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830년 8월 네덜란드 왕국의 남부 지역이었던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일으킨 독립 운동. 런던에 모인 유럽 강대국들이 같은 해 12월 공식적으로 독립을 승인하면서 벨기에라는 국가가 최초로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2 배경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유럽 체제를 재편성하기 위해 열린 빈 회의를 통하여 유럽 각국들은 네덜란드[1]와 벨기에 지역[2]을 하나로 통합하여 네덜란드 연합 왕국을 세우고 오라녜-나사우 가문을 왕좌에 추대하기로 합의한다. 개신교가 우세하며[3] 오랜 독립의 역사를 지닌 네덜란드 지역과 카톨릭 성향이고 독립의 역사가 없었던 벨기에 지역을 하나로 합치는 것과 관련하여 우려의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폴레옹이라는 희대의 굇수에게 질릴대로 질려있었던 동맹국들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통합을 밀어붙인다.
그리고 이러한 무리수는 오래지 않아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인구에서 절반 이상[4]이 벨기에에 거주했음에도 벨기에는 모든 면에서 네덜란드에게 불이익을 받아야했다. 인구비례는 온데간데 없이 의회에서 다수를 장악한 것은 네덜란드 출신 의원이었고, 이제 막 싹을 트기 시작했던 산업혁명은 주로 네덜란드 지방에 집중됐다. 여기에다가 네덜란드 측이 공업 성장을 장려하기 위해 관세를 낮춰버림에 따라 농업이 주력이었던 남부 벨기에 지역은 값싼 곡물이 대거 수입되면서 강한 타격을 입는다.
안 그래도 타오르는 불길에 제대로 기름을 끼얹은 것은 국왕 빌렘 1세의 언동이었다. 북부 출신이었던 빌렘 1세는 벨기에 지역의 자치 요구를 무시했고, 여기에 한 술 더떠서 1823년에는 연합왕국의 공식 언어로 네덜란드어를 지정하는 병크를 저지른다. 이 당시 벨기에를 좌우하는 상/중류층의 언어는 프랑스어였기에 이러한 언어 정책에 격렬히 반발했고 결국 빌렘 1세는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여 네덜란드어를 공식언어로 지정하는 정책을 폐지해야만 했다. 그리고 카톨릭 전통이 깊었던 남부 지역에서 빌렘 1세가 반노골적으로 개혁파 프로테스탄트[5]를 싸고 돈 것이 커져가는 벨기에 인들의 분노를 터뜨리는 데 결정타를 날렸다.
3 전개
1830년 바로 옆나라였던 프랑스에서 일어난 7월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벨기에 인들은 크게 고무된다. 같은 해 8월 25일, 브뤼셀에서는 오페라 포르티치의 벙어리 처녀(La muette de Portici)가 상연됐다.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나폴리 시민들의 이야기를 그린 오페라는 벨기에 인들의 불만을 폭발시켰고, 오페라가 끝날 무렵 자리에 앉아있는 관객은 없었다. 그렇게 우발적으로 벨기에 혁명은 시작된다. 혁명군은 빠르게 브뤼셀 지역의 정부 청사들을 점령해나갔고 당황한 빌렘 1세와 네덜란드 정부 측은 왕자 프레더릭에게 군사 지휘권을 주고 브뤼셀로 파견시킨다. 이러한 파병은 벨기에 인들의 분노를 더욱 거세게할 뿐이었고, 벨기에 인들은 네덜란드로부터의 '행정적인 분리'를 요구한다.[6] 하지만 빌렘 1세는 '브뤼셀 점령과 반란군 진압'이라는 초강경책을 선택했고 9월 말 사흘에 걸친 시가전끝에 네덜란드 군은 패퇴하고 만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것을 결정지어버린다. 10월 4일 마침내 벨기에 인들이 공식적으로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해버린 것.
같은 해 11월 4일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런던에 모인다. 1815년 빈 회의 당시 압도적으로 벨기에의 네덜란드 병합을 찬성했던 것과는 사뭇 달리 소수민족라고 쓰고 폴란드라 읽는다의 독립 분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열강들이 벨기에의 독립을 지지한다. 열강들이 강력한 네덜란드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영국은 이 당시 해상무역을 놓고 네덜란드와 경쟁하는 상황이었으며, 프랑스/프로이센/오스트리아는 자신들의 국경 사이에 위치한 네덜란드가 벨기에를 차지하고 강대국으로 성장한 것이 영 마뜩찮았던 것이다. 게다가 정작 네덜란드를 편들어줄 러시아는 10월 바르샤바에서 일어난 폴란드인들의 봉기로 제 코가 석자인 상황이었다. 그렇게 벨기에는 열강들로부터 독립을 승인받게 된다.
다소간의 협상을 거쳐 1831년 1월 벨기에의 독립과 관련한 의정서가 채택되었지만 당사자인 벨기에가 이를 거부해버린다. 이 의정서에 의하면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네덜란드-벨기에 통합 왕국 영토 중 상당수가 네덜란드에게 넘어가야 했으며 벨기에는 독립의 댓가로 네덜란드의 국채 중 절반 가량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벨기에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레오폴드를 레오폴드 1세로 국왕에 추대한다. 그리고 레오폴드 1세가 '벨기에의 영토 확장'을 주장함에 따라 네덜란드와 벨기에 사이의 긴장이 다시 증폭된다. 1831년 8월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고 이번에는 네덜란드 군이 벨기에 군을 격파하면서 승승장구했지만 프랑스가 개입했기 때문에 전황은 다시 미궁으로 빠지고 만다.
프랑스와 영국은 네덜란드에게 벨기에에게서 뺏어간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지만 빌렘 1세는 거부했고, 영국은 경제봉쇄로 프랑스는 네덜란드 영토 폭격으로 응수(...)한다. 이후로도 이런 긴장관계는 수년동안 이어지다가 1839년에야 네덜란드가 벨기에의 독립을 최종 승인하면서 해소된다.- ↑ 17세기 합스부르크로부터 독립한 이후 프랑스 혁명전쟁 당시 프랑스에게 점령당하기 전까지 독립국이었다.
- ↑ 혁명전쟁 이전까지 계속하여 합스부르크의 영지로 남아있었다.
- ↑ 지금이야 개신교가 폭망하면서 벨기에와 다시 합쳐도 될 수준이라지만 20세기 초까지는 사정이 달랐다. 신자수가 쪼그라든 지금도 전통적으로 개신교 지역이던 곳에는 아직 용도 변경이 되지 않은 국교회 건물이 좀 남아있다.
- ↑ 정확히는 60% 가량. 지금이야 네덜란드가 벨기에보다 인구가 많았지만 당시엔 상황이 달랐다. 이렇게 된 이유는 20세기 초중반에 벨기에가 상대적으로 출산율이 낮았고 그에 반해 네덜란드의 출산율이 벨기에보다 높았기대문에 1930년대에 인구가 역전되었고, 이게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지금은 1.7-1.8명대로 비슷비슷한 수준이다.
- ↑ 네덜란드의 개신교는 스코틀랜드, 한국의 장로교와 같은 칼뱅주의이다. 그런데 빌렘 1세의 저 정책은 지 입맛 꼴리는데로 개신교를 통제하려는 속내가 있었는지라 벨기에가 떨어져나간지 얼마 안되어서 또 한바탕 난리가 난다.
- ↑ 즉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독립' 대신에 '자치'를 요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