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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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역대 국왕
30대 충정왕 왕저31대 공민왕 왕전비정통 덕흥군 왕혜
비정통 덕흥군 왕혜31대 공민왕 왕전(복위)32대 우왕 왕우
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1]
묘호없음
시호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
(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
/공민왕(恭愍王)
능묘현릉(玄陵)
왕(王)
기(祺)[2] / 전(顓)
원량(元良)
몽골식 이름바얀 테무르
(Bayan Temür[3], 伯顔 帖木兒)
이재(怡齋) / 익당(益堂)
배우자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아버지충숙왕
어머니공원왕후(恭元王后)
생몰년도음력1330년 5월 6일 ~ 1374년 9월 22일
양력1330년 5월 23일 ~ 1374년 10월 27일 (45세)
재위기간1차1351년 10월 ~ 1363년
2차1364년 ~ 1374년 9월 22일

1 개요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반원 정책을 펼친 고려의 마지막 불꽃.

욕망개혁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던 비운의 개혁 정치가.

고려의 제31대 왕. 우왕, 창왕, 공양왕은 폐위되었으므로 사실상 고려의 마지막 군주. 고려 왕조에서 실질적으로 왕다운 왕 노릇을 했던 마지막 왕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 정식 시호는 공민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恭愍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인데 '공민'은 명에서 내려준 시호라서 고려에서 올린 시호의 '경효대왕(敬孝大王)'을 따서 '경효왕'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단, 25대 충렬왕의 고려 측 시호도 경효왕(景孝王)이라 혼동될 수 있어서 실제로 그렇게 많이 쓰이지 않는다.

아들인 우왕이인임에게 농락당하다가 권력을 찾은 지 얼마 안 되어 위화도 회군을 당했고 손자 창왕은 병풍 신세의 허수아비 왕인데다 공양왕은 그나마 발버둥치기라도 했지만 오죽하면 우왕과 창왕은 왕이었던 사실이 취소당해 시호가 없어서 본명으로만 불릴 정도. 애초에 호니 자니 피휘니 하는 관습 자체가 한자 문화권에선 사람 본명을 직접 부르는 습관이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생긴 습관인 걸 생각하고, 특히 왕의 본명을 직접 부르는 것 자체가 사약 한 뚝배기 하실래예라고 외치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걸 생각하면.

2 고려의 재흥을 꾀하다

충숙왕의 차남으로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졌다.[4] 원 간섭기의 왕족들이 거의 그렇듯 공민왕도 원나라에서 볼모생활[5]을 한다. 그 기간 동안 공민왕은 원나라가 점점 쇠퇴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이 때 평생의 반려자 노국대장공주를 만나 결혼하여 원에서 생활하다가 충정왕이 원에 의해 폐위되자 고려로 돌아와 왕이 되었다.

원래는 장자계승원칙을 원이 존중해주었고 그렇기 때문에 충정왕의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오를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고려는 새로운 왕을 원했고 그래서 당시 강릉대군을 왕위에 올려달라고 원나라에 요구했고 이 의견이 수용되어 왕위에 오를 수가 있게 되었다. 그 이후 폐위된 충정왕은 공민왕 2년(1352년)에 원나라에 의해 독살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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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되자마자 그는 원나라 생활을 할 때 파악한 원의 쇠퇴를 믿고 본격적인 반원정책을 펼쳤다.그리고 1356년에 병신정변을 일으키다. [6]

당대의 신진사대부의 대표인물은 이색, 이숭인, 정몽주, 정도전 등으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조선왕조의 개국에도 크게 일조했다. 단 이들 중에서도 조선의 개국에 일조한 이들은 정도전 등의 급진적인 신진 사대부들로, 이들 가운데서도 정치적인 스펙트럼의 차이는 존재했다. 또한 정몽주는 당시에도 명사였긴 했으나 정몽주와 정도전은 젊은 세대로서 공민왕 말기까지는 소장관원, 간관으로서 존재했을 뿐 정치적으로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국왕이 중책을 맡겼던 것은 이제현과 그의 제자 이색, 그리고 이인임의 형인 이인복과 같은 원나라 과거급제출신 재상들이었으며, 이들은 양심적이고 성실했으며 학문의 성취가 높았으나, 이후의 세대보다 보수적이었고 기득권과도 얽혀 있었다. 그 밖의 요직은 자신의 측근들(연저수종공신)과 어머니 명덕태후의 가문인 남양 홍씨 집안의 홍언박(공민왕의 외사촌 형이자 홍륜의 조부), 인척인 경복흥 같은 사람들을 기용했다.

2.1 외침의 위기

공민왕은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꽤 괜찮은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원혜종의 요청을 받고 홍건적 토벌을 위해 최영을 중국에 파견하기도 했는데, 최영을 통해서도 원의 어지러운 사정을 파악했다.

당시 원 제국은 행정체계의 미비와 봉건적 군사제도로 인해 전력을 동원하기 힘들고 내부 분열이 잦았다. 교초남발과 중과세와 한인들에 대한 차별로 인해 한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경제 중심지인 강남 일대가 원의 장악에서 벗어난 것도 치명타였다. 이에 공민왕은 차츰 원에서의 독립을 추진하였으며, 독립과 칭신을 반복하면서도 세를 잘 봐서 결국 부원배를 주살하고 동북면의 쌍성총관부(지금의 함경남도 등)를 쳐서 원에 굴복한 이후 상실한 동북지역의 영토를 수복했는데 이때 이성계가 고려에 귀순했다. 그리고 이름만 남아있던 정동행중서성[7]도 폐지했다.

당시는 중국은 새 질서가 수립되는 원-명교체기, 일본은 남북조시대의 혼란을 겪고 있어 동아시아 전체가 전란에 휩싸여 있었다.[8]

그 탓으로 북쪽에서는 요동 지역의 원의 장군 나하추의 침입과 오빠 기철을 죽인데 앙심을 품은 기황후가 원 혜종을 설득하여 덕흥군을 즉위시키기 위해 침입한 최유의 고려 침공이 있었다. 남쪽에서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다.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아수라장. 특히 굶주림에 지친 홍건적들이 떼거지로 고려에 침입했을 때는 개경까지 함락되어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난을 가기도 했다.[9]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시기였으나 최영, 이성계, 정세운 등 많은 명장들의 활약으로 이를 간신히 격퇴할 수 있었다.

