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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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皇后(1315~1369에서 1388년도 사이로 추정)

공식명칭: 창숙광성황후 기씨(昌淑光聖皇后 奇氏)
몽골식 이름: Өлзий хутуг (Öljei Khutugh, 完者忽都, 올제이 후투그)

"너 솔롱고(肅良合)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이 나라에 와서 짐을 받들어 섬겼다. 너는 항상 조심하고 삼가면서, 낮밤으로 언제나 신망이 두텁고 성실했다. 너는 긴 세월을 생활은 검소하고 사람들에게는 공손하게 아랫사람들을 이끌어 왔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중궁(中宮)의 지위가 마땅히 현명한 처(妻)인 너에게 주어져야 할 것이다. 황실의 종친들과 대신들이 모두 너를 황후에 봉하라고 간청하고 있다. 액정(掖庭)의 궁녀들도 모두 너를 존경하여 따르고 있다. 그런데 너 기씨는 여러 차례 겸손하게 이를 사양하니, 너 뜻이 더욱 가상하다.

아! 너는 궁정의 일들을 신중하게 다스려, 충심으로 짐을 더욱 더 잘 보좌할 수 있도록 힘써라. 너의 아름다운 말과 행실을 더욱 환하게 밝히고 계속 이어나가서, 함께 우리 조정의 홍복(洪福)을 보존하도록 하라." - 원나라 혜종이 기씨를 대황후에 임명하면서 내린 교지

원나라 혜종의 3번째 황후. 혜종의 제2계후이기도 하고 3번째 정실황후이기도 하다. 북원소종 아유시리다르 빌레그트 칸의 어머니.

1 소개

시호는 보현숙성황후(普顯淑聖皇后). 따라서 정확한 공식 명칭은 보현숙성황후 기씨(普顯淑聖皇后 奇氏)지만, 명성황후민비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게 기씨 성을 가진 황후였다고 해서 대한민국에선 주로 기황후라고 불린다.

본관은 행주. 아버지는 기자오이며 오빠가 5명, 언니가 2명이었는데 그 중 한 명이 기철. 이중 기황후의 첫째 오빠인 기식은 기황후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 기자오는 음서로 관직에 올랐던 걸 보면 꽤 힘있는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고려식 본명은 알려진 바 없으나 솔롱고 올제이 후투그[1]라는 몽골식 이름만 남아 있다. 솔롱고 올제이 후투그의 한자식 표기의 한국식 발음은 '숙량합 완자 홀도'이다.

2 개요

1333년, 그녀는 공녀원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고려 출신 환관인 고용보가 추천하여 궁녀가 되었다. 고용보는 그녀를 앞세워서 권력을 얻고자 했는지, 그녀를 혜종의 차와 다과를 담당하는 시녀로 삼았다. 혜종은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학식을 가진 기씨에게 반해 비(妃)로 삼았다. 또한 혜종은 1년간 고려에서 유배 생활을 했는데, 마침 기씨는 고려인이었고 이것이 향수로 작용하여 더욱 기씨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혜종의 총애를 받게 되면서 혜종의 제1황후인 타나실리의 질투에 시달리게 되는데 심지어는 채찍으로 맞아 온몸에 검고 푸른 멍이 들었으며, 인두로 지짐을 당하였다. 그러나 타나실리의 일가가 모반을 꾸민 혐의로 집안이 날아가면서 타나실리도 황후에서 폐위되고 중서우승상이었던 바얀에 의해 폐후되어 유배가는 길에 독살당한다.

혜종은 그녀를 새로운 제1황후로 삼으려고 애썼지만 당시 실권자였던 메르키트 바얀이 몽골족이 아닌 여성을 황후로 삼을 수 없다고 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바얀 후투그를 새로운 황후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바얀이 반대한 이유에는 기씨가 황자를 낳지 못해서라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338년, 기씨는 혜종의 아들인 아유시리다라를 출산하고 메르키트 바얀이 실각하자 혜종의 국사였던 사라판이 기씨를 제2황후로 책봉하길 청하였고, 그녀는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제2황후에 오른 이후 기황후는 흥성궁에 거주하면서 비록 아들과 황제의 총애가 있긴 했지만 정치적 뒷받침이 없었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던 중 마침 황태후 부다시리가 축출되었다. 부다시리는 당시 휘정원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부다시리가 축출당한 이후 혜종은 휘정원을 기황후가 관리하게끔 맡긴다. 기황후는 이것을 기회로 삼고 측근들인 박불화와 고용보를 이용해서 원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게 된다. 휘정원을 자정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자신을 추천한 환관 고용보를 자정원사로 임명해 황실의 재정을 장악했으며 엄청난 부를 쌓아 정치자금도 마련하게 된다. 자신의 아들인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하게 했고 며느리도 전부 고려여인으로 친히 골라서 권씨와 김씨를 각각 황태자비로 맞이하게 한다. 같은 고향 출신이자 고용보가 추천한 환관인 박부카(朴不花, 박불화)를 동지추밀원사로 임명해 군사권도 장악했으며 나중에는 재상에 버금가는 정2품 영록대부까지 임명한다. 1365년에 바얀 후투그가 죽은 뒤에는 제1황후가 되었다. 사실상 원나라는 기황후의 천하가 된 것. 기황후는 당시 원에서 인기가 좋던 고려 공녀들을 세력가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불교 문화가 동아시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였기때문에 원 황실과 자신의 일족의 번영을 목적으로 불교 관련 건축물을 세우기도 했다.

