廟號
1 개요
원래 중국에서 죽은 군주의 영(靈)을 태묘(太廟: 조상의 영을 제사지내는 묘, 종묘)에서 제사지낼 때 사용되는 칭호(이름)로 추증되었으며, ~조(祖), ~종(宗) 등의 형태를 갖는다. 종묘에 올라가야만 올릴 수 있으며 광해군과 연산군처럼 폐위되고 영영 복권되지 않은 군주의 신위는 종묘에 없기 때문에 묘호가 없다.
전한대(漢代)에는 묘호로 알려진 황제는 적었지만, 그 후 점차 일반화하여 당대(唐代) 이후 황제의 시호가 점차 길어졌기에 이를 줄여서 부르기 위해 대개 묘호를 약칭 대신으로 사용하였다. 명나라대부터는 한 명의 황제는 하나의 연호만 쓰는 일세일원제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군주의 약칭으로 살아있는 황제 본인에게도 사용가능한 연호를 사용했다. 그래서 황제의 통칭 중 하나가 '묘호 연호+제'이다. 태조 홍무제 같은 식.
시호와의 차이점은 시호는 군주, 신하 양쪽 모두에게 쓸 수 있지만 묘호는 국가의 묘(廟)에 올라간 군주의 경우에만 붙는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어떠했는가를 평가하는 시호와 달리 묘호는 '군주'로서의 업적을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제후에게도 역시 쓸 수 없다.
현대에선 명나라 이후 중국의 황제들을 부를 때 '묘호 연호+제'에서 묘호도 빼버린 '연호+제'가 통칭으로 쓰이고 있다. 이 영향인지 대한민국에선 고려 이후 군주들의 통칭이 대부분 '~조', '~종'이고 대한제국에서야 군주의 지위가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조', '~종'은 왕으로서의 칭호이고 중국 황제들의 통칭으로 쓰이는 '연호+제'가 황제로서의 칭호인 걸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묘호는 원칙적으로 천자국만 쓸 수 있는 거였기 때문에, 묘호가 '연호+제'보다 격이 낮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2 한국에서의 사용
묘호에 붙는 글자는 시호를 붙이는 시법에 준한다. 원래 황제에게만 붙이는 것으로 명목상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이었던 한반도 왕조들에서는 원칙적으로는 쓸 수 없었지만 실제로는 주요 왕조들은 다들 썼다(...)[1]
흔히 잘 아는 고려나 조선에서는 일부 폐위된 왕을 제외하면 모든 왕이 묘호가 있어서,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본래 고대에는 묘호 시스템의 원조인 중국에서도 당나라 이전까지는 역대 군주 중 일부 소수의 중요한 업적을 세운 군주에게만 특별히 묘호를 올리는 개념이었다.[2] 그래서 삼국시대, 남북국시대까지는 한반도 왕조들도 모든 왕이 아닌 일부 왕에게만 묘호를 올렸다.
고구려의 경우 명칭 그대로 6대 국왕 태조왕에게 묘호를 올렸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학계에선 묘호라기보다 묘호와 비슷하게 지은 호칭이라는 게 통설이다.
백제는 한국의 기록에는 전하지 않고, 일본의 사서인 《속일본기》에 백제의 태조가 도모왕이라고 기록돼 있다. 한반도에서 고대에는 한자 인명을 쓰지 않았고 고유어 인명을 썼으며, 기록에는 이것을 한자로 음차하여 표기했기 때문에 인명 표기가 통일되지 않은 채 여러 가지로 쓰였으므로 이 도모왕은 발음이 비슷한 고구려 시조 주몽(추모)일 가능성이 높다.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온조왕이 유리왕에게 밀려나 이주하여 백제를 세운 뒤 동명왕을 모시는 사당을 지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기 때문에 백제 왕실이 주몽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백제는 고구려 왕을 비정통 또는 방계로 취급하고 그 과정에서 주몽을 태조라고 높였을 가능성은 예상할 수 있다.
