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라녜 공작 빌럼 1세
Willem Ⅰ
(1533 ~ 1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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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초대 총독. 종교에 대해 의견을 내지 않고 침묵으로만 일관해 침묵공으로도 불렸다.
1544년에 사촌인 르네가 암살당하면서 오라녜 가문, 나사우 가문을 상속받았으며, 브레다의 거성으로 옮겨 브뤼셀의 마르가레타의 후견을 받아 성장했으며, 1555년에는 프랑스 전쟁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카를 5세가 물러나고 펠리페 2세 휘하에서 금양모기사, 국무회의 의원 등을 지내고 1559년에는 카토 캉브레지 조약의 협상자로 활동해 프랑스, 스페인 사이의 이탈리아 지배권을 둔 분쟁을 종식시켰으며, 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 총독에 임명되었다.
1561년에는 프랑슈콩트의 총독에도 임명되었다가 1566년에 성상 파괴운동을 강경하게 진압했는데, 빌렘은 안트웨르펜에서 이를 진압했지만 성문을 폐쇄하고 스페인의 군사들이 진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충성 서약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영지는 모두 몰수당하고 추방당해 1567년에 딜렌부르크로 망명했으며, 1568년에 군사를 일으켜 4월 23일에 헤일리게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페르난도 알바레즈 데 톨레도에게 엠스 강둑에서 패하자 퇴각해 프랑스로 도망쳤으며, 1571년에 페르난도 알바레즈 데 톨레도가 세금을 마구 거두어들인 것으로 반발을 사면서 1572년 4월 1일에 시 베거스(바다의 거지들)라 불리는 집단이 함대를 이끌고 브릴레 항구를 점령하면서 홀란트, 젤란트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자 이들과 합류한다.
협상을 통해 홀란트, 젤란트의 총독이 되었고 1573년에 칼뱅교로 개종했으며, 1576년에 겐트 화약이 성립되어 네덜란드의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1579년에 에스파냐에 귀순한 남부의 네덜란드 귀족들이 아라스 동맹을 결성했다. 이에 맞서기 위해 북부 7주에서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면서 빌렘은 이 동맹을 이끌고 에스파냐와 싸웠다.
1584년 7월 10일에 델프트에서 가톨릭 교도인 발타자르 제라르의 저격에 맞아 사망했다.
2 빌럼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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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1772년 8월 24일~1843년 12월 12일)
재위:1815년~1840년
1의 자손[1]으로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초대국왕이다. 오라녜나사우 왕가의 초대 국왕(1815~1840)이며, 룩셈부르크의 대공을 겸하였다. 헤이그에서 오라녜 공 빌렘 5세와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딸 빌헬미나 사이에 태어났다. 1795년 프랑스가 네덜란드 공화국을 침공하자,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1809년, 나폴레옹 전쟁에서 나폴레옹 1세에 대항하는 데 오스트리아군에 복무한 이외에는 1812년 프로이센의 궁정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1813년에 네덜란드인들이 프랑스 통치에 저항하자, 빌럼은 네덜란드 공화국의 주권적 왕자가 되는데 지방자치제 정부의 마련을 받아들였다. 1815년 네덜란드 연합 왕국(벨기에와 룩셈부르크까지 포함)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 국왕에 오르자마자, 국가의 경제 부흥 프로그램을 세웠다. 1822년 은행을 설립하여 벨기에의 산업 확대에 재정을 세우고, 1824년 네덜란드 무역 사회를 이루어 나라의 북부에서 장거리 상업을 촉진하였다. 벨기에와 네덜란드 사이에 국회에서 동등한 대표권이 주어지고 동등한 세금을 받아들이자, 벨기에인들은 네덜란드 북부와의 연합에 반대하였다. 벨기에의 자유주의와 가톨릭 당파들은 1828년에 가입된 빌럼 1세의 통치에 반대하였고, 그에게 정치와 종교적 대혁을 청원하였다. 1830년 7월에 일어난 파리 혁명에 영감을 받자, 다음 달에 브뤼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군사적 성공 후에 유럽의 열강들이 회의를 가져 1831년 1월에 벨기에를 독립국으로 선언할 것을 결정하였다.그는 벨기에를 네덜란드와 갈라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하였다. 네덜란드 국민들이 그의 정책에 반대하자, 그는 1840년 10월에 퇴위하고 베를린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벨기에를 떨어져나가게 만든 빌렘 1세의 친 개신교 정책은 정작 개신교인들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1816년에 개혁교단 헌법을 개정하여 그 전까지 자유롭게 뽑히던 교단 총회장을 왕이 직접 임명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총회-노회 간에 계급을 부여하여 수직적인 구조로 개편한 뒤 국가가 목사에게 월급을 주는 국교회 체제로 개편했는데,[2] 보수적인 목사와 교인들은 이를 정교분리 훼손으로 받아들이고[3] 교단 분리 운동을 시도하여 '기독개혁교회'나 '애통의 교회'[4]등이 생겨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