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십자군 원정

역대 십자군 원정
사건 민중 십자군제1차 십자군 원정제2차 십자군 원정
벌어진 일대망의 첫 십자군성지탈환, 십자군 국가들의 성립처참한 실패, 십자군 국가들의 안보공백 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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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십자군 원정도

말 그대로 십자군의 본대의 대망의 첫번째 원정.

전쟁 기간은 1096년부터 1099년까지 약 3년 간. 동로마 제국 영토를 지나 아나톨리아를 가로지르며 투르크족 분파들을 격파하고 시리아로 진군하여, 당시 시골 마을 하나까지 왕국을 자처할 정도로 분열돼 있던 시리아를 어렵지 않게 제압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이후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크 공국, 에데사 백국, 트리폴리 백국 등의 그리스도교 십자군 국가를 세웠다.

1 과정

1.1 콘스탄티노플로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재위 1088~1099)의 선동(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으로 유럽의 유력한 제후들이 십자군에 대거 참가했다. 대표적인 것이 하 로렌의 공작인 부용의 고드프루아, 프랑스 국왕의 동생인 베르망두아의 위그, 타란토의 보에몽, 툴루즈의 백작 레몽 등이었다. 이들의 지휘관은 르퓌의 주교 아데마르였다.

맨 처음 출발한 것은 베르망두아의 위그였다.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의 차남인 그는 1096년 8월에 출발하여 바리 항구를 거쳐 아드리아 해를 건너려 했다. 하지만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그의 배는 난파되었고 거지꼴로 뒤라키움 항구에 도착했다. 뒤라키움(두라초)의 통치자 요한네스 콤네누스가 그를 맞이했다. 과거 충성심 부족한 서구 용병들과 동로마 제국인 특유의 오만함 때문에 동로마 제국은 서유럽인들을 잘 믿지 않았다. 위그는 동로마인들이 자신을 경계하는 것에 오히려 만족했지만 그의 부하들은 위그가 포로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봤다. 알렉시우스 황제는 마누엘 불티미테스 제독을 파견하여 위그를 콘스틴티노플로 데려왔다. 황제는 위그를 극진하게 대접하고 앞으로 그들이 정복하는 모든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양도할 것이며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 군사도 적고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보다 먼저 와서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던 위그는 그 요청을 수락했다. 하지만 알렉시우스가 위그를 조종하려 한 사실에 서유럽인들은 크게 분개했다.

한편 고드프루아는 막대한 재정 손해를 감수하고 십자군에 참여했다.[1] 그는 자신의 동생인 보두앵을 민중 십자군 때문에 십자군에게 날이 선 헝가리 왕 칼만에게 인질로 보내 헝가리의 통행권을 얻어냈고[2] 민중 십자군이 폐허로 만든 베오그라드를 거쳐 베르망두아의 위그 다음으로 빠른 1096년 12월 23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십자군 후발대가 약탈을 벌였지만 뒤에 벌어질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알렉시우스 황제는 고드프루아를 황궁에 초대하여 위그와 같은 요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고드프루아는 위그의 전례를 보고 아예 황제의 초대를 거절했다. 이미 신성로마의 황제에게 충성을 바친 자신에게 또 다른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하는 알렉시우스에게 고드프루아는 크게 분노했다. 황제는 위그를 보내 고드프루아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알렉시우스는 만약 충성 서약과 영토 양도 서약을 하지 않으면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는 것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고 통고했고 고드프루아가 요지부동으로 거부하자 십자군에게 주던 식량을 끊었다. 분노한 고드프루아는 군사들을 데리고 콘스탄티노플 교외를 약탈했고 알렉시우스는 이에 놀라 다시 식량을 제공했다. 3달 간 기다려도 황제가 해협을 건너는 것을 도와주지 않자 고드프루아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의 방비는 매우 굳건했고 동로마군과 싸워 고전한 고드프루아는 황제와 타협했다. 1월 20일에 그는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영토를 양도할 것을 약속한 다음에 보스포루스를 건넜다.

악명높은 로베르 기스카르의 아들인 40세의 보에몽은 1097년 4월 9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그는 아버지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아드리아 동편의 두라초와 그리스를 상속받았지만 동로마와 베네치아 연합군은 역병으로 개발살난 노르만 군대를 박살내고 보에몽을 이탈리아로 축출한 상태여서 그는 빈털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과거 동로마의 영토였던 남부 이탈리아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마련했고 십자군 선포 직전까지 아말피 시를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십자군의 소식을 듣자 보에몽은 아말피 원정을 중단하고 허겁지겁 병력을 급조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달려왔다. 한때 동로마의 적이었던 그를 동로마 사람들은 적대적으로 바라보았다. 보에몽은 자신이 더 이상 동로마의 적이 아님을 강조하며 병사들을 엄격히 단속했고 황제의 초청을 받아 위그와 고드프루아가 수락한 서약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동로마군 아시아 총사령관에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알렉시우스는 외교적인 수사로 그것을 교묘히 거절했고 보에몽은 곧 보스포루스를 건너서 4월 26일 소아시아의 다른 십자군들과 합류했다.

