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정변

丙申政變
1356년(공민왕 5년) 병신년에 일어난 반원정변

1 개요

1258년 고려원나라에게 사대의 예를 갖추고 그리고 부마국이 되어서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그러던 중 고려 30대 왕 충정왕이 국정을 농단하고 어리다는 이유로 폐위가 되고 그 삼촌인 강릉대군 왕전을 왕으로 세우니 그가 31대 왕 공민왕이다. 그러나 뿌리깊은 친원세력에 의해서 뜻대로 정사를 마음껏 펼치 못하고 있었다. 이에 공민왕을 타파하고자 반원개혁을 시도한다. 그러나 친원새력과 원나라 기황후때문에 제대로 시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공민왕은 때를 기다리고 반원정변을 준비하게 된다. 드디어 1356년 음력 4월애 98년건 이어진 원의 간섭을 벗고 친원세력을 숙청하고 옛 땅을 수복하는 정변이 일어났다.

2 내용

2.1 기씨 일파 숙청

대사도 기철, 태감 권겸, 경양부원군 노책이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1]당하고 그 일당들은 죄다 도주했다. 궁성을 삼엄히 경계하는 한편 정지상을 석방하고 순군제공으로 임명해 왕을 경호하게 했다.
홍언박을 우정승으로, 윤환을 좌정승으로, 원호를 판삼사사로, 허백·황석기를 찬성사로, 전보문·한가귀로 삼사우·좌사로, 김일봉·김용·인당을 첨의평리로 각각 임명했다. 얼마 후 고의로 기철·권겸·노책의 일당을 놓아준 혐의로 원호·한가귀와 면성군 구영검을 하옥시켜 처형한 다음 그 가산을 적몰했다.

2.2 정동행중서성이문소 폐지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폐지[2]했다

2.3 쌍성총관부 수복

평리 인당, 동지밀직사사 강중경을 서북면병마사로, 사윤 신순 유홍, 전 대호군 최영, 전 부정 최부개를 부사로 각각 임명해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격하게 했다. 또 밀직부사 유인우를 동북면병마사로, 전 대호군 공천보, 전 종부령 김원봉을 부사로 각각 임명해 쌍성 등지를 수복[3]하게 했다. 인당이 먼저 출발했는데 강중경이 술에 골아 떨어졌다가 뒤늦게 와서 객기를 부렸다. 인당이 제지했으나 듣지 않자 신순에게 눈짓해 처형해 버린 후 왕에게 “강중경이 역심을 품었으므로 군법에 따라 처치했습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온 나라 사람들이 처형한 이유를 알지 못해 물의가 분분했다.

3 평가

추가 바람
  1. 이 때 부원세력인 기철일파가 제거되었다. 공민왕은 조일신의 반란으로 무산되었던 개혁을 부원세력인 기철일파를 제거하면서 재개했다. 공민왕의 부원세력 제거는 고려 내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공민왕의 지지세력의 존재, 원의 정국변화 등이 결합되어 현실화 되었다. 조일신의 반란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을 지지하던 이제현과 같은 유신세력, 연경호종세력, 외척세력 등은 고려 조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원나라 정국의 동향은 공민왕에게 보다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원나라는 하남과 안휘성에서 시작된 홍건적의 봉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원나라 조정의 실력자였던 톡토가 고우성의 반적 장사성을 정벌하러 나선 것을 틈타 반대파들이 톡토를 제거하였다. 그리고 장사성을 토벌하러 간 고려군사들이 귀국하면서 원나라 정국의 동향을 비교적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공민왕은 5년 5월에 전격적으로 부원세력을 제거하고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때 제거된 부원세력은 기철, 권겸 등을 필두로 25명이나 되었다. 공민왕의 이러한 반원개혁 정책은 원나라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지만, 원나라는 당장 눈앞에 닥친 홍건적의 진압도 힘에 겨워 연경조차 제대로 수비하지 못했다.
  2. 정동행성은 원래 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위해 고려에 설치하였던 기구였다가 이후 고려와 원의 연락기관 역할을 담당하면서 그대로 존속되었다. 정동행성의 소속 기구인 이문소는 기본적으로 원나라라는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기구였으며 부원세력의 양성소로 기능하였다. 때문에 정동행성이문소의 혁파는 원의 정치적 영향력과 친원세력을 배제하려는 의도에서 내려진 조치였다.
  3. 쌍성총관부의 수복은 원나라의 쇠퇴와 쌍성지역의 정국변화에 의해 보다 용이하게 이루어졌다. 오랫동안 쌍성지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온 원나라세력이 쇠퇴하면서 쌍성지역에서는 새로운 권력관계의 변화로 나타났다. 원나라의 쇠퇴는 쌍성총관부 지배세력의 분열로 이어졌다. 쌍성총관부는 고려를 배반한 조휘와 탁청이 지배하다 조휘의 증손자인 조소생대에 와서 조씨 일가 사이에 분열이 발생한다. 조소생은 원나라의 지원 하에 계속 고려와 대립하여 왔다면, 조휘의 손자이자 조소생의 숙부인 조돈은 원나라의 위기를 감지한 후 친고려 정책을 취하였다. 이러한 대외정책의 문제는 쌍성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숙질 간의 대립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조씨 일가의 분열은 공민왕이 쌍성지역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