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오르테가

1945- José Daniel Ortega Saavedra
니카라과의 현재 대통령이며 소모사 독재정권의 붕괴를 주도한 혁명가이지만[1][2] 그와 동시에 권력욕의 화신이자[3] 의붓딸을 성추행한 성범죄자(면책특권 덕택에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거진 반 사실화 되고 있다.[4])라는 오명도 동시에 사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도 야권에 위낙에 인물이 없기도 하고 집권 2기때는 그럭저럭 니카라과를 잘 통치하고 있기 때문에 꽤 광범위하게 지지를 받는 중.

1945년에 혁명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자라나서부터는 소모사 일당의 횡포에 대해 듣고 자라면서 1963년에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에 가입하게 되었고 두각을 나타내면서 1965년에 도시 지역의 투쟁을 책임지는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오르테가는 혁명자금 확보를 위해 은행을 습격하다 체포되었고 고문을 당하면서 7년간 감옥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석방 된 이후로는 쿠바로 망명가서 거기에서 훈련을 받았다. 1974년에 산디니스타 해방전선을 지휘하게 되었고 소모사 일당을 지속해서 괴롭혔다. 물론 지지를 얻은것과는 별개로 소모사 일당이 지닌 사병력이 강했고 산디니스타가 게릴라인지라 여러모로 불리한 점이 있었고 실제로도 자신의 동생인 카밀로 오르테가를 전투중에 잃기도 했고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산디니스타 내에서도 소모사 일당이 1978년부터 소모사 일당이 페드로 차모로를 암살하며 스스로 자폭하였고, 그 이후로부터 보수파와 중도파, 급진좌파에 이르는 다양한 세력들과 연합하여 1년간 소모사를 상대로 혁명전쟁을 펼쳐나갔다.

그리고 1979년에 소모사 일당이 미국으로 도망감으로써 혁명이 성공한 뒤로는 오르테가는 과도연립정권의 수장직에 올랐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임금인상, 문맹퇴치, 의로보건체계 재벙비, 소모사 일당이 소유한 기업과 토지의 국유화 및 땅이 없던 농민들에게 나눠주는 조치를 취하고 이에 따라 생산성도 급속하게 올라가고 세계 각국으로부터 지원도 받는 등 니카라과는 희망차게 출발하는듯 싶었지만 1980년 레이건 대통령이 당선되고나서 점차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소모사 일당과 산디니스타 내에서의 이탈파, 과도정부의 스페인어 강제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원주민들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면서 내전이 대대적으로 터지게 되었고 경제재제도 가하면서 경제도 점차 먹구름이 끼게 된다.

그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오르테가는 1984년에 원주민들과의 협상을 통해 자치권을 주는 방식으로 일단 내전의 고리중 하나를 끊어내면서 1984년 대통령 선거에서 오르테가는 혁명후 첫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콘트라와의 대결을 이유로 징병제 도입과 언론탄압등의 조치를 취하며 점차 지지를 잃어나갔고 대외적으로도 미국의 경제재제가 국제적인 비난에도 지속적으로 강화되면서 IMF와 세계은행으로부터의 대출이 막히는 등 지속적인 치명타를 입었다. 그리고 언론검열 조치가 푼 1980년대 후반에 일부 산디니스타 해방전선 당원들의 부패상이 보도되고 복지지출 축소와 초인플레이션이라는 악재가 겹쳐지면서 1기 임기 초중반에 그런대로 굴러나가던 경제는 1960년대 수준으로까지 추락하였고 일부 민영화 정책도 시행하면서 지지를 대거 잃어 결국에는 1990년 대선에서 40%의 지지를 얻는데 그치며 베올리타 차모로[5]를 위시로 한 우파정권에게 정권을 내주게 된다.

1990년 대선에서 패배한 뒤로 일부 산디니스타 당원들과 농민들이 베올리타 차모로 정권을 뒤엎을려고 햇지만 어차피 쿠데타가 성공해봐야 이미지가 안 좋아질게 뻔하고 실패하면 나가리인지라 쿠데타 시도를 막았다고 전해진다. 여하튼 차모로 정권과 협상을 진행하면서 자신의 동생이 지속해서 니카라과 군의 사령관으로 재직하게 만들게함으로써 산디니스타가 우파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영향력을 유지하게 만들 정도로 정치적 수완을 보였고 차모로 정권이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예상보다 덜받았다는 점도 있기에 여론조사에서 콘트라 출신인 알레만 후보에게 내내 우세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알레만 후보가 과반의 득표율로 당선이 되었고 오르테가는 쓴 맛을 봐야했다.