신라는 무열왕에게 태종이라는 묘호를 올렸다. 삼국사기 등의 사서에는 그 뿐이지만, 그 외에 진흥왕 순수비와 흥덕왕릉비와 같은 금석문에서 태조라는 묘호를 쓰는 신라의 임금 성한왕에 대해 거론되는데, 이는 신라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신라시대에 태조로 불리는 왕이 누군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에 대해 삼국사기 등 사서에는 기록이 없어 대체 누가 신라의 태조인지에 대해 설이 분분한데 박혁거세, 김알지, 미추 이사금 등이 그 후보로 거론된다.
앞서 말했듯 원래 묘호는 황제국만 쓸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삼국통일전쟁 이후 당나라에서 신라의 묘호 사용을 직접적으로 문제삼은 적이 있다. 신문왕 때 너희 나라의 선왕 김춘추가 감히 우리 당제국 태종(이세민)과 같은 묘호를 쓰는 건 매우 분수에 넘치는 일이니 칭호를 고쳐라라고 돌직구를 날렸지만 이러저러해서[3] 우린 계속 쓸 거라고 답변했고 당나라도 더 이상 문제삼지 않았다.
고려는 원 간섭기 이전인 충렬왕 이전까지 모든 왕에게 묘호를 올렸다. 한국사 왕조 중에서는 제후국 예법을 가장 철저하게 따랐던 조선조차도 이 부분에서는 그냥 무시하고 자신들의 왕에게 묘호를 올렸다. 고려와 조선 역시 명목상으로는 제후국이었기 때문에 일단은 중국 몰래 쓴 것이다. 즉 중국과 교류할 때는 태조니 성종이니 하는 묘호 대신 원간섭기 때처럼 'xx왕'이라고 했다.
조선 성종은 "우리는 제후국인데 묘호를 붙이는 것은 참람한 일이다."라며 선왕들의 묘호도 삭제하고 자신에게도 묘호를 붙이지 말라고 지시했으나[4] 신하들이 이미 선왕들의 종묘 신주, 묘비나 각종 문서에 묘호가 기록되어 있어서 이것을 다 지우려면 비용이 든다며 반대하여 없던 일이 되었다. 사실 성종의 주장이 아주 억지나 사대를 위한 명분만은 아니다. 성종 스스로도 과거 국가들 가운데 묘호를 쓰지 않은 예를 들면서 조뿐만 아니라 종도 내켜하지 않았을 뿐이다. 묘호는 본래 상나라의 제도였기 때문에 주나라 이후로 쓰지 않다가 한나라 때 부활했다. 그리고 당나라 이전에는 묘호를 일부 소수의 천자에게만 올렸던 것. 이후 성종 사후 '모某왕'이라고 두라는 것을 연산군이 아예 상당한 존호인 성종을 딱 붙여버리면서 성종의 유지도 없던 것이 되었다.[5]
정유재란 때 명나라의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명을 치려한다는 무고를 한 적이 있다. 그 때 증거로 든 것 중 하나가 묘호의 사용이었다. 바로 몇년 전에 일본이랑 피터지게 싸운 조선이 일본과 손잡았다는 말 자체가 허무맹랑한 것이었기에 정응태가 사형당하는 것으로 끝났으나, 다른 건 다 모함이었다고 해도 묘호 사용은 사실이었기에 이것만큼은 고려 때부터 이어지던 것을 그냥 계속하는 잘못을 범했다고 사죄해야 했다. 그러고도, 심지어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후에도 계속 사용했지만. 이를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느슨해지긴 했어도 당대에 묘호를 사용하는지 아닌지를 상당히 신경썼다는 걸 알 수 있다.
