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삼국지)

1 曹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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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의 위왕
신규 책봉조조조비
조위의 추존 황제
고황제 조등태황제 조숭태조 무황제 조조
묘호태조(太祖)
시호무황제(武皇帝)
조(曹)
조(操)
맹덕(孟德)
생몰기간155년 ~ 220년 1월 23일
내가 천하를 배반할 지언정, 천하가 날 배반할 수 없다.[1]
固一世之雄也, 而今安在哉(고일세지웅야 이금안재재) : 실로 일세의 영웅이었건만 지금은 어디 있는가? - 소동파의 적벽부 중

1.1 개요

후한 말기 패국 초현 사람. 후한의 마지막 승상이자 삼국시대 태조.

시호는 무제(武帝)지만 이는 사후 조비에 의해 추증된 시호다. 처음엔 조비가 위왕에 오른 후 조조는 무왕(武王)의 시호가 올려졌으나, 조비가 선위를 받아 황제가 된 다음부터는 조조를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추증하였다. 조조 본인은 황제에 오르지 않았고, 명목상으로는 한나라의 신하로서 죽었다.

현대 북경어 발음으로는 차오 차오(Cao Cao). 고전 영문판 삼국지를 플레이한 사람이라면 'Cao Cao'라는 이름이 익숙할 것이다.

참고로 일본식 독음은 そうそう(소-소-)[2]로 특이하게도 한중일 삼국에서 모두 이름이 같은 음절 두 번 반복으로 읽힌다. 단 중국어 발음으로는 성조의 차이는 있다.

참고로 베트남식으로는 Tao Thao(따오 타오)라고 읽어 같은 음절 반복은 아니다.

아명은 아만(阿瞞)인데, 만(瞞)과 조(操)는 비슷하게 조작하다[3], 속이다라는 뜻이 있다. 이름대로 조조는 간사한 간웅(奸雄)의 이미지로 잘 알려졌으며, 실제로도 교묘하고 복잡한 인물이었다.

또 다른 이름은 길리(吉利). 리(利)라는 글자도 교묘한 느낌을 풍기기는 마찬가지다.

1.2 생애

조조(삼국지)/생애 참조.

1.3 업적과 능력

코에이는 조조가 정치, 전쟁 모두 우수했으며 사가문학에도 통달한 만능의 영웅호걸이라 소개했다. 실제 조조는 다재다능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인물 중 하나이다.

1.3.1 군사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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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에 있는 조조의 기마상

조조의 업적에서 한 가지 결점은, 통일 왕조를 건설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후한 말과 그 후를 묶어 흔히들 위진남북조 시대라고는 하지만, 당연히 나라는 중국사에서 통일 왕조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다만 진의 전신인 만큼 삼국을 대표해 쓰는 것일 뿐. 중국 역사 전체로 눈을 돌려보면 남북조시대의 북조 국가 중이나, 오대십국시대의 5대 왕조들이 차지한 영역이 위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북조 국가들이나 오대 왕조들이 통일 왕조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따라서 위는 통일 왕조로 인정되지 않는다.

중국사 전체를 볼 때 최고의 군사 군주로 꼽히는 것은 한고제, 광무제, 당태종, 송태조 / 송태종, 홍무제 / 영락제 등 당대에 통일 왕조를 건설한 군주들이다. 이들은 당대에 거의 자력으로써 전 국토를 통일하고 완벽한 통일 왕조를 건설했기 때문에 최고의 평가를 받지만, 조조는 이들과 비슷한 종류의 군사 창업 군주이나 통일 군주가 아니라는 결점 때문에 평가가 다소 깎인다.

물론 이는 통일 군주들과 비교해 볼 때 결과적으로 따지면 그렇다는 것이지 제갈량의 후출사표나 훗날 당태종이 평가한 것을 보면 당대 최고수준인 것은 사실이다.

1.3.1.1 상대한 세력

거병 초기부터 왕위에 오른 말년까지 중원을 누비며 싸운 인물인지라 상대한 적들 역시 많다.

  • 동탁 : 거병 초창기에 대적한 적이고, 동탁이 장안으로 도주하자 혼자 추격했다가 복병에 무너지면서 더는 충돌이 없었지만 동탁 사후 정권을 잡은 이각곽사로부터 달아난 헌제를 협천자하는 과정에서 이각과 곽사를 몰아냈다.
  • 도겸 : 원술과 연계하여 조조를 공격했으나 조조는 원소와 함께 이를 연주에서 격퇴했다. 이후 도겸의 부하가 조숭을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며 조조가 도겸을 공격하지만 여포에게 근거지인 연주를 공격당하자 퇴각. 도겸이 사망하며 공손찬 측의 지원군으로 와 있던 유비가 서주목을 승계한다. 이후 서주는 유비, 여포, 조조 등 여러 군벌들의 지배를 거쳐가다 최종적으로는 조조의 손에 떨어진다.
  • 원술 : 원소와 연합하던 시절 조조의 숙적이었다. 원술의 남양에서 북쪽의 공손찬과 연합하며 원소를 견제했고, 원소의 지원을 받던 조조를 공격했으나 역으로 털려 양주까지 밀려난다. 양주에서 재기에 성공하지만 재차 여포와 연합한 조조의 공격을 받아 세력이 크게 약해지며 공중분해된다. 조조 입장에서는 1라운드 보스.
  • 여포 : 조조가 연주에서 자리잡을 때 처음에는 장막의 사주를 받아 치열하게 싸우다가 이후 조조가 연주에서 자리를 잡기 성공하고, 여포는 사방에 적을 만들며 쫓겨나 서주로 가서 유비를 배신한 후 서주를 차지하자 공격을 시도해 죽인 중간보스.
  • 장수 : 관동에서 지지고 볶던 조조가 사예 방면으로의 진출을 꾀하며 마주쳤다. 상대적으로 약소한 세력에도 불구하고 유표의 지원과 가후의 활약이 더해져 수 차례 조조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겨주며 선전했다. 그러나 체급차는 극복할 수 없었는지 결국 조조에게 항복한다.
  • 원소 : 최종보스. 서로의 숙적이었던 원술과 공손찬이 패망하자 자연스럽게 대립하는 입장이 된다. 원소의 세력은 강대하여 한때 조조 본인조차 원소에게 투항할 마음이 생겼을 정도라고 한다. 원소가 먼저 공세를 취했으나 조조가 이를 관도에서 가까스로 막아냈다. 그런데 이 전투 직후 원소의 건강이 악화일로를 걸은 끝에 그대로 사망해버리는 대사건이 터졌고, 원가는 후계자 다툼으로 세력이 분열되어 그 틈을 노린 조조에게 멸망당했다.
  • 유표 : 원래 원소, 조조와 함께 원술에 대항하고 있었으나 원술이 패망하자 적이 되었다. 장수를 방패삼아 조조와 대리전을 벌였으나 장수가 조조에게 투항한 후에는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못했다. 결국 유표 사후 그의 세력은 조조에게 흡수됐다.
  • 마초 : 관중에 있는 군웅들 중 한명으로 관중 지역을 완전히 자기 아래로 복속시키려는 조조와 충돌하여 결국 장기전의 유리함을 살린 조조가 승리하여 마초를 비롯한 관중 군웅들의 세력을 뿌리뽑았다.
  • 장로 : 익주 진출의 교두보로 한중의 토착세력인 장로를 공격해 복속시켰다.
  • 손권 : 자신의 천하통일 야망을 저지시킨 장본인 중 한명인 애송이. 형주를 너무나도 쉽게 점령하자 그 기세를 몰아 손권을 위협한 건 좋았으나 너무 싸움을 서두른나머지 애송이 군주가 앞세운 주유의 활약에 대패하며 물러났다. 이후 서로 몇 차례 대치하며 적당히 강화를 맺기도 한다.
  • 유비 : 라이벌. 기반과 세력 격차, 상대 전적에 있어 늘 조조에게 밀렸지만 끝까지 조조에 맞서는 걸 포기하지 않으며 대항해 결국 조조의 천하통일을 저지시키며, 둘의 마지막 격돌인 한중 공방전에서 조조를 패퇴시켰다. 하지만 유비도 천하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 서로의 천하통일을 마지막까지 막은 격.