3 상세

하지만 그녀의 득세는 고려에는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녀가 가족들을 위해 고려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 바 있고, 그녀가 득세하면서 고려에 남아있던 그녀의 가족들도 고려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온갖 패악을 부린 것. 결국 공민왕병신정변을 일으켜 기철일파을 모조리 숙청하였다. 이에 기황후는 덕흥군 왕혜(王譓)[2]를 앞세워서 원나라의 군대로 고려를 침공하나 최영이성계에 의해 패배하고 만다.

한편 원으로 끌려온 고려 공녀들을 유력자들에게 보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기황후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고려가 원으로 보내는 공물의 양은 오히려 늘었다.

혜종은 탕기시의 반란을 제압하고 반란에 큰공을 세운 바얀이 최고의 권세를 누리게 되지만 바얀은 혜종의 윤허도 없이 담왕 살살독을 마음대로 처형한다. 거기다가 탕기시 형제와 다름없이 마구 권세를 휘둘렀다. 이때문에 혜종은 바얀에게 불만을 갖게 되고 톡토 테무르, 지아와태, 사라판 등이 메르키트 바얀을 실각시켜서 좌승상으로 강등하고 변방으로 쫓아낸 후에 톡토 테무르를 대승상에 임명하며 [3] 수년간은 원에 평화가 도래했다. 그러나 혜종이 라마교에 빠지게되고, 나아가 방탕해짐으로 점점 정치에 관심이 없어졌다. 그 무렵 훗날 북원의 소종이 되는 황태자 아유시리다라는 장성하여 나랏일을 직접 맡을 정도였는데, 방탕함에 빠진 혜종의 모습을 지켜보던 기황후는 이를 염려하여 황태자 아유시리다라와 양위를 의논하였고, 당시 승상이던 태평에게 황태자의 양위에 도움을 청하지만 태평은 응답하지 않고 거절한다. 이 사실이 혜종의 귀로 들어가게 되었고 2달 동안 혜종은 기황후를 보지 않을 정도로 크게 노하였다.

1360년, 오고타이 칸의 후손인 아르카이 테무르가 반란을 일으키고 급기야 1364년에는 볼케 테무르가 대도를 함락하는 사건이 벌어지고만다. 이때 황태자 아유시리다라는 탈출에 성공했으나 기황후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포로로 잡혔다. 이것에 아유시리다라가 코케 테무르에게 도움을 청하고 화가 난 볼케 테무르는 교지를 위조하여 기황후를 궁밖으로 쫓아내서 100일동안 감금시킨다.

하지만 1년후인 1365년, 한족계 출신 군벌 코케 테무르가 아유시리다라의 편을 들며 대도를 수복하여 결국 황태자파와 반황태자파의 내분은 끝나는데, 기황후는 코케 테무르의 힘일 입어 혜종에게 양위를 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나 혜종은 이를 거절하였고 코케 테무르마저 회군하여 대도를 떠나고 만다. 이후 1365년 9월에 바얀 후투그가 사망하고 많은 대신들이 기황후를 제1황후에 책봉할 것을 청했지만 기황후가 혜종을 자꾸 양위시키려 한 것때문에 정나미가 떨어졌는지 제1황후 책봉에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황후는 정궁황후의 자리를 포기하지 못하고 바얀 후투그가 살아생전 관리했었던 중정원을 자정원에 편입시키고 이름도 숭정원이라 바꾸어 더욱 세력을 키워서 혜종을 압박한다. 결국 혜종은 숭정원파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1365년 12월 기황후를 마침내 제1황후로 책봉한다.

그러나 기황후가 제1황후에 책봉된지 2년 8개월만인 1368년 8월, 주원장은 서달에게 대군을 이끌고 북진을 명령하게 되고 혜종은 기황후와 아유시리다라와 함께 대도를 버리고 응창부로 피난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며느리 권황후와 김황후와 그녀들의 자식들까지 전부 포로로 잡힌다. 어처구니없게도 기황후는 고려가 구원병을 보내지 않는 것에 매우 역정을 냈다고 한다. 응창부도 위험해지자 원나라의 초기 수도인 카라코룸으로 천도했고 이 과정에서 혜종이 1369년 4월 23일 이질로 사망한다. 그리고 아유시리다라가 황제에 올랐지만 기황후가 어찌되었는지는 이후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아마도 기황후는 카라코룸에서 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즉위하는 것을 보고 황태후가 되어 살다가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묘?