55세의 레몽 백작은 남프랑스의 13개주를 지배하는 대귀족이었는데 십자군 창설 연설에 감명받아 전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부인과 함께 출정했다. 총사령관인 아데마르와 동행한 그의 군세는 어마어마했고 동로마군이 두라초에서부터 그들의 군세를 감시했다. 하지만 그는 육로를 고집한 탓에 발칸반도에서 세르비아인들의 공격에 많은 피해를 입었고 레몽과 그 부하들은 매우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설상가상으로 동로마군의 오인 공격에 아데마르 주교가 부상당하는 사건까지 터졌다. 아데마르는 테살로니카에 머무르면서 와병했고 십자군들은 먼저 출발했다. 레몽은 불과 몇주 전에 보에몽이 들렀던 도시 루사가 자신들에게 팔 식량이 없다는 것을 알자[3] 도시를 파괴했다. 놀란 황제는 급히 레몽을 콘스탄티노플에 불렀고 그는 1097년 4월 21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그는 알렉시우스의 서약 요구를 매우 단호하게 거절했고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의 중재도 거부했다. 레몽은 알렉시우스에게 직접 동로마 병사들을 데리고 십자군으로 참전한다면 서약하겠다고 했고 알렉시우스는 "그럴 의사가 있지만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란 말로 레몽을 회유했다. 결국 레몽도 좀 더 완화된 서약을 맺고 소아시아로 향했다.

한편 가장 작은 규모의 십자군이자 가장 늦은 십자군은 노르망디의 로버트, 블루아의 스테판, 플랑드르의 로베르가 이끄는 십자군이었다. 로버트는 노르망디 공국을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루퍼스에게 담보로 잡고 1만 마르크를 받아 십자군을 조직했다. 블루아의 스테판은 십자군을 내키지 않아했지만 그의 아내인 정복왕 윌리엄의 딸 아델라는 남편의 십자군 참가를 독촉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십자군에 합류했다. 플랑드르의 로베르는 그의 아버지가 알렉시우스와 친분이 깊었던 관계로 출정했다. 이들 십자군은 수는 적었어도 정예병들이었는데 우르바노 2세를 만나 강복을 받았고 아드리아 연안에 이르렀다. 배 1척이 침몰하여 병력 손실을 입었지만 그외의 손실은 없이 그들은 1097년 5월에 콘스탄티노플에 닿았다. 그들은 황제의 환대와 콘스탄티노플의 화려함에 넋을 잃었고 손쉽게 충성을 맹세했다. 특별 허가를 받아 콘스탄티노플을 잠시 관광한 이들은 곧 소아시아를 건너 다른 십자군과 합류했다.

1.2 니케아 공략

십자군은 룸 술탄국의 수도인 니케아를 1차 목표로 삼아 진군했다. 이미 민중 십자군을 손쉽게 쳐부순 술탄 킬리치 아르슬란은 십자군을 우습게 봤다. 설상가상으로 십자군 본대엔 패장인 은수자 피에르가 합류한 상태였으니 기껏해야 전의 공격의 시즌 2 정도로 본 것이다. 그의 막료들의 의견도 비슷했다. 이에 술탄은 십자군이 오는 것을 알고도 수도를 비우고 다른 투르크족을 상대하러 갔다. 말라트야에서 투르크족을 상대하던 술탄은 지난번의 오합지졸이 아니라 엄청난 숫자의 정예병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했다. 하지만 이대로 말라트야를 경쟁자인 다니슈멘드에게 넘겨줄 수도 없었다. 이에 킬리치 아르슬란은 다니슈멘드를 만나 로마인과 그 용병들은 투르크의 공동의 적이란 사실을 주지시켜 명예를 중시하는 그의 성향을 이용하여 휴전을 맺고 니케아로 급히 돌아왔다. 그가 니케아를 구하기 위해 허겁지겁 돌아왔을 때는 이미 십자군이 니케아를 포위한 후였다. 술탄은 니케아 남쪽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십자군은 5월 21일에 룸 술탄국의 군대를 개발살냈다. 킬리치 아르슬란은 막대한 재화에 자신의 임신한 부인과 가족들까지 니케아에 두고 달아나야 했다. 어차피의 그의 권력기반은 도시가 아니라 충성스러운 유목민족들이었다. 그는 수도를 코니아로 옮겼고 니케아 수비대에겐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라는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가망이 없어진 것을 깨달은 니케아 수비대는 알렉시우스 황제에게 강화를 요청했다. 알렉시우스는 능수능란한 외교로 수비대의 간담을 서늘케 한 다음에 수비대에게 니케아 시민들과 수비대의 안전을 보장하며 십자군을 니케아에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밤을 틈타 니케아의 항구에 동로마 제국 군함들이 정박했고 십자군은 니케아 성벽에서 휘날리는 동로마 깃발에 아연실색했다. 알렉시우스가 십자군의 노고를 치하하며 많은 재화를 하사했음에도 십자군들은 황제에게 속았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킬리치 아르슬란의 아내는 스미르나를 지배하는 그녀의 오빠에게 보내졌다. 그녀는 다시 킬리치 아르슬란의 곁으로 갔다. 한편 동로마군은 서둘러 스미르나를 비롯한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선을 장악했다.

1.3 안티오키아 공략

6월 26일 십자군은 안티오키아로 향했다. 더운 아나톨리아의 고원은 행군하기 워낙 고된 곳이었는데 룸 술탄국의 패잔병들이 청야 작전을 벌이면서 상황은 더욱 열악해졌다. 킬리치 아르슬란은 숙적 다니슈멘드와 동맹을 맺고 지하드를 선포하여 십자군에 맞서려 했다. 이에 많은 투르크 부족이 호응했다. 십자군이 출정했다는 소식을 들은 킬리치 아르슬란은 부하들을 이끌고 돌라이온에 매복했다. 7월 1일 킬리치 아르슬란은 보에몽이 지휘하는 소수의 십자군의 선봉이 십자군의 본대인 것으로 착각하고 그들을 섬멸하기 위해서 기습을 벌였다. 이윽고 레몽과 고드프루아가 본대를 이끌고 나타나서 술탄의 병력을 개발살냈고 킬리치 아르슬란은 막대한 재물과 보급품을 두고 다시 패주해야했다. 뒤늦게 시리아에서 술탄을 돕기 위한 기병대가 달려왔지만 전세는 완전히 기운 후였다. 이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이슬람 전체가 충격을 받았다. 이윽고 1097년 10월 21일 보급품 부족으로 처참한 몰골이 된 십자군은 안티오키아의 성벽이 보이는 곳에 당도했다.[4]

