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비르/배경

1 단문 배경

특유의 무자비함으로 명성을 떨친 용병 시비르. 모두들 그녀를 전장의 여제라는 호칭으로 부른다. 꺾이지 않는 용기와 끝없는 야망으로 똘똘 뭉친 시비르는 엄청난 유명세와 부를 모두 거머쥐었다. 이런 그녀의 앞에 조상 대대로 내려온 비밀이 그 정체를 드러냈다. 시비르는 이제 자신이 택한 길을 걸을 것인지, 숙명을 따를 것인지를 두고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2 장문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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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든 은화든 상관 없어. 보수만 짭짤하면 그만이지."

시비르는 슈리마 사막에서 활동하는 보물 사냥꾼이자 용병 대장이다. 몸값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비싸지만 전투를 벌이는 족족 이겨 몸값에 걸맞은 솜씨로 명성이 자자하다. 대담무쌍한 성격에 원대한 야심까지 겸비한 시비르. 그녀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슈리마의 묘역에서 진귀한 보물을 찾으며 남다른 자부심을 느낀다. 의뢰인에게서 두둑한 대가를 챙기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슈리마에 고대의 존재들이 귀환하면서 시비르도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사막에서의 삶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시비르가 뼈아프게 깨달았던 건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힘든 일을 겪고 난 후였다. 바로 크타온족, 슈리마 제국의 가장 악명 높은 침입자인 그들의 손에 온 가족이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이 참혹한 사건 이후, 시비르는 동네 좌판에서 먹을 것을 훔치고 슈리마의 묘역에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내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갔다.

값나가는 물건들은 이미 도적떼들이 한 차례 휩쓸고 간 뒤였다. 하지만 시비르는 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찾아내는 데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예리한 관찰력과 단호한 의지를 바탕으로 그녀는 비밀 통로를 찾아냈고, 또 아주 오랜 수수께끼를 풀어 그 동안 드러나있지 않던 지하 묘지도 발굴해 냈다. 이 과정에서 눈앞에 닥친 위기를 재빠르게 모면했음은 물론이다.

때때로 시비르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보물 사냥꾼 일을 함께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혼자서는 힘에 부쳤기 때문이었다. 손에 쥔 것이라곤 고작 밧줄과 양초 몇 개뿐. 더구나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매번 비좁은 터널 아래로 내려가 돈이 될만한 것들을 찾아 헤매는 것은 여간 고달픈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몇몇과 팀을 이루어 보물 사냥을 하던 시비르는 비밀 무덤 하나를 파헤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필시 어마어마한 양의 값비싼 물건들이 묻혀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는 기분 좋은 상상도 마음껏 했다. 무덤 아래로 내려가 몇 시간을 탐색한 끝에 드디어 숨겨진 출입구 하나를 발견해냈다. 하지만 그곳으로 이어진 건 티끌 하나도 없는 텅 빈 방이었다. 몇 시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에 격분한 시비르의 오랜 동료 마이라는 그녀에게 자격이 없다며 리더 자리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시비르는 말 같지 않은 소리라며 단칼에 거절했고, 결국 피 튀기는 싸움이 오고 갔다. 시비르보다 훨씬 큰 체구에 힘도 센 마이라는 재빨리 그녀를 제압해버렸고, 결국 시비르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몇 시간 뒤, 어둠 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시비르는 불빛을 찾아 더듬더듬 빠져 나왔다. 그렇게 해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가 마주한 건 비통한 현실이었다. 자신을 배반한 마이라가 모든 재산을 챙겨 달아나버린 것이었다.

그 후, 시비르는 두 번 다시 배신 따위는 당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아이하 지하로우가 이끄는 전설의 용병 부대에 가입했다. 그곳에서 전쟁 물자를 나르고 때로는 길을 찾는 역할도 하면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그렇게 수년을 그 속에서 생활했지만 시비르는 담요 밑에 늘 단검을 숨겨 놓고 지냈다. 지하로우는 물론 그의 부하들까지 누구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돈만 주면 충성 따위는 쉽게 내던질 수 있는 족속이라는 것을 시비르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비르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할 수 있는 한 뭐든 배우고자 노력했다. 매일같이 어린 용병들과 대적하며 이를 악물고 싸움의 기술을 익혔다.