동국여지지에 의하면 경기도 연천에 그녀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보면 기황후가 카라코룸으로 가지 않고 고려로 돌아와 연천에서 여생을 마친 게 아닌가라는 추정이 가능하지만 고려사 등에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게 문제. 그녀가 고려로 돌아왔으면 고려사에 기록 한 줄이라도 남았을 것이다. 공민왕 입장에서도 자신을 밀어내려고 했던 기황후를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순순히 받아줬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연천군 연천읍 상리에 그녀의 묘라는 게 남아있고 인근에서 고려시대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석물 2기도 발견된 걸로 보면 어쩌면 그녀가 카라코룸에서 죽어서 자신의 시신이나마 고향에 묻어달라고 해서 연천에 묻혔을지도 모른다. 공민왕도 죽은 기황후라면 아무 위협이 안되었을 테니 연천에 묘를 만드는 것 정도는 허락했을지도.

5 평가

최근에는 MBC 드라마 기황후로 인해 논란의 중심이 되고있는데, 부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다. 아무래도 그녀의 일족이 고려에 끼친 만행이 결정적인 듯. 일단 한국에선 일족의 만행과 고려 침공시도 만으로도 좋게 볼 수 없는 인물이다.

원나라가 망하던 시기의 황후이기도 하지만 고려의 입장에서는 민폐만 끼칠 뿐 득이 되는 것은 적었다. 원나라에서 그녀가 권력을 잡고 그녀의 오빠 기철, 기원이 힘을 가지게 되자 부마국인 고려에서는 기씨 집안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기씨 집안은 기황후의 세를 등에 입어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빴다. 날이 갈수록 고려의 기씨 일족은 횡포와 전횡을 부렸고 결국 공민왕이 즉위하자마자 원과 충돌할 각오로 기씨 집안을 정리하게 되었다. 그후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펼치자, 공민왕을 제거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나 고려가 이를 막아내며 무산되어 버린다.

또한 한국 사람들에게는 기황후가 원나라도 망친 인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달기서태후 같은 요부나 악녀를 떠올리고는 하는데, 애초에 달기는 몰라도 서태후가 사치를 많이 부렸긴 했지만 권세를 많이 휘둘렀을 뿐이지 요부나 악녀가 아닌데다가, 사실 기황후는 중간은 갔다. 그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원사 후비 열전 뿐이나, 열전과 열전외의 사료를 통해 유추해봤을때, 원나라 입장에선 그나마 막장은 아닌 모습의 황후에 가까웠다. 고려 출신 환관등을 통해 자정원이라는 기구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나 심하게 사치와 향락에 빠지진 않았고, 실생활에서의 그녀는 틈틈히 효경과 사서를 읽었으며,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귀한 음식을 먹기전에는 항상 태묘에 올리는 등 내명부에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원나라 입장이고, 고려엔 부정적인 영향을 줬을 뿐이다. 기철 등 기씨 일족의 악행과 공민왕의 숙청에 대해 1만의 군대를 고려로 보낸 것은 두고두고 까여야 할 것이다.

한편 기황후가 공녀 폐지를 했느니 입성론을 막았느니 하는 헛소리들이 존재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먼저 [1]를 보면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는 "기황후는 고려 출신이면서도 고려의 독립성을 부정한 친원 세력의 배후이자 중심인물"이라고 말했다. 순제 때 원으로 보내는 공녀가 중단된 사실을 들어 기황후가 '공녀 중단'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강한 교수는 "기황후가 공녀 중단에 기여했다는 기록은 없다"면서 "당시 관점에서나 지금 관점에서나 기황후가 고려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부분은 없다"고 단언했다. 뿐만 아니라 [2]를 보면,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정책실장으로 재직중인 이강한 교수는 “기황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이숙인 교수는 “고려 때 기황후를 모델로 해 공녀가 더 늘었다”며 “기황후가 당시 권력 기반을 위해 더 많은 고려 사람들을 원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결과 원나라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는 고려 공녀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3]에는 "1343년(충혜왕 복위 4) 역시 원나라에서 이운(李芸)·조익청(曹益淸)·기철(奇轍) 등이 제4차 입성책동을 일으켰다."라고 나온다. 동생이 입성론을 일으키는데도 이를 막으려 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이곡이 순제에 상소를 넣어 공녀 차출을 중지시켰으나 기황후는 오히려 박불화를 시켜서 공녀를 계속 보내라고 독촉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아무튼 궁극적으로 그녀가 황후로 있던 시기 말기는 원 제국 자체가 더 이상 피지배 민족들을 억압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여러 어려운 요구를 하기 어렵고 본국 관리도 힘들어졌기 때문에 저절로 여러 요구가 사라진 것이다. 이를 왜곡해서 해석하여 위와 같은 역사왜곡이 벌어진 것이다. 아무튼 속지 말자. 또한 고려양 또한 수많은 환관, 공녀들이 끌려가서 저절로 퍼진 것이고 기황후는 그 공녀의 일부였을 뿐이다. 이 여자가 한류의 원조네 뭐네 하는 것도 참 웃긴 소리다.

