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국상(國相) | ||||
음우 (254년 ~ 271년) | ← | 상루 (271년 ~ 294년) | → | 창조리 (295년 ~ ?) |
尙婁
(? ~ 294년)
목차
1 개요
비류부(沸流部) 출신으로, 명림어수의 뒤를 이어 국상이 된 음우의 아들이었다.[2]
271년, 서천왕 때에 국상을 지내던 아버지 음우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국상 직위를 이어받았다. 특이하게도 상루의 경우에는 부자 간에 국상 지위가 계승된 유일한 사례로 손꼽힌다.[3]
이후 봉상왕 때인 294년까지 국상직을 지내다가 결국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국상이 된 인물이 바로 창조리인데, 창조리는 봉상왕이 폭정을 일삼자 훗날에 정변을 일으켜 왕을 폐위하고 미천왕을 옹립한 사람이다.
2 매체에서의 모습
곽재식의 소설 모살기에서 잠깐 등장한다. 봉상왕의 숙부인 달가가 모함을 받아 죽을 때, 그 판결을 주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모든 것이 이미 봉상왕의 음모로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단순히 기계적으로 명령을 집행하는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으나, 우랑이 설치는 것을 방관하는 등의 모습을 볼 때 달가 내지는 달가와 연합하려고 한 극중의 소태후를 공격하려는 반대파 세력이었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