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중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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範仲淹
(989~1052)

"천하의 근심에 앞서 걱정하고, 천하의 기쁨은 나중에 기뻐한다." 先天下之憂而憂 (선천하지우이우) 後天下之樂而樂歟 (후천하지락이락여)

-악양루기 中-

1 소개

북송의 정치가이자 개혁가이다. 송인종을 도와 여러가지 개혁정책을 내놓았다. 자는 희문(希文), 시호는 문정(文正)

2 생애

989년 소주(蘇州)에서 태어났고 2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산둥 성의 지저우의 장산현 주씨 집안에 개가를 하여 이름도 '주열'로 바꾸었다. 이후 성장하면서 생가를 알아내고는 다시 제 이름을 찾았다. 이후 응천부로 가서 고학을 하여, 1015년에 진사에 급제하고 광덕군(廣徳軍)의 사리참사를 역임했다.

안수의 추천을 받아 비각교리가 되었고 송나라 인종이 친정을 하면서 중앙 관리가 되었다. 비각교리 당시 장헌명숙황후 유씨가 황제에게 대권을 이제 인종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하중부통판(河中府通判)으로 발령받아 조정을 떠나야 했고 그 다음에는 아예 진주통판(陳州通判)으로 좌천되었다가 1033년에 황태후가 죽은 후 그를 기억한 인종이 그를 다시 불렀다. 복귀한 후 그후 황태후가 축출했던 자들이 그녀의 악행을 고발해 논쟁이 불거졌지만 범중엄이 태후가 황제를 10년이 넘도록 보좌하며 몇가지 과오를 저질렀지만 그게 공을 덮을 정도는 아니라고 말했고 인종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아(장헌명숙황후 유씨의 본명)에 대한 비판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했다.

이후 곽황후(郭皇后)의 폐립문제를 놓고 찬성파인 재상 여이간(呂夷簡)과 대립했기 때문에 요주로 좌천되게 된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52세 때 서하가 쳐들어옴에 따라 전운사로 출정하게 된다. 이때 그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정책을 펴 서하군의 공격을 번번이 무찔렀다. 범중엄은 우선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그들의 지지를 받은 다음 군기 확립, 군사 훈련, 진지구축 등을 철저히 하여 적들을 방어했다. 그가 지킨 대순성(大順城)은 무려 6만대군이 쳐들어와도 무너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고향을 떠난 강족들을 다시 불러모으는데 성공했다. [1]

이 공로로 그는 부재상으로 승진하였고 1043년 관리제도를 정비하여 인재를 양성하며, 무력을 강화하는 개혁조치를 제안했다. 인종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여 전국적으로 실시하였고 1041년부터 7년간 시행된 이 개혁을 경력신정(慶曆新政)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기득권의 반발로 개혁른 실패로 돌아가고 1045년에는 참지정사의 직에서 파면되었다. 그 후 급시중 벼슬을 3년간 지내면서 등주에 머물렀고[2] 이 때 악양루를 보수하면서 악양루기를 남겼다.

1049년에는 항주로 옮겼으며 1051년 호부시랑이 되었고 그 후 청주로 부임하였으나 겨울이 되면서 병이 심해져 영주로 옮겼고 마지막에는 서주에서 6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1. 훗날 범중엄이 죽을때 강족들은 슬퍼했고 범중엄은 강족의 추장들로부터 '용도노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2. 1048년에 조정에서 지형남부에 그를 앉혀 이곳을 떠나야 했으나 등주 사람들의 만류로 좀 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