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장헌명숙황후 유씨(章獻明肅皇后 劉氏/969~1033)는 송진종의 황후이며 송나라 역사상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태후임과 동시에 여후, 측천무후와 함께 중국의 3대 여주(女主)로 불린다. 본명은 유아(劉娥). 익주 화양(현 중화인민공화국 사천성 성도시 화양현) 출신.
2 생애
2.1 초기 생애
유아의 조부 유연경은 5대 10국 시대에 우효위대장군을 지냈고 부친 유통은 송태조 시절 호첩도지사와 가주지사를 지낸 인물이다. 부친이 유아가 어렸을 때 황제와 함께 북한(北漢)정벌에 나섰다가 전사한 후 가세가 기울자 모친은 그녀를 데리고 친정에서 살았다. 그녀는 커가면서 발랑고(發浪鼓)라는 작은 북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은을 제련하는 대장장이인 공미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게 되고 한동안 그리 살다가 성공할 기회를 얻으려고 수도인 카이펑으로 갔다. 그러던 중, 유아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엄청난 일이 오게 된다.
2.2 양왕과의 만남
공미는 수도에서 은을 제련하는 일을 하면서 이런 저런 친구도 많이 사귀었는데 그 중에는 양왕의 하인인 장기라는 사람이 있었다. 양왕 조항은 당시 송태종으로부터 상당히 총애를 받는 왕자였다.[1] 아무튼 이 조항은 상당히 풍류와 여색을 즐겼는데 하루는 익주 출신 여인들이 아름답다는 말에 조항이 하인인 장기를 시켜 수소문해서 데려오라고 시켰는데 때마침 공미와 유아가 익주에서 왔다는 것을 안 장기는 공미에게 유아를 양왕에게 바치고 출세해 볼 마음이 없냐고 넌지시 설득했다. 공미는 그 제안에 갈등했는데 때마침 유아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공미를 설득했고 결국 공미는 장기를 통해 유아를 조항에게 추천했다.[2]
조항은 유아를 마음에 들어했으나 유아에게 너무 빠진 나머지 건강이 나빠지자 조항의 유모인 진국부인이 이를 알고 송태종 조광의에게 알렸고 조광의는 격노해 유아를 양왕부에서 내쫓게 했다. 결국 양왕은 유아를 장기의 집에 머물게 하고 수시로 밀회를 무려 15년간이나 즐겼다. 그 후 송태종은 아들에게 반미의 딸(장회황후 반씨), [3]곽수문의 딸(장목황후 곽씨) 등을 아내로 맞게 했지만 조항은 15년간 변함없이 유아를 총애했다.
2.3 궁궐에 입궁하다
송태종이 붕어하자 양왕이 황위를 물려받아 진종이 되었다. 1년 후 진종은 유아를 불려들여 미인으로 봉했다.[4] 그리고 유아에게 친척이 없었기 때문에 진종은 그녀의 전 남편인 공미에게 유씨 성을 하사하고 오빠로 만들었다. 이 무슨 개족보인가 그때부터 진종은 유아를 총애해 진종이 가는 곳에는 어김없이 유아가 있었다. 유아는 기억력이 비상해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을 한 번 듣고 모두 외울 정도였고 또한 그녀가 종종 좋은 의견을 내놓으면 그것을 받아들여 함께 국사를 논했다.
그러던 중 경덕 4년(1007년)에 장목황후가 세상을 뜨고 진종은 유아를 황후에 세우려고 했지만 신하들의 강경한 반대로 인해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수의(修儀)로 봉하는데 그쳤다. 이후 다시 유아의 황후 책봉 문제를 거론했지만 유아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한림학사 이적(李迪) 등이 강하게 반대하여 진종은 황후의 자리를 비워둔 채 유아를 덕비(德妃)로 진봉시켰다. 진종에게는 아들이 5명이나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모두 다 죽어 마흔이 되도록 후계자가 없었고 그는 유아가 아들을 낳아주길 고대했다. 그녀가 아들만 낳아주면 황후로 봉할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진종과 유아가 성생활을 30년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없었다는 것인데 유아는 본인이 황후가 되기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계획을 꾸몄다. 유아는 우선 자신의 시녀인 이씨(李氏)를 진종과 함께 동침하게 했다. 이씨가 황제의 아들을 낳으면 자신의 아들이라고 속이고 황후가 될 계획이었다. 씨받이 운좋게도 이씨가 임신해 아들을 낳자(뒷날의 인종) 유아는 그녀를 찾아가 위협해 아기를 빼앗아 온 후 주변 사람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유아의 계획을 알고있던 진종은 그 아이를 유아가 낳은 황자라고 선포하고 양숙비에게 아기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진종은 명분을 얻게 된 후 그녀를 황후에 봉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유아의 심복인 정위를 시켜 한림학사 양억에게 유아를 황후로 책봉하는 조서의 초안을 작성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나 양억은 쓰지 않았고 정위가 설득해도 씨알도 안먹히자 다른 신하에게 조서를 작성하게 했고 마침내 유아는 43세의 나이로 황후가 되었다.
