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국상(國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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倉助利
(? ~ ?)
1 개요
고구려의 정치인. 막장의 극에 달한 봉상왕을 폐위시키고 미천왕을 옹립시킨 고구려명재상.
본래의 지위는 남부의 대사자(大使者)였으며, 봉상왕 때에 국상(國相)을 지내었다. 이후에 봉상왕이 폭정을 일삼자 쿠데타를 일으켜 봉상왕을 몰아내고 그 조카인 미천왕을 왕위에 앉혔다.
창조리(倉助利)는 고구려인인데 봉상왕(烽上王) 때 국상(國相)이 되었다. 당시에는 모용외(慕容廆)가 변경의 걱정거리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일러 말했다."모용씨는 군대가 강성하여 누차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창조리가 대답하였다.
"북부(北部)의 대형(大兄) 고노자(高奴子)가 어질고도 용맹하니, 대왕께서 외적을 막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신다면 고노자가 아니고는 쓸만한 자가 없습니다."
왕이 고노자를 신성(新城) 태수로 삼으니, 모용외가 다시는 오지 못했다.
9년(서기 300) 가을 8월에 왕이 15세 이상 되는 전국의 장정을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였다. 백성들이 먹을 것이 부족한데다 노역에 시달려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다. 창조리가 간하여 아뢰었다.
"천재가 거듭되고 흉년이 드니 백성들이 살길을 잃어 장정들은 사방으로 떠돌고 노인과 아이들은 구렁텅이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지금은 참으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염려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대왕께서는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내몰아 토목공사의 부역에 시달리게 하시니, 만백성의 부모가 되신 뜻에 크게 어긋나는 일입니다. 더구나 가까운 이웃에 강한 적이 있으니 만약 우리가 피폐해진 틈을 타서 그들이 쳐들어온다면 사직과 백성들은 어찌 되겠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려주소서."
왕이 성내며 말했다.
"임금이란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존재이다. 궁실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지금 국상은 과인을 비방함으로써 백성들의 칭송을 구하고자 하는가?"
창조리가 말했다.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이는 인(仁)이 아니며,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을 하지 않는다면 충(忠)이 아닙니다. 신이 이미 분에 넘치는 국상의 자리에 있기에 감히 말씀드리는 것이지, 어찌 감히 백성들의 칭송을 바라겠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했다.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가? 다시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창조리는 왕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을 것임을 알고 물러나와 여러 신하들과 함께 폐위시킬 것을 모의했다. 왕은 모면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 《삼국사기》 권49 창조리 열전##
2 일생
2.1 국상이 되다
294년, 봉상왕 때에 국상[1]이었던 상루가 죽자 뒤를 이어 국상이 되었고, 대주부(大主簿) 벼슬을 받았다.
이후 296년, 모용부의 족장인 모용외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해해오자 봉상왕이 이를 막아낼 방도를 고심하던 중에 명장 고노자를 왕에게 추천하여 신성 태수로 삼게 하였다.[2] 과연 창조리의 예견대로 고노자는 모용외의 침략을 잘 막아내었으며, 이후로 모용외가 고구려를 넘보지 못하게 되었다.
2.2 왕을 몰아내다
한편, 봉상왕은 갖은 폭정을 저지르며 폭군이 되어갔다. 전쟁영웅으로 명망이 높았던 숙부인 안국군 달가와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던 동생 돌고 등을 비롯한 친족들을 의심한 끝에 살해하였으며, 왕의 권위를 드러내어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으로 궁궐을 새로 수리하려 하였다. 때문에 흉년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백성들을 징발하여 부역에 동원하려고 하였다.
300년, 봉상왕이 궁궐을 수리하기 위해 온 나라에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15세가 넘는 이들을 징발하였다.[3][4] 일손인 장정들이 부역을 나간데다가 설상가상으로 흉년까지 닥쳐오자 많은 백성들이 식량난과 노역에 시달렸고, 급기야는 살던 곳을 버리고 달아나거나 떠돌아다니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이에 창조리가 나서서 봉상왕에게 백성들의 괴로움을 헤아려서 궁궐 수리를 그만 둘 것을 간하였으나, 봉상왕은 이를 듣지 않으려 했다. 창조리가 다시 한번 간하였으나 오히려 봉상왕은 씨익 쪼개며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으려 하는가? 그만 하시오."라고 답하며 오히려 창조리의 목숨을 위협하였다.[5]
창조리는 왕이 폭정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이 언제든지 자신을 해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결국 창조리는 여러 신하들과 모의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이후에 창조리는 봉상왕을 폐위시켰고, 왕위를 빼앗긴 채 달아난 봉상왕은 두 아들과 함께 자살하였다.
2.3 정변 이후
왕을 몰아낸 창조리는 봉상왕의 조카이자 세상을 떠난 돌고의 아들인 을불을 찾아내어 왕으로 삼으니 그가 바로 미천왕이었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이후로 머슴살이나 소금장수로 연명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했던 미천왕은 이후로 고구려의 군왕으로 거듭난 것이었다.
이후에 창조리는 다시 기록에 등장하지 않아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봉상왕으로부터 목숨을 위협받던 미천왕을 구하고 왕위에 앉도록 도와주었으니 공신으로 대접받으며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후 기록이 전혀 없고, 삼국사기에 미천왕 즉위 직후 괴이한 이변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미천왕에 의해 제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3 평가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창조리를 연개소문과 엮어서 반역열전에 넣어버렸다. 이것은 후일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건국 세력이 강조를 역적으로 분류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직 ‘반정’, ‘쿠데타’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폭군이든 어쨌든 왕을 잡아 죽였으니 역적이라는 논리.
그런데 그렇게 따지자면 왕을 시해한 명림답부가 있지 않나 웃기게도 명림답부는 충신 열전에 들어가 있다 이는 아무래도 명림답부의 경우 정변 이후의 업적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거 같다. 초대 국상에 오르면서 신대왕을 보필하여 민심을 수습했을 뿐만 아니라 1차 좌원전투에서 한나라 군대를 격파한 공이 있다. 그래서 정변을 저지르고도 반신 열전보다는 충신 열전에 기록된 것. 창조리의 경우도 정변 후의 업적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면 이쪽 보다는 명림답부와 함께 명신 열전에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4 매체에서의 모습
곽재식의 중편 소설인 지진기[6]에서 등장한다. 다만 직접적은 등장은 한 번도 없으며 내용상으로 보면 사실상 흑막과 같은 인물이다.
김진명의 소설인 고구려에서는 충신이며 지략에 능한 인물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