또한 지난 날 원종이 내전 중이던 쿠빌라이에 칭신해 나라를 유지했듯이, 공민왕도 막 원을 몰아내고 불안한 처지이던 명에 곧 칭신하여 명 태조(주원장)의 호감을 샀다. 공민왕은 사신을 보내가며 명나라에 저자세를 취하고 곧장 제후왕으로 책봉될 정도로 관계를 좋게 하는데, 이는 요동정벌을 위한 준비였다. 이미 기씨 일파의 숙청으로 관계가 나빠진 북원과는 국교를 단절하였고, 아직 명나라는 요동에 신경을 쓰지 못할 시기, 공민왕은 요동을 공격하는데 이것이 제1차 요동정벌이다.

제1차 요동정벌은 발해가 멸망한지 445년만에 고려가 처음으로 요동성 점령에 성공한 사건이자 한반도 국가가 마지막으로 요동을 공략하고 실제로 점유했던 시기이다. 이성계가 처음 큰 전공을 세운 전쟁이기도 하며, 따라서 용비어천가와 고려사에도 상세히 기록되었다. 공민왕은 명나라를 경계하여 기씨 일파와 원 군대 토벌을 명분으로 요동으로 군대를 진출시켰다. 총사령관은 이인임이었으며 이성계, 지용수, 양백안, 임견미가 함께 군대를 이끌었다. 다만 당시 지용수가 해안선을 따라 움직이는 일로 부대내 불만이 커졌으며, 성내의 군량고에 불이나 군량이 타버린 와중 본국의 군량 보급이 제대로 오지 않은 일로 인해 결국 전투 후반에 전사자보다 굶주림과 추위에 죽은 병사들이 더 많은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시도에 반발한 명이 고려에 외교적 압력을 가하고, 한편으로 요동 무장들을 투항시키면서 요동 정벌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일시적으로나마 요동을 정벌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그 뒤로 한반도의 영향력이 요동에 미치는 일은 영원히 없었다.

왜구를 근절하기 위한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이 남북조 시대의 내전상태라 규슈 일대의 통제는 고사하고, 규슈 일대의 호족과 도적들이 뭉쳐진 왜구들이 수도 교토 인근인 기나이(畿内)까지 약탈하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왜구는 중앙정부 자체가 없어져버려 고삐가 풀려버린 지방 세력들 그 자체였고, 왜구의 준동은 우왕 때까지 이어졌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참조.

3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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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초상화라 추정되는 것.#

공민왕의 시대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난세였다. 이럴 때 군주가 굳건한 태도로 일관되게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겠지만 공민왕의 예술가적인 예민한 기질은 이렇듯 급박하고도 강한 압박이 가해지는 국제정세와 국내상황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원명교체기를 틈타 몇가지 제도를 개혁하긴 하였으나 원이 제동을 걸면 곧바로 다시 원위치되거나 하는 등 수도 없이 난항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기득권 세력이었던 권문세족들의 반발은 엄청난 것이어서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이나, 딸들을 원 고관에 바치고 권세를 누리던 부원배 일당들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이들은 충목왕충정왕 때 시도되었던 개혁을 무산시켰던 장본인들이었으며 막대한 토지와 노비,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결국 왕은 원이 혼란스러운 틈에 기습적으로 이들을 주살 및 토벌하여 간신히 숙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기근과 홍건적왜구의 대량 침입이 벌어졌다. 왜구는 고려 수군을 궤멸시키고 개경 인근까지 북진하여 대살육을 벌였고, 홍건적은 2차 침입때 개경을 함락시킨 뒤 궁을 불사르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으며 공민왕은 안동까지 몽진해야 했다. 정세운이 간신히 개경을 수복하기는 했으나 김용의 모략으로 살해되었다. 군사권이 장군들의 손에 놓였던 상황에서 심복으로 믿고 있던 김용의 반란은 공민왕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공민왕은 김용을 어찌나 신임했는지 왕을 해치려 했던 자인데도 말년까지 한번씩 그리워했다고 한다.

이 흥왕사의 난 때 국왕을 지켰던 노국공주가 자신의 아이를 해산하다가 아이와 함께 사망하게 되자 공민왕은 완전히 무너졌다. 흥왕사의 난 외에도, 노국공주가 살아있을 적에도 자객으로 추정되는 불온한 무리들이 공민왕의 침소에 간간이 나타났는데 공주가 온몸을 다해서 그들을 물리쳤다는 얘기가 전할 정도로 공민왕을 적극적으로 보호했다.

또한 공민왕은 노국공주 외에는 다른 여자를 상대하지 않고 후궁도 들이지 않았는데, 후일 오랫동안 왕손이 태어나지 않자 후사가 끊길 것을 염려한 왕대비와 신하들의 간청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 1359년 혼인한 지 10년만에 이제현의 딸을 혜비로 맞이하고 공주의 사후(死後)에는 익비 등 3명을 더 간택하지만 이는 형식상의 혼인이었을 뿐, 여자들에게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반야에게서 우왕을 볼 수 있었던 것도 반야가 노국공주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란 이야기까지 전한다.

4 신돈의 개혁시도와 좌절

신돈에게 모든 국사를 넘겨버린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들이 있으나 가장 큰 의견은 공민왕 자신이 기존 정치세력들에게 염증을 느낀 나머지 정치계에서나 불교계에서나 완전한 비주류였던 신돈을 등용하여 이들을 견제하고자 했다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 또한 전란을 진압하면서 많은 토지를 하사받아 전제개혁의 장애가 되고, 사병을 거느려 위협적이었던 무장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10]