이윽고 4만명의 십자군이 유서깊은 안티오키아[5]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안티오키아는 인구 4만에 거대한 성벽과 4백개의 망루를 갖춘 대도시였고 1085년에 투르크가 점령했다. 20만이 넘게 살았던 과거에 비하면 초라했지만 그래도 인상적인 도시였다. 안티오키아의 성주인 야기 시얀은 40년간 셀주크 투르크를 섬겨온 사람이었는데 그의 휘하엔 6~7천 명의 병력 밖에 없었다. 게다가 가장 가까운 알레포의 지배자 리드완과 그의 사이가 좋지 않아 가까운 곳의 무슬림들의 지원을 바랄 수도 없었다. 이건 비단 안티오키아의 문제가 아니라 전 이슬람 세계의 문제였다. 사실상 모든 도시들이 독립 왕국이나 다름없었고 명목상의 군주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시늉을 할 뿐이었다. 이는 무슬림들이 십자군에 거의 대응하지 못한 이유였다. 하지만 안티오키아는 점령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였고 도시 내부에 가꾼 농지와 채소밭에서 식량과 식수를 얻을 수 있었으며 외부연락이 쉬웠다.

레몽은 무슬림 지원군이 오기 전에 도시를 점령해야 한다는 전략적인 이유와 안티오키아의 정복자란 영광을 얻고자 하는 명예욕이 동시에 반영된 기습 공격을 주장했지만 안티오키아의 정복자가 되고 싶었던 것은 매한가지인 보에몽은 이를 반대했다. 거대한 안티오키아는 단기간에 점령하기도 어려웠고 기습 공격이 성공할 시에 가장 많은 병력을 갖춘 레몽이 안티오키아의 지배자가 될 것은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도 많이 지쳐 있어기에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도 단기간 함락이 어려울 것이라고 동의하여 십자군은 1097년 10월 21일부터 1098년 봄까지 긴 공성전을 벌였다.[6]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에 기독교도들이 많다는 점을 이용하여 첩자들을 심어 도시의 사정을 알아내는 한편 야기 시안이 10년 전에 이 도시를 점령한 방법인 매수를 통해서 도시를 점령하고자 했다. 하지만 십자군 진영에서 십자군 정보를 알려주는 첩자들도 있었기에 야기 시얀은 십자군이 당장 공격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무슬림들은 대담해졌고 여러차례 반격을 시도했다. 다마스커스에서 지원군이 온다는 소문에 그들은 더욱 고무되었다. 결국 공성기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공성 기간 내내 식량 부족으로 십자군은 큰 고통을 겪었다. 맨 처음엔 식량이 풍족했지만 어디까지나 빨리 도시를 점령한다는 가정 하에서였다. 겨울을 나기엔 식량이 터무니없어 직었다. 기사들은 자신들의 말을 잡아먹었고 거름을 뒤져 곡물을 얻었으며 이때 투르크인들의 시체를 먹기도 했다. 안티오키아 근처의 성 시메온 항구로 제노바 함대의 보급품이 들어왔지만 역부족이었다.

십자군들은 주변을 약탈하며 식량을 보충하려 했다. 하렝크 요새를 점령하고 투르크인 2천명을 학살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변을 쓸어버렸으니 약탈 반경이 점점 넓어질 수밖에 없었다. 안티오키아의 군대가 걸핏하면 반격을 시도했기에 거대한 누대가 세워져서 무슬림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다가 첫번째 중대한 위기가 닥쳤다. 보에몽이 2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기습을 감행한 틈을 타서 야기 시얀이 12월 29일 대대적인 습격을 감행한 것이다. 하지만 레몽은 자신의 노련함을 바탕으로 투르크 군대를 개발살냈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안티오키아의 일부를 점령했지만 너무 지친 나머지 철수했다. 한편 보에몽은 안티오키아를 구하려던 증원군의 공격을 받았다. 플랑드르 군사들이 패하면서 위기가 엄습했지만 보에몽은 적시에 예비대를 투입하여 투르크 증원군을 섬멸했다. 증원군이 섬멸되면서 사기가 올라갔지만 문제는 원래 목적인 식량 확보는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식량 사정은 자꾸 악화되었다. 키프로스와 제노바의 지원은 부족했고 아데마르 주교가 정신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흘간 단식을 선포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고 안티오키아의 방어자들이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를 성벽에 매달아 십자군을 조롱하기도 했다. 거기에 투르크 증원군이 또 온다는 소식이 도달했다. 십자군에 합류한 황제의 대리인 타티시우스도 십자군을 버리고 황제에게 돌아가버렸다. 보에몽은 이 상황을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적절히 이용했다. 그는 타티시우스를 비난하면서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돌아가겠다고 다른 십자군들을 위협했다. 결국 십자군 지휘관들은 그에게 투르크 증원군을 물리칠 임무를 맡겼다. 보에몽은 하렝크에서 25km 떨어진 지점까지 도달한 투르크 증원군을 기습을 통해 섬멸했다. 골목에 몰려 있던 투르크 대군은 매우 당황했고 곧 공포에 사로잡혔다. 십자군의 맹공에 2천명이나 되는 투르크인이 전사했고 결국 와해되어 달아났다. 하지만 이 승리에도 식량 상황은 여전히 나빴다. 하지만 슬슬 전세는 십자군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보에몽과 레몽이 함대가 내려놓은 보급품을 운반하던 중에 안티오키아 군대가 기습했는데 십자군은 용맹히 반격하여 투르크 군대를 무찔렀다. 겁에 질린 안티오키아 수비대는 성벽을 닫았고 미처 들어가지 못한 1500명의 투르크인들이 무참하게 죽었다. 공성자재들까지 받은 십자군은 본격적으로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다른 위협이 다가왔다. 1098년에 접어들어 파티마 왕조의 군세가 셀주크 투르크를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점령했는데 예루살렘에서 축출된 투르크인들은 다마스커스, 알레포, 모술로 이동했다. 모술의 아타베그인 카르부가(카르부카)는 투르크인들을 규합하여 안티오키아를 구원하기 위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에 십자군은 매우 초조해졌다. 많은 탈영병이 발생했으며 심지어 은자 피에르도 탈영하려다가 잡혀왔다. 블루아의 에티엔은 그냥 십자군을 이탈해 콘스탄티노플로 달아났다.

