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카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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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앙아메리카의 국가

과테말라

벨리즈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파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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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의 국가정보
국기240px-Flag_of_Nicaragua.svg.png
공식명칭니카라과 공화국(República de Nicaragua)
면적130,373㎢
인구5,907,881(2015)
종족구성메스티소 69%, 백인 17%, 흑인 9%, 아메리카 원주민 5%
종교기독교 90%(가톨릭 50%, 개신교 40%), 기타 종교 4%
수도마나과
정치 형태대통령제, 공화제
대통령다니엘 오르테가(Daniel Ortega)
임기1985년 1월 10일 ~ 1990년 4월 25일
2007년 1월 10일 ~ 2011년 11월 6일
2011년 11월 6일 ~ 2016년 11월 6일 (예정)
부통령모이세스 오마르 알레슬레벤스 (Moisés Omar Halleslevens Acevedo)
명목 GDPGDP70억 5000만 달러(2011)
1인당 GDP1,197$(2011)
GDP(PPP)GDP185억 3300만 달러(2011)
1인당 GDP3,147$(2011)
지니계수0.401(2007)
공용어스페인어
화폐단위코르도바(Córdoba)
국가니카라과 만세(스페인어: Salve a ti, Nicaragua)
모토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En Dios Confiamos)
국제연합(UN) 가입1945년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한 나라. 수도는 마나과(Managua).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국토면적 13만㎢로 중미에서 가장 크며[3], 인구는 약 600만 명.

1 역사

원래 메소아메리카 계통의 니카라오 족, 초로테가 족, 미스키토 족 등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며, 북서쪽의 아즈텍과의 교역도 이루워졌다. 그리고 에스파냐의 침략으로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이웃나라처럼 대농장주들이 원주민을 노예나 소작농으로 부려먹어 그 생산물을 수출하는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에스파냐인들의 이주로 퍼지고 시작한 천연두와 황열병 같은 질병이 본격적으로 퍼지자 가뜩이나 강제노동으로 면역력이 약해진 원주민들을 휩쓸었고 자연히 원주민들의 인구가 격감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흑인노예들을 상당수 수입하기도 하였다. 여하튼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다가 에스파냐가 니카라과와 제3국의 무역을 금지하자 농장주들은 이에 반발해 독립 운동을 일으켰다.

1821년 니카라과는 타 중미 국가처럼 보수주의자들의 멕시코 제국의 한 부분으로 에스파냐에서 독립했다. 그러다 1823년 멕시코에서 떨어져나와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등과 함께 중미 연방을 구성하다 혼란 끝에 1838년 니카라과는 중미 연방에서 독립한다. 영국은 이 무렵 니카라과 동해안을 장악했으며, 북부 레온 중심의 자유주의자와 남부 그라나다 중심의 보수주의자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끼리 내전을 벌이던 상황에서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고용된 미국인 백인 용병 윌리엄 워커(William Walker)가 황제 노릇을 한적이 있었지만 군벌들에게 다구리를 맞고 쫓겨났고 보수주의자들이 집권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니카라과에서 커피 산업과 바나나 산업이 나타났는데, 이들 신흥 소지주들이 감히 대지주들 땅을 뺏을 순 없었으니 원주민 땅을 뜯어갔다. 그러자 염료와 목축을 하던 대지주들도 커피와 바나나 재배를 시작했다. 1890년대 자유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 후에 정부는 교회의 땅을 뺏어 커피 농장으로 만들었으나 대부분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보수주의자들은 20세기 들어 다시 집권해 자유주의자들을 누르고자 미국의 지원을 요청해 니카라과는 19년간 미국의 간섭을 받았다. 산디노가 이에 저항해 게릴라 활동을 하다 1934년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에 의해 죽는다. [4] 한편 이 무렵 국방군의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가 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았으며 그가 암살당한 후에도 아들 루이스 소모사 데바일레와 그의 동생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가 연달아 니카라과의 권력을 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1960년대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rente Sandinista de Liberación Nacional)이 결성되었다. 소모사 족벌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기존의 기득권층은 위협을 느꼈고 소모사가 1972년 대지진 때 받은 지원금을 횡령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자 소모사에 대한 불만은 더 높아졌다. 그리고 1978년 소모사가 자신에 반대하던 유력지 «라 프렌사»의 페드로 차모로를 살해하자 반 소모사 운동은 더욱 강해졌다. 1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혁명전쟁이 펼져졌고 1979년 마침내 소모사 일당은 해외로 망명을 가며 혁명은 성공했다.