1.3.1.2 위무주손자

조조의 군사적 식견은 높은 수준이었다.

손자병법에 주석을 단 것으로 유명하다.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손자병법은 기본적으로 모두 조조가 주석을 단 '위무주손자'이다.[4] 그가 손자병법에 한 일은 내용을 고치는 것보다는 당시까지 있었던 일화들과 보충 설명들을 달아놓은 것이다. 그리 길지 않으면서도 문장만으로도 격조 높으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주석들은 손무라는 걸출한 병법가의 기본 틀과 함께 손자병법을 병법서 이상의 책으로 끌어 올려 주었다.

반면 조조의 행적이 손자병법의 주요 사상인 총력전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전략가로서의 조조를 그리 높게 보지 않는 경향도 있다.

위무제 주석 손자병법 등을 볼 때 잘 나간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오만하고 자뻑기질이 있었던 듯하다(…). 손자병법 주석 중에 "병사가 10배가 있어야 능히 이길 수 있다는 건 적군의 능력이 나와 비슷할 때 얘기다. 나는 두 배의 병사만 가지고 하비성에 틀어박힌 여포를 잡았다"라고 적어놓았다(…).

1.3.1.3 북방 민족 정벌

조조는 북방 원정으로 원가에 붙은 오환족을 캐박살내어 그 세를 크게 꺾어버리고 흉노족을 복속시켜 후환을 제거하였다. 흔히 삼국지연의에서의 비중으로 인하여 조조의 북방 정벌이 원씨 정복에 부수된 잔당 사냥 쯤으로 치부되지만 역사가들은 조조의 북방 토벌이 후한 말 북방 민족의 세를 크게 꺾어논 업적이라고 평하면서 조조의 오환 토벌로 오호십육국 시대를 100여년 더 늦출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까지 평가한다 한다. 그럼 육호십육국? 또 건안 16년(216년)에는 남흉노를 5부로 나누어 선우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5부 흉노로 분할 통치하면서 흉노를 사실상 중국에 복속시키고 노예화하였다. 흉노는 한인들에게 사회적, 경제적으로 멸시받는 존재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북방 민족을 막을 요충지였던 하북 지역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조조는 이민족을 철저하게 때려 잡았지만 동시에 원소를 따른 하북세력, 백성 대다수를 몰락시키거나 억누르는데 힘을 쏟았다. 게다가 이어진 반란과 내전으로 하북 지역의 역량은 계속 약화되었다. 조조가 이후 하북의 업군을 자신의 세력의 수도로 두었지만 조비 시대엔 다시 낙양으로 돌아감으로서 이런 행보는 무색해졌다. 물론 이민족도 같이 깨부수었기에 조조 생전, 삼국시대 이후 서진 초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1.3.1.4 친정 중시

조조의 군사 전략에서 특이점은 두가지를 들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개인 친정 중시이며 다른 하나는 친족 중시다.

조조는 다른 지역을 침공할 때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陣頭指揮)를 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하북 정벌, 오환 정벌, 형주 정벌, 강동 정벌, 한중 정벌이 모두 조조의 친정 아래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유비가 관우장비 등의 자신의 부하로 하여금 다른 지역을 점령하게 하고 관우가 독자적으로 형주 북쪽 지역을 침공한 것과 비교된다. 하지만 조조 자신이 노년에 접어들면서 신체 정신적 역량이 떨어지게 되었는지 친정의 결과도 악화되는데, 형주 정벌을 마지막으로 적벽대전한중 공방전이라는 두 결점을 남기면서 영토 확장이 좌절되게 된다.

이는 조조가 한 황실을 등에 업는 '협천자'라는 정치적 입장을 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한 지역을 정복하는 거대한 정벌 계획을 조조 이외의 인물이 나서서 수행하고, 그 인물이 성공을 이룩하게 된다면 조조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약화된다. 조조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군권을 손에 놓을 수 없었으며, 언제나 전쟁에 나서야 하고, 이기지 못하면 정치적 입지가 손상되었다. 후한과 공존하는 막부의 우두머리라는 입장상, '조조의 대안'이 될 만한 장수가 나타나면 그는 후한 조정을 등에 업고 또 다른 '협천자'를 수행할 수 있었으므로 이러한 상황이 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아야 했다. 따라서 노년의 나이에도 친정을 하고, 항상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고자 하였다.

사실 이는 통일왕조 군주에게서도 자주 나타나는 모습이다. 당태종, 송태조, 청나라의 황제 등 개인의 군략에 자신있는 군주들은 본인이 직접 사령관이 되어 진두지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조조뿐만 아니라 유비, 손씨가문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모습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조조는 중국사 통일군주들이 달리 자신에 반대하는 군웅인 유비와 손권을 끝내 제압하지 못하여 천하를 석권하지 못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1.3.1.5 친족 중시

조조는 군사 분야에서는 조씨, 하후씨 친족을 매우 중시했다. 항장이나 이성의 숙장들을 대우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친족 장수들을 우위에 놓고 그들로 하여금 항장들을 감독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역시 많은 왕조에서 드러나는 특징이라 조조만의 특징으로 보긴 어렵다.

문제는 조씨, 하후씨 일족에는 그 지위에 걸맞는 군사적 능력을 가진 인물들도 많았지만, 다소 부족한 인물도 있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봐도 정사에서 그 지위에 걸맞는 수준의 '군공'은 찾기 어려운 조홍하후돈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비교적 명장으로 꼽히는 하후연 역시 한중 공방전에서 패배하여 사망한 직후 조조 자신이 하후연의 사령관으로서의 역량 부족을 한탄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런 문제점이 조조의 군사 행동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가깝기는 하다. 조조는 상당히 자주 내부 반란에 시달렸는데 서주 공방전 와중에는 여포를 앞세운 진궁, 장막이 일으킨 본거지 연주에서의 반란으로 거의 죽을 뻔 했고, 협천자 이후에는 후한 황제와의 마찰로 인해 여러 차례의 반란에 지속적으로 시달렸다. 동승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후한 내에서의 반 조조 반란은 조조가 죽을 때까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가 정권을 유지하려면, 군권을 꽉 집기 위하여 친족을 중용하는 정실 인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3.1.6 과감성

장단점이 있는 것은 과감성이다. 조조는 일견 무리하게 보일 정도로 과감한 공격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으며, 관도대전, 오환정벌 등에서는 이러한 과감한 공격이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위기를 자주 겪기도 했는데 동탁을 추적하다가 서영에게 대패를 당해서 겨우 목숨을 건진 것이 그 사례다. 역시 과감하게 나섰던 적벽대전에서는 보급 문제, 질병 문제가 겹치면서 무너지게 된다.

원소를 쓰러뜨린 이후에는 그전의 조심성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오만해져서 문제를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원가의 잔당을 토벌할 때는 필사적으로 원담과 원상의 사이를 가르는 이간계를 쓰고 조심하면서 과감하게 싸웠던 조조가 손유동맹과 싸울때는 괜시리 손권에게 허세를 떨지 않나, 패배 이후 형주를 떠날때 병사를 충분히 남겨놓지 않고 떠나자 유비가 오면 어쩌냐는 유파의 말에 그럼 내가 친히 육군[5]을 몰고 와서 막겠다는 말을 해서 유파를 벙찌게 했다. 이에 대해서는 조조에게 가장 강력하고 위협적이었던 원가의 세력을 완전히 말살하고, 상당히 강력했던 유표의 잔당마저 흡수한 뒤라서, 남아있는 손권과 유비의 세력이 약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해이해졌다는 분석이 많다.

