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티스 고지의 전투

기원전 211년 하스드루발 바르카(한니발 바르카의 동생)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그의 형인 그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싸운 전투이다. 이 전투는 카르타고의 승리로 이어졌으며 두 스키피오 형제는 살해당한다.[1] 이 전투는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 전체에 걸쳐서 한니발이 지휘하지 않는 카르타고군이 로마군을 상대로 거둔 유일한 승리다. 한니발 曰 "1승만 하라고 정말 1승만 하냐?"

1 전황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데르토사의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로마군은 그들의 교두보를 스페인에 마련하였다. 그 뒤 이들은 승리를 거듭하며 카르타고의 영토를 조금씩 약탈하고 점령했다. 그 결과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사군툼까지 전진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214년 이후 이 두 세력은 잠시 전쟁을 멈춘다. 이는 카르타고군은 로마인의 외교술에 인한 스페인 원주민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시간을 보냈고 스키피오 형제는 외교전에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스키피오 형제는 로마 본국으로부터 군사적 보급을 받지 못했는데 이는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 군이 이탈리아 내에서 강한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카르타고 본국은 2개의 부대와 사령관을 파견하였다. 한 부대는 그의 동생인 마고 바르카가 이끌었고 다른 군대는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이끌었다. 이들 부대는 스키피오군과 여러 차례 싸웠으나 승리를 하지 못하였다. 그동안 스키피오 형제는 카르타고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누미디아 왕 중 하나인 시팍스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어쨌건 카르타고 본국이 보낸 증원부대 덕에 스페인에서 카르타고의 입지는 호전되었으며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기원전 213년과 212년 시팍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건너갈 수 있는 여유까지 생겼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기원전 212년에 스페인으로 되돌아왔는데 이때 그는 누미디아의 차기 왕인 마시니사가 이끄는 3천 명의 누미디아 기병을 데려왔다.

다른 전선에선 한니발이 타렌툼을 점령하고 그 밖에 루카니아와 브루티움, 그리고 아풀리아의 여러 도시을 배반케 하는데 성공했다. 로마인들은 파비우스 전략으로 맞섰고, 이 전략의 성과로 시칠리아섬의 대도시 시라쿠사를 점령하였고, 카푸아를 포위하였다.

2 전투

리비우스 사료에 따르면 기원전 212년 (현대 학자들은 기원전 211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함) 스페인에서 카르타고군은 여러 곳에 분산 배치되어있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1만5천의 병사를 이끌고 암토르기스라는 마을에,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각각 1만을 이끌고 서쪽 떨어진 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스키피오 형제는 그때까지 스페인에서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해왔다. 그동안 거둔 군사적, 외교적 성공에 고무된 스키피오 형제는 5개 군단병에 맞먹는 수인 2만 명의 켈티베리안 (Celtiberians)을 새로 용병으로 고용한다. 이들 병력은 3만 보병과 3천 기병으로 구성되어있던 그들의 기존 군대를 강화했으며 이 증강된 전력에 자신감을 얻은 이들은 그해에 스페인에서의 전쟁을 마무리 짓기로 하였다.

두 형제는 각각 군대를 나누어 지휘하기로 하였고, 이에 따라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로마 + 동맹시 군단의 3분의 2인 2만여 병력을 이끌고 마고와 기스코를, 그나이우스는 로마 + 동맹시 군단의 3분의 1인 1만여 병력에 2만의 켈티베리안을 합한 3만여 병력으로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치기로 정하였다. 그 뒤 둘은 일제히 남하한다.

둘 중 그나이우스 스키피오가 목적지에 먼저 도착해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하스드루발은 그나이우스 스키피오군의 주력이 로마인이 아닌 켈티베리안인 것을 파악하였고, 스페인 용병의 습성을 잘 알고 있는 하스드루발은 이들을 매수할 계획을 세운다. 이윽고 로마인 몰래 열린 켈티베리안 족장과의 회담에서 하스드루발은 그들이 철수하는 대가로 상당한 양의 보수를 주기로 약속한다.켈티베리안 족장과 병사들은 싸움 없이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에 기뻐하였고, 다음날 로마인이 보는 앞에서 군기를 모두 내리고 군대를 철수한다. 로마인들은 이들이 대담하게 이런 행동을 하는데 놀랐으나 그들의 수는 전체 병력의 3분의 2에 해당하어 무력으로 제지할 수 없었고, 그저 떠나지 말라고 애원밖에 할 수 없었다. 그 애원을 들은 켈티베리안들은 고향에서 전쟁이 나서 집에 간다고 둘러댄 뒤 그대로 캠프를 떠나 자신의 고향으로 떠났다. [2]

이때 다른 형제인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카스툴로에 도착한다. 마고와 기스코 군에는 누미디아 왕자인 마시니사와 그가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이 있었고 이들은 밤낮으로 로마군을 괴롭힌다. 로마인이 물을 긷거나 공사를 하러 캠프 밖에 나가면 곧바로 공격하였으며, 한밤중에도 기습하여 큰 소동을 일으키고 물러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였다. 이에 시달린 로마군은 마치 포위된 것처럼 아무런 군사행동을 하지 못하고 캠프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푸블리우스는 스페인 족장 인디빌리스가 7천5백 명의 스페인군을 이끌고 마고군에게 합류한다는 소문을 듣는다. 푸빌리우스는 이들이 합류하기 전 신속히 격파하고 돌아올 계획을 세우고 2천 명의 병사를 티베리우스 폰티우스에게 맡겨 캠프에 남긴 뒤 전 병력을 이끌고 캠프를 떠난다.