이런 결연한 의지를 바탕으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것을 눈여겨 본 아이하 지하로우는 시비르를 자신의 심복으로 삼았다. 지하로우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일로 아무나 누릴 수 있는 영광이 아니었다. 이후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시비르는 그 누구도 함부로 대적하지 못할 강한 전사로 성장했다. 그녀는 아이하가 이끄는 부대의 병사로서 수많은 적을 무찔렀다. 전쟁이 끝난 후, 시비르는 원정대를 결성하여 슈리마의 잃어버린 보물을 찾아 나섰다. 갈 곳 잃은 용병들이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시비르도 차츰 지하로우의 그늘에서 벗어나길 원하게 되었다. 사실 지하로우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슈리마 지하 무덤의 구조를 훤히 꿰뚫고 있던 시비르 덕분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금은보화는 물론 모든 영광은 오롯이 지하로우의 몫이었다. 더욱이 명예를 중시하는 지하로우의 태도는 시비르와 좀처럼 맞지 않았다. 지하로우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지도자라는 말까지는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비르는 달랐다. 돈이 될만한 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손에 피를 묻히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도덕의 잣대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상당수의 용병이 시비르와 동조하여 지하로우를 축출하는 데 모의했다. 그런데 시행 전날, 이 음모는 발각되고 말았다.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 지하로우는 시비르가 잠든 틈을 타 그녀를 제거해버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시비르도 그 정도의 공격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결국 맹렬한 혈투가 벌어졌고 지하로우는 시비르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하지만 시비르는 한 때 자신을 자식처럼 돌봐주었던 지하로우의 목숨까지 앗아버릴 수는 없었다. 고아나 다름없던 처지에서 지금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지하로우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비르는 반쯤 채워진 물통 하나와 동전 한 닢만을 쥐여주고는 지하로우를 사막 한 가운데 홀로 남겨둔 채 떠나왔다.

시비르가 이끄는 부대의 명성은 순식간에 슈리마 제국 전체로 퍼져 나갔다. 무시무시한 전력을 지녔음은 물론 전설 속의 유물 발굴에도 탁월한 수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막 내 각 거물, 부호, 유물 수집가들은 앞다투어 시비르에게 전쟁 지휘를 맡기거나 숨겨져 있는 각종 진귀한 보석들을 찾아 달라고 주문했다. 위험 지역을 탐험하며 고대 유물을 파헤치는 것은 꽤 높은 수준의 대가가 요구되는 일이었지만 비용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시비르만 영입할 수 있다면 얼마가 됐든 기꺼이 지불했다. 시비르에 대한 사람들의 요구사항은 제각각이었다. 슈리마의 족장들은 녹서스 무리로부터 영토를 지켜줄 것을, 군 지도자들은 병력을 투입하여 적군을 초기에 제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일천 번의 폭풍이 몰아치던 해에, 슈리마 제국의 고대 도시 나시라미의 영주는 시비르에게 십자 모양의 칼날을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것은 나시라미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보물이었다. 영주는 감시 병력까지 보내는 등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몇 달에 걸쳐 이루어진 탐색 끝에 시비르는 마침내 칼날의 위치를 찾아냈다. 그것은 수십 톤에 달하는 돌무더기 속, 어느 옛 영웅의 석관 안에 감춰져 있었다. 이토록 깊은 곳에 있는 것을 감지해내다니! 가히 신기에 가까운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칼날은 온통 금과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였다. 아주 오래 전의 물건이었지만 마치 근래에 만들어진 것인 양 그 칼날은 매섭게 빛났다.