그리고 1998년에 성추행 스캔들이 펼쳐지면서 다니엘 오르테가는 도저히 씻을수없는 치명상을 입었다. 자신의 부인이 적극적으로 변호한 덕택에 겨우 살아남을수있었지만 혁명가에서 순식간에 변태로 이미지가 추락하는 수모를 겪었고 일부 산디니스타 당원들이 그의 전횡에 회의감을 느끼며 탈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그나마 부인이 열성적으로 변호를 한 덕택에 겨우 살아남을수 있었지만 이를 계기로 이미지를 전환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2001년 대선에서 여론조사에서 과반의 득표율을 기록할것이라고 예상되었지만 미국에서 여전히 다니엘 오르테가를 안 좋게 본건 여전하고 결국 43%의 득표율로 낙선되었다.

그러나 이후로 2005년 대통령 탄핵사건이 일어나며 보수정파가 두개로 분열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이를 잘 활용하여 선거법 개정을 이끌어냈고 이를 바탕으로 2006년 대선에서 한때 자신의 적이었던 콘트라의 수장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하면서 38%의 득표율을 얻어 겨우 당선되었다. 그리고 2기 집권시에는 베네수엘라와 쿠바로부터 석유와 의사들을 받아와서 이를 전력생산과 공공의료서비스, 교육시스템 확충에 쓰면서도 주요기업들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펴는 투드랙 전략을 폈고 이를 바탕으로[6] 보수정당들의 지지기반을 완전히 잠식해나가며 2011년 대선에서 62%의 득표율로 대승을 거두며 3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3선 성공뒤에는 니카라과 운하의 건설계획[7]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길려고 했지만 여론이 반반으로 나누고 중국측 시행사가 자금난에 시달리는 등의 악재로 인해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다만 매년 4-5%대의 경제성장을 그럭저럭 이룩하면서도 공공서비스를 확충했기 때문에 지지율은 매우 높으며 2016년 대선에서도 자신의 부인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는데 이에 대해 야당진영과 라 프렌사를 비롯한 언론계를 중심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있지만[8] 어차피 야당이라고 해도 별다른 대안이 있는건 아니고[9] 보수정당의 지지기반같은건 날라가버린지 오래이기 때문에 대략 60%대의 득표율로 결선같을 치르지 않고도 4선에 성공할것으로 예상된다.
  1. 니카라과에서 오르테가의 위상은 한국으로 친다면 김대중과 김영삼을 합친것보다 크다고 할수있다
  2. 그래도 절친하게 지내는 피델 카스트로와는 다르게 집권 1기때에도 나름대로 민주적으로 선거를 치르고 그 이후로 여러번 낙선당했을때도 내전을 일으킬수 있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승복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물론 그와 별개로 집권 1기 중,후반기에 상당히 독재자적인 모습을 보여주여준건 사실이지만
  3. 니카라과 혁명 이후에 치러진 모든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서 여러번 낙선되면서 점차 좌파적인 색체를 약화시키고 2006년 대선 러닝메이트로 아예 콘트라 반군 수장을 지명하기도 했고(하이메 모랄레스) 낙태금지법을 지지하기도 했으며 대통령에 재선된 이후로는 개헌안을 통과시켜서 대통령 선거에 몇번 출마하든 제한을 두지 않은 법안을 통과시켰다 .
  4. 이 것때문에 불굴의 혁명가에서 파렴치한 변태로 한 동안 위상이 떨어질뻔하기도 했다. 물론 자신도 찔리기는 하는지 대통령에 재당선 된 이후로는 여성인사들을 적극 기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한다.
  5. 페드로 차모로의 부인으로 1980년대 초반에 다니엘 오르테가를 위시한 과두정부에 참여했지만 1980년대 초중반에 등을 돌렸다.
  6. 물론 부정적인 면모또한 있는데 낙태를 불법화 시키는 보수 가톨릭계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거나하는 퇴행적인 면모도 보인다.
  7. 사실 건설계획자체는 이미 100여년 훨씬 이전부터 있었지만 보수정부에서도 추진할려고 했지만 자금문제로 인해서 지속적으로 연기되었다.
  8. 아닌게 아니라 소모사 왕국에 이은 오르테가 왕국이라는 용어도 나올지경이다.
  9. 다니엘 오르테가가 뒤가 상당히 구린 인물인건 맞지만 보수정당도 사실 집권기간에 별다른 경제성장을 이루지못한건 물론이고 부패관련해서는 큰 말할 처지는 아니라는 점이 크기는 하다(...) 산디니스타에게 정권내준 과정만 봐도 말 그대로 스스로 자폭한 꼴인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