한편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의 수비대 대장인 아르메니아 기독교도 피루즈를 매수하는데 성공했다.[7] 피루즈는 보에몽에게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맡기고 도시를 내어줄 것을 약속했다. 보에몽은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지금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강조한 다음에 만약 자신이 안티오키아를 단독으로 점령하면 안티오키아의 지배권을 자신에게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대부분의 십자군 지휘관들이 동의했지만 레몽은 서약을 준수해야 한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상황이 나빠지자 그도 동의했다. 1098년 6월 3일 아침 십자군은 짐짓 카르부카를 상대하러 떠나는 것처럼 동쪽으로 떠났고 안티오키아인들은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그날 밤 십자군들은 즉각 피루즈가 열어준 문을 통해 안티오키아를 들이쳤다. 보에몽의 병사들이 안티오키아 내부로 진입했다. 내부의 요새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가 몇시간만에 함락됐다.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십자군은 투르크인들을 보이는 족족 모조리 죽였고 이에 휘말린 아르메니아인들과 정교도들도 많이 죽었다. 십자군은 실로 엄청난 전리품을 얻어 보급 부족을 해결했다. 야기 시얀은 달아나다가 아르메니아 주민들에게 잡혀 죽었고 아르메니아인들은 그의 목을 베어 십자군에게 바쳤다.

이 와중에 카르부가는 안티오키아가 아니라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의 손아귀에 들어간 에데사를 탈환하기 위해 3주나 지체한 상황이었다. 에데사 탈환에 실패한 카르부가는 곧장 안티오키아로 달려가 십자군들을 역포위했다. 이에 고무된 최후의 안티오키아 수비대들이 공세를 감행했으나 격퇴되었다. 카르부카는 십자군들을 굶겨죽이기로 작정하고 성을 포위했다. 절망적인 상황에 탈영병이 급증했고 설상가상으로 탈영한 블루아의 에티엔이 알렉시우스 황제가 이끄는 지원군을 찾아가서 다 끝났으니 안티오키아로 가지 말라고 했고 황제는 콘스탄티노플로 회군했다. 십자군:이런 개... 동로마의 지원을 손꼽아 기다리던 십자군들은 황제가 회군한 걸 알고 격노하여 날뛰었고 저 신의없는 배반자에게 지킬 서약 따윈 없다고 자신들이 점령한 영토를 동로마에 양도하다는 서약을 전부 찢어버렸다.

이때 피에르 바르톨로뮤란 자가 성 안드레아의 계시를 받아 롱기누스의 성창을 찾았다고 주장하여 성 베드로 성당을 뒤진 결과 정말로 성창을 찾아냈다. 아데마르는 피에르 바르톨로뮤의 자작극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다른 십자군들은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개선된 것은 없었고 카르부카에 협상단이 파견되기도 했다. 협상단은 은자 피에르가 이끌었는데 카르부카는 십자군의 제의를 거절했다. 십자군은 앉아서 굶어 죽을 수 없었고 성창의 반격으로 고무된 사기를 바탕으로 6월 28일 보에몽의 지휘 하에 고드프루아, 로베르, 베르망두아, 로버트, 아데마르, 탕크레드가 모든 병사들을 이끌고 선제 공격에 나섰다. 레몽은 와병 중이라 성의 수비를 맡았다. 카르부가는 십자군을 단번에 쓸어내기 위해 십자군이 성문을 열고 나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십자군의 숫자는 카르부가의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카르부가는 이미 십자군들이 거의 와해된 상태라고 생각하여 방심했던 것이다. 경악한 카르부가가 급히 강화를 요청했지만 대번에 씹혔고 카르부가의 진영을 향해 돌진했다. 카르부카는 매복 작전을 통해 십자군을 섬멸하려 했지만 보에몽은 매복을 예상하고 있어서 제때에 예비대를 투입했다. 투르크군은 서서히 밀렸다. 여기서 전세가 기적적으로 뒤집혔다.