3 용례
원칙적으로 왕조의 창시자에게는 조(祖)를 올린다. 대부분 태조, 고조 둘 중 하나다. 그 외에 재위 기간 중 국가가 전복될 만한 위난이 닥쳤으나 잘 대처했을 때, 혹은 새로 건국한 것에 버금갈 정도의 큰 개혁을 완수한 경우에도 조를 쓴다. 왕조의 창시자의 선조에게 부여되는 경우(추존)도 있으나, 예외가 많다. 반면 종(宗)자가 들어가면 덕이 있다는 뜻으로, 쉬운 말로 그냥 그럭저럭 어려운 사건도 없었고 대단한 업적도 없이 자리보전이나 잘 했다는 뜻이다. 다만 종도 적어도 백성들을 잘 다스려서 성군 소리를 들을 정도는 되어야 붙었고, 일반적인 황제에게는 종도 안붙은 일이 흔했다.
앞서보듯 초기에만 해도 묘호 자체, 즉 조와 종 모두가 드문 것이었다. 종은 뒤에 남발되지만 조는 더더욱 남발되지 않았기에 조의 남발은 조선만의 특수사례였다. 고려때는 그 많은 국란이 있었지만, 잘 헤쳐나간 경우에도 '조'를 붙인 왕은 오직 태조 왕건밖에 없었다.
묘호의 본고장인 중국에서는 대체로 조를 아주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안썼다.
- 한은 태조 유방이 태조로 묘호를 받았다. 흔히 한 고조로 알려져 있지만 유방의 정식 묘호는 '태조'이다. '고조'라는 표기는 '고황제'의 존칭이었으며, 후한을 건국해서 사실상 한을 재건국한 세조 광무제의 둘 뿐이며, 촉한을 정통으로 볼 시 열조 소열제가 있긴 하나 촉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올린 묘호는 아니다.
- 수나라 역시 수문제는 고조로 묘호를 받았고 수양제 역시 세조로 올려졌으나 이를 추존한 세력이 정통으로 인정받지못하는 왕세충 하의 꼭두각시 황제였기 때문에 후세 사가들은 양제를 세조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선 잘 인정하지 않는다.
- 청나라는 누르하치(태조)와, 베이징 입성과 중원을 점령한 치적을 세운 순치제(세조)[7],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대만을 얻었으며 몽골로 친정한 후 후환을 제거하여 중국 완전정복이라는 업적을 이룩한 강희제(성조) 3명.
이처럼 일반적인 경우 "조"를 받은 왕은 나라를 세우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제2의 개국, 국가의 재구축이라 할 만한 큰 위업을 달성한 왕이었다.
실제로 추존 군주중 최초로 "조"의 묘호를 받은 이는 바로 조조다. 이때만 해도 조조가 위왕으로서 황제에 오르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조위를 개창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태조라는 묘호를 받았고 이후로도 왕조 성립 이전에 기틀을 마련하거나 일정한 공이 있던 조상이라면 조를 받았다. 이 덕분인지 수나라 때까지만 하더라도 추존 군주는 모두 창업 군주의 부친이나 조부 뿐이었다. 하지만 당나라부터는 이런 규칙이 깨지고 증조부, 고조부, 많기로는 4~6대조까지 추존하면서 모두 묘호에 조를 올렸다. 4대조까지 추존하는 것은 나중에 전례란 이름으로 수입되어서 조선 건국시 이성계의 조상 4대조를 추존하고 나중에 고종이 황제가 되자 자기 위 4대조의 조선국왕을 황제로 추존한다. 영조는 4대조가 넘으므로 영종이 영조로 오르는 정도에서 끝났지만, 그 손자인 정조는 3대조위라서 황제로 추존되었다. 정조의 소원으로 장종으로 추숭했던 고종의 4대조인 사도세자도 장조의황제로 추존 황제로 만들어주었다. 태조 이성계의 경우 왕조 창시자이기에 예외로 두고 그냥 황제가 되었다.