순간 시비르는 섬뜩해졌다. 칼날이 마치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함께 온 나시라미 감시병의 우두머리가 칼날을 내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시비르는 이미 자신의 손에 넣기로 작정한 터였다. 그녀는 원을 그리며 십자 칼날을 휙 던졌다. 그러자 감시 군단의 우두머리를 포함, 그 뒤에 서 있던 세 명의 감시병까지 순식간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칼날은 다시 시비르의 손으로 돌아왔다. 범상치 않은 무기임에 틀림없었다.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은 너무나 자연스러웠지만 던질 때만큼은 아주 힘있게 뻗어 나갔다. 나시라미 감시병의 시체를 대동한 채, 시비르는 위풍당당하게 무덤을 빠져나갔다.

시비르의 위업과 극악무도한 전력은 슈리마 제국에서라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어느덧 이웃 나라에서도 그녀는 꽤 유명인사가 되어 녹서스의 여성 귀족카시오페아까지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카시오페아는 자신이 찾는 유물이 슈리마의 사막 한가운데 묻혀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반드시 찾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돈은 얼마든지 지불하겠노라며 그녀는 시비르를 고용하여 유물 찾기 여정에 나섰다.

시비르는 본능적으로 카시오페아를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꽤 돈이 되는 이번 일을 놓칠 수는 없었다. 마치 미로 같이 구불구불한 지하 무덤으로 내려가면서 시비르 용병 중 상당수는 덫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카시오페아는 되돌아 가려 하지 않았다.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어둠 속에서 얼마간 헤매고 난 후, 시비르와 카시오페아는 드디어 희미하게 새겨진 그림 조각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고대 황제와 초월체 전사들을 새긴 것으로 이들의 머리는 짐승처럼 묘사되어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대부분의 건축물은 분명 모래사막 아래에 수천년 동안 묻혀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 조각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각물을 응시하던 찰나, 시비르는 오싹한 기운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운명이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아아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사막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카시오페아가 그녀의 등에 십자 칼날을 내리꽂은 것이다. 시비르는 고통 속에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붉은 피가 모래사막을 물들였다. 마치 꺼져 가는 등불처럼 시비르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시비르의 운명은 결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흘린 피 속에서 선대 왕 아지르가 부활한 것이다. 아지르 왕은 시비르의 시체를 생명의 오아시스로 옮겼다. 이곳은 치유의 샘물이 흐르는 성스러운 물가였다. 수 천 년이 넘도록 바싹 말라 있던 오아시스는 이제 아지르의 부활과 함께 수정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곳으로 변화되었다. 치유의 물이 시비르의 시체를 뒤덮자 깊이 팬 칼자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헉헉거리며 숨을 뱉어낸 시비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러고는 한참을 멍하게 서 있었다.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꿈속을 헤매는 듯 보였다. 어딘가 익숙한, 온화한 표정의 얼굴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비르는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분간되지 않았다. 그녀를 빙 둘러싼 채 희뿌연 먼지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러면서 마치 그림을 그리듯 순식간에 우뚝 솟은 궁전과 화려하게 장식된 사원, 드넓은 광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래 무덤 위에서 슈리마 제국의 옛 도시가 다시 한 번 탄생한 것이다. 아지르의 부활과 함께 이 고대 도시는 이전의 장엄한 영광을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시비르는 어릴 적부터 전설의 초월체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랐지만 애당초 어린애들이나 믿는 한낱 소설 같은 이야기로 치부해 버렸었다. 그러나 허허벌판의 모래사막에서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된 고대 도시가 지금 그녀의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또 옛이야기 속에서나 들어봤을 법한 아지르 왕과 마주한 채 그에게서 오랜 혈통과 왕국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시비르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사실이라고 믿어온 것들이 전부 거짓인 것만 같았다.

아지르의 이야기들이 여전히 귓가에 울리는 듯했지만 시비르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잃어버린 옛 제국의 후계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모든 생각을 애써 지워내고자 했다. 아지르의 모든 말이 사실이라 해도 슈리마 제국의 여러 종족이 하나로 통일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강력한 군 지도자가 나타나 돈과 병사를 등에 업고 몇몇 소수 종족을 다스릴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한때일 뿐, 결코 지속되기는 힘들어 보였다. 단일 군주 아래 단일 제국. 그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지르가 부강했던 옛 제국의 명성을 되살리기 위해 본격적으로 노력하기 시작하자 시비르는 이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좋건 나쁘건, 운명의 그림자는 이미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인생의 두 번째 기회와 마주한 것이다.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다. 주어진 길을 따라야 할 뿐. 이제 새로운 유산을 만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3


목구멍에 유리 조각이 잔뜩 들러붙은 것처럼 칼칼했다. 갈라진 입술은 불이 붙은 듯 화끈거렸다. 눈이 자꾸만 침침해져서 집중하기가 영 힘들었다.
‘이만큼 기다렸으면 슬슬 움직일 때도 되었는데...’