카르부가를 따라 온 아미르들은 가뜩이나 카르부가가 이 싸움에서 이기면 절대적이 될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었고 독선적인 그에게 감정이 안 좋았는데 카르부가의 오판 때문에 힘든 싸움을 하게 되자 망설이지 않고 카르부가를 버리고 달아났다. 카르부카는 필사적으로 맞섰지만 자신이 이미 엄청난 패배를 당한 것을 알자 결국 달아났다. 카르부가의 군세는 개발살이 났고 그는 모술의 통치권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안티오키아의 패잔병들은 모든 것이 끝난 것을 알고 십자군에 항복했고 십자군은 그들을 살려주었다. 안티오키아에서 에데사에 이르는 지역이 십자군의 손에 들어왔다. 보에몽은 약속대로 안티오키아를 차지하려 했고 레몽은 거룩한 십자군 원정에서 세속적인 이유 때문에 남는다는 것을 말이 되지 않는다며 반대했지만 알렉시우스의 회군과 예루살렘으로 인도해달라는 요청 거부는 동로마에게 안티오키아를 반환할 명분을 궁색하게 만들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뜨거운 날씨 때문에 11월 1일까지 안티오키아에 머물렀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논의가 벌어졌다. 베르망두아는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것이면 서약을 충분히 이행한 것이라면서 회군하기 시작했는데 투르크인들의 습격으로 많은 병사를 잃었다. 위그는 3주간의 행군 끝에 7월 말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안티오키아를 회복했단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알렉시우스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그는 사태를 잠시 관망하기로 했다.

레몽과 보에몽의 대립은 격렬해졌다. 보에몽이 도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야기 시얀의 궁전은 레몽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유일하게 중재가 가능한 아데마르 주교가 장티푸스에 걸려 1098년 8월 1일에 사망했다. 그는 십자군의 종교 지도자 역할을 충실하게 했고 도릴라이온과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군사적 업적도 남겼다. 그의 죽음 이후 십자군은 구심점을 잃었고 지휘관들은 모두 원정에 매진했다. 보에몽은 실리시아 공략에 나섰고 고드프루아는 투르베셀과 라벤델, 로베르는 라타키아를 점령했다. 하지만 로베르는 라타키아에서 너무 학정을 펼쳐 쫓겨난다. 어쨌거나 아데마르의 사망 이후 십자군은 동로마에 더욱 적대적이 되었다. 그들은 황제에게 아데마르의 죽음을 알리면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요한네스를 이단으로 비난했다. 아데마르는 가톨릭과 지역 정교회의 조화를 주장했지만 그의 죽음 이후 십자군은 가톨릭을 강요했다. 레몽은 안티오키아를 보에몽이 차지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며 교황에게 직접 예루살렘으로 올 것을 요청했다. 물론 아무도 실제로 교황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진 않았다.

1.3.1 외전: 타르수스-에데사 공략

한편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과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는 터키 남부의 킬리시아의 아르메니아 기독교 국가들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본대에서 이탈했다. 탕크레드는 300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투르크군을 격퇴한 다음에 타르수스를 포위했다. 타르수스의 주민들은 대부분 기독교도라서 탕크레드를 반겼다. 보두앵이 2,500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나타나자 투르크 수비대는 달아나버렸고 탕크레드는 성에 입성하여 자신의 깃발을 걸었다. 그런데 보두앵은 자신에게 타르수스의 소유권을 넘길 것을 요구했다. 탕크레드는 분노했지만 보두앵의 병사가 더 많은 관계로 도시를 그에게 넘겨주고 떠났다. 그런데 탕크레드가 떠난 줄 모르고 탕크레드와 합류하기 위해 300명의 병사들이 나타나자 보두앵은 이들을 모두 학살했다. 보두앵의 측근들조차 경악한 사건이었다.

탕크레드는 투르크인들이 버리고 달아난 도시 마미스트라를 점령했는데 보두앵이 불로뉴의 기메네가 조직한 함대를 타고 그의 뒤를 바짝 쫓아왔다. 탕크레드는 보두앵의 입성은 거부했지만 그에게 식량은 제공했다. 하지만 타르수스를 잃었던 것을 수치로 여긴 탕크레드의 부하들 일부가 보두앵의 기지를 야습하기도 했다. 다행히 보두앵의 처자식이 아프단 소식에 보두앵은 타르수스로 돌아갔고 탕크레드는 알렉산드레타로 이동해 그곳을 점령했다. 결국 보두앵의 가족들은 병으로 죽었고 그들이 죽자 보두앵은 안티오키아로 이동해 십자군의 왼쪽 측면을 방어했다. 그런데 에데사의 지배자 토로스가 그에게 구원요청을 하자 보두앵은 본대를 역습으로 보호할 것이란 구실로 안티오키아를 이탈해 에데사로 떠났다. 1098년 2월 6일에 보두앵은 에데사에 도착했는데 그곳의 아르메니아인들은 보두앵을 크게 환영했다. 심지어 에데사의 군주 토로스는 보두앵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기까지 했다. 보두앵은 얼떨결에 에데사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8]. 보두앵은 에데사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자신을 공동 통치자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는데 머지않아 아예 그를 단독 통치자로 옹립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1098년 3월 7일의 쿠데타는 보두앵을 에데사의 단독 지배자로 만들어주었다. 보두앵은 전 지배자인 토로스를 살려주었지만 에데사 시민들은 토로스를 잡아서 찢어죽였다. 보두앵은 에데사에서 얻은 보물로 이웃한 사모사타 시를 샀고 그곳의 에데사인들을 풀어주어 명성을 드높이는 한편 아르메니아 공주와 결혼해 입지를 굳혔다. 그는 원칙적으로 에데사를 동로마 제국에 돌려줘야 했지만 그는 서약을 지키지 않았다[9].

1.4 예루살렘 공략

약속했던 11월 1일이 지나도 지휘관들이 안티오키아를 떠나지 않자 병사들이 분노하여 항의하기 시작했다. 11월 5일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회의에서도 지휘관들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병사들이 만약 합의하지 않으면 성벽을 부수겠다고 위협했고 결국 레몽도 고집을 꺾고 예루살렘으로 떠나야 했다. 레몽은 보에몽이 예루살렘 공략에 참가하면 그의 안티오키아 소유권을 인정하겠다고 했고 보에몽도 동의했다. 하지만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주변의 영토 확장에만 신경쓸 뿐 끝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 십자군은 레몽에게 성지에 도착하면 총지휘관의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하여 겨우 레몽을 달랬다. 하지만 그 총지휘관의 직함은 아무런 권위도 없는 직함이었다.