산디니스타 혁명정권은 국방군을 해체하고 혁명에 참여한 타 정당들과 단체들과 협력하면서 국가재건위원회를 구성해 토지 개혁과 국유화 등을 시도하였다. GDP의 41%에 달했던 소모사 일당의 소유 재산을 빼았고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문맹퇴치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1년도 안되는 기간에 문맹률을 50%에서 13%로 떨어트렸으며, 전국적인 의료보건제도를 도입하여 영유아 사망률을 크게 떨어트리는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국가재건위원회내에서도 좌우간의 대립으로 반목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레이건 정부들어 미국은 산디니스타 정권에 반발해 1982년 제재 조치를 취해 세계 최대 바나나 회사가 니카라과를 떠나 큰 타격을 주었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콘트라 사건이라 불리우는 뻘짓을 감행했는데 산디니스타를 엎기 위해 이란에 무기를 밀수출해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면서 콘트라 반군이 현지에서 현물세로 걷은 코카인까지 맡아준 것이다.[5] 한편으로 미국의 지원이 끊어지면서 소련쿠바, 불가리아의 지원이 이어져왔지만 소련은 아프간전으로도 군사비 부담이 커져서 추가로 전선이 늘어나는걸 부담스러워해서 소극적으로 지원하는데 그쳤고, 쿠바와 불가리아도 지원을 했지만 두 나라 모두 당시 공산주의권에서 국력 규모가 큰 나라는 아니었기에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큰 보탬은 못되었다. 거기에다가 정권초에 베네수엘라나 멕시코도 니카라과에 대한 지원에 나섰지만 80년대 중반 이후에 이들 국가가 석유값이 하락하여 경제위기가 일어나자 지원이 축소되었다. 이런판이니 니카라과의 경제는 막장이 되어 1989년 1인당 GDP는 1960년 수준까지 추락했고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나 환율이 1달러당 25,000,000 코르도바까지 갔다.

결국 소련의 지원이 계속해서 줄어드는판에 냉전이 종식될 기미를 보이자 산디니스타와 콘트라 반군과 협상에 나섰고 그 결과 1990년 선거에서 산디니스타가 정권을 잃고, 우파가 집권해 산디니스타가 몰수한 재산을 돌려주고 산디니스타 장교 몇 명이 체포되었다. 그렇지만 산디니스타와 보수여당간의 협약이 이루워져서 산디니스타도 제1야당으로써의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했고 1980년대 당시 니카라과 대통령이었던 오르테가도 지속적으로 유력 대권주자로 나서며 대선에 출마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경제파탄으로 인한 기억과 미국과의 관계가 안 좋다는 점때문에 산디니스타는 계속 야당 신세로 머물러있었다가, 2006년 대통령 선거에서 우파의 분열에 힘입어 오르테가가 재집권하였고, 이후 친기업 정책[6]과 쿠바와 베네수엘라 등으로부터 의료와 석유지원을 받는 투드랙 전략으로 빈곤을 줄여나가면서 그 동안의 경제파탄 이미지를 쇄신하는데 성공을 거두었고 2011년 대선에서 재선을 해서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는 중이다. 3기 집권기에도 주요 재정지원국인 베네수엘라의 경제위기에도 최소 연 4% 이상의 경제성장을 유지하는 등 거시경제정책은 그런대로 잘 수행한다는 평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니카라과 운하 건설 문제로 인해서 니카라과 운하 건설에 대한 여론이 반으로 갈라지다시피한데다가[7] 농민들과 니카라과 운하 건설 예정지 주민에게 배신자, 중국과 기업을 위해 물을 팔아먹는 놈 소리를 들으면서 지지율이 상당히 떨어진편이다. 그러나 대도시 지역에서는 여전히 지지율이 높아서 전체적인 지지율은 60%대에 달하고 있는 상황이며 야권에서 오르테가에게 맞설 대안 후보가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이미 4선은 기정 사실화 되고 있다.[8][9]

2 상징물

2.1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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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중앙아메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를 기초로 하며 가운데에 국장이 들어가 있다.

