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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최근 모습)
이름 | 빌헬무스"빌리" 마르티누스 레오나르두스 요하너스 판 데르 카일른 (Wilhelmus "Willy" Martinus Leonardus Johannes van der Kuijlen) | |
생년월일 | 1946년 12월 6일 | |
국적 | 네덜란드 | |
출신지 | 헬몬드 | |
신체 조건 | 181cm | |
포지션 |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 |
유소년팀 | HVV 헬몬드 (1953~1964) | |
소속팀 | PSV 아인트호벤 (1964~1981) MVV 마스트리흐트 (1981~1982) | |
국가대표 | 22경기 7골 |
목차
1 소개
미스터 PSV
자타공인 PSV 역대 최고의 선수. 공격형 미드필더와 포워드 위치에서 활약한 선수로, 동시대 요한 크루이프의 국가대표팀 라이벌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조율 능력과 패싱 능력이 강점이었으며 대포알 같은 슈팅 역시 보유하고 있었다. 다만 공중전이나 수비적인 면에서는 약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2 클럽
유스 시절부터 여러 클럽들의 관심을 끌었고 1964년 PSV 아인트호벤과 세미프로 계약을 맺으면서 선수의 길로 들어섰다. PSV는 필립스사에서 운영하는 축구팀이었고 반 더 카일른은 주말에는 축구선수로, 주중에는 창고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첫 시즌부터 반 더 카일른은 27경기 20골을 기록하며 PSV를 리그 4위에 올려놓았고 리그 득점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 다음 시즌에는 약관의 나이로 23골을 넣으며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그러나 반 더 카일른은 그의 필립스 직원으로서의 일과 군대 등이 겹치면서 선수 생활과 병행하기 어려워졌고 두 시즌간 21골을 넣었으나ㅎㄷㄷ 감독인 밀란 니콜리치와의 불화는 반 더 카일른이 제 모습을 보여주기 어렵게 만들었다.
PSV는 반 더 카일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리그에서 강등 위기에 몰려있었으나 니콜리치의 경질과 동시에 반 더 카일른이 DWS전에서 4골을 넣으며 5-1 승리를 견인해 간신히 강등을 면했었다. 1968-69 시즌 반 더 카일른은 신임 감독인 쿠르트 린더와도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고 고향팀인 헬몬드 스포르트로의 이적 직전까지 갔으나 헬몬드의 이적료 부족으로 무산되었고 반 더 카일른은 결과적으로 PSV와 재계약을 맺었다.
린더와의 PSV 생활에서 반 더 카일른은 1969-70 시즌 26골로 득점왕을 차지한 것을 제외하면 명성이 걸맞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린더는 1972년 팀을 떠났고 그와 PSV의 유럽무대 성공을 이끌 키스 라이베르스가 신임 감독으로 부임했다. 라이베르스는 반 더 카일른에게 자유롭게 움직일 권한을 주었고 1973년 스웨덴 출신의 거인 공격수 랄프 에드스트룀이 팀에 합류하면서 반 더 카일른의 활약에 날개가 달렸다.
에드스트룀의 함류는 공중전을 기피하는 반 더 카일른의 약점을 매꿔주었고 반 더 카일른은 그 시즌 27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오른다. 레알 마드리드, 안더레흐트, 발렌시아 등의 클럽이 반 더 카일른에게 관심을 보였으나 PSV는 그에 대한 모든 제의를 거절했다.
1974-75 시즌 반 더 카일른은 첫번째로 리그 우승을 맛보았고 28골을 기록했다. 이 시즌 그에게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바게닝언을 상대로 프리킥 골을 넣은 것이다. 프리킥 골 하나 넣은 것이 뭐가 대수냐고 할 수 있으나 반 더 카일른은 위에서 서술했듯이 슈팅 파워가 굉장했던 선수이다. 프리킥 상황에서 반 더 카일른의 강력한 슈팅은 골대 안으로 들어가다 못해 골망을 뚫고 나가버렸고, 주심은 얼마 있다가 골이 그냥 아웃된 것이 아니라 골망을 찢어버린 것을 안 것이다.
