때를 회고하며 "내 못난 목소리에 너무 충격을 받아 눈이 빠지게 울었다"고 말했을 정도. 일반적으로 소프라노라면 연상되는 맑고 청량한 느낌대신, 칼라스는 음성은 기본적으로 무겁고 회색 베일에 싸인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칼라스는 적어도 전성기 때는 그런 타고난 음색을 빼어난 호흡 조절과 성악 기교로 필요에 따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래서 노르마에서 표효하던 그 목소리로 몽유병의 여인에서 고음의 기교를 무리 없이 오르내리고 나비부인에서는 놀랄 만큼 순박한 소녀의 음성을 보여줄 수 있던 것. 그래서 어떤 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름다웠다면 그런 폭 넓은 표현력을 위해 도전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다만 목소리의 전성기가 너무 일찍 지난 것이 흠으로 지적된다. 50년대 후반에 이르면 고음이 거칠어지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고, 60년대에 드러서면서는 총체적인 변질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목소리 변화의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은 결론이 없지만, 급격한 다이어트, 무리한 일정, 다난한 개인사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이 함께 작용했으리란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그 전설적인 연기력을 눈으로 확인할 영상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이 큰 아쉬움이지만, 이미 목소리의 전성기가 지난 시기에 촬영된 열악한 화질의 영상만으로도 칼라스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오페라 연기를 짐작하기에는 충분하다. 62년 함부르크 리사이틀에서 카르멘을 부르는 영상, 65년 파리에서 노르마를 리허설하는 짧은 영상을 보면 호들갑스런 동작 없이 목소리와 혼연일체된 절도 있는 손 제스처와 시선 처리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그래서 칼라스와 여러 번 함께 작업한 지휘자 안토니노 보토는 "칼라스를 단순히 가수로 부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무대 위 그녀는 음악가이며 배우이며 무용수이며 음유시인이다. 한 마디로 칼라스는 완벽한 공연 예술가다"라고 말했다.
4 사후의 평가와 우여곡절
생전에 실황으로 공연을 본 사람들의 인상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EMI의 전속 아티스트로 활동하며 꽤 많은 양의 오페라 전곡 음반과 아리아집을 남긴 탓에 녹음으로나마 그 전설을 확인하려는 이들이 곳곳에서 득시글대고 있다. 저작권이나 저작인접권 만료 직전까지도 EMI가 이들의 단물을 빨아먹기 위해 리마스터링을 몇 차례고 거쳐 각종 전집 시리즈를 내놓아댔을 정도니 더 이상의 말이 必要韓紙?
게다가 다른 가수들이라면 상상도 못할 리허설 음반이나 마스터 클래스 음반, 심지어 인터뷰 음반까지도 유통되고 있어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인기를 실감케 한다. 그 외에 방송국에서 중계한 실황녹음 같은 비공식 음원이나 객석에서 몰래 녹음한 부틀렉도 이런저런 복각 전문 음반사에서 계속 출시되고 있다.(물론 개중에는 해적반도 많다.)
사후에도 이런저런 전기 영화나 연극이 나오고 있는데, 평전 등 전기물 종류도 꽤 많은 편이다. 다만 칼라스가 원체 굴곡많은 삶을 살았던 인물인 만큼, 이들 저작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꽤 다양하게 갈라진다. 가령 토니 파머의 전기 영화는 영화 자체로만 따지면 꽤 잘 만든 다큐멘터리 축에 들지만, 칼라스 팬들의 뒷목을 잡게 만들 정도로 왜곡이나 비약이 심하다는 욕 또한 많이 먹는다.
한편 씁쓸함을 남기는 반전도 있었는데, 칼라스 사후 그녀의 유언 집행인을 자처한 바소 데비치라는 여자가 사실은 막대한 유산을 노린 고도의 사기꾼에 칼라스를 죽음으로 몬 각종 비처방 약들의 제공자라는 내막이 폭로되었다. 여러 전기 작가들과 생전 지인들은 데비치가 칼라스와 친분 관계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깊지는 않았고, 매니지먼트나 유언 집행인 자격도 인정한 일이 없었다며 천하의 개쌍년 취급하고 있다.
심지어 프랑코 제피렐리는 2004년 말에 기자회견까지 열어 데비치의 행적을 맹렬히 비난했고, 억대의 소송에 봉착한 데비치가 죽기 직전 자기 몫의 유산을 마리아 칼라스 기념 재단에 기부하겠다고 데꿀멍하며 일단락되었다.
5 트리비아
- 칼라스는 지독한 근시였지만, 평소에 집에서 생활할 때를 빼고는 절대 안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여성성에 대해 보수적인 관점을 고수했던 그녀로서는 안경 쓴 여자는 매력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그래서 오페라 무대에서는 사실상 장님과 다를바 없었고 지휘자도 거의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매니저를 비롯한 공연 관계자들은 그녀가 행여 무대 밑의 오케스트라 피트[6]에 빠질까 노심초사했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었고, 박자를 놓치는 경우도 없었다.
- 칼라스가 케루비니의 메데아 역을 처음 불렀을 때 지휘자로 등장한 인물은 미국의 기대주였지만 오페라 지휘 경력이 일천했던 레너드 번스타인이었다. 칼라스는 번스타인의 양성애 성향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서 꽤 까탈스럽게 대했다고 하는데, 자신이 내심 마음에 들어한 연출가인 루키노 비스콘티와 무대 뒤에서 썸씽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7] 하지만 공연 뒤 번스타인은 '오페라의 성서'라고 칼라스를 추켜세웠고, 이후에도 그 때의 공연이 자신의 오페라 지휘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긍정적으로 회고했다.