2.2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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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국가

1893년부터 1910?년까지 사용한 국가인 Hermosa Soberana.

1971년에 제정된 국가인 Salve a ti, Nicaragua(니카라과여 만세!).

3 경제

본래 이 나라에 대서양태평양을 잇는 운하가 파질 예정이었지만 파나마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데... 2013년 6월 13일, 니카라과 의회가 중국 회사에 의한 운하 건설 프로젝트를 승인함에 따라 니카라과에도 운하가 건설될 것으로 보인다. 11년간 400억 달러(45조 원)를 투입해 길이 286㎞에 달하는 수로를 뚫는다는 계획. 중국의 급속한 성장과 중미 지역의 반미감정, 니카라과 자신의 경제개발 계획에 따라 신속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물론 여기에 대해 찬반여론이 비등하고 있긴 하다. 이 기사이 기사 참조 운하 건설과 운영권 유지 기간이 백 년이라, 운하만 완공된다면 미국이 파나마에 대해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하듯이, 중국도 합법적으로 니카라과에 군대를 주둔시킬 명분이 세워져 미국의 턱밑에 갑자기 중국군 기지가 건설되는 흠좀무한 상황이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중국이 군 기지 건설까지 내다보고 이 사업을 추진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설령 군사기지가 세워지지 않더라도 미국 입장에서는 썩 유쾌하지 못한 상황일 듯.

2014년 1월 11월, 다니엘 오르테가 니카라과 대통령이 중국 기업인 홍콩니카라과운하개발투자공사(HKND)과 12월 니카라과 운하를 착공하기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전년 6월 운하 건설에 대한 잠정 합의 후 뚜렷한 움직임이 없어 연내 착공이 불투명하다는 기존 예상을 깨트리는 것이다. 이 운하의 건설 프로젝트를 통해 중국은 중남미에 자국에 유리한 경제적, 정치적 거점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됐다.관련 기사

파일:/image/032/2014/12/23/khan TC8mlu 99 20141224005902.jpg 12월 22일, 마침내 홍콩니카라과운하개발(HKND)의 주도하에 니카라과 대통령도 참석한 착공식을 시작으로 500억 달러(약 55조 원)을 투자한 초대형 프로젝트가 개시됐다. 총 길이는 약 280㎞. 컨테이너 25,000개를 실은 대형 화물선 한 척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수로 폭이 넓고 수심이 깊다. 예상 공사기간은 5년으로 2019년 말 완공, 2020년 개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운하가 완공되면 HKND는 니카라과 정부에 매년 1,000만 달러(약 110억 원)를 내는 조건으로 100년 동안 운하 건설·관리·개발 권리를 갖게 된다.본격 미국 따라하기 HKND는 운하 인근에 도로, 항구뿐 아니라 공항, 철도를 건설할 계획이다.이름을 거론할 수 없는 그 분이 끝내 못다 이룬 대운하 계획이 지구 반대편에서 마침내 실현된다! GDP가 고작 4,500달러(약 496만 원)에 불과한 니카라과 정부는 운하 건설로 중국 자본의 대규모 투자에 의한 경제 발전을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현지 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대 여론은 거세다. 환경단체들은 운하가 지나는 니카라과 호수의 오염을 경고하고 있다. 니카라과 호(湖)는 국민들의 주요 식수원이다. 또 운하가 통과하게 되는 지역 주민 3만여 명도 운하 건설 및 개발의 여파로 삶의 터전을 잃을까 우려하고 있다.# 다만 여기도 기업들이나 건설업쪽은 환영일색이다. 돈이 생기니까

대다수 북중미 나라가 그러듯이 가난과 내전에 시달리고 있었고. 1988 서울 올림픽 때도 이런 사정으로 불참한 6개국 중 하나이다. 또한, 주변의 남아메리카 국가들에 비해 커피산업이 매우 영세한 편이다. 그래서 정부에서 지원하는 프로젝트로 커피 농가들을 서포트하여 커피를 생산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니카라과 커피는 수세식 커피로서 다른 나라 것보다 커피콩의 크기가 크고 독특한 맛과 신맛이 어우러져 고유의 풍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다니엘 오르테가가 집권한 이후에 친기업 정책과 베네수엘라-쿠바의 지원이라는 투드랙으로 어느정도 경제가 성장하기는 했고, 상기했듯이 2014년 말 드디어 운하 건설이 시작되어 앙골라잠비아 같은 몇몇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니카라과도 운하 건설을 계기로 중국 자본의 대규모 투자에 의한 경제 발전을 기대하고 있는 상황이다.[10]

주요 수출품은 면화(25%), 쇠고기(7%), 커피(13%) 등 1차 산업이 주류를 이룬다.