1.3.2 제도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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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성 허창시 '위무제광장'에 세워진 조조의 석상

조조 시기엔 하임없이 백성을 이주시켜 민초 사이에서는 불평불만이 있었다. 먹고 살게는 해주지만 그렇다고 마음과 몸이 편하게는 못 해주기 때문에 민담 등에서 이미 악역이 된 듯하다.[6]

당연한 말이겠지만 중화대륙 10위권 돼지 독재자감히 황제를 납치하는 독재자보다는 훨씬 낫다.

1.3.2.1 둔전제

조조의 제도 정비 능력은 중국 전체의 경제적 체질의 강화에 있다.

대표적인 것이 둔전법(屯田法)으로서 전한 시절부터 이미 존재해왔던 법을 모개 등이 새로 정비한 것이다.종전의 둔전은 국가 주도로 변방 등에 신 경작지를 개척하는 것뿐이었으며 주로 병사들의 군량 자급자족을 위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곤 했다. 반면에 조조는 민둔(民屯)이란 것을 두어 수도인 허도 근처에 배치해 전쟁 직후 황폐한 땅의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였다.

그 세율은 개인 소유의 소를 사용한 자는 수확량의 50%, 관의 소를 사용할 땐 60%라는 가혹해 보이는 것이었으나 생산량 자체의 증대와 전관(田官)을 통한 중앙정부의 직접적 통솔로 중간 과정을 생략하여 그 이상의 수취가 없도록 하였다.[7] 이는 풍족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백성에게 부여한 것으로서 이후 마련된 막대한 양의 물자는 위의 전략적 우위를 늘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시절에 완성된 둔전제는 이후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중국의 각종 토지 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고려 시대의 토지 제도 확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둔전제에 관료의 부정부패가 어떻게 개입하지 못하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코 제도화하지 않고 조조가 자신의 능력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것으로 대처했다. 이 때문에 조조 당대에는 막대한 세수 증대를 이루어냈으나 이후에는 세수는 잘 걷혔으되 각종 부정부패로 이외의 보조적인 세금이 늘어나기에 이른다. 진대에 이르면 부세가 이미 농민 소득의 절반 가량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토지에서 거둔 농산물의 25%만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한나라 시절에 부세가 1/15였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여기에 후한대까지 2년이었던 군 복무 기간이 위의 경우 평생으로 늘어나는데, 인간 이외의 노동력을 생각할 수 없던 고대에 각 집의 노동력을 빼앗긴 상태에서 높은 세금을 거뒀다는 것은 위, 진이 얼마나 백성들이 살기 힘든 곳이었는지를 알게 한다.

1.3.2.2 호조법

조조는 200년 전후로 호조법을 시행한다. 그 전까지 중국은 개별 단위로 인두세를 부과해 한 명마다 세금을 적용했으나, 조조는 개별 수취에서 호(戶)단위의 가족 집단 하나로 치환해 세금을 부과해서 과세 부담을 줄였다.전쟁을 치르며 내지(內地)의 양곡으로 외지(外地)의 군사와 국민을 부양하는 데는 조조가 전쟁으로 피폐해진 중원에 수리 사업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한 공헌도 컸다.

호 단위로 부과하는 전통도 이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다만 이건 족징이나 인징 등이 가미되어서 좋다고 볼 수만은 없지만(...) 이 역시 제도는 정비해도 그 제도 자체를 관리하는 것은 조조 개인의 역량에 의존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1.3.2.3 구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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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현령을 내려서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을 시행한 것은 널리 알려 있다. '덕행과는 상관없이 능력으로 인재를 뽑겠다.'라는 선언은 당시로써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한 시절에는 관직을 뽑는 절차를 "효렴"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물의 덕행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선발했었기 때문이다. 뭐, 사실 그 덕행이란 게 결국 사대 호족 내에서 나눠 먹기라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

조조를 높이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구현령을 '유교 도덕을 뛰어넘은 능력 위주의 선발'이라고까지 하는 등의 칭찬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구현령은 실제로 이루어진 정책이라고는 볼 수 없으므로 실질보다는 그 의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는 어떤 시대에나 그렇듯이 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삼국시대에도 재능보다 덕이 부족한 인재가 더 널렸고, 바보가 아닌 이상은 '유력가의 추천'을 받는 인재가 발탁되는 것이 당연했으며, 조조마저도 그러한 시스템의 한계에서 벗어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조조가 인재등용에 특별히 파격을 보인 것도 아니다. 유비와 손권도 인재등용에 있어서 조조처럼 파격적 인사를 보인 적이 분명히 있었다. 유비의 경우, 한중왕 즉위 당시 한중의 수비를 당시엔 상대적으로 무명이던 위연을 발탁해 맡겼으며, 손권의 경우, 무지렁이에 불과했던 여몽을 발탁해 지용겸비의 무장으로 활약할 수 있게 해주었다.

위의 현실 정치에서 구현령은 실질이 수반되지 않은 선언에 불과하였다. 어차피 관리 선발 기준은 한 시대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으며, 후대의 과거 제도나 시험 선발 같은 체제 정비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선포되었음에도 구현령이 현실 정치에 미친 적은 편이다. 사실 조조 휘하에서 활약한 인물들을 보면 어디 유명한 가문의 누구라는 경우가 꽤 많으며 인물을 추천하여 등용한 인물이 지인을 추천하여 등용시키는 다단계 피라미드 비제도적 등용 체계였다.

그나마 조조 생전에는 창업 군주만 가질 수 있는 강력한 전권과 실질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난세의 현실 때문에 비교적 낮은 신분 출신의 인재나, 예법에 크게 얽매이지 않은 인재들이 적지 않아 광폭한 인재풀을 구성했다. 그러나 이들이 '공신'의 지위를 얻으면서 점차 인재풀이 고착화 되는 과정이 나타나게 된다.

결국 조조 사후의 조비 시대에 이미 기존의 호족 집단에서 공신 계층을 이루면서 성장한 문벌 귀족들이 고위 벼슬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되었다. 위나라의 성립 이후에는 더욱 더 명문가 출신이 고위직을 독점하게 되고, 예외적인 사례는 등애 정도만 남게 된다. 이런 풍조는 위진남북조 시대 중국 정치계를 대표하는 귀족 계급이 형성되는 흐름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지나치게 강력해진 귀족 계급 때문에 오히려 상대적으로 '문벌'이라는 측면에서는 그 계통부터 청류와는 거리가 멀어 미묘한 측면이 있었던 조씨의 세력은 흔들리게 된다. 조예 이후의 조상 정권에서는 조씨, 하후씨와 인척들이 모여서 정권을 형성하고 귀족들과 대항하게 되지만, 결국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사마씨에게 무너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마소를 따라 위를 뒤집어엎은 자들은 순욱, 종요, 신비, 화흠, 왕랑, 가규 등의 후손이었다.(…)

1.3.2.4 원호법

조조는 관도대전, 적벽대전 등 큰 싸움이 끝났을 때마다 영을 내려 자신을 위해 죽은 장병들의 자손이 없으면 친척으로 대를 잇게 하였으며 가족에게 농사지을 땅을 나누어 주고 밭갈이 소를 공급해 주며 학교와 선생을 둬서 죽은 사람들의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묘당을 지어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하여 전사자의 가족 중에서 살림이 궁핍한 이들을 위로하고 구제할 것을 명하여 체계적인 원호법을 사실상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1.3.3 인재 관련

능력이 있는 인재에 대한 욕심이 대단해서 자신과 악연이 있었던 인물이라도 과감하게 기용하는 면이 있었다. 예시는 다음과 같다.