2.4 황후 시절
유아는 황후가 된 이후에도 송진종을 도와 정사에 관여하기도 했고 이런 저런 조언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유아를 반대하는 세력은 많았다. 가령 개봉부의 유종에게 진종이 유아와 성씨가 같으니 승직시키고 봉호를 내리겠다고 하자 유종은 황후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받지 않겠다 하고 거절했다.[5]그러나 유아를 따르는 세력도 많았는데 정위외에도 전유연등이 유아의 심복이었다. [6]
천희 4년(1022년)진종이 병에 걸리자 유아가 대권을 쥐고 직접 국사를 보게 되었다. 그러자 구준과 양억등은 그녀가 정사에 참여하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진종이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고 태자인 조정을 감국으로 봉하려고 하자 구준은 진종에게 태자를 감국으로 임명하게 하고 정위를 내쫓고 그 자리를 양억이 대신하게 해야 한다고 청했다. 그런데 구준이 술김에 흘린 말이 정위의 귀에 들어서고 오히려 구준이 파면되었다. 그러자 황후 반대파 중 한명이었던 주희정은 환관인 양승훈과 함께 유아를 폐위하기로 하고 일을 모의했는데 양승훈이 이 일을 밀고하여 주희정은 참수되고 구준은 도주사마로 좌천되는등 황후 반대파는 박살나고 말았다. 이 정쟁의 결과로 정위는 재상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런데 얼마 후 그와 또다른 재상인 이적 사이에 문제가 벌어졌다.
이적은 원래 유아가 황후 자리에 오르려고 할때 가장 극렬하게 반대했던 인물이었는데 유아가 황후가 된 후에도 사사건건 대립하여 유아와는 대립관계였다. 정위가 정무를 볼때 황후 반대파인 또다른 재상 이적을 제쳐두고 독단으로 결정을 내리자 이적은 진종을 찾아가 둘 중 한 사람은 조정을 떠나야 한다고 간했고, 이 이야기를 휘장 뒤에서 엿들은 유아는 소원대로이적을 파면시켰다.[7] 진종의 병은 호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진종은 신하들은 승명전에 모아 놓고 태자인 조정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유아가 태자를 보좌해 정사를 처리하게 하라고 선포했다.
2.5 황태후 시절
건흥원년(1022년) 2월, 진종이 붕어한 이후 13살의 조정이 황위에 올라 송인종이 되었고 유아와 숙비 양씨가 각각 황태후와 황태비가 되었다. 진종은 유서에서 태자에게 황위를 계승하고 정사는 황태후의 처분에 따르라고 당부했다. 반대파도 제거하고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유아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한 예로 황제의 생일을 건원절((乾元節)이라고 하듯 유아의 생일은 장녕절((長寧節)이라 하고 황제의 생일과 똑같이 성대하게 치루었다. 거기다가 그녀가 타고다니는 수레인 대안련(大安㰈)은 명편시위(鳴鞭侍衛)가 가 마치 황제를 모시듯이 끌고 다녔다. 이때부터 유아는 황태후란 신분으로 대권을 손에 들고 조정을 쥐락펴락했고 신하들은 한 술 더 떠 그녀에게 응원숭덕인수자성태후(應元崇德仁壽慈聖太后)라는 긴 존호를 바쳤다. 그리고 정적인 구준과 이적을 각각 뇌주사호참군(雷州司戶參軍)과 형주단련부사(衡州團練副使)로 좌천시킨 후 자신의 측근이지만 권세를 마구 휘둘러 원성이 자자했던 정위와 뇌윤공을 숙청목표로 삼았는데 어린 인종이 잠이 많아 조회에 매번 지각해 유아가 황제 대신 신하들의 배알을 받는 것을 정위가 반대한 것과 정위가 산릉사(山稜使) 진종의 침릉 축조를 하던 중에 산릉도감 뇌윤공이 임의로 황릉의 위치를 옳긴 것도 모자라 침릉을 파던 중에 지하수가 나와 묘지로 쓸 수 없는 흉지란 것에 대해서 유아가 뇌윤공을 처형하려고 할때 정위가 뇌윤공을 두둔하며 명에 따르지 않은 것을 문제삼아 신하들의 동의를 얻어 뇌윤공은 사형에 처하고 정위는 애주사호참군(崖州司戶參軍)으로 좌천시키고 그들을 따르던 관리들은 모두 조정에서 내쫓았다.
