裴矩
(557 ~ 627)
북제, 북주, 수나라, 당나라의 인물. 자는 홍대(弘大).
하동군 문희현 사람으로 590년에는 급사랑을 지내면서 영남을 돌아다니면서 위무해 남강에 도착하면서 군사 수천 명을 얻었으며, 번우에서 반란을 일으킨 왕중선이 주사거를 파견해 동형주를 포위하자 녹원과 함께 그를 공격해 목을 베고 남해에 이르렀다. 녹원이 왕중선을 토벌하고 배구는 20여 주를 돌면서 위무하고 창오의 수령인 진탄 등이 와서 알현하자 황제의 명을 받들어 자사, 현령을 임명하고 돌아가서 부락을 다스리게 하고 조정으로 돌아와서 민부시랑에 임명되었다.
593년에는 수문제의 명으로 돌궐의 도람가한에게 진나라의 공주였던 대의공주를 죽이도록 유세해 대의공주를 죽게 했으며, 돌리가한이 수나라에 혼인을 요청하자 수문제가 대의공주를 죽이면 혼인을 허락하겠다고 하면서 돌리가한이 도람가한에게 그녀를 헐뜯어서 죽게 만들었다.
606년 가을 7월 8일에 황문시랑을 지내면서 6명의 신하들과 함께 인재를 선발하는 임무에 관장하게 되어 당시 사람들은 이를 선조칠귀라 불렀지만 배구는 그 일을 하지 않았으며, 이부시랑이 되어 607년에 서역의 여러 호족들이 장액에서 서로 교역을 하자 배구는 이를 관장하게 되었다.
배구는 수양제가 원대한 계략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장사꾼으로 호에서 도착한 사람들에게 여러 나라의 산천, 풍속, 왕과 서인들의 의형, 복식들을 탐방하도록 꾀어 서역도기 3권을 저술했다. 여러 나라들이 방문하니 총 44개국이었고 배구는 지도를 만들어 서역의 요충지를 연구했으며, 수양제가 크게 기뻐해 배구는 비단 500필을 하사받고 수양제가 서역에 관한 일에 대해 묻자 호족들 중에는 여러 진귀한 보물이 많다면서 토욕혼을 쉽게 병탄할 수 있다고 했다.
배구가 다시 황문시랑이 되어 장액으로 가서 여러 이민족을 이끌고 이익을 주면서 그들을 조정에 오게 했으며, 철륵이 변경을 침공하자 싸웠지만 패했고 철륵이 사신을 파견해 사죄해서 항복을 받아주기를 요청하자 수양제의 명으로 배구는 그들을 위무했다. 609년에 배구가 타협하고 회유하는 지략을 가졌다고 생각해 수양제가 은청광록대부가 임명되었으며, 우세기와 함께 기밀을 관장하는 일에 참여했다.
배구는 우문술, 우세기, 배온, 곽연 등과 함께 아첨을 해서 총애를 받았으며, 610년에 배구는 고구려를 위협해 조정에 들어오도록 수양제에게 상주해 고구려 원정이 이루어지게 했다. 613년에는 수양제의 명에 따라 농우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면서 회령에 가서 갈살나가한의 부락을 위문했으며, 돌궐의 시필가한 부족의 무리들이 강성하자 그 기세를 분산시킬 계책을 바쳤다.
617년에 수양제를 쫓아서 강도에 있던 사람이 대부분 달아났는데, 8월에 수양제가 이를 걱정하고 묻자 배구는 군사들이 배우자를 얻도록 허락하라고 했다. 618년에 배구는 장차 난이 있을 것이라 여겨 부리는 사람이라도 모두 후하게 대했고 난이 일어나자 도적들은 그의 죄가 아니라고 했으며, 우문화급이 수양제를 강도에서 죽이고 동도로 도착하자 그에게 절을 하면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배구는 우복야로 임명되었고 619년에 두건덕이 우문화급의 세력을 격파하자 두건덕으로부터 좌복야, 장선사에 임명되었으며, 621년에는 행대 조단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했고 624년에 구양순, 진숙달과 함께 예문류취를 편찬했다. 625년에 태자첨사를 지낸 배구는 검교시중을 임시로 맡았으며, 서돌궐의 통섭호 가한이 사자를 파견해 혼인을 맺자고 청하면서 당고조가 이에 대해 묻자 배구는 혼일을 허락해 힐리가한을 위협해야 한다고 하자 당고조는 이 말을 쫓았다.
625년에 권검교시중에서 파직되어 판황문시랑이 되었으며, 626년에는 황문시랑을 지내면서 현무문의 변이 일어난 후에 동궁에 가서 여러 장졸들을 흩어지게 했다. 당태종이 즉위하고 9월 29일에 민부상서를 지내면서 백성들 중에 돌궐에게 짓밟힌 자들에게 호마다 견을 한 필씩 달라고 상주했는데, 당태종은 사람 수를 계산해서 기준으로 하게 했다.
또한 당태종이 관리들이 대부분 뇌물을 받는 것을 걱정해 몰래 좌우의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어 시험하게 했는데, 어떤 사문영사가 견 한 필을 받자 죽이려 하는 것을 배구가 죄로 봐서는 죽어도 마땅하지만 폐하(당태종)께서 사람을 시켜 법에 빠뜨린 것이니 이끌어 주되 덕을 가지고 하고 고르게 하되 예를 가지고 한다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라 상주해 당태종은 그 사람을 처벌하는 것을 멈췄다. 627년에 죽고 시호는 경(敬)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