시비르는 바위 너머를 슬쩍 내다보았다. 짐마차들은 아직 샘 주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하필이면 크타온족의 야영지라니, 재수가 없어도 너무나 없었다. 시비르가 죽기를 바라는 부족이야 많기는 하지만, 크타온족은 그중에서도 유독 앙심이 깊은 부족이었다.

시비르는 말라붙은 강바닥에 꾸려진 야영지를 다시금 훑어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짐마차에 올라타 출발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비르는 아무래도 크타온족의 장정 여섯 명과 싸울 각오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어깨 근육을 풀었다. 불시에 기습해야만 승산이 있을 것이다.

그 앙큼한 녹서스 여자에게 기습당했던 때를 생각하면...

시비르는 머리를 휘휘 저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목이 너무 말라서 정신이 산란해지는 것 같았다. 물을 충분히 가져오지 않은 게 뼈저리게 후회되었다.

그 도시에는 물이 가득했다. 물줄기가 콸콸 뿜어져 나오는 석상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모두 어느 고대의 존재가 되살려낸 것이었다. 그는 시비르의 목숨을 구하고 상처를 치료해주고는, 주위의 신전들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모래밖에 없는 죽은 도시에서, 알아듣기도 힘든 옛 언어로 된 이상한 주문을 외치면서... 시비르는 거기서 급히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마법사가 도시 전체를 다시 먼지로 만들어버릴까 봐 겁이 났으니까. 아니면 그에게 빚을 지게 될까 봐 겁이 났는지도 모르겠지만.

침을 삼키자 목구멍이 화끈 아파왔다. 시비르는 다시 샘 쪽을 내다보았다. 샘이라 봤자 누리끼리한 물웅덩이 정도였다. 저걸 마시려고 꼬박 하루를 기다렸다.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시비르가 저들을 죽이고 물을 얻거나, 그들이 시비르를 죽이고 금을 몇 닢 얻거나. 사막의 법칙이란 이런 것이다.

시비르는 가장 가까운 곳의 바위 위에 서 있는 보초를 향해 뛰어가면서 십자날 검을 들어올렸다. 보초가 뒤를 돌아보기 전에 덮칠 수 있을까? 그녀는 걸음을 헤아렸다. 열네 걸음, 열두 걸음, 열 걸음...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두 걸음... 시비르는 뛰어올라 보초를 공격했다.

시비르와 보초가 한데 뒤엉켜 바위 밑으로 넘어졌다. 보초는 이미 치명상을 입고도 몸부림치며 저항했다. 그는 시비르가 팔을 부여잡고 압박하자 절명했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죽지 않아도 될 목숨이었는데.

카시오페아에게 공격당했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 녹서스 여자가 시비르를 찔렀을 때, 시비르는 한 번 죽었다. 그 죽음에는 무슨 의미가 있었나?

멀리서 무언가가 우르릉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말발굽 소리인가? 모래언덕이 무너지는 소리인가? 궁리할 시간이 없었다. 크타온족 남자들은 동료가 사라졌다는 것을 금세 눈치 챌 것이다. 시비르는 저편에 솟아오른 둔덕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또 다른 보초를 두 번째 표적으로 결정하고, 돌바닥에 엎드려 조용히 기어갔다. 표적이 둔덕에서 내려오기 전에 깔끔하게 맞춰야 한다. 시비르는 확실히 조준을 한 뒤 십자날 검을 던졌다.