이러한 변모의 내적 요인은, 사적 개인으로서 공민왕이 노국공주의 사망으로 인해 정치에 뜻을 잃은 채 실의에 빠졌고, 삶의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 있다. 현실세계에서 공민왕의 실존은 이미 사라진 채 슬픔에 대한 탐닉과 죽음에의 갈망, 그 사이를 메우는 쾌락만이 남았다.[11] 그래도 신돈을 앞세워 개혁정책을 맡긴 것으로만 봐도 아직까지는 개혁에 대한 의지만큼은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개혁을 위해 임용되어 국왕의 스승격 지위를 가지고 군림하게 된 신돈은 기존 정치세력인 권문세족에 대한 견제차원을 넘어서서 이들에 대한 공격을 가했고 기존의 정치세력인 권문세족들은 신돈에 대해 태업으로 맞섬으로써 오히려 나라가 더 어지러워지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이는 전제개혁을 위해 기성세력이라 할 수 있는 권문세족들을 약화시키려는 것으로 해석되나, 한편으로는 천민 중 출신인 신돈이 기존 세력 위에 군림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권력을 하루아침에 천민 출신의 이름 없는 중에 의하여 빼앗기고 소유하고 있던 토지마저 농민과 천민에게 강압적으로 내주게 된 권문세족들은 신돈에게 무서운 반감을 품기 시작하였다. 신돈에 의해 밀려난 세력 중에는 탐욕스러운 대농장주와 부원배들도 있었으나, 양식있는 귀족들이나 소장세력도 있었다. 심지어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던 최영조차도 그를 싫어할 정도였다.[12]

그러나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토지개혁을 시도하였고, 이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긴 했다.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어 있다는 십실구공(十室九空)이라는 말이 있던 시대였다. 신돈은 이틀에 한 번씩 도감에 나가 일을 처리하였고 실무 책임자는 이인임과 이춘부[13]였는데 이춘부는 홍건적을 몰아낸 전쟁영웅 출신이었고 이인임은 당시 권문세족 중 가장 명신이던 이인복[14]의 동생이었으므로 신돈의 포고령은 왕권의 철저한 비호 아래 실효를 거둔다. 이는 백성들이 신돈에게 강력한 지지를 보내는 바탕이 된다. 또한 신돈은 성균관을 지원하여 미래의 신진사대부 개혁층을 육성하는데 힘이 되었다. 정몽주, 정도전, 윤소종 등 조선 건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신진 문신세력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유교적 사대부층은 기존 사대부들보다 불교에 적대적이었고, 불교계 내에서도 왕사 보우는 신돈과 갈등을 빚었다. 신돈 세력 내에서도 외척인 경천흥(경복흥)이 신돈과 갈라져 살해당할 뻔했으며, 왕의 측근이었던 유숙도 참소로 죽임을 당했다. 또한 신돈은 사심관 제도를 부활시켜 자신의 세력을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다.

결국 더 이상 좌시를 했다간 자신의 자리마저 위태로워 질 것이라는 예상을 한 공민왕은 역모죄로 신돈과 그 일파를 모조리 처형하여 다시 자신이 정치일선에 나서게 된다. 이는 신돈이 막대한 재정과 인력을 소모하고, 사망자까지 늘어나던 노국공주 영전 공사에 결국 반대를 표명하면서 불거지게 되고, 신하들을 믿지 못하던 공민왕은 의심을 더욱 굳히게 되어 결국 친정을 선포하고 최영을 불러들여 신돈을 숙청하게 된다.

5 방종, 그리고 비극적인 최후

하지만 이미 공민왕은 거진 반 폐인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그는 공적 기구인 국왕으로서의 정치와 행정에 대한 전권은 신돈에게 맡긴 채, 노국공주 영전 건설에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동원했고 이는 결국 국가재정 악화와 인부의 사망자 증가를 불러왔다. 그리고 언제나 슬퍼하면서 불공이나 탄식으로 날을 지새웠다. 민심도 당연히 악화되었으나 말리는 신하들의 간언 자체를 파면이나 처형 등의 처벌로 틀어 막아버렸다. 신돈이 키워놓고 새로운 정치원동력으로 삼으려고 했던 사대부들조차 공민왕의 영전공사 강행과, 여러 난행들에 실망해 있었고 공민왕 역시 신하들을 믿지 못한 채 흥왕사의 난에서 자신을 보호했던 환관들만을 믿고 의지했으며, 영전공사에 찬성한 일부 신하들만을 비호하였다.

반 폐인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모든 육체적, 정신적 동력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다급해진 것은 후사의 문제였다. 하지만 공민왕이 노국공주를 제외한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아서인지 다른 후궁들의 몸에서 공민왕의 후사가 나올 가능성은 매우 낮은 상황이었다. 공민왕은 스스로의 수명을 길게 보지 않았고, 애써 살려고 하지도 않았다.

충정왕은 16살의 어린 나이로 원에 의해 독살당했고, 충선왕의 서자로 알려진 덕흥군은 역적이 되었던데다 그 왕씨 혈통을 부정했던 바 있어서 당시 살아 있는 왕손들은 대부분 공민왕과 촌수가 멀었다.[15] 이래서 공민왕의 후계자 문제는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신돈의 여종이었던 반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왕우는 공민왕의 아들이 맞는지에 대한 혈통 문제가 있어서, 공민왕은 왕우의 생모가 반야가 아니라 죽은 궁녀 한씨로 선포해 출신이나 혈통 문제를 덮으려고 했다. 하지만 우왕의 혈통 논란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명덕태후마저 왕우가 자신의 손자인지 의심해 다른 인물을 공민왕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다. 명덕태후는 공민왕의 사후에도 이 때문에 우왕의 즉위를 반대한 적이 있다. 이 반야와 우왕 이야기 때문에 아예 공민왕 본인이 일종의 무정자증이어서 처음부터 후손을 남기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는 루머가 있는데, 노국공주가 임신한 것을 볼 때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공민왕은 성적 측면에서도 방종해져 공민왕 스스로 여장을 하기도 하고, '자제위'라는 미소년집단을 뽑아 시중을 들게 하고 이들로 하여금 후궁들을 범하게 해놓고NTR? 자신은 이것을 지도, 감독(!)하거나 감상하고 있었다 한다. 이러한 기록들의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신중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고려 말기의 기록은 대부분 조선의 건국을 미화하기 위해 왜곡돼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제위에 대해서는 세족들을 믿지 못했던 공민왕이 세족 자제들을 궁에 두어 인질로 삼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어쩌면 반반일지도... 이들은 궁에 갇혀 국왕의 상대를 해야 했기에, 대가로서 많은 재물과 권세를 누렸으며 궁녀들과도 문란하게 행동하여 지탄을 받았다. 공민왕을 살해하는 홍륜의 경우에도, 외척이던 남양 홍씨의 자손으로 집안에서는 홍륜의 사람됨과 자제위를 우려하기도 했으며, 시해 이후 역모죄로 거열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결국 공민왕은 이 자제위 중 하나인 홍륜이 익비라는 후궁을 임신시키자, 공민왕은 그것을 은폐할 의도로 홍륜과 내시 최만생을 죽이려했고 이 낌새를 눈치챈 그들에게 역으로 시해당했다. 고려사에서는 공민왕이 변소에[16] 행차하자 내시 최만생이 쪼르르 달려가 "홍륜이 익비를 임신시켰습니다."라고 말하자 공민왕은 홍륜을 죽일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사실을 고한 최만생에게 "너도 비밀을 아니 같이 죽어 줘야겠어."라고 말한다. 이에 놀란 최만생이 당사자인 홍륜 등과 모의하여 잠을 자고 있던 공민왕의 처소로 난입해 그를 시해했다는 것이다. 향년 45세였다. 어찌나 난도질을 당했는지 뇌수가 병풍에 튀었을 정도로 시신은 참혹한 상태였다고 한다.

