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의 역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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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 인종(仁宗) | |
시호 | 체천법도극공전덕신문성무예철명효황제 (體天法道極功全德神文聖武睿哲明孝皇帝) | |
연호 | 천성(天聖, 1023년 ~ 1032년 11월) 명도(明道, 1032년 11월 ~ 1033년) 경우(景祐, 1034년 ~ 1038년 11월) 보원(寶元, 1038년 11월 ~ 1040년 2월) 강정(康定, 1040년 2월 ~ 1041년 11월) 경력(慶曆, 1041년 11월 ~ 1048년) 황우(皇祐, 1049년 ~ 1054년 3월) 지화(至和, 1054년 3월 ~ 1056년 9월) 가우(嘉祐, 1056년 9월 ~ 1063년) | |
성 | 조(趙) | |
휘 | 정(禎) | |
생몰기간 | 1010년 5월 30일 ~ 1063년 4월 30일 | |
재위기간 | 1022년 3월 23일 ~ 1063년 4월 30일 |
북송의 4대 황제 (1010 ~ 1063, 재위기간 1022 ~ 1063), 휘는 정(禎). 시호는 체천법도극공전덕신문성무예철명효황제(體天法道極功全德神文聖武睿哲明孝皇帝).
1 출생의 비밀
3대 황제 진종의 여섯번째 아들로 사실 막내이다. 그럼에도 제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들은 앞서 태어난 진종의 아들들이 유년기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해버렸기 때문이다.
원래 진종의 후궁 이씨[1]가 낳은 아들이었으나, 진종의 황후인 장헌명숙황후 유씨가 적통은 아니지만 진종의 유일한 아들이니 적모가 키워야한다면서 아이를 빼앗았으며 이씨는 별궁에 유폐되어 인종과는 절대 대면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후로도 이씨의 존재를 철저히 감추었기 때문에 인종은 장헌황후가 친모인줄 알고 자랐다.
훗날 자신의 생모가 이씨라는 사실을 알게된 후에는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진노하여 장헌황후 유씨와 그 일족을 처벌하려 하였으나, 자신의 생모가 죽었을 때 황후의 예를 갖추어서 정중히 장례를 치뤄주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유씨 일족을 용서하였다.[2] 이 후 인종은 생모의 묘를 황후의 격에 맞게 다시 조성하고 황후로 추존해 장의황후라는 시호를 올렸다.
2 재위기간
2.1 서하와의 전쟁
1038년 서하가 섬서성을 침공하면서 서하와 대립구도에 놓였는데 진종 치세동안 문인우대정책을 펼쳤던 까닭에 송나라 군대가 많이 약체화된 상황이었다. 이에 범중엄을 기용하여 군사제도를 개혁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켜서 나름대로 전력강화를 꾀하여 그런대로 대처를 해낼 수 있었다. 이후 범중엄은 승상으로 기용되어 관리제도를 개편하고, 혹시 모를 서하와 요의 도발에 대응하기 위한 무력강화 등을 골자로 하는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서하는 1041년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원정을 단행하였는데 초전에 송군이 개발살나버려서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지만 무너질듯 말듯 버텨낸 덕분에 전쟁은 점점 길어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송이 요와 강화조약을 맺으면서 군사력 일부를 서하 방면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고, 서하 역시 계속된 전쟁에 지쳐버린 상황이라 결국 상대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있었던 서하가 먼저 강화를 신청하였다. 송 역시 전쟁이 길어지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고, 만약 요가 서하와 동맹을 맺고 공동전선을 형성하면 매우 곤란해질 수 있었기에 즉시 강화교섭에 착수하였다.[3]
그 결과 1044년 서하는 송의 황제를 천자로 인정하고 신하의 나라가 되는 조건으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서하의 황제는 하국왕에 봉해졌으며, 매년 비단 13만필, 은 5만냥, 차 2만근씩 송이 서하에게 공물을 제공하는 것으로 상황이 마무리되었다.[4]
2.2 북송의 전성기
인종의 치세는 아버지 진종의 치세와 더불어 두 황제의 연호를 따서 '함평-경력치세'라고 불리며 북송의 전성기로 평가받고 있다. 외적의 침임을 받기도 했지만, 진종과 인종의 치세에 내부적으로는 유례없는 태평기였고 경제와 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번영을 누렸다. 사실 인종 본인의 능력에 대해서는 송의 전성기를 이끈 최고의 명군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때를 잘 만난 것에 불과한 평범한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다.
특히 상인과 지주계층의 증가 등으로 인하여 세수는 줄었는데 주변 국가에 제공하는 공물과 자체적인 국방력 강화정책으로 인한 지출이 꾸준히 발생했기 때문에 말기에는 송나라의 재정이 파탄날 지경에 놓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크게 실정한 것이 없었던 까닭에 그럭저럭 괜찮은 평가를 받은 황제였다.
진종 못지 않게 학문을 중시한 군주였기에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한 권학문(勸學文)을 남겼는데, 아버지만큼 노골적으로 물질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朕觀無學人(짐관무학인) : 짐이 배움이 없는 사람을 보건대
無物堪比倫(무물감비륜) : 이 같은 무리에 비교할 것이 없느니라.