- 생전에 이미 전설급 스타가 되어 거대한 팬덤 만큼이나 안티도 많았고, 덕분에 그에 얽힌 에피소드들도 많다. 그 중 유명한 몇 가지만 소개하면...
- 55년 스칼라에서 대성공을 거둔 라 트라비아타의 커튼 콜 중 팬들이 칼라스에게 던진 꽃 사이에는 안티 팬들이 조롱의 뜻으로 던진 채소들도 섞여 있었다. 칼라스는 꽃 대신 채소를 집어들고 보란듯이 관객에게 인사를 해 멋지게 맞받아 쳤다.
- 58년 로마에서의 노르마 공연 중단 스캔들 후 바로 다음 공연은 스칼라에서의 안나 볼레나 재공연이었다. 여론이 엄청나게 안 좋은 상태에서 관중석은 언제든 야유를 퍼부울 준비가 된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1막의 마지막 씬에서 칼라스는 안나를 체포하는 병사들을 뿌리치고 무대 앞으로 달려나가 관객들에게 직접 대사를 외친다. "안나를 체포하라! 심판하라, 당신들의 여왕을!" 이 두둑한 배짱과 드라마 센스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욕하러 왔던 사람들까지 가세해 극장을 떠나는 칼라스의 차를 둘러싸고 진짜 여왕처럼 환대를 했다고.
- 61년 스칼라에서의 메데아 공연 중 컨디션 난조로 제 기량을 못 보이는 칼라스에게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1막의 마지막에 자신을 배신한 이아손을 비난하는 장면에 이르러 칼라스는 오케스트라를 멈추고 관객을 향해 육성으로 대사를 외쳤다. "Crudel! Ho dato tutto a te! 잔인한 사람, 난 당신께 모든 걸 바쳤는데!" 관중은 다시 한 번 데꿀멍이 되었고, 공연 후에는 기립박수로 답했다.
- 6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마지막으로 공연했던 토스카는 시작부터 관객의 열기로 팽팽했다. 좌석은 오래 전에 매진이었고 입석표를 구하느라 사람들은 이틀 밤낮을 노숙까지 했다. 공연 날 무대 뒤에서 '마리오!'를 외치는 칼라스의 목소리가 들리고 드디어 그녀가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관중석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무려 5분여 간 지속되는 사람들의 박수와 '브라바', '비바 디비나'를 외치는 함성 소리로 공연은 잠시 중지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 중심에 선 칼라스는 내내 토스카의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않은채 미동도 없이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74년 뉴욕, 디스테파노와의 듀오 리사이틀 직전 50년대 부터 칼라스의 미국 공연을 매니징 하던 솔 후록이 갑작스런 사망했다는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렇잖아도 컴백 리사이틀 투어에 쏟아지는 대중의 관심과 언론의 악평, 무책임한 디스테파노와의 다난한 관계 등으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있던 칼라스에겐 마지막 쥐약 같은 소식이었다. 처참한 상태로 겨우 공연을 마치고 극장을 나서는 그녀의 앞에는 언제나처럼 수 많은 팬과 취재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솔 후록이 보낸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눈물을 흘리던 칼라스는 화환의 꽃을 하나 하나 사람들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곧 칼라스의 꽃을 차지하려 흐트러진 무리의 가운데에 길이 났고, 칼라스는 그 틈에 대기하던 차에 올라타 사라져 버렸다.
- 어느 이탈리아 파스타 제조업체가 '칼라스는 우리 회사의 파스타로 다이어트에 성공했다'라고 이빨을 깠는데, 칼라스의 다이어트 식단에 파스타 따위는 없었고 소스 치지 않은 샐러드와 퍽퍽한 닭가슴살이 있었을 뿐이었다. 결국 소송드립으로 버로우.
- 칼라스가 1971~72년에 뉴욕의 줄리어드 음대에서 성악 마스터클래스를 개최했을 때 한국의 소프라노 이규도, 박정하, 테너 박인수와 바리톤 김성길이 그녀의 수업을 들었다. 특히 김성길에게 리골레토의 아리아를 가르치는 세션은 마스터클라스 중 가장 유명한 장면으로 손끕힌다. 다소 밋밋하게 곡을 부르는 김성길에게 칼라스는 절규하는 짐승과 같은 리골레토의 심정을 직접 표현해 보이는데, 그걸 직접 지켜본 이들은 '역사상 최고의 리골레토는 여자였다'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 ↑ tessitura. 해당 성역의 가수에게 자주 요구되는 음역대를 일컫는 단어.
- ↑ 이때 깊게 생각않고 싸인한 계약서의 전속 조항 때문에 나중에 소송에 휘말린다. 시카고에서 나비부인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촌극의 씨앗이 바로 이 계약이다.
- ↑ 이 다이어트에 대해서 기생충, 그러니까 회충을 먹어서 뺐다는 루머도 있었다. 가능은 하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 ↑ '칼라스의 노랫소리를 듣고 싶다면 공연보다는 리허설 때 오시는게 나을 겁니다'라는 투였다.
- ↑ 다만 모두 이탈리아어를 원어로 한 곡이었고, 독일어 원어 곡도 이탈리아어나 영어 개사판으로 불렀다. 완벽주의자였던 그녀로서는 그닥 친숙하지 않은 독일어로 노래하는 게 탐탁치 않았을 듯.
- ↑ 객석과 무대 사이에 관현악단이 들어가는 자리. 오케스트라 박스라고도 한다.
- ↑ 둘 다 남성이고, 둘 다 양성애자이다. 사생활도 나름 화려한 편들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