왕릉인 현정릉은 지금도 개성에 있으며 북한 정부가 다른 고려왕릉들에 비해 더 신경을 쓰는 듯 하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자신이 모셨던 왕인 공민왕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종묘 내부에 공민왕 신당을 세울 것을 명하였다. 공민왕 신당은 지금까지 현존하고 있고 덕분에 우리는 공민왕과 노국대종공주의 영정은 물론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준마도도 감상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영정(작자미상)

5.1 공민왕 시해에 관한 의혹

중국의 정사인 명사 조선열전에서는 이인인(李仁人)[17]이 공민왕을 시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공민왕의 시해 사건 배후에는 신돈파(?)였던 이인임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궁녀를 겁탈했다는 홍륜은 이미 부인이 있었다. 둘째, 공민왕은 이런 문란한 사생활에 대한 서술과 달리 정사를 보는데 별 탈이 없었다. 셋째, 이인임이 권력을 잡은 후에 북원의 사신의 말에서 왕을 죽인 죄를 용서한다란 말이 있으며, 명에게 왕의 시해사실이 새어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인임이 시해의 배후였기에 이를 두려워할 했을 것이며, 배후가 아니었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만 이인임과 공민왕 시해의 관련성은 고려국사나 고려사 어느 부분에도 전혀 기록되어있지 않으므로 이 설을 받아들이자면 이와 같은 사실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한데, 그 부분은 이인임 실각 4개월 후 위화도 회군이 발생하면서 집권을 위해 우왕의 혈통과 공민왕의 총명함을 깎아 내릴 필요가 있었던 이성계 등이 자제위의 홍륜 이야기만을 남겼다는 것으로 설명하는 모양.

그러나 이는 사실상 명백한 루머로, 우선 이인임이 혼자 일을 도모하고도 그때까지의 지위를 누리기엔 우선 당시 고려 조정엔 그를 견제할 만한 쟁쟁한 명사와 충신이 너무도 많았다. 또한 익비의 아이가 홍륜의 아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당시 멀쩡히 정사를 볼 정도로 판단력이 있었던 공민왕이 황급히 홍륜을 살해하려 들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북원 사신의 발언 역시도정확히는 백안첩목아왕(공민왕)이 우리를 배반하고 명에 귀부하였으므로 죽인 것을 인정한다는 것으로, 정확히는 우왕 원년, 우왕의 즉위 과정을 정당화하는 발언이었다. 이전까지 우왕을 인정하지 않고 심양왕의 손자인 터터부카를 강제로 왕으로 세우려던 북원이 이인임의 화전양면책을 받아들여 고려의 후계 승계에 대해 한 발 양보 발언을 보내온 것이다. 또한 이인임이 신돈파여서 공민왕에게 앙심을 품었으리라는 설은 아예 앞뒤가 다른 것으로 이인임을 전민변정도감에 넣은 사람은 신돈이 아니라 공민왕 자신이었다. 그 증거로서 당시 신돈의 측근이던 이춘부 등이 신돈 실각과 함께 모조리 사형당한 것과 달리 이인임은 그대로 다시 공민왕의 곁에 돌아왔다. 즉 그는 신돈 일파였다기보다는 공민왕의 수족이었다. 따라서 신돈파(?)였던 이인임이 앙심을 품고 시해했다는 주장은 다소 무리가 있는 주장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고려사 이인임 열전의 원전이 된 고려국사는 정도전이 직접 나서서 편찬한 책으로 이인임에 대한 비난은 티끌만한 것도 빼지 않았다. 공민왕을 약간 깎아내리기 위해 이인임의 가장 큰 악행을 홍륜에게 옮기고 없던 일로 만들어가며 축소 기록하는 일은 사실상 정도전태조의 인격이 뒤바뀌지 않는 한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인인(李仁人)이 공민왕을 시해하였다는 중국발 조선열전의 정확한 내용은 사실 이인인과 그 아들 이성계[18]가 고려 사왕(四王, 공민, 우왕, 창왕, 공양)을 함께 시해하였다는 오기록이다.

어쨌거나 홍륜의 공민왕 시해 이후로 신돈의 개혁 운동에 반대하던 자제위의 집안들은 약화되었으며, 이인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익비 등 우왕에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를 차근차근 정리하여 자신의 정치 기반을 공고히 했다.

이런 배경들에 착안하여 정도전(드라마)이인임이 자제위를 충동질해 공민왕을 차도살인 했다는 과감한 각색을 보이고 있다. 또한 그 전의 드라마인 대풍수에서도 비슷한 각색을 하였는데 이쪽은 이인임의 내연녀인 가상의 고려 최고 무당이 음모를 꾸며 공민왕을 시해했다는 내용이다(...)

