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니카라과의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정당으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소속되어 있다. 1961년에 창당되었으며 1960년대에서 70년대까지는 소모사 일당에게 맞선 저항단체였다. 1960년대에는 그저 그런 군소 게릴라에 불과했지만[1] 1972년 마나과 지진으로 소모사 일당이 하라는 지진 수습은 커녕 그 돈으로 자기배 불리기에 나서면서 소모사 일당의 부도적성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세가 급속히 불어나기 시작했고 1978년 타치토가 라 프렌사 지의 사주인 페드로 차모르를 암살하자 이를 계기로 니카라과 내의 중도우파-중도파-좌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향의 단체들과 연합하여 힘을 모아서 소모사 일당을 몰아내는데 열중하였고 소모사 일당이 미국으로 도주하면서 혁명은 성공을 거두웠다.

1979년 혁명으로 11년간 집권정당이 되었고[2] 집권 초반에는 문맹률을 크게 줄이고 노동자의 봉급수준도 크게 올라가는 등 잘나가는 듯 싶었지만 얼마가지 않아 연립정권내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삐그덕 거리기 시작하더니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이 집권하면서 소모사 잔존 세력들을 지원하기 시작하여 콘트라와의 내전이 벌어졌고 설상가상으로 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소련의 경제가 침체되는 바람에 지원액수가 크게 줄어나가고 물가상승률도 사상최악을 향해달렸기에 결국에는 집권초기의 정책을 뒤엎고 복지정책을 축소하고 민영화도 추진하는데다가 검열도[3] 시행하는 바람에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으며 그 덕택에 1990년 선거에서 통합야당후보로 나선 베올리타 차모로(페드로 차모로의 부인이다.)에게 패배하면서 한 동안 야당으로 전락했지만[4] 그래도 이 기간에도 니카라과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데다가 나름대로 제1야당으로써의 지위는 차지했으며 때때로 보수정당과 협약을 맺었다. 2006년 선거에서 재집권에 성공하였고 보수여당의 지지기반을 잠식하면서 2011년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산디니스타에게 바치는 노래

역대 선거결과

1984 다니엘 오르테가 67.0% 당선[5] 61/92 66.8%
1990 다니엘 오르테가 40.8% 낙선 39/92 40.8%
1996 다니엘 오르테가 37.8% 낙선 36/93 36.5%[6]
2001 다니엘 오르테가 42.2% 낙선 39/92 42.6%
2006 다니엘 오르테가 38.1% 당선 40/92 37.6%

2011 다니엘 오르테가 62.4% 당선 63/92 60.9%[7]
  1. 1960년대 초중반 시기에 집권한 루이스 소모사가 동생인 타치토와는 다르게 최소한의 개념은 있었던것도 한몫하기는 했다. 그래봐야 독재자는 독재자지만
  2. 다만 얼핏 사회주의 혁명이라는것 때문에 이 당시의 니카라과가 일당제 국가였을거같지만 공식적으로는 다당제 국가였으며 실제로 집권 초기에는 보수당 등 주요 보수파와 중도파 정당들이나 공산당등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형태였고, 1984년 의회 선거(상당수 야당들이 보이콧 했기는 했다.)에서 보수정당이 멀쩡히 진출했을 정도였다.
  3. 1980년대 후반에 라 프렌사 지를 여러번 정간시키기도 했다. 물론 그 라프렌사 지가 맞다.
  4. 다니엘 오르테가가 성추문으로 한동안 물의를 빚은데다가 1980년대 경제파탄의 이미지 때문에 산디니스타 민족해방 전선에 표를 주는걸 꺼려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5. 다만 이 선거는 상당수 야당이 보이콧한채로 실시된 선거이다. 그래도 국제적으로 제법 공정하게 치러졌다고 인정받았는데 레이건 행정부는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면서 콘트라 세력을 계속해서 지원했다.
  6. 헌법개정으로 대통령 임기가 6년에서 5년으로 단축되었다.
  7. 사상 처음으로 개헌선을 넘었다 상당수 야당이 불참한 1984년보다도 높은 수치다. 다만 선거관리가 그리 공정하지는 않은 모양인지 욕을 좀 얻어먹기도 하고 보수야권을 주도로 항의시위도 좀 벌어지기도 했지만 어차피 오르테가가 압승할것이라고 오래전부터 예측되어왔기도 하는데다가 선거분위기도 오르테가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고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이 의도적으로 부정선거를 저지르기에는 의석수가 부족하다는 점 때문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