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에몽 1세

1 개요

로베르 기스카르의 장남이며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주요 지도자이자 안티오키아 공국의 지배자가된 인물.

2 행적

2.1 유, 청년기 시절

보에몽은 로베르의 첫 아내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큰 키와 빼어난 외모 강인한 육체로 촉망받았으며. 뛰어난 검술 실력으로 명성이 높았다.

2.2 동로마와 맞서다

로베르는 남부 이탈리아의 패권을 잡았고 곧이어 교황의 막강한 후원 하에 남부 이탈리아의 탈환을 노리던 동로마 제국과 맞서 싸운다. 보에몽은 아버지의 군대 일부의 지휘권을 하사 받아. 뛰어난 전사로 명성을 드높였다. 하지만 알렉시오스 1세가 제국을 재정비하고 총력을 다하자 보에몽과 그의 아버지의 군대는 패배를 거듭해갔고 1083년 보에몽과 그의 군대는 동로마 군에 격파당하고 보에몽은 터덜터덜 시칠리아 왕국으로 귀환한다.

2.3 로베르의 죽음

곧이어 1085년 로베르가 죽자 노르만의 상속법에 의해 그의 이복 동생인 루제로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받았고 보에몽은 이것에 제대로된 항의도 해보지 못한채 무일푼으로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간다.

2.4 제1차 십자군 전쟁

이대로 허송 세월이나 보내다 죽을것만 같던 1095년 십자군 전쟁이 발발한다. 이 기회를 포착한 보에몽은 병력을 모아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다. 또한 이 전쟁에서 여러 전공을 세운 보에몽은 사실상 지도자가 되어 십자군을 자유자재로 운용하기 시작한다.

2.5 안티오키아 공국을 차지하다

안티오키아 공략전에서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의 정복자라는 영광을 탐내며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레몽과 대립하였다.

보에몽은 레몽의 단기전에 반대하고, 안티오키아 내부에 첩자를 심은 뒤, 공성전을 시도했다. 허나 식량 사정이 악화되자, 십자군은 약탈을 위해 자주 군세가 분산되었고, 안티오키아 방위군의 습격을 받아 피해를 자주 입게 된다. 이와중에 비잔틴 제국 황제의 대리인인 타티시우스가 비잔틴 제국으로 돌아가버렸고, 보에몽은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에게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돌아갈 것이라고 협박해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의 협조를 구한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를 구원하려는 투르크의 증원군을 격파하고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내고, 안티오키아 내부의 피루즈를 매수한다.[1] 피루즈는 보에몽에게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맡기고 도시를 내어줄 것을 약속했다. 보에몽은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지금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강조한 다음에 만약 자신이 안티오키아를 단독으로 점령하면 안티오키아의 지배권을 자신에게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대부분의 십자군 지휘관들이 동의했지만 레몽은 서약을 준수해야 한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상황이 나빠지자 그도 동의했다.

1098년 6월 3일 아침 십자군은 짐짓 카르부카를 상대하러 떠나는 것처럼 동쪽으로 떠났고 안티오키아인들은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그날 밤 십자군들은 즉각 피루즈가 열어준 문을 통해 안티오키아를 들이쳤다. 보에몽의 병사들이 안티오키아 내부로 진입했다. 내부의 요새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가 몇시간만에 함락됐다.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십자군은 투르크인들을 보이는 족족 모조리 죽였고 이에 휘말린 아르메니아인들과 정교도들도 많이 죽었다. 십자군은 실로 엄청난 전리품을 얻어 보급 부족을 해결했다. 안티오키아의 성주인 야기 시얀은 달아나다가 아르메니아 주민들에게 잡혀 죽었고 아르메니아인들은 그의 목을 베어 십자군에게 바쳤다.

2.6 실패와 죽음

3 기타

4 관련 문서

  1. 피루즈가 어째서 보에몽의 매수에 넘어걌느냐에는 말이 많았는데 그의 아내가 투르크인 상관과 바람이 나서 그렇단 말도 있고 이슬람 교도들에 치를 떤 나머지 도시를 넘겨준 것이란 말도 있다. 또 다른 말론 그가 곡물을 횡령한 죄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