6 '개혁 군주'의 한계 - 평가

史臣贊曰 王之未立也, 聰明仁厚 民望咸歸焉 及卽位 勵精圖治 中外大悅想望大平。自魯國薨逝 過哀喪志 委政辛旽 逐殺勛賢 大興土木 以斂民怨。狎昵頑童 以逞淫穢 使酒無時 歐擊左右。又患無嗣 旣取他人子 爲大君 而慮外人不信 密令嬖臣 汚辱後宮 及其有身 欲殺其人 以滅其口。悖亂如此 欲免得乎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왕이 즉위하기 이전에는 총명하고 어질고 후덕하여 백성들의 기대를 모았고, 즉위한 후에는 온갖 힘을 다해 올바른 정치를 이루었으므로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면서 태평성대의 도래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국공주가 죽은 후 슬픔이 지나쳐 모든 일에 뜻을 잃고 정치를 승려 신돈에게 맡기는 바람에 공신과 현신이 참살되거나 내쫓겼으며 노국공주의 영전건설같은 무리한 건축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샀다. 완악한 무뢰배들을 가까이 해 음탕하고 더러운 짓을 함부로 하였고 수시로 술주정을 부리며 좌우의 신하들을 마구 때리기도 했다. 또 후사를 두지 못한 것을 근심한 나머지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대군으로 삼고서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해 몰래 폐신을 시켜 후궁을 강간하게 한 다음 임신하게 되면 그 자를 죽여 입을 막아버리려 했다. 패륜적 행동이 이와 같았으니 죽음을 면하려고 한들 어찌 피할 수 있었겠는가?"


고려사》 공민왕 - 논평[19]

의심이 많아 신하를 함부로 죽이기도 했는데, 그 예시로 들 만한 사건이 당시 '삼원수'라 불리며 홍건적의 침입으로 부터 고려를 구한 당대의 명장인 안우, 이방실, 김득배와 정세운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들은 권력을 탐했던 간신 김용의 모략 때문에 살해된 인물들인데 (공민왕이 김용을 비호 내지는 흑막이라는 의견도 있다) 후에 김용마저도 흥왕사의 변 이후 최영을 시켜 제거했다. 또한 최영과 이성계 이전에 고려의 명장으로 손꼽히던 인당이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인당은 원의 반란군 토벌 지원병으로 갔던 중국에서도 용명을 떨쳤고 영토 수복 전쟁에서도 활약했다. 인당은 압록강변 수복에서도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공민왕이 보낸 심복 장수였던 강중경을 군법위반으로 처형하면서 국왕의 의심을 샀고, 결국 공민왕은 원의 반발을 무마하고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희생물로서 인당을 처형하였다.[20]

이런 장군들의 숙청은, 임진왜란시의 선조와 마찬가지로, 계속되는 전란 속에서 공을 세워 세력을 키운 무인세력들로부터 왕권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고 봐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고려 전체를 뒤흔들며 혼란하게 만들었던 무신정권이 끝난 지 채 100년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김득배 등의 자식들을 공민왕이 위로하였던 것은 이런 불가피한 숙청 이후의 나름의 속죄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도 공민왕 사후 무신들의 힘은 더욱 강해지고, 이인임마저 몰락한 이후 권력은 최영과 이성계 등으로 넘어갔으며, 결국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조선왕조를 일으킨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은 신하들의 불안감을 촉발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이후에 홍륜이 공민왕을 시해한 이유로 보기도 한다.

성격 역시 우유부단하여 개혁을 시도한다고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서 우물쭈물하는 경향이 있기도 했는데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는 이런 점들을 공민왕의 단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여러 가지로 한계나 단점도 많았던 군주로 고려 멸망에 책임이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조선시대에 편찬되었고 공민왕 본인이 조선 건국 주역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위치에 있는 만큼 그에 관한 기록과 평가는 주의해가며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고려의 국력과 군사력의 회복, 영토 확장, 권문세족의 세력약화, 신진사대부의 성장 등의 긍정적인 측면 역시 존재하였다.

신하들을 충성시킬 개인적 리더십도 아쉬운 점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최영 혼자만 공민왕 편이었지 나중에 고려로 쳐들어오는 최유도 한때는 공민왕을 따랐었고, 호종공신이던 조일신을 제어하지 못했던 것을 보더라도 그런 면의 카리스마는 부족했던 것 같다.

근본적으로 공민왕의 측근세력이 미래의 출세를 위해 공민왕에게 투탁했던 호종공신이나 자신의 외척 등으로 좁았고, 신진 사대부들의 육성이 당시까지는 미비했었을 뿐만 아니라, 공민왕이 이들을 완전히 포섭하지 못한 것이 한계라 할 것이다. 공민왕 자신의 사상에서도 성리학을 깊게 이해하고 수용하기보다 기존의 한당유학의 전통과 불교에 심취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런 공민왕과 비슷한 사상체계를 보였던 기성 유학자들은 기존 권문세족과 일정부분 유착관계에 있어 개혁에 힘을 실어주기 어려웠다. 그리고 정도전, 윤소종, 정몽주, 권근, 조준과 같은 소장 성리학파 세력들은 공민왕대까지는 젊어서 중책을 맡기기 어려웠고, 왕 말기에는 국왕이 실의에 빠진 채 신하들을 불신해 개혁을 추진하지도 못하였다. 더불어 원과 홍건적,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무장들의 토지를 몰수하기 어려웠고, 오히려 공에 따라 토지를 분배해야 했으며, 이는 재정 악화로 이어져 군비 조달이 어려워졌다. 그 결과 원의 제도 하에서 사병집단을 거느리던 장수들을 통제하거나 사병을 혁파하기도 어려워져 개혁을 추진하기가 어려웠다. 공민왕은 계속 현실적 권력 유지를 위한 기성세력 유지와, 개혁을 위한 기성세력 제거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으며 현실적 힘도 제약되었다. 본격적이고 근본적인 전제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이성계가 군권을 거의 장악했던 공양왕 대였으며, 그때조차도 기성세력의 무수한 반발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했고 공민왕도 실패한 군주로 남았지만, 그의 개혁 시도는 신진 사대부들 중에서도 급진파였던 정도전 등과 신흥 무인 세력이었던 이성계에게 많은 힘을 부여해주었고 결국 조선 건국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막장이던 고려의 국세도 많이 회복하여 공양왕대로 가면 조선후기보다 국가에 등록된 전답의 수가 많아지기도 한다. 다만 그렇다고 이 시기 고려가 조선보다 농업이 발전했다는 뜻은 아니다. 농업은 당연히 조선이 훨씬 앞섰으며 고려가 회복돼갔다 해도 왜구들 때문에 여전히 나라는 개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에 끊임없이 망가져 가던 고려의 국세를 어느 정도 되돌렸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는 있을것이다.

