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지

소량의 역대 황제
5대 숙종 민황제 소연명6대 목종 경황제 소방지황조 멸망(진무제 진패선)
7대 영가왕 소장
묘호목종(穆宗)
시호효성황제(孝成皇帝)
연호소태(紹泰, 555년 10월 ~ 556년 8월)
태평(太平, 556년 9월 ~ 557년 10월)
소(蕭)
방지(方智)
혜상(慧相)
생몰기간543년 ~ 558년
재위기간555년 ~ 558년 5월 5일

1 소개

소방지(蕭方智 543년 ~ 557년, 재위 555~557)

재위 기간 동안 소태(紹泰), 태평(太平)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영가왕 소장(蕭莊)은 묘호는 목종(穆宗), 효성황제(孝成皇帝)라는 시호를 내렸고, 널리 알려진 시호로 경황제(敬皇帝)는 진패선이 내린 시호이다.

2 목차

대동 9년(543년)에 태어났으며 소역과 하씨의 9남이다. 자는 혜상이고 아명은 법진으로 승성 원년(552년)에 진안왕으로 책봉되고 이듬해 강주자사에 임명되었다. 소방지의 형제들은 대부분 요절하거나 서위의 강릉 습격 때 소역과 함께 사망했다. 승성 3년(554년) 12월, 태위 왕승변, 사공 진패선에 의해 태재로 옹립되었다.

서위가 강릉을 깨뜨리고 소역을 죽이고 소태 원년(555년) 정월, 소찰을 황제로 세우고 괴뢰정권인 후량을 건국했다. 거기에 8년 전에 사로잡혔던 정양후 소연명을 석방시켜 양나라 황제로 세우고 강남을 뺏을 작정을 했다. 2월, 소방지가 황제에 올랐으나, 북제는 소방지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왕승변에게 서한을 보내 소연명을 황제로 세우라고 했지만 왕승변은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3월, 북제의 군대가 침공해 오자 왕승변은 겁을 먹고 소방지를 황태자로 세우는 조건으로 소연명의 동의하에 그를 5월에 황제로 내세웠다. 원래 진패선과 왕승변은 후경 토벌부터 대권 장악까지 같이 세운 사이라서 서로 자식들을 정략결혼까지 시켰다. 그러나 위태로운 동맹 관계였으며 경구를 지키던 진패선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왕승변에게 소연명 추대에 대해 강경한 충고를 했지만 거절당했으며 결국 이때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9월에 진패선은 군대를 보내 왕승변을 죽이자 소연명은 스스로 퇴위했다. 10월에 진패선은 다시 소방지를 황제로 추대하고 혼자 대권을 장악했다.

소방지는 북제에 서한을 보내 '북제의 신하로써 영원한 번국이 되기를 청원합니다'라고 보냈다. 북제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역양에서 양나라와 동맹을 맺었지만 북제는 뒤통수를 쳤다. 한편으로 진패선에 대해 불만을 품던 양나라 초주, 진주자사 서사휘와 남예주자사 임약을 후원하여 건강을 기습하게 했지만 실패했다. 이듬해 3월, 북제는 서사휘, 임약과 함께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다시 건강을 공격했지만 진패선이 북제를 대패시키고 서사휘를 사로잡은 다음 죽였다. 이로 인해 진패선의 위망은 날로 높아졌고 9월에는 승상, 녹상서사, 진위대장군, 양주목, 의흥공이 되었다. 태평 2년(557년) 9월에는 상국이 되고 10월에는 진왕이 되었다. 10월, 소방지는 진패선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선양하고 강음왕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4월, 진패선은 사람을 보내 소방지를 죽였는데 이 때의 나이가 16세였다. 그래도 진패선은 양나라 황족을 몰살시키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 덕분인지, 진나라가 수나라에 멸망했을 때 수나라 문제 양견은 진나라 황족들을 살려주고 서북 변방으로 이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