또한 왕증, 여이간, 노종도, 장지백과 같은 명신을 기용했으며 진종 후기에는 도교 사원의 건축과 제사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여 재정난을 겪고 있었는데 출신이 낮았던 유아는 하층민들의 고충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도교 사원의 건축과 불필요한 노역을 금지시켰다.
또한 도교 사원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고 사원에 바치는 공물도 금지하였으며 세금을 감면시켜주는 등 선정을 펼쳤다. 또한 정무를 처리함에 있어서도 유아는 상당히 엄격했다. 하루는 그녀가 조회에서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신하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며 감사를 표시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친족을 등용할 것이니 자식과 친족의 이름을 쓰라고 하자 많은 신하들이 좋다고 이름을 올렸지만 유아는 그들을 절대로 등용하지 않았다. 너 이새끼들 나의 함정카드에 걸렸구나 다만 그녀의 전 남편인 공미가 세상을 떠나자 유아는 그의 장자 유종덕을 총애하여 그가 천거하는 사람들은 능력을 따지지 않고 기용했고 그가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유아는 그의 친척들을 관리로 등용했고 또 공미의 사위인 마계량이 학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시험관에게 대신 시험을 치게 해 그를 사관(史館)에 들어가게 했다. 이런 일련의 일을 가지고 시어사 조수고가 특별대우를 하는 것을 반대하자 그를 강등시켰고 그 후로는 공미의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인종과 유아의 사이는 의외로 좋은 편이었다. 유아는 비록 인종의 권력을 통제했지만 인종을 억압하지 않고 수신과 치국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도록 독려했다. 특히 효경(孝經)을 강조했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인종과의 관계를 잘 유지했다.[8]
유아의 권력이 막강해짐에 따라 유아는 무측천처럼 한번 황제가 되고 싶다는 야망을 가지게 되었고 신하들은 그것을 경계했다. 이에 따라 인종이 성년이 되었으니 이제는 어느정도 잡무를 맡겨도 되지 않느냐라는 상소가 나왔지만 유아는 그런 말을 한 자를 지방관으로 좌천시켰다. 유아가 하루는 노종도에게 무측천에 대해 묻자 노종도는 질문의 의도를 간파하고 무측천이 당대의 죄인이며 그로 인해 나라의 사직이 지켜지지 못했다고 대답했고 , 유아는 조정대신들이 모두 반대하니 자신의 뜻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황제에 대한 계획은 포기했다. [9]
한편 명도 원년(1032년)2월에 인종의 생모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유아는 인종의 출생 비밀이 새어나갈까봐 두려워 이씨를 서둘러 매장하려고 했지만 재상 여이간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뤄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그녀의 시신에 황후의 옷을 입히고 수은으로 봉해 주었다.[10]시신을 궁밖으로 내갈 때에도 여이간이 서화문으로 나가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유아는 황태후의 장례와 동격이니 안 된다고 거절하였지만 환관 나숭훈의 설득으로 결국 이씨의 장례를 성대히 치러 주었다.