로마군은 한밤중 내내 진격하여 마침내 인디빌리스와 그의 군대를 맞닥뜨리게 된다. 전투는 전투대형을 갖추지 못하고 행군하는 모습 그대로 황급히 이루어졌으나, 병력의 수는 1만 8천 대 7천으로 우세하였으므로 로마군이 우세함을 보였다. 그런데 전투 중 마시니사가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이 도착한다. 누미디아 기병은 사방으로 퍼져 공격하였으며 로마군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마고와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각각 군대를 이끌고 전장터에 도착한다. 앞뒤로 적을 맞닥뜨린 로마군은 어디를 공격해야하고 어디로 돌진해야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저항한다. 이어진 전투는 치열하였고 로마군 사령관인 푸빌리우스 스키피오는 자신이 직접 가장 격렬히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 가서 병사들을 지휘한다.

푸빌리우스의 모습을 본 카르타고 기병은 쐐기 대형을 짠 뒤 푸빌리우스 스키피오를 향해 돌진한다. 푸빌리우스는 오른쪽에 창을 직격당해 쓰러진다. 로마 사령관을 죽인 카르타고 기병들은 전투가 벌어지는 전열을 돌아다니며 로마군 사령관의 죽음을 외친다. 마침내 로마군은 전장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난다. 카르타고 기병은 이 도주하는 로마군의 상당수를 죽였고,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 지은 마고와 기스코는 하스드루발과 대치하는 그나이우스만 격파하면 스페인에서의 전쟁이 끝난다고 판단하여 쉬지 않고 곧장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캠프로 이동한다.

마고와 기스코가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캠프에 합류했을 때까지 강 건너에서 대치 중인 그나이우스는 푸빌리우스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마고와 기스코의 합류는 그나이우스를 크게 근심시켰는데, 그 이유는 정황상 푸빌리우스 군대가 격파된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병력의 수 역시 크게 밑돌았으므로 그나이우스는 곧장 이 전장에서 철수한 뒤 스페인 북부로 가기로 하였다.

그나이우스는 한밤중에 카르타고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캠프를 버리고 달아났으나 아침에 하스드루발이 급히 파견한 누미디아 기병이 이들을 추격하여 낮에 따라잡는다. 로마군은 싸우면서도 전진했으나 행군 속도는 매우 느렸고, 밤이 되자 그나이우스는 군대를 일로르카라는 언덕 위에 숙영케 하기로 하였다. 그 지형엔 그 언덕 외엔 높은 지형이 없었다.

그날 밤 카르타고군의 주력부대가 도착한다. 하스드루발, 마고, 기스코가 이끄는 스페인에 머무는 카르타고의 모든 병력이 그 장소에 집결한 것이었다.

이 병력에 의해 언덕에서 포위된 로마군은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는데, 이들은 요새화된 숙영지를 지으려 하였으나 언덕이 돌투성이여서 삽이 들어가지 않았고 따라서 참호와 나무 울타리를 세울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짐과 안장을 얹어 그 언덕을 둘러싼 수비벽을 만든다.

다음 날 아침 카르타고군은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이 어설픈 수비벽을 본 카르타고 병사들은 일단은 깜짝 놀라 잠시 멈췄고, 멈춘 병사들을 본 카르타고 장교들은 "왜 이런 여자와 아이들이나 막을 수 있는 멍청한 물건을 치우지 못하냐"라고 고함을 지르며 꾸짖는다. 카르타고 병사들은 장대를 가져와 이 짐 벽을 허물어뜨렸고, 그 틈새로 돌격하는 카르타고군에 의해 로마군은 전멸을 당하게 된다.

리비우스는 해당 사건을 서술하면서 그나이우스의 죽음에 대해 두 가지 설을 이야기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나이우스는 카르타고군의 첫 번째 공격에 전사하였다고 전하고, 다른 설에 따르면 캠프의 근처의 타워에 올라갔는데 그곳에 카르타고군이 불을 놓아 그 안에서 병사와 함께 타 죽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리비우스는 그나이우스는 그가 스페인 전쟁을 시작한 지 8년째 해에, 푸빌리우스의 죽음으로부터 29일 뒤에 죽었다고 언급하는데, 이에 따라 현대 학자들은 해당 전투는 기원전 212년이 아닌 211년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며, 또한 마고와 기스코의 하스드루발 캠프와의 합류, 그나이우스의 대치, 그리고 로마군의 후퇴와 카르타고군의 추격이 장장 한 달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3 그 이후

뿔뿔히 흩어져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로마군은 에브로 강 북쪽에 집결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8천명 정도였다. 그러나 승리한 카르타고 장군들은 이들을 완전히 추격하여 섬멸하지 못하였다. 로마 원로원은 그해 말에 1만명의 병력을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주어 이 패잔병과 합류하게 지시한다. 네로는 합류한 이후에도 아무런 전공을 세우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카르타고 장군들이 그를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해에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1만명의 추가 병력을 이끌고 이들과 합류하였고 뒤이은 그의 활약은 카르타고인들이 살아남았던 로마군을 추격하여 섬멸하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만든다.
  1. 이 전투 이전까지 이들 형제는 7년에 걸쳐서 스페인에서 전쟁을 수행하면서 스페인에서 한니발을 보급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차단해왔다.
  2. 이 사건을 서술한 로마인 역사가 리비우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로마군 지휘자들은 이 사건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절대로 용병을 군의 주력으로 삼은 뒤 의지하면 안 되며, 캠프 내에서 로마인의 다른 병력에 대한 우세함을 유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