4 사회

중미에서는 그나마 치안 상태가 양호한 편이지만, 수도인 마나과에서도 절강도, 소매치기 등의 범죄들이 자주 발생한다고 한다. 시내버스 승차시에는 소매치기를 조심하고 차량으로 이동 시에는 차 문을 잠가야 하며, 또한 야간 외출은 가급적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환태평양 지진대에 위치하여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5 스포츠

5.1 야구

야구 인기가 많은 나라로 1891년에 Managua Base-Ball Club이란 야구팀이 창단될 정도이다.인구 600만이 안되는 나라에 야구팀이 4500개, 야구선수로는 7만 명 가까운 이들이 등록되어 있다.1905년 Boer란 팀이 창단되었는데 2012년에도 활동 중이다. 68년에는 자국 리그를 창설했으며 72년 세계선수권에서 우승 하는 등 국제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 때 나타난 선수들이 메이저리그까지 진출한 데이빗 그린, 알 윌리엄스, 포피리오 알타미라노 그리고 '엘 프레지덴테' 가카 데니스 마르티네즈다. 80년대에 들어선 윈터리그 형식으로 시즌이 끝난 메이저리거나 마이너리거들을 끌어들여 리그의 인기를 높였다.

니카라과가 낳은 최고의 선수는 바로 데니스 마르티네즈다. 데니스는 74년에 데뷔하여 97년까지 23시즌 동안 커터와 싱커를 앞세워 통산 245승을 올렸고 올스타 4회에 선정되었으며, 1981년 다승 1위, 1991년 방어율 1위를 기록하는 등 마운드의 대통령으로 군림하였다. 마르티네즈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몬트리올 엑스포스 시절인 1991년 7월 28일 LA 다저스를 상대로 역사상 13번째의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여 니카라과의 전설이 되었으며 1996년에는 실제로 니카라과의 국민들에 의해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으나 자신이 거절하였다. 데니스는 "El Presidente"라는 닉네임을 얻었으며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던 해에는 임시 공휴일이 선포되고 동상이 세워지기도 하였다.[11]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로베르토 클레멘테다. 클레멘테는 푸에르토리코 태생으로 니카라과와 무관하지만 72년 11월 니카라과 대지진으로 수천 명이 사망하고 이재민이 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자신의 돈으로 각종 구호물품을 싣고 가다가 비행기 사고로 인생을 마무리하였다. 이로 인해 클레멘테는 니카라과에서도 영웅이 되어 그의 이름을 딴 야구장도 생겼다.

5.2 축구

반면에 (니카라과에서) 축구는 야구에 비해 인기도 없고, 성적도 영 좋지 않다. 월드컵 본선 진출 기록은 아예 없으며, 네덜란드령 안틸레스나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 같은 작은 섬나라들에게까지 져서 월드컵 예선을 번번히 탈락할 정도. 북중미 골드컵도 2009년에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했는데, 3패로 탈락했다.

2013년 7월 기준 피파랭킹은 162위.

국대에 관한 사항은 니카라과 축구 국가대표팀 항목 참조.

6 문화

니카라과에는 불세출의 시인 루벤 다리오가 있다. 그는 대륙적인 차원에서 전개된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혁신적 문학운동인 모데르니스모(Modernismo)를 주도했으며 라틴아메리카 문학에서 근대의 문을 연 작가로 평가될 만큼 독보적인 문학사적 위치를 점하고 라틴아메리카 뿐만 아니라 스페인에서 일어난 신문학 세대 '1898년세대'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니카라과는 2004년부터 매년 '그라나다 국제 시(詩) 페스티발' 개최를 통해 세계 각국과의 문화 교류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니카라과 요리의 주재료는 옥수수와 콩이며 마늘과 양파를 대부분의 요리에 사용한다.

