顏斐
생몰년도 미상
중국 삼국시대의 인물로 자는 문림(文林).
창자전에 간략한 사실이 기록되어 그 곳에 주로 딸려있는 위략에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다.
현에 있어 부족한 게 있으면 백성들에게 이를 시키는 것을 의무화 시키는 것을 반복해 백성들의 의무를 늘리지만 장기적인 안목으로 백성을 위한 행위를 하는 인물이다.
재능과 학식이 있어 조조가 불러들여 태자세마로 삼았고, 조비의 대인 황초[1] 연간 초두에는 전임해 황문시랑이 되었다가 이후 경조태수가 되었다.
이 경조라는 지역은 마초가 패배한 이후에도 많은 백성들이 농업과 식량 생산에 전념치 않아 문제가 되었는데, 또 서너사람의 이천석 태수가 역임했음에도 눈앞의 해결책만을 채택해 민중을 위해서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이가 없었다. 이 때 안비가 착임하자 속하의 현에 명을 내려 길을 정비케 하고, 뽕나무나 과실수를 심게 한다.
그런데 백성의 많은 수가 수레나 소를 갖고 있지 않아 문제가 생기니 안비는 백성에게 농한기에 수레의 재료를 모으는 것을 의무화 하고, 서로 수레를 만드는 법을 배우게 한다. 또 백성 가운데 소를 갖지 못한 자에 대해서는 의무를 지워 돼지나 개를 사육케 했고, 이것을 팔아 소를 사게 했다.
한 마디로 없으면 "네놈들이 다 구해라 안 그러면 벌을 주마"라는 소리(…)로 당연히 백성들이 이를 귀찮게 여겼으나 1, 2년 사이에 집집마다 수레, 큰 소를 갖게 되니 장기적인 안목으로는 옳은 일을 했다. 또한 문학을 진흥해 관리, 백성 가운데 글 읽기를 바라는 자에게는 담당한 부역을 더 부과하지 않도록 규정했다.
그러면서 관청 근처에 채소밭을 만들고 관리들에게 명해 일하는 사이에 경작케 하는 등의 명령을 내렸으며, 또 민중에게 의무를 지워 조세를 수송할 때 수레나 소 마다 각기 두 다발의 장작을 부과했다. 추운 겨울 동안에는 필묵을 가까이 하게 했는데, 이렇게 백성들의 의무는 늘어났지만 풍속의 교화는 훌륭히 진행되어 관리는 백성을 귀찮게 하지 않고 백성도 관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없게 되었다.
지리적으로 경조는 풍익, 부풍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는데, 두 군에서는 도로가 모두 어지러워져 통행이 어려우면서 밭에서도 잡초가 우거져 백성들은 기근에 허덕였다. 그러나 안비 덕택에 경조에서는 모든 도로가 정돈되고, 논밭이 개발되어 풍부함이 항상 옹주 십군 가운데 필두가 되었다.
거기다가 안비는 스스로를 청렴히 다스려 재산을 늘리기를 꾀하지 않고 봉록만 받을 뿐이니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이제는 그가 전임할까 걱정한다.
청룡 연간[2]이 되자 사마의는 장안에 주둔해 군영에 시장을 설치했는데, 부대의 관리나 병사들은 현민을 깔보며 약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안비는 이 사실을 즉각 사마의에게 알리니 사마의는 이에 노해 군의 시후[3]를 불러들여 즉각 안비 앞에서 백대의 매질을 하고 그 자리에서 관리, 병사들에 대해서 엄숙함을 유지하도록 명한다.
이 때 안비의 옆에 있다가 덩달아 쫄은 장안의 전농교위는 안비에게 사과하고자 생각하고 은밀히 안비를 부른다. 하지만 안비는 사과를 받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말한다.
안비가 마음으로부터 명공의 치세하는 일을 분담받은 책임을 살펴 많은 백성을 하나로 결집코자 바랬는데, 이는 분명코 아무렇게나 좌우될 일이 아니오. 그럼에도 전농은 은밀히 안비에게 사과코자 했소. 혹여 안비가 사과를 받았다면 이는 명공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라 여기오.
이렇듯 안비의 노력으로 군영, 군현은 각기 그 맡은 바를 지키는 것이 가능해졌다. 수년 후에 전임해 평원태수가 되었는데, 관리,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길을 막았으므로 수레가 나가지 못했다가 겨우 나가면서 열흘이 걸려서야 겨우 군 경계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쪽으로 향해 효산에 이르자 병이 들어 괴로워했으며, 안비는 본심으로부터 경조 땅을 사랑하고 있었으나 그의 가족, 종자들은 안비의 병이 심함을 보고 "평원님, 부디 힘을 내십시오."라고 말한다. 이에 안비는
나의 마음은 평원의 태수직을 바라지 않고 있다. 너희는 나를 부르는데, 어째서 경조님이라고 부르지 않느냐?
하지만 그는 결국 세상을 떠났고, 안비의 유체는 평원에 도착했다.
경조에서는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그를 위해 비를 세워 지금도 그를 추모하면서 칭송했다고 하며, 위략이 쓰여지던 시대의 이야기이기 때문에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지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