  • 진림 : 진림은 조조의 3대 조상까지 싸잡아 욕하는 글을 썼는데도 살아남아 순조롭게 출세한다. 일단 시위를 떠나면 화살은 날아갈 수밖에 없다며 대답하자, 조조는 자신을 위한 화살이 되라며 설득한다.
  • 위충 : 장막이 연주를 침공하자 위충은 도망가버려서 그를 신뢰하고 있던 조조는 분노한다. 그러나 위충을 다시 사로잡았을 때 너의 재능을 아낄 뿐이라며 다시 기용했다.
  • 가후
  • 장수
  • 유웅명 : 마초에게서 조조에게 도망왔다. 그러나 다시 조조를 버리고 장로에게 도망갔다. 장로가 격파되자 유웅명은 조조에게 항복하는데 조조는 그를 용서하고 관직에 복직시켰다.
  • 관우 : 조조의 관우에 대한 애착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관우가 천하의 의인이라 유비에게로 돌아간 것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조조에게로 넘어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반면에 비위에 거슬리는 인물들에게는 냉혹한 일면이 있었다. 예시는 다음과 같다.

  • 양수
  • 공융
  • 최염 : 최염이 감옥에서도 의연한 태도를 보이자 '이런 건방진 놈을 봤나?'하고 자결시켰다.
  • 최씨 : 최염의 조카딸. 문제는 조조의 아들인 조식의 아내인데도 죽였다(!).
  • 예형 : 예형은 명성 때문에 죽이기 껄끄럽자 유표에게 보냈다.
  • 허유 :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허유도 죽였다.
  • 누규
  • 주불의
  • 순욱 : 조조가 구석을 받는 것을 순욱이 반대하자, 그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한 번은 순욱을 전장으로 끌고 가서 여러 구실을 붙여 죽이려 했는데 순욱이 이를 알고 병을 핑계로 집에 있자 이제 그대에게 내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빈 도시락통을 보냈다. 이에 순욱은 그 뜻을 깨닫고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 모개 : 최염의 동료였던 모개 또한 밀고로 인해 체포되었으나 다른 동료들의 변호로 관직을 빼앗기고 쫓겨났다. 이후 모개는 병을 얻어 죽게된다.
  • □희 : 조만전에 따르면 조조는 총애하는 희(姬, 첩)가 있어 조조가 낮잠 자는 것을 늘 수종했는데, 조조가 베개를 베고 누우며 조금 있다가 자신을 깨우라고 말했다. 희(姬)는 조조가 편안히 잠든 것을 보고 깨우지 않았는데, 조조가 스스로 잠이 깬 뒤 그녀를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 변양
  • 환엽
  • 원충

하지만 조조의 대인배적인 모습은 오직 정치적으로 쓸모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었다. 당장 조조에게 밉보여 버림받거나 살해당한 인물들 가운데는 능력만큼은 일류였던 인물, 그 중에서도 능력은 물론이며 인품마저 훌륭한 인물들도 적지 않았고 순욱처럼 자신의 공업에 큰 공로를 한 자들도 있었다. 조조는 기본적인 그릇은 컸지만, 이용가치가 없는 사람들은 미물처럼 취급하는 구석이 있었다. 물론 이용가치가 없다는 말은 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이런 조조에 대해 장야신은 인재를 구할때 충성스럽거나 효도하지 않아도 된다더니불효죄로 사람을 죽였나하는 내용의 말을 했다[8]

몇몇 동양의 위정자들은 조조의 통치력을 고평가했지만, 옛 사대부들이나 민중들이 조조를 인간적으로 싫어했던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1.3.4 신체 관련

1.3.4.1 무예

개인적 무예와 용력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큰 개를 때려잡았다는 기록도 있고 남피에서 사냥할 때 꿩을 63마리나 잡았다는 기록도 있다. 근데 이건 사냥을 잘하는 것일 뿐이잖아[9]

조조가 직접 칼을 썼다는 기록이 몇 개 존재한다. 젊었을 적 십상시 장양의 집에서 칼부림을 부렸는데 칼솜씨가 상당했는지 아무도 그를 저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양주에서 모병한 단양병[10]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조가 직접 수 십 명을 베어가며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아래에 나오듯 전장에서 살면서도 크게 아팠던 적이 거의 없고,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나 죽음의 위기에서도 살아돌아왔으니 상당히 수준급의 무예를 보유하고 있다봐도 과언이 아니다.

1.3.4.2 건강

평생 전장을 돌아다니며 격무 중에 크게 아프거나 병치레를 한 기록이 없다. 후술할 조조닭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몸에 좋은 음식을 골라 챙겨먹으며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한 모양이다. 그 시대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고 의학 수준도 매우 떨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60대 중후반까지 살았던 조조는 고대인으로서 상당히 장수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평생 편두통에 고생할 정도로 몸이 좋은 편은 아니였지만,[11]

밑에 가족 관계에 나와있지만 일찍 요절한 자식들부터 60대에 얻은 늦둥이까지 포함해 수많은 자식들이 있었던 걸 보면 건강 관리에 굉장히 신경을 썼던 모양이다.

1.3.4.3 외양

태평어람에 인용된『위씨춘추』에 이르길: 무왕(조조)은 체구는 왜소하지만 의기양양하였다.

후대의 이야기책에 조조가 작고 왜소했다는 식의 기록이 종종 있기 때문에[12] 조조의 풍채가 훌륭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보통 창업군주를 묘사할 때 외양을 실제보다 높게 기술해주는 편인데, 조조의 경우 그런 묘사가 없다.

세설신어에는 조조가 신하로 위장하고 최염을 왕좌에 세워서 왕 노릇을 하게 한 후 흉노의 사신을 접대하게 했는데, 그 사신에게 나중에 위왕의 풍채가 어떠냐고 묻자, 그 사신이 "위왕은 대단히 위엄이 있었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그러나 그 옆에 칼을 들고 시립하고 있던 사람이야말로 진짜 영웅이었다."라고 했다. 그래서 조조가 그 사신을 위험하다고 여겨 사람을 시켜 살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식적인 외교절차에서 저런 장난을 친다는 것부터가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당대에 외모의 가치가 크게 평가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실제론 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13]

1.3.5 예술 관련

조조의 예술가 자질은 군주로서는 실로 돌연변이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물론 중국사에서 군주가 천재적인 예술가 자질이 있던 케이스는 적지 않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암군, 폭군 테크를 타 나라를 말아 먹었다.(…) 물론 조조도 폭군 소리를 들을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나라를 망치긴커녕 창업 군주 수준의 업적을 쌓았는데, 조조만큼 천재 예술가로서의 자질이 있으면서 정치와 행정 일도 잘 보았던 인물은 거의 없다. 예술가 기질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나라를 거덜나게 만든 휘종 같은 케이스, 스스로 예술가로서 한 가닥 한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별거 아닌 수준이었던 건륭제 같은 케이스나 여럿 존재할 뿐이다. 중국사의 군주 중에서 조조만큼이나 예술가로서도 뛰어난 인물을 굳이 찾아 본다면 선덕제 정도?

1.3.5.1 요리

중국 요리 중에는 조조닭이라는 음식이 있다.갈비만 남은 닭이 아니다 일화는 하비에서 주둔하던 조조가 너무 바쁘다 보니 몸져누웠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해 요리사들은 의원의 말대로 조조가 먹는 닭에 한방재료들을 넣었고 이를 먹은 조조는 서서히 기운을 차렸고 후에도 이런 음식을 자주 먹게 돼서 조조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즉 삼계탕 같은 음식과 비슷한 것. 이런 일화가 있었을 만큼 조조도 꽤 바쁘게 살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귀한 식재료였던 전복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문화인답게 술도 좋아했는지 술의 레시피를 천자에게 상주했는데, 이것이 구온춘주. 후일까지 황실에 진상하는 명품이 됐다.