7 군사

니카라과군을 참조할것

8 외교

중화민국의 몇 안되는 수교국 중 하나로 좌파 정권이 집권했더라도, 중국과 대만사이에서 양다리 외교중이다.

대한민국과는 1962년부터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1979년에 집권한 산디니스타가 사회주의 성향이라는 이유때문에 외교관계가 단절되었고 1988년 서울에서 열렸던 하계올림픽에서는 한국과의 수교국 및 IOC 회원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창 콘트라 내전으로 몸살을 앓았기 때문에신경쓸틈이 없어 불참했다. 그리고 내전이 끝난 1993년 대전에서 열렸던 세계박람회에서는 중남미공동관 국가로 참가했다.[12] 한때 주(駐) 코스타리카 한국 대사관이 겸임했으나 2007년부터 수도 마나과에 주 니카라과 한국 대사관이 설치되어 직무가 부분 이임되었다. 한편 니카라과 측에서는 아직 한국에 대사관을 열지 않았으며 현재 주 일본 니카라과 대사관에서 겸임하고 있다.

북한과는 1978년에 수교하였다. 과거 1970년대 산디니스타 혁명 당시 북한에서 여러모로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에 1980년대에 교류가 활발한 편이었고 북한대사관도 설치되어있었지만 이후로는 우파정권이 집권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졌고 북한에 경제난이 닥치면서 대사관 운영비도 줄었기 때문에 1995년에 대사관을 철수하고 그 이후로는 주 쿠바 대사관에서 대행하고 있다. 다니엘 오르테가가 재집권 한 이후로도 관계가 소원한데 사실 별 다른 이유는 없고 북한이 니카라과에 뭘 투자할 돈이 없기 때문이다. 돈을 줘야 편을 들어주든지 말든지 하지 거기에다가 니카라과에서도 당연히 한국인이 북한인보다 훨씬 많이 살기 때문에[13] 당연히 남한과의 교류가 더 활발할수밖에 없다.

이웃 코스타리카완 애증의 관계가 크다. 국민소득이 6배가 넘게 차이가 크다보니 코스타리카로 가서 니카라과인들이 일하는 게 많지만 코스타리카에선 니카라고 부르면서 경멸하는 게 크다. 니카라과인들을 저임금으로부려먹는 등 인권침해문제도 심각하다. 그래도 1979년 혁명 당시 산디니스타에게 지원을 해주는 등 니카라과의 민주화에 도움을 줬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뭔가 말할수 없는 애증관계.

베네수엘라쿠바하고는 경제적인 교류덕택에 상당히 친한관계이며 다니엘 오르테카가 피델 카스트로, 우고 차베스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돈독한 관계다.

위에도 나와 있지만 이웃 온두라스코스타리카와 함께 커피가 국가의 주요 사업 중 하나이다. 특히 2011년 코스타리카에서 커피 생산량이 감소한 후 그 대체제로 니카라과산 커피가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코스타리카 항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코스타리카 커피 농장의 노동자들이 거의 니카라과인이었고 그들이 돌아와서 산업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9 창작물

비디오 게임 블랙 옵스 2의 악역 라울 메넨데즈의 고향이기도 하다.

겁스 무한세계의 몇몇 평행계에는 이곳에 운하를 파져있기도 하다.

메탈기어 솔리드 피스 워커에 등장하는 아만다와 치코가 FSLN 출신이다.

키드갱 최고의 명대사에 등장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게릴라들-총을 든 사제의 배경이 바로 니카라과이다. 소모사 정권에 맞서싸우던 산디니스타 해방전선의 활동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10 여행

미국 뉴욕 타임즈지가 2013년 방문해야할 이상적 여행지 46곳을 선정하였는데, 니카라과가 그 중 3위에 뽑혔다. 특히 카리브해의 콘 아일랜드는 외국 관광객이 많이 방문하는 명소다.