若比於草木(약비어초목) : 풀과 나무에 견주어 보면
草有靈芝木有椿(초유영지목유춘) : 풀에는 영지가 있고 나무에는 춘목이 있다.
若比於禽獸(약비어금수) : 새와 짐승에 견주어 보면
禽有鸞鳳獸有麟(금유란봉수유린) : 새에는 난새와 봉황이 있고 짐승에는 기린이 있다.
若比於糞土(약비어분토) : 똥과 흙에 견주어 보면
糞滋五穀土養民(분자오곡토양민) : 똥은 오곡을 살찌우고 흙은 백성을 기른다.
世間無限物(세간무한물) : 세상의 무수한 사물 중에서
無比無學人(무비무학인) : 배움 없는 사람과 비교할 것은 없느니라.
2.3 후사 문제
인종의 황후는 곽씨였으나, 투기가 심하고 인종의 얼굴에 상처를 내었다는 이유로 폐위하여 사사하였다. 계후로 개국공신 조빈의 증손녀인 조씨를 황후로 세웠다. 하지만 그는 9명의 아들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사촌 동생인 복안의왕 조윤양의 13남, 즉 5촌 조카 조서를 양자로 삼았고 그가 뒤를 이어 영종으로 즉위하였다.[5] 1063년 죽자 영소릉에 안장되었다.
3 후대의 창작
실제 포청천의 활동 시기와 드라마 판관 포청천의 배경 시대가 송 인종의 재위시기이다. 더불어 판관 포청천에서도 다뤘던 살쾡이 태자 전설은 사실 원래는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경극으로 다른 후궁들과 그 소생들을 독살했던 성화제의 후궁 만귀비를 비판하면서 검열을 피하기 위해 위의 장헌황후 유씨와 장의황후 이씨의 이야기로 각색한 것이다.[6]
수호지의 프롤로그 부분에 등장하여 '태위 홍신'을 108마왕이 봉인된 복마전에 보낸 황제도 바로 인종이다.[7] 이 때 인종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태어난 이후로 울음을 멈추지 않았는데 아무도 이걸 그치게 하지 못하다가 어느 도사가 한 마디 말을 해서 울음을 그치게 했다고 한다. 이유인즉 황자로 태어나서 어떻게 나라를 운영할 것인가에 대해서 걱정을 한 것[8]이고, 도사는 이것을 알고는 '하늘이 무곡성과 문곡성을 내려줬다'라고 하면서 안심하라고 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서 무곡성이 서하와의 전투에서 활약한 명장 적청(狄靑)이고, 문곡성이 판관 포청천으로 유명한 개봉부윤 포증이다 라는 이야기. 무시당한 재상 범중엄만 안습
- ↑ 진종이 이씨를 데리고 높은 누각에 올라갔다가 비녀가 떨어졌는데 비녀가 망가지지 않아 귀한 아들을 낳을 징조라 하여 가까이 하였다고 한다.
- ↑ 원래 장헌황후는 이씨의 장례를 아무렇게나 치르려고 했으나 후에 인종이 알게 되면 화가 미칠 것이라는 재상 여이간의 충고로 황후의 예로 치뤄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 서하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명장으로 '적청'이라는 인물이 유명하다. 송나라를 대표하는 명장 중 한 명으로 당대에 무곡성(武曲星)의 화신으로 여겨질 정도로 대활약을 펼쳐 많은 공을 세웠으나 그런 만큼 시기와 모략도 잇달아 결국 파직되고 만다. 많은 민간설화를 남긴 무인으로 중국에서 지금까지도 인기가 많은 무인 중 한 사람이다.
- ↑ 송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결정한 정책. 어떻게 보면 명이 조공국에게 더 많은 이익을 안겨주었던 사건의 시초이기도 하다.
- ↑ 자식이 없어 양자로 들인 후, 인종에게 아들이 태어나자 다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 후에 그 아들이 죽는 바람에 다시 양자를 후계자로 삼았으나 궁으로 불러들이지는 않았다.
- ↑ 실제 역사에서는 장헌황후 유씨가 죽은 후에야 사실이 알려졌으며 이씨는 사실 진종에게 별다른 사랑을 받지 못했다. 애초에 진종은 왕자 시절부터 유부녀였던 유씨를 지극히 사랑해서 아버지인 태종의 명령으로 왕자궁에 감금당하고 못 만나게 되어서도 유씨를 잊지 않고 제위에 오른 뒤에는 그녀를 정식으로 궁으로 불러들여서 황후로 삼았을 정도였고 이씨는 진종이 그냥 한동안 관심을 보였던 일개 후궁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아예 취급이 다른 것이다. 진종 또한 이씨가 아들을 낳고서도 유씨의 청에 따라 그녀가 키우도록 하고 이씨에 대해서는 존재 자체를 깨끗이 잊어버렸다.
- ↑ 정확히는 나라에 역병이 들어 이를 물리칠 도사를 찾기 위해 보냈던 것.
- ↑ 물론 결과적으로 황제가 된 것에서 만든 이야기지만 원래는 막내라는 점에서 끼워맞추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