1.3.5.2 패션

박물지에 따르면 한나라 때 쓰던 갈관(葛冠)이라는 모자 대신에 백갑이라는 모자를 만들어 위진 시대에 백갑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외모가 뛰어났다는 기록은 미화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찾아내 마구 부풀리는 왕조의 개창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없으나, 붉은 옷으로도 유명하다. 즉 당대의 패셔니스타.

1.3.5.3 음악

박물지에 따르면 한말에 금석(金石) 음악이 실전되었으나, 한중에서 두기(杜夔)라는 인물을 얻어, 헌현종경(軒懸鐘磬)을 설치하고 음악 연주법을 다시 보급했다고 한다.

1.3.5.4 문학

조조는 문학에도 매우 뛰어났고, 이러한 재능은 자식들에게도 이어졌다. 흔히 조조, 조비, 조식 세 사람을 통틀어 삼조(三曹)라 부른다. 이 중 조식은 이백이 출연하기 전까지 중국 문학의 일인자로 손에 꼽혔다. 조조가 중국 문학에 완전히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시인으로만 평가해도 위인이라 하는데 실제로도 그러하다.

조조 시절의 문학을 건안 문학이라 한다. 특징으로는 지금까지 있었던 문학들과 달리 현실을 강하게 반영하였으며 화자의 개인적 감상을 적극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있다.

이전의 시들은 유가적 취향이 강하여 현실을 도외시하였으며 부(賦)라는 형태의 매우 긴 문학이라 접근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하지만 조조는 수도에 문인을 모으고 자신도 오언시[14]를 많이 지었다. 대표적으로 보출하문행, 단가행 등이 있다.

매너리즘을 타파하고 개성을 부여한 건안 문학의 풍토는 이후의 중국 문학사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그 필두에 서 있던 사람이 당시의 위정자였던 조조였다는 것을 말할 필요도 없고.

한편, 마오쩌둥이 조조의 시가를 좋아했다고 알려졌다. 마오쩌둥이 조씨 삼부자의 시 중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것이 조조의 시이다. 조조의 시는 대인배의 풍모가 느껴진다고 한다. 패기가 넘치면서도 깊은 사색과 문학적 감수성이 들어있는 해로행 같은 시를 보면 그 평가가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5.5 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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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설의 탁본

서예에도 재능이 있었던 편으로 글씨가 예술적으로도 상당히 평가받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아직 존재하는 유일한 글씨가 있는데 석문잔도의 곤설(袞雪)이 그것이다. 소용돌이치며 튀는 물방울이 마치 눈과 같다 하여 쓴 것으로 필체에 호방할 뿐 아니라 재치가 들어간 글씨로 평가받는다. 袞 자는 본래 滾으로 쓰여야 하지만 이에 대해 누가 물으니 바로 옆에 물이 흐르니 삼수변을 붙일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한다. 더불어 滾과 袞은 통가자[15]로 袞을 사용해 재치를 더하고 雪과의 균형을 맞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는 댐 건설로 본래 글씨가 있던 곳은 물에 잠겼고 글은 그 이전에 떼어내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석문잔도에는 복사본이 존재한다. 어떤 의미로 보면 삼수변이 사라진 셈. 미래를 예견한 것일까

1.3.6 종교 관련

1.3.6.1 유교

유교(유가)를 배척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유교는 중국 문명의 근간이기 때문에 간단히 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교(유가)와 법가를 병용하는 것은 한나라 이후 중국 정치의 기본이었고, 조조 자신도 지식인인 이상 유교의 주요 경전은 모두 암기하고 있었을 수밖에 없다.

조조는 유교 사상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한 측면도 있다. 공융을 죽일 때는 불효했다는 죄목도 포함해서 죽이기도 했다. 물론 이건 유교를 따른 게 아니라 이용한 것이니, 조조의 평가가 더 더러워진 일화 중의 하나다(...).

1.3.6.2 도교

조조는 도가에 상당히 심취해 방술(方術), 즉, 도교의 영향을 받은 연단법이나 방중술을 좋아하여 그런 사람들을 모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박물지에는 조조가 끌어모은 방사의 이름이 16명이나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좌자, 화타의 이름도 끼어 있다. 조식의 글에도 천하의 방사들을 위왕이 모두 불러 모았다는 언급이 있었다.

이 영향 때문인지 조식은 도교를 옹호하는 "변도론"을 저술하였으며, 조조의 양자인 하안은 연단술을 활용하여 오석산을 만들었다. 조조의 취향은 후로 육조 시대로 이어지는 노장 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1.4 가족 관계

아줌마 너무 좋아

이상하리만큼 유부녀와 관련이 깊다. 이 탓인지 2차 매체에서의 조조는 인처 모에(…)로 그려지는 일이 잦다. 예시(...) 당연히(?) 아버지만큼이나 유부녀에 하악하악한 아들 조비도 함께. 부자가 쌍으로 인처모에

다만 당시는 난세였기 때문에 남편이 일찍 죽은 아내&적 측에 약탈당한 아내도 많았으며, 결혼 연령도 현대와 비교하면 상당히 낮았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워낙 난세다보니 온 나라에 과부가 넘쳐났고(...) 크게는 호족들 간의 정략결혼, 작게는 국력을 위해서 과부들이 수절하기보다는 개가해서 건강한 씨를 받아 애를 낳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만연했기 때문에 개가하는 사례는 많았다. 예를 들어, 당대의 유명한 여류 문학가 채염은 여러 사유 때문에 여러번 결혼을 했다. 물론, 이런 이유가 있다고 해도 당대 조조 정도의 위치나, 조조가 맞이한 과부들에게 정략적 이유도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개인의 취향 외에 굳이 과부를 취할 이유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일단 그가 노렸으나 얻지 못한 여자들은 다음과 같다.

  • 문소황후 : 문소견황후전에 주석으로 달린 세설신어에서는 원희의 처 견씨를 아들인 조비가 취하자 이를 부러워했다고 한다.
  • 이교 : 삼국지연의 한정. 적벽대전 당시 제갈량이 주유를 격동시켜 주전론을 펴기 위해 동작대부를 조작하긴 했지만 실제로 조조도 이교를 노리고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바로 조조가 단가행을 읊는 편인데 조조가 자기 스스로 대교와 소교를 동작대로 데려가겠다고 선포까지 한다.
  • 추씨 : 장수를 토벌할 때 장수의 숙모인 추씨를 건드려서 조앙전위, 조안민이 죽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게다가 장수가 여기에 대해 한스러워하자 죽이려는 생각을 품은 걸 장수가 알자 더욱 조조를 죽이기로 작정했다.

여성이 많다보니 자식이 꽤 많은데 다음과 같다.

  • 부인 : 정씨(丁氏) : 처녀 상태로 조조에게 시집을 왔던 정씨는 조앙이 죽었을 때 그와 이혼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이후 조조가 정씨의 집에 몇 차례 찾아와 함께 돌아가자고 말했지만, 유부녀와 바람났다가 아들을 사지로 내몰은 남편을 정씨는 결코 따라가지 않았다. 훗날, 조조가 죽기 전에 자신은 평생에 마음에 걸리는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정말? 유일하게 후회스러웠던 일이 정씨의 일이라며 조앙을 볼 면목이 없다 말한다.
  • 부인 : 무선황후 : 조비의 모친이자 훗날 왕후가 되는 변씨는 가기 출신이다.
  • 첩 : 유씨(劉氏)
  • 첩 : 환씨(環氏)
  • 첩 : 두씨 : 여포를 토벌할 때 관우가 여포의 수하인 진의록의 처 두씨를 자신에게 달라고 했을 때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실제로 보니 미인인지라 조조 자신이 취했다.(…) 조조:미녀>관우[16]
    • 1남 : 조림
    • 2남 : 조곤
    • 1녀 : 금향공주
  • 첩 : 진씨(秦氏)
    • 1남 : 조현
    • 2남 : 조준
  • 첩 : 윤씨(尹氏) : 조비 등과 형제처럼 자라난 하안의 어머니 윤씨는 하진의 며느리인데 조조의 첩이 되었다.
    • 1남 : 조구
  • 첩 : 왕씨(王氏)
  • 첩 : 손희(孫姬)
    • 1남 : 조상
    • 2남 : 조표
    • 3남 : 조근
  • 첩 : 이희(李姬)
    • 1남 : 조승
    • 2남 : 조정
    • 3남 : 조경
  • 첩 : 주희(周姬)
    • 1남 : 조균
  • 첩 : 유희(劉姬)
    • 1남 : 조극
  • 첩 : 송희(宋姬)
    • 1남 : 조휘
  • 첩 : 조희(趙姬)
    • 1남 : 조무
  • 첩 : 진씨(陳氏)
    • 1남 : 조간 : 조조가 환갑을 넘어서 본 막내로 조비와는 30살이나 차이나서 조비를 보면 이 아니라 할아버지라고 불러 조비가 "난 할아버지가 아니라 형이다."라고 고쳐줬다고 한다(…). 조비가 자기 형제들 중 잘 대해준 거의 몇 없는 사례.
  • 윤부인