1099년 1월 13일에 이르러서야 레몽은 시리아로 출발했다. 시리아의 수많은 아미르들이 십자군과 협상하여 안전을 보장받았다. 다마스커스의 강대한 수니파 이슬람 영주들은 십자군이 시아파인 파티마인을 섬멸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즐거워했다. 파티마는 십자군에게 동맹을 맺어 투르크와의 공동 전선을 펼 것을 제안했지만 십자군은 거절했다. 파티마는 자신들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 조건으로 다시 동맹을 요청했다. 그들은 십자군이 성지 탈환을 원한다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5월 19일에 십자군은 베이루트 북쪽의 파티마 영토에 진입했다. 시돈, 티레, 하이파, 아크레가 동맹을 요청했고 십자군은 이를 수락했다. 6월 3일에 십자군은 야파에서 에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가도로 접어들었다. 또한 파티마 병사들이 동원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십자군 내부에서 예루살렘이 아니라 카이로를 먼저 점령해서 배후를 튼튼히 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왔지만 피라미드 따위를 차지하는 것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6월 6일 예수 그리스도의 고향인 베들레헴이 십자군들의 수중에 들어왔다. 6월 7일에 십자군은 몽조이 언덕에 올라 에루살렘이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 예루살렘 총독은 모든 기독교도를 추방하고 방어 준비를 갖췄다. 십자군은 6월 13일에 기습을 가했지만 수비대는 손쉽게 공격을 격퇴했다. 절망적 상황에서 파티마의 대군이 온다는 소식이 들렸고 십자군은 절망했지만 레몽의 수행원인 페트루스 데시데리우스란 사제가 아데마르의 영혼을 보았다고 주장하며 십자군들의 사기를 독려했다. 그리고 만약 에루살렘의 성벽을 한바퀴 돌면 9일 후에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십자군들은 순레자의 복식으로 예루살렘 성벽 주위를 돌기 시작하였고 예루살렘 수비대는 그 꼴에 황당해했다. 7월 13일에서 14일에 걸쳐 십자군은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했고 7월 15일에 고드프루아가 성벽의 일부를 점령했다. 로렌의 병사들이 성문을 열었고 십자군들이 성안으로 몰려들었다. 흔히 하는 말로 말고삐까지 피가 튀도록 사람을 죽였느니 예루살렘이 피바다가 되었느니 하지만 십자군은 재물에 욕심이 많았고 많은 숫자의 무슬림과 유대인들의 몸값을 받고 그들을 추방했다. 하지만 죽은 무슬림과 유대인이 많았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1.5 예루살렘 왕국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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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반트 지역 십자군 국가의 성립

원래대로라면 예루살렘은 동로마에 반환되어야 했고 교황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십자군들은 배신자인 동로마에겐 한치의 땅도 줄 수 없다고 버텼다. 따라서 예루살렘 총대주교나 교황 특사가 교황령처럼 예루살렘을 통치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아데마르는 죽었고 공교롭게도 예루살렘 총대주교도 며칠 전에 죽은 상태였다. 십자군의 성직자들은 새 총대주교를 선출할 것을 요구했지만 십자군들은 합의를 보지 못했다. 이집트에서 파티마의 대군이 오는 상황에서 십자군들은 여유가 없었고 일단 레몽에게 에루살렘의 왕관을 바치기로 했다. 하지만 레몽은 예루살렘 내부의 주요 요새들을 장악하고 있어서 예루살렘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이를 체면상 거절했는데 십자군들은 그와 밀당을 할 여유가 없었고 곧바로 왕관을 고드프루아에게 바쳤다. 고드프루아 역시 왕관을 거절했지만 이교도들로부터 도시를 지키겠다고 성묘의 수호자라는 호칭은 수락했다. 레몽이 격노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차지한 영토를 내놓을 수 없었다고 버텼지만 교회 회의를 통해 레몽은 다윗의 탑 요새를 알바라 주교에게 양도하고 철수했다. 레몽은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떠나 요단강 순레를 떠났으나 아스칼론까지 이집트 군대가 왔다는 소식에 다시 돌아왔다.

8월 11일 십자군은 십자군들이 예루살렘 안에 있을 것이라고 방심한 파티마 군대를 들이쳤고 이집트 군대는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 전투 이후 십자군들 대부분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때 4만이 넘던 병사들이 있었지만 이제 예루살렘엔 3백명의 기사와 2천명의 보병밖에 없었다. 다른 지휘관이라곤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 뿐이었다. 탕크레드는 티베리아스를 점령하고 자신의 영지로 삼았다. 이후 피사의 대주교 다임베르트가 교황 특사로 도착했는데 다임베르트는 예루살렘에 세속 지배자의 영토가 아니라 교황령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고드프루아를 몰아내려 했다. 그런데 고드프루아는 1100년 7월 18일 돌연 사망했다. 다임베르트에게 예루살렘을 넘겨줄 생각이 없던 고드프루아의 측근들은 급히 에데사의 보두앵을 불러 예루살렘 국왕에 즉위시켰다. 보두앵은 에데사 백작령을 자신의 사촌인 부르의 보두앵에게 맡기고 급히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순간 안티오키아의 지배자인 보에몽이 다니슈멘드 왕조의 포로로 잡혔다. 보두앵은 안티오키아로 달려가 그곳의 안정을 확보한 다음에야 예루살렘으로 갔고 다임베르트는 마지못해서 베들레헴의 강림 교회에서 보두앵을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로 즉위시켰다.