조선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도 공민왕 사당이 건립되기도 했고 곳곳에 공민왕을 신으로 모시는 사당[21]도 많이 세워졌다. 일본인들은 절대로 가면 안 되는 곳 이는 이성계에 의해서인데 이성계가 출세하여 조선을 건국하게 된 것이 공민왕 때 벼슬을 받아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마움 때문에 종묘에도 공민왕을 모시게 된 것이다. 영정을 보면 노국공주와 함께 그려지고는 했는데 거의 공인 커플로 인정받은 셈이다.

여담이지만 야사에 의하면 훗날 연산군은 자기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노국공주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국의 노국공주 초상화를 수집하게 했다고 한다.

6.1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의 실사례 - 조일신의 난

공민왕이 신하들을 완전히 믿지 못했던 것은 재위기간 초에 일어난 조일신의 난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조일신은 원나라 때부터 호종했고 초기에 공민왕을 도왔지만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고 전횡을 일삼고 왕을 협박했을 정도였다. 결국 이인복과 최영에게 토벌되는데 믿었던 신하가 왕을 협박하고 전횡을 일삼다가 생긴 이 사건은 공민왕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거기에 홍건적, 왜구의 칩입과 권문세족의 반발 등 내우외환이 많은 혼란한 시기였다는 것도 생각해봐야 한다. 다만 조일신의 난의 후처리 과정이나 장군들 숙청에서 공민왕은 신하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거나 배신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것이 후에 김용이 흥왕사의 변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김용이 정세운 등을 죽인 것이 공민왕의 뜻이었다고 본다면, 김용은 자신 역시 그렇게 될까 두려워 선수를 쳤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김용이 독단으로 정세운이나 이방실 등을 죽였다고 보기는 어려운 면이 많은데 그들은 이 당시 여기저기 쳐들어오는 외적들을 소탕하던 상황이라 상당한 군사력이 있었고 아무리 직책이 더 높았다 하더라도 건드리기는 여간 껄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당시 인선을 보면 공민왕의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홍건적 토벌군의 총사령관 격인 중서평장사에는 정세운이 임명되었다. 정세운은 물론 안우와 같은 종 2품직이었지만, 경력이나 연륜은 안우가 앞섰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중서평장사는 정세운이 아니라 안우가 되어야 했다. 게다가 정세운은 총사령관이 되자 오만해져서 안우와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진 것으로 보인다. 재상이었던 홍언박이 위협을 느낄 정도로 오만했다고 할 정도였다. 나아가 정세운은 장수들의 개인보고를 금지하고, 특히 포상과 관련된 보고는 반드시 자기를 거쳐야 한다고 공민왕에게 다짐을 받았다. 특히 개경 공격 감행일에 정세운은 멀찍이 임진강 남쪽에서 대기 중인 것도 컸다. 즉 실제로 피 흘리며 싸운 장수들은 삼원수와 이성계 등인데, 정세운은 후방에 빠져있으면서 개경 수복 직후 보고서를 올리면서도 수훈자인 안우 등의 공적은 빼버리고 공민왕 찬양 일색의 보고서를 보낸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속적인 승전보는 그간 공민왕의 측근이었던 김용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자리가 위험하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김용은 밀서를 위조(?)하여 공민왕이 적은 조서처럼 꾸며 안우에게 보내 정세운을 죽이라고 명했다. 안우와 이방실은 이 밀서를 믿는다. 김득배도 한번은 말렸지만 결국 설득당해 정세운을 살해하는 일에 합류한다. 안우가 정세운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대사령을 선포하고 과거 안우의 상관이었던 유탁을 보내 안우를 안심시켜 행재소로 입궁하게 한다. 이에 안우는 이것이 정말 왕명이었던 것으로 확신하고 행재소로 향했다. 그러나 안우가 행재소로 들어서자 김용의 습격이 시작되었고 안우는 죄를 받더라도 왕의 밀서를 보인 후에 달게 받겠다고 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이를 듣지 못했고[22] 뭐라고? 안들려 안우는 밀서를 보이기도 전에 살해당한다. 이 때 공민왕은 전공을 참작하여 안우 등이 정세운을 살해한 것을 용서한다는 조서를 작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우가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이 조서는 이방실과 김득배를 체포하는 자는 3등급을 승진시킨다는 조서로 바뀐다. 이쯤 되면 알 법 하지 않은가? 이방실은 이를 모르고 행재소로 오다가 살해되었고 김득배 역시 도망치다가 이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이를 통해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단연 공민왕이었다. 전쟁의 공훈을 세운 무인 세력 집단과 총 사령관이었던 정세운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자들을 일거에 쓸어버리고, 곧이어 김용까지 흥왕사의 난을 빌미로 처형시킨 것이다. 설령 공민왕이 일을 주도하지 않았다 해도 이 사단의 원인이 그의 불안한 인재 활용 때문임은 변치 않는다. 고려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천성이 의심이 많고 잔인해서 심복대신이라도 권세가 커지면 의심해서 죽였다.

고려사

조선조 들어서도 태조를 처음 등용했다는 이유로 전 왕조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사당까지 지어줄 정도로 공민왕을 우대했던 조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천성을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면 알 만하다.지독하게 잔인한 왕이었으니 기철같이 원나라 빽덕에 입지가 두터운 신하도 숙청을 면치 못했던거겠지더군다나 저 고려사는 세종대왕이 불공정한 평가를 내릴 필요가 없다고 하여 몇 번이나 고친 것이다.[23] 군왕으로서 적절한 인선과 리더십이 얼마나 필요한지 잘 알려주는 부분.

7 현대 매체 속의 공민왕

"공민왕은 영웅의 모습을 갖춘 왕인 동시에 로맨티스트이자 최고의 예술가였다. 모든 것을 지닌 사람이여서 매력을 느꼈다."