1.5 조조의 무덤

조조 무덤 참조.

1.6 평가

종종 조조를 '동양의 카이사르'라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고, 실제로도 둘이 은근히 비슷한 면모들이 있다. 둘 다 황제가 되지 못했지만 후에 추존되었다거나, 유부녀를 좋아했다는 점도 비슷하고, 문무겸비의 영웅이라는 점도 닮았다.다만 조조외 달리 카이사르는 대머리가 되었고, 자신의 아들이 아닌 사람을 후계자로 세울 수 밖에 없어서 다시 내란이 일어났다 군사적, 정치적 업적을 세운 영웅이 문학적 재능도 보인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인데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 등의 걸출한 전기를 남겼고, 조조도 당대 유수의 시인으로 손꼽히며 손자병법 주석 작업, 악부의 진흥 등에 큰 업적을 보였다. 다만 최근 들어서는 연의에 나오지 않는 악행들이 속속 재발굴되며 인격적으로 큰 결함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6.1 당대의 평가

한나라 말 천하에 대란이 일어 영웅호걸들이 아울러 봉기하니, 원소가 4주(四州)에서 호시(虎視-범처럼 노려봄)함에 강성하여 대적할 자가 없었으나, 태조가 주략과 지모를 내어 우내(宇內-천하)를 편달(鞭撻-독려)했다.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의 법술(法術)을 취하고 한신(韓信)과 백기(白起)의 기책(奇策)을 갖추었고, 관직은 재능에 따라 수여하되 각각 그 그릇에 맞게 썼으며, 사사로운 감정을 억제하고 냉정한 계산에 임해(矯情任算) 옛 허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침내 황기(皇機-황제의 정무)를 능히 총람(總禦)하고 홍업(洪業-대업)을 이루어낸 것은 그의 밝은 지략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니, 가히 비상(非常)한 인물로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 이를 만하다. - 진수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 허소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지면 일세의 재주가 아니면 이를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니, 능히 천하를 평안케 하는 것은 군(君, 그대)에게 달려 있소! - 교현

정사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는 시대를 초월하는 영웅이라고 조조를 극찬했다. 또한 위-서진 시대의 역사가들은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서 조조를 좋은 지도자처럼 써줬다.

반면 조조에 반대하는 군웅이나 조조가 세운 위나라에 반대하는 촉, 오의 인물들은 당연히 조조를 적대시 하였다. 당장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인 장제만 해도 "위나라 백성들이 조조를 따르는 것은 그 위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조조가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1.6.2 후대의 평가

조조는 난세가 만들어낸 영웅으로서 뛰어난 군주로다, 나 이세민은 많은 백성들과 제장들로부터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라고 일컬어지지만 이는 말도 안되는 것이다. 나 태종은 다른군주와 비교한다면 뛰어나지만 무제(조조)와는 비교를 할 수가 없노라. 위무제는 뛰어난 재능을 갖춘 인물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을때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나라를 지탱하는 큰 기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천하를 평정한 공은 이전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 - 제위태조문
"나는 항상 위무제의 행위가 매우 간사하며 그의 사람됨이 천박하다고 생각해 왔소. 이와 같은데, 어떻게 교화를 시행할 수 있겠소?" - 정관정요
"임기응변과 적을 헤아린 기모(奇謀)는 일개 장수로의 지혜로는 남음이 있었지만, 만승천자(萬乘天子)의 재주에는 모자랐구나!" - 고구려 원정 직전 업성에서 조조에게 제를 올리며. 이상의 발언은 모두 당태종 이세민의 발언들이다.[17]

조조는 통일을 못 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창업 군주들보다는 저평가를 받았고 대표적인 조조의 실수들은 후대의 학자와 정치가들에게 두고두고 까였다. 이것은 조조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은 있는데 개인적인 앙금에 사로 잡혀서 명망을 더럽히고 통일할 기회를 놓쳤다"라는 것이 후대의 지식인들이 내린 결론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동진 이후 촉한정통론이 두각되기 시작하고 남조시대를 거치면서 세설신어 같은 서적을 보면 당시 귀족층, 식자층의 인식에서 조조의 이미지가 조금씩 나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식자층이나 귀족충, 사대부들 입장에서도 반평생을 함께 일한 순욱이나 모개, 명사로 이름 높았던 최염 등을 납득하기 힘든 방식으로 죽이거나 숙청했기에 조조를 편하게 보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 나온 당태종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당나라 때까지는 식자층에선 그래도 영웅으로 받아들여진 듯 하다.

그러나 민중들 입장에선 조조는 오래전부터 간악한 인물이나 악인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조(後趙)를 세운 석륵(石勒)은 본디 노예 출신으로 나중에 입신양명하여 조조와 사마의를 묶어 평가하길 저 조조나 사마중달 부자처럼 남의 고아나 과부를 속이며 잔꾀를 부리고 온갖 아첨을 일삼으며 천하를 빼앗는 일은 자신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조조에게 멸망당한 군웅들의 통치를 받았던 지역에서 조조의 혹독한 정치에 반발하여 민담, 설화 등을 지어내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도삭군 전설.

거기에 조조가 학살을 많이 자행했던 것이 민중들에게 악한 이미지를 심어줬는데 대표적으로 서주 대학살이 있다. 진수마저도 이 부분에선 살육이란 단어를 쓰기까지 했으며, 형주의 10만 백성이 유비를 따라간 건 조조의 이때의 악명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18] 또한 관도전투 이후 8만 포로[19] 생매장 건을 보면 사람들이 조조를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20]

덧붙여 조조가 모금교위와 발구중랑장이라는 관직까지 만들어 도굴을 했다는 이야기가[21] 진림의 격서에 나오며, 이 역시도 당대에 비난받은 이유 중 하나. 문화재 도굴꾼을 국가단위로 운영해서 부장품을 팔아치우는 일을 했다고 받아들이면 조조가 대충 어떤 일을 한 건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송나라 때 쯤 가면 민담이나 설화, 이야기극 등에서 조조는 악인으로 부각된다. 이후로 후대의 중국에서는 조조=역적, 변절자, 악인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식자층들도 성리학적 관점에서 조조와 그가 세운 위나라를 좋게 보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당대의 중국인들 가운데 조조를 긍정적으로 본 이들은 없었다. 성리학 성립전이지만 사마광은 '위 무제는 잔혹한 데다 천하에 큰 공을 세웠으니 오래전부터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을 키웠을 것이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한나라 황제를 폐위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지 못했는데 그것이 어찌 마음이 없어서였겠는가. 명분이 두려워 스스로 억제한 것이리라.'라고 평가를 내렸다. 또 민중은 조조를 싫어했기 때문에 연극에서 조조가 패배하는 장면이 나오면 환호성을 지를 정도였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조조를 연기했던 연극인이 관객들에게 맞아 죽는 사건까지 있었다.(…) 그리고 삼국지연의가 나오고 나서 부터는 조조는 완전히 "난세의 간웅"으로 이미지가 굳어진다.