물론 어디나 예외는 있다. 대체로 혼란기에는 조를 남발한 경우가 많았다. 조위(2대 열조 조예)를 시작으로 오호십육국시대 및 남북조시대, 오대십국시대의 국가들은 2명 이상이 조를 받은 국가들이 수두룩하다. 그 가운데 탑은 북위로 실제 재위한 황제 중 조를 받은 이가 4명이나 된다.
3.1 고려의 경우
고려는 추존된 왕건의 선조들을 제외하고 실제로 왕을 했던 사람들 중에서는 1대 태조 왕건에게만 조(祖)을 붙였으며 2대 혜종에서 24대 원종까지는 모두 종(宗)을 붙였다. 25대 충렬왕부터 30대 충정왕까지는 앞에 조종의 묘호 없이 원나라가 붙여준 충(忠)을 붙여 시호만 받았다. 31대 공민왕도 묘호 없이 명이 내려준 공민을 시호로 삼았다. 32대 우왕, 33대 창왕은 이성계 세력에 의해 정통 왕씨가 아니라는 모함을 받아 폐위되었으므로 본명인 우와 창으로 대신하였으며 마지막 군주인 34대 공양왕은 묘호와 시호도 없이 공양군으로 불리다가 조선 태종때에 공양왕이란 시호를 받게된다.
3.2 조선의 경우
사실 조선의 경우는 다른 왕조에 비해 조(祖)를 받은 왕이 지나치게 많다. 일단 기본 용법 중 하나인 개국 시조 앞 몇 대를 추존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보자면 조선에서 실제로 재위한 왕 가운데 조를 받은 왕은 7명이나 되며 추존된 왕인 태조 이성계의 4대조(고조부, 증조부, 조부, 부친), 사도세자, 효명세자까지 합치면 무려 13명이나 된다.
다른 왕조의 사례를 보면 바로 전 왕조인 고려도 추존된 태조 왕건의 3대조인 국조, 의조, 세조를 제외하면 500년 동안 조를 받은 왕은 태조 한 사람뿐이다. 이런 조종 묘호 시스템의 원조인 중국에서 찾아보면 한나라, 명나라, 원나라(몽골 제국)는 두 명[8], 심지어 당나라나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등은 중국 왕조치고 오래 지속된 나라들인데도 창업군주 딱 한 사람만 '~조' 자 묘호를 받았다.
상기 언급하였지만 시호를 짓는데 시법이 있듯이 당연히 묘호를 짓는데 그 방법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유난히도 조선에서는 세조 이후 지켜진 적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처음에는 "종"으로 묘호를 올렸으나 이후에 추숭의 경우가 너무 많다.
일단 이유는 있으니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그 위난을 잘 해쳐나왔다 해서 조라는 묘호를 내린 것이다. 선조나 인조의 경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문에, 세조의 경우는 계유정난 때문에 조를 붙였다. 이 경우에도 1차적으로 붙인 묘호는 종(세조는 신종, 선조는 선종)이었지만 후계자들(예종, 광해군)이 억지로 조로 추숭해버렸다. 다만 인조는 1차 선정부터 열조(烈祖)였다가 효종이 더 높은 글자를 쓴다고 인조로 바꿔버렸다. 결국 태조 이성계를 제외하고 세조부터는 억지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조정의 만년 떡밥.
한편 순조는 철종기에 조를 받았는데 지금도 한국사의 작은 떡밥으로 남아있다. 철종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처사로 보이며 추숭한 목적은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고, 사학(천주교)을 처단했기 때문".