2005년 신돈(드라마)에서 공민왕을 열연한 정보석
천산대렵도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지녔던 군주이며, 특히 그림에 뛰어나서 대표작으로 천산대렵도가 유명하고 아끼는 신하의 초상화도 직접 그려줬다고 한다. 이런 예술적 감각과 반원정책으로 대표되는 개혁군주라는 이미지와 노국공주와의 로맨스, 극적인 삶 등 여러 매력적인 요소 때문인지 한국사에서 인기가 많은 왕 중 한 사람이다. 그 인기를 반영하듯 사극에서도 몇 번 등장했는데

  • 대표적으로 개국에서 공민왕을 연기한 임혁신돈에서 공민왕을 연기한 정보석이 열연한바 있다. 특히 신돈의 공민왕은 공민왕의 광기어린 모습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영화 <쌍화점>의 고려왕(주진모)도 공민왕이 모티브가 된 캐릭터다.[24]
  • 신의에서는 류덕환이 재위 초기의 공민왕을 맡았다. 이 드라마에서의 모습은 공민왕(신의)를 참고할 것. 비슷한 시기에 방영한 대풍수에서는 류태준이 공민왕을 연기하였는데, 고려사의 기록대로 노국공주가 사망한 후에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며 삐뚤어지다가 급기야 자제위의 홍륜을 상대로 남색을 하게 된다. 그런데 노는 모습이 상당히 변태스럽다는 평이 있다(...)[25] 그러나 결국 이인임의 사주를 받은 홍륜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김명수가 역을 맡았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신하들의 정쟁에 모든 의욕을 잃고 공주의 영전 건설에만 몰두하는 폐인으로 등장. 신하들 가운데 믿을 사람이 없어 자제위를 친위세력으로 두었고 의심증이 있어 믿었던 신하들을 도륙했던것은 역사와 같다. 그러나 난행을 일삼다가 살해당한 정사와 달리 태후와 정도전의 일갈에 다시 한 번 희망을 품어 이인임을 버리고, 정도전에게 자신의 뜻을 담은 그림을 하사하며 대궐로 다시 들어가는 것을 모니노와 약속하는 등 정사를 바로 잡을 의지를 다졌으나, 내쫓길 위기에 처한 이인임의 모략으로 홍륜에게 살해되었다.[26]
  • 코에이징기스칸 4에서 파워업키트 추가 시나리오 4번(1370년)에서 고려 국왕으로 등장하는데 공민왕 말년이라 그런지 능력치는 다소 수수한 편이다. 아마 게임 제작시 공민왕 말년의 난행을 감안하여 수수한 능력치를 준 듯 하다. 다만 생몰연도 정도는 고증해 주지... 수하 장수로 이성계최무선이 있는데 이성계 때문에 그럭저럭 게임을 이끌어 갈 수 있지만, 어쩐 일인지 화포병을 편성할 수도 없고[27] 기본 병과인 경보병, 단궁병으로만 초반을 이끌어야 하는 데다가, 주변의 명과 무로마치 막부도 강적인지라 쉽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노국공주는 1365년에 이미 사망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여기서는 노국공주가 생존해 있다! 하지만 출신이 고려 출신으로 되어 있다[28].

파킷에서 해당 시나리오를 플레이하면 명과 무로마치 막부의 파상공세가 펼쳐져서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의 막장 상황을 간접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먼저 명과 동맹을 맺고 무로마치 막부에 전력을 집중하는 게 정석적인 공략법[29]. 더욱이 명의 북경이 문화도가 높아서 교역을 통해 고려의 문화도를 올리기 쉽고, 명이 치라는 북원은 안 치고 남경에서 다자이후를 계속 공격해 대기 때문에 다자이후의 방어도가 약해진 틈을 타 어부지리로 점령할 가능성도 있어서 더욱 이득이다. 후계자는 고려의 문화치와 공민왕의 능력으로는 좋은 왕자를 생산하기가 어려우므로 그냥 공주를 이성계에게 시집 보내 사위 무장으로 삼는 게 무난하다.