1101년에 그는 카에사리아와 아르수프를 장악했고 1104년 5월에는 제노바 함대와 함께 아크레를 점령했다. 1110년에는 노르웨이 국왕 시구르드가 이끄는 노르웨이 십자군 덕에 시돈과 베이루트를 함락했다. 레반트 해안 거의 전지역이 예루살렘 왕국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보두앵 1세는 나일강 삼각주까지 장악했지만 병에 걸려서 귀환해야 했다. 1118년 4월 2일에 그는 죽었다. 보두앵 1세는 그의 동생인 볼로뉴의 외스타슈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외스타슈는 왕위를 거절했고 결국 에데사의 보두앵이 보두앵 2세로 왕위에 올랐다. 에데사 백작령은 쿠르트네의 조슬랭이 물려받았다.

1.6 안티오키아 공국의 위기

1103년에 석방된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에데사의 보두앵과 쿠르트네의 조슬랭과 연합해 알레포를 쳤지만 참혹하게 패했다. 조슬랭과 보두앵이 포로로 잡혔고 보에몽만 겨우 살았다. 보두앵 1세는 재빨리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를 에데사에 급파하여 공격에 대비했는데 공격은 이슬람이 아니라 동로마에서 왔다. 보에몽이 안티오키아를 돌려주지 않자 분노한 알렉시우스 황제가 군대를 이끌고 안티오키아를 친 것이다. 동로마 군대는 킬리시아를 점령했지만 그 이상의 소득은 없었다. 보에몽은 탕크레드를 안티오키아의 섭정으로 임명하고 이탈리아로 넘어가 프랑스 왕의 딸인 콩스탕스 공주와 결혼한 다음에 동로마 제국을 칠 준비를 했다. 1107년 그는 아드리아해를 넘어 두라초를 공격했지만 알렉시우스와 베네치아 연합군은 보에몽을 개발살냈다. 보에몽은 데볼 조약을 맺어 동로마의 봉신이 되었고 실의에 빠져 1111년 3월 3일 이탈리아의 아풀리아에서 죽었다. 하지만 안티오키아의 섭정인 갈릴리 공작 탕크레드는 조약 준수를 거부하여 안티오키아는 독립적인 영지로 남아 있었고 보에몽의 사망 이후 동로마 제국이 안티오키아의 지배권을 회수하려 하자 탕크레드는 이를 거부하고 십자군을 규합하여 이를 물리쳤다.

보에몽 사망 이후 그의 어린 아들인 보에몽 2세가 안티오키아 공작 자리를 승계하였고 1111년 12월에 탕크레드가 장티푸스로 죽자 살레르노의 루지에로가 안티오키아의 섭정 자리를 승계했다.

1.7 트리폴리 백작령의 성립

한편 레몽 백작은 1105년 트리폴리 항구를 포위했지만 항구가 함락되기 전인 1105년 2월 27일에 죽었다. 레몽은 트리폴리를 점령하기도 전에 트리폴리 백작을 칭했는데 영토도 없는 작위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다툼이 벌어졌다. 레몽의 사촌 기욤과 레몽의 아들 베르트랑이 후계자 자리를 다투었다. 보두앵 1세, 탕크레드, 부르의 보두앵, 조슬랭이 트리폴리에 모여 합의를 보았다. 그들은 기욤과 베르트랑이 트리폴리를 분할점령하되 기욤은 안티오키아 공국의 봉신이, 베르트랑은 예루살렘 왕국의 봉신이 되도록 결정했다. 1109년 7월 12일에 트리폴리가 함락됨으로 트리폴리 백작령이 성립되었다. 근데 기욤이 화살에 맞아 죽음으로 베르트랑이 트리폴리를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도 1111년에 죽었고 그의 아들인 퐁스가 트리폴리 백작이 된다.

1.8 평가

시오노 나나미의 경우 후일의 6차 십자군을 제외하곤 성지를 탈환한 유일한 십자군이며 사자왕 리처드 1세의 무쌍으로 점철된 3차 십자군보다도 성공적인 유일한 십자군이었고 이런 십자군을 유럽의 '왕'들이 아니라 '제후'들이 이끌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며 이후 '왕'들이 이끌었던 십자군은 모조리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중세 가톨릭 유럽의 총화가 왕이 아닌 제후였다는 것을 실증하는 것이기도 하다라는 식으로 평가하기도 하였지만, 시오노스러운 과장, 또는 확대해석이다. 왕은 하나도 끼지 않고 제후들만으로 상당한 병력을 구성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세 가톨릭 유럽에서 제후들이 가졌던 위세를 보여주는 근거는 될 수도 있엤지만, 병력의 규모든, 질이든 조직구성이든 제후들이 이끈 1차 십자군이 왕이 이끈 이후의 십자군보다 뛰어났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다른 십자군 원정과 달리 1차 십자군 원정이 군사적으로 성공한 것은 어디까지나 당시 중동 이슬람 세력은 양대 종주국이던 파티마 왕조와 셀주크 제국의 쇠락으로 갈갈히 분열되어 있었고, 대규모 종교전쟁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기습당한 것이었기 때문일 뿐이며, 병력의 양, 질, 지휘체계등에서 1차 십자군보다 강했던 이후의 십자군 원정은 이슬람 세력의 조직적인 저항에 가로막혔기에 실패했던 것 뿐이다.