세월이 흘러 청나라 건륭제 역시 조조는 역적이라고 결론내렸다.[22] 박지원열하일기 구외이문편엔 조조의 무덤이 홍수로 발견되었을때 건륭제가 친히 조조의 목을 치고 유비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얘기까지 소개하고 있는데 그냥 전해지는 얘기를 박지원이 듣고 쓴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 이런 얘기가 조선사신단에게까지 들렸을 정도면 그 인식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청대에 출간된 요재지이에선 죽은 뒤에 개가 되어 나타나거나, 1000여 년이 지나도록 지옥에서 (죄상에 걸맞은) 형벌을 못 정하는 통에 애꿎은 볼기짝만 계속 맞으며, 심지어는 홍수에 무덤이 박살 나서 유골이 산산조각이 나는 이야기가 있는 등 엄청난 미움을 받았다.

1.6.3 연의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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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則鄴城水彰水. : 그곳의 성은 업성(鄴城) 그곳의 물은 창수(彰水)

定有異人從此起 : 남다른 사람이 그곳을 따라 일어나니
雄謀韻事與文心 : 웅대한 지략으로 멋진 일을 하며 문장도 뛰어나고
君臣兄弟而父子 : 주군과 그 신하들은 마치 형제와 부자 같았구나
英雄未有俗胸中 : 영웅은 가슴 속에 속된 것이 없으니
出沒豈隨人眼底 : 그 출몰을 어찌 평범한 사람들의 눈으로 따르랴
功首罪魁非兩人 : 공로도 으뜸 죄악도 으뜸 따로 두 사람이 아니라
遺臭流芳本一身 : 악취나 향기나 본래 한 몸에서 다 나왔네
文章有神霸有氣 : 그의 문장은 신묘하고 패기가 있었으니
豈能苟爾化為群 : 어찌 구차하게 다른 인재들과 섞이랴
橫流築臺距太行 : 흐르는 물을 가로막고 동작대를 쌓아 태행산과 겨루고
氣與理勢相低昂 : 기(氣)와 이(理) 형세 따라서 때때로 낮아지고 높아졌네
安有斯人不作逆 : 어찌 이런 사람이 반역을 저지르지 아니하고
小不為霸大不王 : 작게는 패자(覇者), 크게는 왕이 되지 않았으랴!
霸王降作兒女鳴 : 그러나 패왕도 죽게 되니 아녀자처럼 울며
無可奈何中不平 : 어쩔 도리 없이 마음속으로 불평했네
向帳明知非有益 : 제를 올려도 부질없음을 잘 알고
分香未可謂無情 : 향수를 나눠줬으니 무정하다고 말할 수 없네[23]
古人作事無鉅細. : 고인이 일을 할 때 크고 작음에 구애 없었고
寂寞豪華皆有意 : 적막하거나 호화롭거나 모두 의미 있었는데
書生輕議塚中人 : 서생들은 무덤 속 사람을 함부로 의논하지만
塚中笑爾書生氣 : 무덤 속 사람은 이런 서생을 비웃을 것이네

- 업중가(嶪中柯)

동양 창작물계에서는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과 복합적인 캐릭터성의 대표주자중 한명으로 볼 수 있다.

소설 연의에서는 한쪽 측면으로만 평가하기 어려운 매우 복합적인 캐릭터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연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캐릭터 중의 하나다.

예를 들면 완에서 자신을 위해 희생한 전위를 위해 눈물을 흐르는 선한 모습과[24] 이에 반면에 수춘에서 군량이 부족하자 군량 배급 담당자 왕후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는 간사한 모습이 있다.

또한 관우를 자신의 인재로 삼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은 화북으로 가는 관우를 안타깝게 송별하는 모습과 자신의 속을 읽은 양수를 죽이는 모습이 상반된다.

사실 연의 이전엔 선한 면은 아예 없다시피할 정도로 악독하고 잔인한 면만 부각되고 없던 악행도 새로 만든 데 비해, 비교적 연의는 실존한 악행 대부분에 가상의 악행은 얼마 없고, 여기에 선한 모습을 추가했다. 사실상 연의가 조조 이미지 재평가의 시발점이라 봐도 좋을 정도.

그 덕분에 연의 이전까지는 평면적인 악당의 모습으로 나왔으나, 연의에서는 선과 악, 인정과 비정이 섞인 복잡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중적인 면이 조조를 매력적인 캐릭터로 승화시켜주고 조조에 대한 평을 바뀌게 하였다.

1.6.4 현대의 평가

현대에 들어선 조조라는 옛 대권신의 위세에 영향을 받을일도 없는 현대인들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대 중국을 중심으로 조조의 재평가가 이루어져 현대에는 이러한 조조 악당론에 대립하는 영웅성을 강조하는 조조론이 인기를 얻고 있다. 중국에서의 평가는 위에 적었듯이 대대로 간웅, 역적 등에 가까웠지만, 현대에 들어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곽말약이 조조를 '민중적인 혁명아'라고 평하며 복권 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곽말약 이 사람이 마오쩌둥 빠돌이라는 논란이 있는 편이라 어쩌면 마오쩌둥의 입맛에 맞춘 조조 찬양일 수도 있다.

84부작 삼국지처럼 연의의 이미지를 그대로 따오기도 하지만 신삼국처럼 일세의 영걸임과 동시에 그렇다고 일방적인 미화가 아닌 비정하고 냉혹한 모습도 잘 조명된 균형잡힌 모습으로 나오는 작품도 있다. 한편으로는 드라마 조조처럼 조느님에 반대하는 놈들은 다 찌질이(...)로 묘사된 작품도 있다. 하여튼 현대 중국작품에서 조조를 악당으로만 그리는 매체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정사가 유행을 타기 시작하던 재평가 초창기에 연의의 촉한정통론에 대한 반발로, 무능한 유비에 대비되는 유능한 조조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현대에도 통용되기 어려운 악행들도 재평가 받으면서 이전만한 인기는 없는 편이다. 사실 정사 갖다가 재평가 한다 했는데, 유비는 연의에서 인덕 쪽으로 버프를 받았어도 능력을 보면 엄청난 너프를 먹었다. 즉, 연의 유비를 정사 조조에 비교해놓고는 정사가 옳다며 조조가 유비보다 유능하다 했으니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요즘은 재평가가 계속해서 이루어지며 점점 자리를 잡아가서 위나라 측에서도 유비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촉나라 측에서도 조조가 유능했던 것 정도는 알기에 서로 인정하고 있지만 극렬 위빠들과 촉빠들은 계속해서 우기기만 하고 답이 없다. 물론 극소수일 뿐이니 오해하지 말자.

정리하자면 현대에서 재평가된 조조는 현대 시점에서 부각된 악행으로 더 이상 호평을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그 시절이라고 치더라도 여론이 좋은 것도 아니었고, 현대에 조조의 만행이 부각되었다는 인식과 달리 전근대 역사학자들도 조조의 만행에 대해서 무조건 그냥 넘어가지만은 않았다. 극단적인 경우 "조조는 순전히 마오쩌둥 덕분에 뜬 인물이지 아니었으면 그냥 능력 좀 되는 악당 취급 이었을 것이다."라는 의견도 있다.

아무래도 좋을 여담이지만 리우 올림픽에서 중국 양궁선수들이 한국 양궁선수에게 밀리니까 옛날에 중국에 있던 활 잘쏘는 사람은 어디갔냐는 드립이 나왔는데 이에 조조한테 죽었어라는 리플이 달렸다(...). 대한양궁협회에서 감사해야 할 위인이다.