  • 그나마 게임 원조비사(징기스칸 3: 고려의 대몽항쟁)에서는 정치 B 전투 C 지휘 B 매력 A로 쓸만해서 대부분 시나리오 3에서 충숙왕을 일부러 죽이고 공민왕을 군주로 삼아서 플레이했다. 공민왕을 부하로 삼아서 플레이를 해봐도 꽤 잘 하는 편이다.
  1. 이성계가 종묘를 창건할때 관내에 있던 어진이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어진 항목 참조. 관복이 송나라 것에 가까운데 실제로 익선관을 쓰는 형식의 명나라 관복은 우왕 때나 들어왔다.
  2. 어릴때 이름
  3. 몽골어로 바얀은 '풍요로운' 이란 뜻을, 테무르는 '철(鐵)'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4. 참고로 아버지도 충선왕의 차남으로 강릉대군이었다.
  5. 이를 "뚤루게"라고 부른다.
  6. 먼저 원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했고 원의 풍속인 변발호복을 폐지했다. 또한 기황후의 인척임과 동시에 고려 내에서 가장 세력이 큰 친원파 무리들 중 하나이자 갖은 전횡을 일삼던 기철 일당을 중심으로 한 부원배 세력의 숙청에 나섰고, 기철의 동생들을 빼곤 아내와 어린 자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였다. 전민변정도감까지 세워 기철 일당이 점탈했던 인구와 토지를 재빠르게 정리했으며,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라는 새로운 지식인 계층을 등용 및 육성하면서 의욕적인 개혁정책을 펼쳐 나갔다. 성적 면에서도 스스로를 절제했으며, 신하들에게도 예우를 갖추었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다는 평가도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부원배를 처단하면서 공민왕이 들었던 명분 중에서는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이 정한 원칙을 기철 일파가 어겼다'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즉 쿠빌라이가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아 직접통치를 하지 않고 독자적인 내정 운영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것을 근거로 삼아, 고려를 원에 들어다 바치려는 책동을 하던 부원배들을 다름 아닌 원나라 황제의 이름으로 제거해 버린 것이다.
  7. 征東行中書省. 정동행성이라고도 불리며 일본 정벌을 위해 일본정벌을 단행하면서 1283년과 1285년에 각각 설치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죽은 뒤 일본정벌이라는 본래의 목적이 없어지면서 원나라에 하정사(賀正使)를 파견하는 의례적인 기구로 바뀌었다가 1299년에는 다시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기구로 변하였다.(정보출처 : 두산백과)
  8. 여담이지만 유럽은 오스만 제국의 팽창이나 흑사병의 유행으로 정신이 없었다.혼란하다 혼란해
  9. 공민왕은 원래 말을 탈 줄 몰랐는데 그래서 이 무렵에 노국대장공주에게 승마 법을 배웠다고 한다. 애마부인? 또한 놋다리 밟기의 전승은 안동 피난으로 거슬러간다.
  10. 실제 신돈은 집권 후 곧 최영부터 좌천시켰다.
  11. 공민왕릉을 보면 노국공주와 합장되어 있는데, 능 가운데 노국공주의 봉분과 통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놓는 등 죽어서까지 노국공주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공민왕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12. 여말선초의 인물들중 이 시기에 벼슬을 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공민왕에게 신돈을 내치라는 간언을 했다가 귀양가거나 아니면 파직당했다는 기록이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정도로 저항은 엄청났다. 하지만 민중들에게 신돈은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13. 신돈의 실각과 함께 사형당한다.
  14. 신돈에 대항하다 귀양갔다.
  15. 참고로 우왕 때 세상을 떠난 충혜왕의 서자 왕석기는 이 당시 아예 존재가 알려져 있지도 않았다.
  16. 변소라고해서 단순히 시골에서 볼 수 있는 낡은 화장실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고대의 변소는 생각보다 규모가 꽤 컸고 단순히 화장실 용도로만 국한되지 않고 탈의실의 기능도 겸했고 바깥에서 말하기 힘든 은밀한 사실을 고하거나 남녀간의 정사를 치르기도 했다. 그래서 삼국지에서 이적이 화장실에 간 유비에게 암살음모를 알린다거나 한복이 지우개칼로 자살하는 얘기가 나온다.
  17. 이인임의 오기로 보인다. 아마도 임과 인이 발음이 비슷해서 잘못들어서 오기됐을 가능성이 있다.
  18. 이성계의 휘는 단(旦)이며 중국에서는 이인인과 그의 아들 단旦의 짓이라고 적고 있다.
  19. 이 부분은 조선시대 사관의 의도적인 오기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즉 폐신을 시켜 후궁을 강간하게 한 다음 입막음을 위해 죽이려한 게 아니고 단지 사통한 자를 죽이려고 했다는 게 정설이다.
  20. 오죽하면 나중에 신돈이 등용될때 신돈이 "전하께선 참소하는 말을 잘 믿으신다고 들었습니다"라고 할 정도
  21. 대표적인 예가 서울 창전동에 위치한 공민왕 사당
  22. 화성 행궁처럼 왕이 정기적으로 들러 머무는 공식적인 행궁도 아니고 임시로 피란차 자리잡은 행재소다. 즉, 궁궐만큼 크지도 않은, 인근에서 가장 크고 좋은 건물 정도라는 것. 조선시대 가옥이라 일대일 비교는 어렵지만 민속촌에라도 들러서 한옥의 구조를 살펴보자. 그 정도 소란이 났는데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더군다나 안우는 공민왕을 세 번이나 외쳐가며 불렀다고 한다.
  23. 하지만 이것에도 한가지 유의할점이 있는데 세종대왕이 분명 불공정한 평가는 내릴 필요없다고 새로 적으라고 하긴 했지만 번번히 마음에 안들어서 고치라고 했고 결국 마지막에 완성된 건 세종대왕이 죽고난 다음이다.즉,마지막 수정본은 세종대왕이 보지도 못했다는 말.이게 완전히 공정하다고 확단하기는 힘들고 세종대왕이 검증한 버전인것도 아니다.생전에 완성되었다면 또 수정하라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그렇다 해도 일단 처음에 비해서 많이 공정해진 것은 사실일 것이다.
  24. 다만 어디까지나 공민왕이 모티브인 것이지, 영화 속 고려왕이 절대 공민왕 본인은 아니다. 그런데 선전물에선 공민왕과 자제위언급이 나온다. 대체역사물이 아니잖아!!! 수위가 높아서 고증비판은 전혀 없으니..
  25. 역할 바꾸기 놀이를 해서 홍륜에게 굽실거리며 술을 따라주거나 욕을 들어먹으면서 이를 즐기는 듯한 묘사가 나온다.
  26. 드라마에서 홍륜에게 살해당하기 전에 노국공주의 환청 혹은 영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공민왕은 이 목소리를 듣고 공주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음에 홍륜이 들어와 칼을 겨누자 크게 소리치나 결국 살해당한다.
  27. 사실 고려에서 화포가 실전에 투입된 건 우왕 치세부터니 완전히 틀린 묘사라고만 보기는 힘들지만. 코에이에서 별로 염두에 둔 것 같지도 않다
  28. 이 게임에서 장수들은 문화에 따라서 병종등에 추가 능력을 얻는 시스템이었다. 예를 들어서 서유럽 문화권 출신이면 십자군을 지휘할 때 능력치가 상승하는 식이다. 대부분은 자신의 문화권이 정해져 있고, 가상 장수들은 등용된 도시의 문화도에 따르는데, 문제는 왕의 자손들은 왕의 출신문화와 왕비의 출신문화 가운데서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노국대장공주를 몽골문화로 설정하면, 태어나는 왕자가 몽골문화로 탄생해서 몽골기병에 플러스 효과를 받는 상황이 일어난다. 이런 점을 고려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냥 몰라서 그럴 수도 있고.어차피 아이도 없었는데
  29. 무로마치 막부와 동맹을 맺는 선택지도 있는데, 이 게임에서 고려와 명은 문화권이 같지만, 일본과는 문화권이 달라서 동맹 기간 및 성공 확률에도 패널티가 있다. 가끔 컴퓨터의 무로마치 막부가 고려와 먼저 동맹을 제의하는 경우도 있으니 상황 보고 잘 판단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