하지만 여행유의국가인만큼 비즈니스 등 꼭 필요한 목적이 아니라면 방문하지 말아야 하고, 특히 주요 우범지대인 마나과 오리엔탈시장 인근지역은 출입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로베르또 우엠베스 시장에 많은 공예품 가게가 있고 농산물과 식료품 등을 판매한다.
  1. 전 지역
  2. #
  3. 북한과 비슷한 정도의 크기이다.
  4. 이는 나중에 나올 산디니스타의 어원이 되었다.
  5. 참고로 이 사건은 국제법 판례에서 Nicaragua Case로 유명한 사건으로, 니카라과의 요청에 의한 미국의 집단적 자위권 발동 주장을 부정했고, 미국의 반군에 대한 군사적, 준군사적 지원에 대해 국내문제 불간섭 원칙 위반이라는 판시를 했다. 결국 1991년 니카라과에 친미정권이 수립되면서 제소가 취하됐다.
  6. 실제로 니카라과는 중미권에서는 파나마, 코스타리카와 더불어서 기업하기 좋은나라라는 평을 받고 있다. 물론 치안이 상대적으로 좋다는 점이 큰 영향을 끼친것이기는 하지만 그 문제의 니카라과 운하 건설계획도 친 기업적인 정책 중의 하나다.
  7. 니카라과 운하 건설을 하면 물류수송이 원할해지고 일거리도 많이 생기기 때문에 기업이나 일용직 노동자 입장에서는 이득이지만, 사업 특성상 상당수 주민들이 땅을 잃고 이주해야하는데다가 토지보상계획도 체계적으로 수립되어있지 않으며 운하를 건설했을때 숲을 베어야 한다는 문제때문에 환경파괴 염려도 크며 무엇보다도 운하를 잘못 관리했을 경우에는 수질오몀 문제도 크게 발생할수있기에 이에 대한 염려가 크다.
  8. 사실 이는 2006년 대선을 앞두고 니카라과의 선거제도가 오르테가에게 유리하게 짜여지도록 개편되었기 때문이다. 오르테가 피델 카스트로와 친하게 지내기는 하지만 사실 여러번에 걸쳐서 대통령 선거에 지속적으로 출마한만큼 성향이 지속적으로 온건화 되어서 (브라질의 룰라와 비슷한 케이스.) 2000년대 중반 당시에 보수여당이 볼라뇨스 대통령 탄핵문제로 이합집산하는 과정에서 오르테가는 당시 유력 우파정당이었던 헌정주의 자유당과 협약을 맺고 사법제도를 개편하는 대신에 선거제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개편했고 콘트라 인사도 영입했다.(니카라과의 선거제도는 결선투표제지만 35% 이상의 득표율로 2위 후보와 5% 이상 격차만 벌려도 당선될수 있게했다.) 그렇게 해서 당선되었던 것이다
  9. 거기에다가 집권후에 빈민층에 대한 보조금 지급 정책이나 빈민촌 지역에 상하수도나 전기 등을 대대적으로 보급하는 정책을 펼치고 교육예산도 크게 늘리고 그렇다고 해서 대기업에 대해 뚜렷하게 압박하는 정책을 펼친것도 아니기 때문에(오히려 주요 기업과 관계가 좋은 편이다.) 야권의 지지기반 자체를 박살낸것도 영향을 크게 미쳤다.
  10. 하지만 이 나라들은 자본 투자와 노동력 고용, 현장 관리까지 전부 중국인의 손으로 이루어져 자본 투자에 비해서 별다른 경제 개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때문에 해당 국가 국민들 사이에서는 반중, 혐중(嫌中) 기운이 고조되기도 했다. 뭐, 다니엘 오르테가가 복지개념같은걸 모르는 인간은 절대 아니긴 하지만 중국쪽이 건설문제에 대해서는 여론을 무시하기로 유명하기도도 하니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 과연 니카라과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 될지, 일단 지켜볼 일이다.
  11. 퍼펙트 게임 당시 다저스 투수인 마이크 모건도 4안타 완투했지만 수비실책으로 2실점하여 데니스 마르티네즈의 퍼펙트에 가려졌다.
  12. 같은 성격의 국가로 아프리카에티오피아가 있다.
  13. 물론 많이 살고있다고 해봐야 650명 정도이기는 하다. 이들 중 대다수는 섬유업체 직원이나 농장경영등 자영업을 하고있으며 선교사도 일부 주거한다. 그리고 엄연히 대사관이 설치된 나라이기 때문에 한글학교와 한인교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