명중했다. 보초의 몸이 둔덕에서 떨어져내리고, 동시에 십자날 검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면서 시비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검이 날아오는 속도가 느려지더니, 도중에 또 다른 남자를 쓰러뜨리고는 각도가 변해버렸다. 검은 이제 샘 한가운데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원거리에서 적들을 저격해 조용히 해치우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십자날 검이 물에 빠지기 전에 낚아채기만 하면, 공중제비를 넘으며 검을 휘둘러서 나머지 남자 셋을 단칼에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시비르는 샘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그런데 달리다 보니 발이 무거워졌다. 폐에 공기가 충분히 들어가질 않는 느낌이었다. 서른 걸음만 더... 둔덕에서 추락하고 있는 두 번째 보초의 시체가 땅에 부닥치기 전에 샘에 닿아야만 한다. 스무 걸음... 다리 근육이 저려오면서 말을 듣질 않았다. 그리고 열다섯 걸음이 남은 시점, 발이 미끄러지면서 몸이 휘청거렸다.

‘안 돼!’
그 순간 두 번째 보초의 주검이 땅에 부닥치고 말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랐다. 털푸덕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사막에서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사막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시비르가 한 발짝 더 내딛기도 전에, 크타온족의 나머지 보초들이 전부 무기를 뽑아들었다.

시비르의 십자날 검이 샘물에 첨벙 떨어졌다. 샘은 보초들과 시비르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다. 그들에게서는 다섯 걸음, 시비르에게서는 열 걸음 위치였다. 지금이라도 무기를 회수할 수 있을 것이다. 온몸의 근육이 앞으로 뛰어나가려 꿈틀거렸다. 그런데 시비르는 다리를 내뻗다 말고 우뚝 멈춰섰다.

물을 충분히 가져오지도 않았고, 습격을 개시하기까지 너무 오래 꾸물거렸고, 거리를 잘못 가늠하기까지 했다. 평소라면 결코 저지르지 않는 실수들이었다. 왜 이런 실수를 했지? 시비르는 자연히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카시오페아의 단검에 등을 찔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칼날 자체는 느껴지지 않았고, 별안간 엄청난 무게에 폐가 짓눌려 숨이 막히는 것 같던 그 느낌이 지금도 생생했다.

“나는 너희가 내 기척을 듣기도 전에 세 명이나 죽였다.”

시비르가 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러자 크타온족 보초들 중 덩치가 가장 큰 자가 입을 열었다.
“무기도 없는 주제에 위세만 대단하군.”

“마실 물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공격을 그만뒀을 뿐이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래도 그 말이 그럴싸하게 들렸는지, 남자 셋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시비르가 누구인지 알아본 모양이었다.

“작년에는 너희 부족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 스무 명과 족장까지 모두 죽였지. 금 한 자루를 위해서. 그들의 목숨 값으로는 너무 싼 금액이었어.”

시비르는 세 남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들은 물가에서 걸어나와 시비르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금으로 뭘 했게? 하룻밤 만에 도박으로 날려버렸지!”
“혀를 잘못 놀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우리 친척들의 원한도 유감없이 갚아주지.” 덩치 큰 남자가 을러댔다.

“그래, 죽인 게 후회되긴 해. 겨우 금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죽이기에는 아까운 목숨들이었으니까. 지금도 나는 너희를 죽이고 싶지는 않다. 겨우 물 몇 모금 때문에 이러기는 싫다고.”

덩치 큰 남자가 초조하게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나는 지금 경고를 하는 것이다. 너희가 움직이기도 전에 나는 저 검을 주울 수 있어. 그렇게 되면 너흰 모두 죽는다.”
시비르는 누런 흙탕물이 일렁이는 샘을 흘끔 눈짓하고 말을 이었다.
“너희 목숨은 저것보다야 가치 있지 않나?”

“명예를 위해서라면 죽음은 두렵지 않다!”
덩치 큰 남자가 엄포를 놓았지만, 나머지 두 명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네가 원한을 갚아주겠다고 하는 그 스무 명을 내가 어떻게 죽였는지 알기나 하나? 그때는 저 무기가 굳이 필요하지도 않았어. 그런데 너희는 고작 세 명뿐이잖아?”