원 패망의 주역으로 꼽히기도 하는데, 기황후가 원나라를 말아먹은게 아니다. 이때 원나라는 어차피 망조가 깃든 나라였고, 애초 원나라 멸망의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원의 한족 차별로 인한 한족들의 불만과 원나라 말기에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물가폭등[4] 그리고 이로 인해 경제가 파탄되었던 점, 군벌들의 봉기, 그리고 농민반란을 가장 큰 이유로 꼽을 수 있는데, 결론적으로 원나라의 멸망은 기황후의 짓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황후 또한 정치적 악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그녀 생애 큰실수라고 볼 수있는데 톡토 테무르가 대승상이 된후 유래없는 평화를 맞이했던 원나라였으나 희대의 간신이였던 합마가 기황후와 톡토 테무르를 이간질하여 결국에는 톡토 테무르를 죽게 만들고 만다. 기황후도 1345년 톡토 테무르가 3사를 편찬할때 그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에 비록 기황후의 본심은 아니였을지언정, 대승상 톡토 테무르를 죽인 것은 단연코 악수였다. 기황후가 합마의 이간질에 넘어가지 않고 톡토 테무르가 오래도록 원나라에 남아있었다면 원나라의 멸망이 조금이라도 늦춰졌을지도 모른다. 또 한가지의 결정적 악수로는 심복이였던 고용보가 죽은 후에 박불화에게 너무 많은 권력을 준 것이었고, 이것은 1364년의 황태자파와 반황태자파의 내전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결국 자신도 반황태자파였던 볼루드 테무르에 의해 궁에서 쫓겨나서 일반 사가에 100일간 감금되는 피해를 입는다. 이는 원나라의 국방력을 크게 약화시켰으며, 가뜩이나 불안불안했고 어지러웠던 원나라를 더욱 흔들리게 만들었다. 결국 원이 만리장성 이남지역을 빼앗기고 다시 초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아무튼 개인의 입장에서도 그리 행복한 삶은 아니었을듯 하다. 비록 자국의 왕보다 높은 지위를 얻어 28년간 황후로서 온갖 권세를 누렸지만 그녀 역시 반황태자파와 정치적 정적들에 의해 골머리를 앓아야 했고 고민도 많이 했을 것이다. 또 그녀의 치세였던 28년중에서 25년은 제2황후생활이었다. 이미 바얀 후투그가 어진 황후였다고는 하나 엄연히 바얀 후투그가 그녀의 윗사람이었고 기황후는 완전히 마음껏 인생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차별대우도 있었는데 기황후는 황후의 옥책과 금보도 갖지 못했으며 책립 의식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그리고 원나라에서 다수의 황후를 둔다한들 정궁황후를 제외한 나머지 황후들은 사실 고급 비자(妃子)에 가까웠다. 거기다가 살아생전에 원나라가 멸망하고 건조하고 추운 카라코룸으로 피난을 갔다. 그래도 신분이 낮은 공녀로 와서 제2황후, 제1황후에 책봉되었으며 자기의 핏줄이자 아들을 직접 황제의 자리에 즉위시켰으니 나름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겠다.[5]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드라마 신돈에서는 김혜리가 기황후 역을 맡았으며, 비중은 그리 크진 않지만 악녀의 포스를 제대로 풍겼다. 그리고 드라마 신의 때문에 기황후의 오빠 기철악역으로서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 두 오누이고려를 향해 하는 행동들을 보면 이완용 뺨치는 매국노가 따로 없다.

드라마 기황후하지원이 기황후 역을 맡아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로 역사왜곡 문제로 논란이 일었다. 내용이 기므로 항목 참조. 절대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인물인데도 미화를 해 놓았고, 기황후 일생 자체에 대한 왜곡도 매우 심하다.
  1. 肅良合 完者忽都. '완췌후두'는 현대 중국어 발음이다.
  2. 몽골식 이름은 타스티무르(塔思帖木兒)
  3. 톡토 테무르항목과 다름. 확인바람.
  4. 특히 경제 관념이 없었던 원 조정은 교초를 말 그대로 남발했는데, 그 결과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된다.
  5. 이후로도 중국의 역대 황제에게 사랑받은 이민족 국가의 여인들은 있었지만 모두 후궁의 신분으로 죽었고 한명도 자기 자손을 태자에 올리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