3 사후
명도 2년(1033년)3월 29일 예순 다섯의 나이로 유아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에게 장헌명숙이라는 시호가 올려졌다.[11] 그녀는 양태비를 황태후로 봉해 국가 대사를 함께 논의하라고 유지를 남겼지만 대신들은 당연히 반대했고 실현되지 않았다. 그 후 그녀가 죽은 후 태종의 아들이자 당시 생존해 있던 인종의 유일한 숙부인 조원엄(趙元儼)이 찾아와 인종에게 그의 생모가 유아가 아닌 진종의 후궁 이씨였음을 밝혔다. 인종은 큰 충격을 받고 이씨의 관을 파내 조사하게 했는데, 관 속에는 황후의 옷을 입은 이씨의 시신이 수은으로 온전히 보전되어 있었다. 유아의 결백을 확인한 인종은 유아를 의심한 것을 후회하며 그녀를 그해 10월에 영정릉에 안장하고 유아의 일족을 후히 대접했다. 그후 유아가 축출했던 자들이 그녀의 악행을 고발해 논쟁이 불거졌지만 범중엄이 태후가 황제를 10년이 넘도록 보좌하며 몇가지 과오를 저질렀지만 그게 공을 덮을 정도라고는 아니라고 말했고 인종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아에 대한 비판을 더이상 하지 못하게 했다.
4 여담
유아는 황실의 어른으로서 질서를 잡기도 했다. 어느 날은 송태종의 두 공주가 황궁을 방문했는데 나이가 들어 머리카락이 빠져 가발을 쓰고 있었다. 그것을 본 유아가 보석으로 만든 머리띠를 하사했다. 그러자 진종의 제수이자 윤왕(潤王) 조원빈의 처 이씨가 자신도 머리카락이 빠졌으니 머리띠를 하사해 달라고 청하자 유아는 두 공주는 태종의 딸이자 진종의 누이인데 어찌 조씨가문의 며느리인 이씨가 똑같이 할 수 있냐며 질책했다.또 조정에서 대신들에게 용과 봉황을 수놓은 혁대를 선사하자 용과 봉황은 황제와 황후를 상징하기 때문에 안된다며 문양을 바꾸게 했다.- ↑ 셋째였지만 첫째형은 폐서인되고 , 둘째형은 요절하는 바람에 왕위계승이 제일 유력하기도 했다.
- ↑ 뒷날 유아는 황후가 된 이후에 전 남편 공미의 자손들을 배려했다.
- ↑ 스물두 살의 나이로 요절
- ↑ 원래는 귀비로 삼고자 했지만 재상 이항(李沆)의 반대에 부딪혀 가장 품계가 낮은 미인(美人)으로 삼아야 했다.
- ↑ 뒷날 유종은 수렴청정을 하게 된 유아가 다시 제안을 하지만 거절하고 스스로 좌천의 길을 택한다.
- ↑ 전유연은 5대 10국 시절 남월(南越)의 군주 전오의 아들로 송에 투항해 학문으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누이를 유아의 전남편인 공미에게 시집보내 사돈관계를 맺고 정위와도 사돈관계를 가졌다.
- ↑ 나중에 진종이 옆에 있는 신하들에게 구준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데 무슨 일이 있느냐?라고 물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신하들은 구준이 쫓겨났다는 말을 하지 못했고 진종이 임종을 앞두고 구준과 이적에게 대사를 맡기라고 분부할 때도 신하들은 그 둘은 조정에 없다고 말하지 못했다. 유아가 이미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 ↑ 어쩌면 그녀가 인종에게 이런 애정을 쏟은 것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인종은 자신이 권력을 잡을 수 있게 했던 존재이자 방패막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다행이게도 인종은 유아가 생모가 아니란 것을 유아가 죽기전까지 알지 못했다.
- ↑ 하지만 그래도 권력에 대한 욕망은 있었던지 태묘대전을 앞두고 유아는 천자의 곤룡포와 면류관을 착용한 채 제를 올리고 싶다고 했고 이에 조정은 의논끝에 신분이 불분명해진다며 반대했지만 그래도 유아는 고집대로 특별제작한 곤룡포를 입고 제례를 올렸다. 며칠 후에는 인종이 적전(籍田)에 가서 농사를 짓자 유아는 재상 장사손에게 사태묘와 , 궁정적전기를 편찬하려고 명했지만 장사손은 태후가 제를 올리는 법도를 후대까지 남길 수 없다고 반대했고 결국 궁정적전기만 편찬되었다.
- ↑ 후일 세손시절 조선 정조와 홍대용이 이를 논하면서 여이간은 주자에게 죄를 받을만 했지만 지모는 탁월하기 왕안석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했다.
- ↑ 원래 이때까지만 해도 황후의 시호는 2자였지만 유아부터 4글자로 늘어났다. 이후로도 수렴청정을 한 태후는 네 자의 시호를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