1.7 미디어 믹스

맨 위에도 나와있듯 발음이 같은 죠죠와 엮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현대에 와서는 주로 일본 창작품의 영향을 받아서 미남으로 나오기도 한다.

조조를 한나라를 부정한 혁명가, 개혁자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천자를 끼고 원소가 죽은 이후 그의 세력을 흡수한 시점에서 최종보스가 되기 때문에(…) 조조가 주인공인 작품은 필연적으로 픽션으로 후반부를 꾸미거나 후반부에 방향이 엇나가게 된다.

배우를 봐도 이런 이미지 변화를 느낄 수 있는데 이전의 조조는 위의 동상들에서 볼 수 있듯이 군주로의 위엄과 냉혹함을 강조한 이미지로 등장했지만, 최근에는 이미지가 다양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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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코에이 삼국지 12의 조조, 오른쪽은 노부나가의 야망 천도노부나가. 복사 붙여넣기

위에서 보듯이 일본 코에이사의 삼국지 시리즈의 조조의 모습은 비슷한 시기의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모습과 거의 같다. 코에이 사의 역사 시뮬레이션이 인물 개개인의 매력에 의지하는 경향이 큰 만큼, 여러 인물들의 특징적인 면들을 강조하다 보니 이런 일이 왕왕 발생하는 것. 코에이를 비롯한 일본에서 씌여진 2차 창작에서 조조와 오다 노부나가를 등치시키는 면이 상당히 강하다.

일본에서 조조를 '냉혹한 초인'으로 묘사한 것은 나쁠 것 없는 '캐릭터' 해석이었다. 중화권의 삼국지 컨텐츠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코에이 게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국내 삼국지 팬덤의 현실상, 코에이 게임의 이미지 메이킹, 특히나 그 정점에 선 캐릭터인 조조의 이미지는 국내 삼국지 팬덤에 깊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조의 이미지도 점점 노부나가와는 차이가 생기게 되어 점점 인간적인 모습이 추가되는 경우가 잦아졌다.

2 曹肇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장사(長思). 조휴의 아들.

조휴가 주방의 거짓 항복에 속아 석정에서 패한 일로 인해 화가 나 등창으로 사망하자 후사를 계승했는데, 조조는 당대에 뛰어난 재사로 산기상시와 둔기교위를 역임했다. 조예가 병으로 죽기 직전에 조우, 하후헌, 진랑 등과 함께 조예의 부름을 받아 뒷일을 부탁받았다. 그러나 진랑 등과 사이가 좋지 않아 진랑 등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한 유방손자가 조우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몰래 일을 꾸며 조예의 마음을 갑자기 변하게 했으며, 이로 인해 조예는 사마의조상에게 뒷일을 맡기고 조조는 조칙을 받아 영지로 내려가도록 명령받았다.

정시 연간에 사망했고 사후에는 위장군으로 추증되었으며 아들 조흥이 후사를 계승했다. 인지도가 항목 1의 인물에 밀려 지극히 떨어진다. 지못미
친척 할아버지는 창업 군주인데 이쪽은 그냥 종친(?) 중신일 뿐이라

  1. 정사에선 '천하'대신 '다른 사람'이었는데 연의에서 약간 각색된 것이다. 참고로 홍길동전의 판본 중에는 "천하가 나를 저버릴 지언정, 내가 천하를 저버리지 않겠다."라는 대사가 있다.
  2. 역사적 가나 표기법으로는 さうさう. 아마 옛날에는 '사우사우'로 읽었을 것이나 후대에 철자는 남은 채 '소-소-'로 발음이 바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좀 더 간단한 현대 가나 표기법으로 교체되면서 そうそう로 쓰게 되었다.
  3. 날조를 뜻하는 조작(造作)이 아니라 조종한다는 의미의 조작(操作)
  4. 위나라의 무제가 주석을 단 손자병법. 조조의 저서인 맹덕신서가 이 위무주손자와 동일하다는 견해도 있다.
  5. 육(六)군, 즉 천자가 이끄는 군대를 가리킨다.
  6. 국경지대에 있는 농민들 강제 이주는 예사였으며, 민둔제의 경우는 징발된 농민으로 하여금 황무지를 개간시키는 것이다. 백성의 딸이나 심지어 유부녀(!)까지 뺏아서 병사들의 아내로 던져주는 것은 덤.
  7. 중앙 정부가 부패하지 않는 한은 더 이상의 수취는 없다는 뜻이다. 어떤 훌륭한 제도라도 운용이 방만하다면 결론은 국민에게 피해가 온다.
  8. 더불어 조조가 살아돌아온다해도 이 질문을 하지 못할것이라고 얘기했다. 조조가 질문하는 사람을 죽여버릴까봐 두려우니까.
  9. 하지만 꿩은 활로 쏘아 잡는만큼 그만큼 조조의 궁술이 뛰어나다고 서술한것이다.
  10. 양주 단양군의 병사들로 용맹하고 흉폭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유비가 도겸을 지원했을 때도 도겸이 유비에게 단양병 일부를 그의 군대로 편입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11. 때문에 연의에서는 길평에게 독살당할 뻔했다.
  12. 약 161cm 정도라고 알려져있다.
  13.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평가 기준은 당나라 때 등장한 표현이다. 신체, 언행, 글씨, 판단력 모두를 총괄하는 기준이므로 외모중시하고는 상관없다. 신(身)이라는 게 단순히 핸섬한 얼굴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얼굴 형태는 못 생겨도 품격이 나타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14. 五言詩, 한 행에 다섯 글자가 있는 한시. 대부분의 한시는 오언시 또는 칠언시이다. 兮 등의 불필요한 추임새 등이 사라져 있다.
  15. 동일한 글자로 간주하는 글자. 파자에 많이 사용된다.
  16. 호사가들이 관우가 조조를 떠난 이유 중에선 두씨를 조조가 차지해서 그런거 아니냐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물론 애시당초 그랬다면 관우가 조조에게 받은 은혜는 꼭 갚고 떠나겠다고 하진 않았겠지만.
  17. 과시할 만도 한 게, 당태종 역시 막강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면에서는 조조를 초월한 사실상의 창업 군주였다.
  18. 실제로 촉오의 명사나 장수들 중 제갈량 등 서주 출신이 꽤 있는 것을 보면, 서주 대학살이 얼마나 병크인지 알 수 있다.
  19. 이들의 귀와 코를 잘라 원소에게 보낸 건 덤.
  20. 이런 성향때문에 벌어진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하북 평정 후 호관을 공격했는데 함락되지 않자 함락되면 다 묻어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게 역효과가 나서 몇달이 되도록 호관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후 조인이 이는 좋지 못하다며 조언한뒤 살 길을 열게 하자 호관은 그대로 항복했다(위서 조인전)이거 어디서 많이 본것 같은데
  21. 훗날 남조 유송폭군 유자업은 조조를 본받길 좋아했는데 그 중에 본받은게 바로 도굴이었다.(…)
  22. 복잡하게 생각할것 없이 조조가 죽인 이들 중에서 자신이 모시는 황제의 아이를 임신한 귀비황제의 황후가 있고 둘 다 헌제가 살리려고 했는데 무시했다. 이 점 하나만 봐도 당대가 아닌 그 후대라 해도 황제 신분인 건륭제로서는 역적으로 보일수밖에 없다.
  23. 조조가 죽기 전에 그를 따르던 여공과 시녀들에게 제사 지내는 도구를 나눠준 일을 말한다. 그런데 이건 애정이 있어서라기보단 "내가 죽어도 계속 제사 지내줘"라고 종신 노동(…)을 시키는 의미가 다분하다.
  24. 하지만 조조까 성향이 짙은 모종강은 조조의 눈물이 인심을 얻기 위한 연기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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