세 사람이 머뭇거렸다. 시비르의 위협을 무시하기에는 그녀의 명성이 너무 대단했다. 결국 보초 둘이 덩치 큰 남자를 끌어당기면서 눈치를 줬다. 시비르는 샘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우리 전사들을 더 데려와서 복수하겠다!”

크타온족 남자들이 자기네가 탈 말 쪽으로 슬금슬금 내빼면서 소리쳤다.
“그런 짓을 시도한 사람들은 예전에도 많았어.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시비르는 부어오른 혀로 입 천장을 핥았다. 지금 당장 무릎을 꿇고 샘물을 마시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저들이 모래 언덕을 넘어가서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시비르는 남자들이 말에 올라타고 도망치는 뒷모습을 끈질기게 지켜보았다.

그런데 아까 들었던 그 이상한 소음이 또 들려왔다. 우르릉 하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 이건 말발굽 소리도, 모래가 움직이는 소리도 아니었다. 시비르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말라붙은 강바닥에 푸른 물줄기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고대의 도시에서 나오는 물이 분명했다. 폭포수처럼 흘러 들어오는 물이 시비르의 다리를 적신 순간, 공기중에 확 피어오르는 시원한 습기가 살갗에 와 닿았다. 뜻밖의 키스처럼 놀라운 감각이었다. 무릎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차가워서 피부가 아려왔지만, 곧 허리까지 물이 차오르자 상쾌하게만 느껴졌다.
시비르는 물속에 드러누웠다. 따가운 모래 알갱이들이 씻겨 내려가고, 머리카락이 가뿐하게 떠올라 물결에 일렁거렸다. 그녀는 자신을 뒤덮고 흘러가는 물살을 느끼며 생각했다.

‘나는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렇다면 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야 해.'

4 구 배경

시비르라고 알려진 아름답고 치명적인 영웅은 지난 10년간 리그의 소환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영웅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정의의 전장으로 오기 전 용병으로 생활했다. 그녀는 현재의 룬테라에서 많은 성공을 거둔 용병의 전형이었다. 시비르는 리그의 대결 성적을 기록하는 '점수판'에는 별 관심이 없다. 대신 그녀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물질적인 부와 재물이다. 그리고 그녀는 두둑한 대가를 받지 않는 한 일을 의뢰받지 않는다. 시비르는 발로란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다. 시비르는 여러 국가에 집 여러 채를 보유하고 있으며 발로란 전역에 사업채 여러 개 또한 운영하고 있다. 그녀의 성공을 부러워하거나 아니면 그녀의 유연한 도덕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이들은 시비르를 예로 들어 리그의 잘못된 점을 비판한다. 그들은 리그의 본질 자체가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꼬집는다. 그러나 시비르는 그런 비평에 개의치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개인적인 윤리 규범이 그녀의 경쟁자들보다 더 관용적이라고 주장하며 "누구나 대가를 바란다."라고 말한다.

시비르는 그녀의 걸출한 경력 기간에 많은 칭호와 포상을 받았지만, 최근까지 그녀를 따라다녔던 칭호는 '녹서스의 전장의 여제'이었다. 녹서스 사령부와 계약을 파기한 후 그녀는 이제 그냥 "전장의 여제"로 불린다. 녹서스가 평화로운 섬 국가 아이오니아를 침략했을 때 시비르는 용기 있게 이의를 제기했다. 물론 그녀가 꿍꿍이속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예고한 데로 이오니아가 끝없이 공격해 들어오는 녹서스의 군대를 저지하고 나서자 양국은 피비린내 나는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녀는 녹서스 사령부가 감을 잊어버렸다고 주장한 후 녹서스를 떠나버렸다. 그 후 그녀는 전쟁 학회에 합류한다. 녹서스 사령부는 그녀를 처단하기 위해 암살자들을 고용한 뒤 그녀에게 보냈지만 아무도 그녀를 처단하지 못했고 그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시비르는 몇 번이고 계속해서 자신이 '최고의 용병'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 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