이 때의 이슬람권은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909~1171)가 한창 막장테크를 타던 중이고, 페르시아에서 시리아, 아나톨리아까지 차지했던 셀주크 제국(1037~1219)은 부족이나 도시 단위로 갈갈이 찢겨져 나간 시점이라 예상도 못한 십자군의 대규모 침공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십자군을 동로마 제국의 용병 내지는 우방 정도로 보았고 그들의 등장에 오히려 파티마와 셀주크는 서로 동맹을 요청하며 상대를 공격할 것을 사주했다. 물론 십자군은 다 씹고 투르크인이고 이집트인이고 가리지 않고 밀어버렸지만.

유럽인들의 이슬람권에 대한 첫 대규모 공격이다 보니[10] 유혈과 학살도 이 때 가장 심했다. 애초에 상당수의 십자군은 이런 학살을 벌일 수 있을 정도의 군사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거나 목적 자체가 정복이 아니라 성지 순례 비스무리하게 흘러간 경우가 많았으니 당연하다.

2 1101년의 십자군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에 사정상 예루살렘 원정에 참여하지 못했던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다. 피사와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예 정부가 직접 돈을 투자하여 십자군을 조직했다. 1098년 피사가 120척의 함대를 발진시켰고 1099년 7월에 베네치아도 200척의 함대를 발진시켰다. 이들 덕분에 예루살렘의 십자군은 10배로 늘었다. 이들 베네치아 십자군은 하이파를 점령한 다음에 귀국했다. 예루살렘의 정복과 베네치아 십자군의 성공에 망설이던 예비 십자군들이 곳곳에서 조직되었다. 가장 처음 출발한 사람은 중도 귀국했던 블루아의 에티엔이었다. 에티엔은 귀국하여 비겁자라고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고 심지어 그의 부인조차 그를 경멸했다. 교황은 그에게 순례를 완수하란 명령을 내렸고 에티엔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떠나야 했다. 그 말고도 밀라노 대주교가 지휘하는 롬바르디아 십자군이 1100년에 출발했다. 이들은 니코메디아에서 에티엔의 부르고뉴 군대와 레몽의 툴루즈 군대와 합류했다. 롬바르디아 십자군은 보에몽이 다니슈멘드에게 잡혀갔단 소식에 그를 구출하려 했다. 레몽과 에티엔의 만류에도 롬바르디아인들은 아나톨리아 내부로 진군했다가 투르크인들의 공격에 처참하게 패했다. 고위층 일부만 겨우 살았다.

3 1122년의 십자군

안티오키아의 섭정 루지에로는 1119년 6월 27일에 알레포를 공격했다가 참패했고 엄청난 병력 손실 때문에 안티오키아와 에데사가 동시에 위기에 처했다. 결국 이 사태를 수습한 보두앵 2세가 안티오키아의 섭정이 되었다. 1122년 알레포의 발라크가 에데사를 공격하여 조슬랭을 포로로 잡았는데 보두앵 2세는 그를 구하기 위해 1123년 4월에 알레포를 공격했다가 도리어 포로가 되고 말았다. 교황 칼릭스투스 2세는 성직 서임권 논쟁에 바빠서 예루살렘의 구원 요청을 베네치아에 위임했다. 베네치아는 120척의 함대와 1만 5천의 군대를 파견했다. 1122년 8월 8일에 출발한 베네치아 십자군은 동로마의 요한네스 2세가 약속했던 무역 특권을 주지 않자 자신들의 손으로 점령하여 동로마에 양도한 바가 있는 코르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두앵 2세가 포로로 잡혔단 소식에 그들은 공성을 포기하고 5월에 이집트 대함대를 격멸시켰다. 1124년 7월 7일 그들은 아스칼론과 더불어 예루살렘 왕국에 속하지 않은 유이한 팔레스타인 도시인 티레를 함락시켰다. 한편 보두앵 2세는 발라크가 죽자 석방되었다.
  1. 독일 로렌 지역 근처에 있던 그의 영지들을 팔아 치우면서 까지.
  2. 보두앵은 자신이 인질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매우 분개했다.
  3. 보에몽이 신사적으로 많은 식량을 사간 탓이었다.(...)
  4. 아나톨리아의 험준한 지형은 십자군의 진격을 매우 힘들게 만들었고 기사들은 자신들의 갑옷을 벗어 보병들에게 던져주기까지 했다.
  5. 기독교인이란 이름을 처음 쓴 것이 안티오키아였다.
  6. 여담이지만 이 결정으로 레몽과 보에몽의 사이는 매우 악화되었다.
  7. 이 피루즈가 어째서 보에몽의 매수에 넘어걌느냐에는 말이 많았는데 그의 아내가 투르크인 상관과 바람이 나서 그렇단 말도 있고 이슬람 교도들에 치를 떤 나머지 도시를 넘겨준 것이란 말도 있다. 또 다른 말론 그가 곡물을 횡령한 죄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고도 한다.
  8. 사실 이는 보두앵에게도 나쁜 결과는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보두앵의 가족들이 죽자 그 결혼으로 약속되었던 영토 역시 증발해버렸기 때문(...)
  9. 사실 알렉시우스가 안티오키아에 오는 길에서 퇴군하여 형식적으로나마 있던 신뢰 관계를 깨부수기 전부터도 이미 십자군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레이몽을 빼고는 알렉시우스와의 서약을 지키고 싶어했던 인물들은 한 명도 없었다(...).
  10. 엄밀한 의미로는 이 표현은 맞지 않는다. 이미 '유럽인'인 동로마 제국이 그보다 수백 년 먼저 이슬람권에 대한 공격을 가해 크레타 섬을 탈환하고 예루살렘 근처까지 진격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었기 때문.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가톨릭 유럽이슬람권 심장부에 대한 첫 반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심장부'냐면, 이슬람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변경인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국가에 대해서 레콘키스타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