고종 때는 대한제국을 세우면서 왕위에서 제위로 바꾸고, 고종을 기준으로 4대조까지의 왕들을 황제로 높이고, 그에 따라 묘호를 높이면서 정조는 원래 정종이었다가 조로 추숭되었다. 조선 말기 계보도가 조금 막장이라, 고종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익종)의 아들로 양자입적한 상태라 효명세자부터 4대를 역산하면 사도세자, 정조, 순조, 효명세자가 된다. 그래서 고종은 이들 4대를 장조, 정조, 순조, 문조로 추존했다. 그나마 엄밀히 말해서 이 4대 추존(순조 제외)은 조선의 조 남발 사례에서 한발자국 벗어나 있다고 볼 여지도 있다. 어쨌든 황제 즉위라는 준개국에 해당하는 상황에서 개국 선조 몇대를 조로 추존하는 것은 중국에서도 일반적인 사례였다. 다만 영조의 경우는 4대 추존이라는 일반적인 예법과 별도로 따로 추진된 추존사례이다. 원래는 영종이었다가, 고종 27년, 그러니까 대한제국을 세우기도 전에 그냥(...) 추존했다. 제일 오래 재위하면서 나라를 잘 다스렸으니까 추존한다는 뉘앙스. 단 영조는 황제로 추존되지는 않았다.
'조'를 붙인 경우들은 대부분 정통성 강화를 위해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정통성이 없을수록 조가 더 남발된 것이다. 세조 이후 조선의 왕위계승이 계속 방계계승으로 이어지면서 왕위의 정통성 문제가 끊임없이 불거져 나오게 되었다. 사실 세조는 세종의 적차자이니 방계는 아니지만, 적장자 다음으로 적장손이 대를 잇는게 당연한데 그걸 찬탈(...)했으니 방계에서 굴러들어온 것보다도 정통성에 애매함을 느꼈을 것이다. 후대의 선조는 정식 왕비에서 태어난 적자의 계통이 끊어지는 바람에 확실하게 방계승통을 시작해버렸다. 이런 정통성 논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예송논쟁이었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예론과 같은 보수적 학풍이 대두하면서 신하들이 충신이라는 명분을 어떻게든 마련하기위해 왕의 칭호를 높이는 데 꽤나 힘썼고, 조 호칭은 더더욱 남발될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조선왕조 자체가 28대 500년으로 길기도 했고, 왕족 내부의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 양위도 결코 드문 편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묘호에 '조'를 붙이는게 나름대로 중요한 문제였지만 결국 지금 보면 왕에 대한 평가는 묘호에 '종'을 붙이냐, '조'를 붙이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 자명하므로 결과적으로는 부질없는 짓이나 다름없다. 단적으로 예를 들어보면, 선조나 인조가 '조'가 붙었으니 세종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 묘호는 중국에서도 당대 이전엔 드물었기 때문에 한국의 고대왕조에선 고구려의 태조대왕, 신라의 태종무열왕 정도만 확인된다. 허나 고려는 원간섭기 이전엔 대놓고 황제국을 칭하거나 부분적으로 외왕내제의 체제를 가졌기에 묘호를 썼고,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을 표방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부분적으로 외왕내제의 시스템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 ↑ 예를 들어 한나라 역대 황제 목록을 보면 묘호가 있는 황제보다 없는 황제가 더 많다. 삼국지연의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후한 영제, 헌제 같은 암군들은 대표적인 묘호가 없는 황제.
- ↑ 답사의 요지는 무열왕 역시 덕이 있고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루었으니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큰데 신라 역시 당에 대해서 당당한 외교적 자세를 유지했고 자국의 정통성을 지키려 했다고 볼 수 있다.
- ↑ 이에 대해서 사림의 대표격 인물이기도 했던 김종직이 반대하며 든 것이 바로 태종 무열왕의 사례였다.
- ↑ 사실 대간들은 인종이라고 하자고 했는데, 성종보다 인종이 유교국가에서는 더 좋은 묘호다.
- ↑ 왜 태조가 없이 바로 세조(사마염)로 넘어가냐면, 서진 건국 전에 사망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인 사마의와 사마소를 각각 고조와 태조로 추존했기 때문이다.
- ↑ 엄밀히 따지명 도르곤 섭정기에 이루어진 일이지만.
- ↑ 창업군주를 제외하면 다른 한 사람은 각각 광무제, 영락제, 쿠빌라이 칸인데, 이 쪽 역사를 안다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세 사람은 사실상 나라를 새로 세운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