1975-76 시즌 PSV는 리그와 컵 대회에서 우승했고 유러피언컵에서 4강에 올랐다. 1976-77 시즌 PSV는 리그에서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거두었고 다음 시즌 UEFA컵에 참가하게 되었다. 1977-78 시즌 UEFA 컵은 PSV와 반 더 카일른에게 모두 중요했던 대회인데, 결말부터 말하자면 PSV는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사상 첫 유럽 클럽대항전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이는 반 더 카일른에게도 마찬가지였는데,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이 대회 4강전이었다.
4강전에서 PSV의 상대는 다름아닌 FC 바르셀로나였다. 요한 크루이프, 요한 네스켄스가 포진된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반 더 카일른은 절치부심했고 1차전 3-0 대승을 이끌어냈다. 2차전 1-3으로 패배하긴 했으나 그로써는 라이벌 크루이프를 상대로 복수를 톡톡히 한 셈이다. 대회 결승전 상대는 SC 바스티아였는데 2차전에서 반 더 카일른은 팀의 3번째 골을 성공시키며 팀의 3-0 승리를 이끌었다.
UEFA 컵 우승 이후 반 더 카일른은 하락세에 접어든다. 1978-79 시즌 PSV는 리그 3위에 머물렀고 반 더 카일른은 14골에 그쳤다. 1981-82 시즌 반 더 카일른은 팀에 이적 요청을 했고 MVV 마스트리흐트로 이적해 1시즌간 활약한 뒤 벨기에 무대에 잠깐 있었고, 얼마 안가 현역에서 은퇴했다. 반 더 카일른이 PSV에 남긴 것은 역대 최다 출전 기록과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이다.
3 국가대표
1966년 국가대표팀 데뷔 이후 1977년까지 22경기 7골을 기록했다. PSV 역대 최고의 선수이자 당시 에레디비지 최정상급 선수였던 것을 감안하면 국가대표팀 커리어가 굉장히 초라한 편인데 그 이유는 다름아닌 요한 크루이프 때문이다. 요한 크루이프와 그의 포지션은 완벽히 겹쳤고 페루치오 발카레지가 마촐라, 리베라를 활용하듯 스타페타 전술을 쓰지 않는 이상 둘의 공존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둘을 스타페타 전술에 적용시키기에는 요한 크루이프가 너무나도 위대한 선수였다. 크루이프와 반 더 카일른은 모두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했고 둘을 그렇게 좋은 사이도 아니었다. 크루이프는 반 더 카일른에게 패스하지 않고 아약스 동료들에게만 패스를 하는 등의 방식으로 그를 따돌렸고 결국 사건이 하나 터졌다.
하루는 바르셀로나에서 뛰던 크루이프와 네스켄스가 다른 동료들 보다 대표팀 캠프에 늦게 도착하는 것이 허락된 적이 있는데, 반 더 카일른은 캠프에 오는 두 사람을 보고 "스페인의 왕들이 저기 오고있네!"라는 비꼬는 말을 날렸다. 둘은 당연히 싸웠고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이었던 크노벨은 팀 케미스트리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반 더 카일른을 포함해 PSV 소속의 네덜란드 대표팀 멤버였던 골키퍼 얀 반 베베른을 퇴출시켰다.
1974년 네덜란드 대표팀은 반 더 카일른 없이도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엄청난 모습을 보이며 준우승을 거두었다. 이 것이 아까운 점도 있는데 왠만해서 크루이프가 막힐 일이 없었으나 그의 부진에 대비한 플랜 B의 상실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실제로 크루이프가 봉쇄당한 74년 월드컵 결승전에 반 더 카일른이 대신 투입되었다면?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반 더 카일른은 곧장 국가대표팀에서 은퇴를 선언했으나 이후 몇경기에 모습을 드러냈고 1977년 북아일랜드와의 유로 1976 예선 경기에서 크루이프와 교체 투입된 것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지 못했다.
4 현역 은퇴 이후
현역 은퇴 이후에도 PSV의 레전드로 남아 PSV에서 수석코치 등으로 활약했으며 현재 PSV의 스카우터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