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그람시

Antonio Gramsci(1891.1.22 ~ 1937.4.27)
이탈리아사회주의 혁명가이자 마르크스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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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한 인상. 그러나 눈썹이 갈매기 눈썹이다.(30세경의 사진)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

팬클럽,...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팬클럽이 있는데 이탈리아를 못하면 낭패.(International Gramsci Society) 소박한 그람시 오타쿠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좋은 자료 사이트로는 그람시아넷 (http://gramsci.objectis.net/ ) 이 있다.


4살 때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고(척추를 다쳐서 키가 150cm 정도였다.) [1][2] 몸이 상당히 병약한 편이었다. 왜소한 체구와 불안한 건강 상태 등 육체에 관련된 결함은 코민테른에서 그람시를 대중 간부로 세우기를 주저했을 정도로 심각했는데 하도 병약한 나머지 그람시가 어렸을 때는 밤에 자다가 죽으면 바로 장례를 치르려고 어머니가 매일 정장을 입혀서 재웠다고 한다. 가난했는데 형제는 많아서 11세때 학교를 중퇴하고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독학하다가 다행히 장학금을 받아 토리노 대학에 진학하는데(대학 시험을 치면서도 몇번 기절했다) 결국은 몸이 병약해서 시험 몇 번 보고 포기했다.[3]

1913년 이탈리아 사회당에 입당. 토리노의 노동자들을 이끌어서 이탈리아 사회당 내 좌파 세력을 결집한다. 대학 중퇴 후 사회당 기관지인 아반티 토리노 지국에 입사했는데 당시 토리노 지국장은 무솔리니였다.[4] 거기조차 때려치고 나와서 1919년 이탈리아 공산당의 기관지 신질서를 창간한다. 1921년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인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립한다.

동지들이 기고한 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싸늘한 표정으로 "이것도 글이라고 써 왔느냐"라고 반문하는 냉혹한 도시 남자…가 아니라 편집장이었다고. 그러나 편집을 마치고서는 젊은이들과 산책하면서 즐겁게 토론하는 사람이었다. 냉혹한 도시 편집장, 그러나 젊은 동지들에게는 다정하겠지.

이탈리아 사회당은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파시스트 정당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5] 그에 비해 그람시의 이탈리아 공산당은 활발하게 반파시스트 운동을 벌인다. [6] 무솔리니 정부는 그 때문에 파시스트 국민당 외의 모든 당의 정당 활동을 금지시킨다. 그걸 빌미로 정당의 리더인 그람시를 투옥. 이때 신질서 창간 동기 중 움베르토 테라치니를 비롯해[7] 공산당 주요 인사 20여 명이 함께 투옥된다. (1926년)

머리가 너무 똑똑하니까 20년 동안 두뇌를 쓰지 못하게 해야 된다(…)[8] 는 어이없는 이유로 20년 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옥중에서 오히려 두뇌를 더 활발하게 쓰면서 책을 왕성하게 집필하였다. 대표작은 <옥중수고>. [9]세계에서 행동 반경이 가장 좁은 혁명가가 아닐까 추정된다.[10] 원래 몸도 약한 데다가 옥중에서 건강상 이유(뇌출혈)로 사망. 무솔리니는 그람시의 사망이 완전히 확인되고서도 며칠 뒤에서야 그람시의 사망을 발표한다.

후세의 많은 사람, 특히 활동가들에게서 "마르크스주의를 한 단계 발전하게 한, 신분에 관련된 구속에 지배되지 않아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이성에 토대한 결합으로 구성된 사회의 경험 없는 사람에게 오랜 기간에 걸쳐 조언해 주고 도와주는 경험이 있는 사람・선배"와 "결과상 패배한 혁명가"라는 극단으로 경도되어 상반된 평가받는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헤게모니시민사회, 수동 혁명, 기동전·진지전, 생물체처럼 전부를 구성하는 각부가 밀접히 관련한 지식인 등의 개념 도입으로도 유명하다. 여담으로 이탈리아판 백괴사전에는 "죽도록 지루하다"라는 평이 있는 만큼, 청소년기에 교과서에서 접했으면 당연히 싫어지고도 남을 발언을 많이 했다. 한국에도 <옥중수고>, <남부 문제[11]에 관하여 외>, <대중문학론>을 비롯 많은 책이 번역되어 있고, 정치학이나 문화론을 공부하면 한 번쯤은 반드시 거쳐가게 될 인재이다. 일반으로 그람시의 이론은 마르크스주의를 한 단계 제고했다고 간주되는데 특히 경제주의에 기초한 마르크스주의(물질에 관련된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와 마르크스주의에 토대한 전위 주의(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은 외부에서 도입된다)를 대상으로 한 성공했다고 할 만한 비판으로 평가받는다.

그람시는 특히 세계를 변혁하려는 사람들이, 생물체처럼 전부를 구성하는 각부가 밀접하게 관련된 지식인이 되어 대중의 '상식'에 익숙해질 것을 주문했다. 상식은 노동계급이 세계를 관망하는 시각을 형성하며, 사회구조는 이 상식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게 돼서 그람시는 대중을 중심으로 한 상식이 형성되는 원인을 냉철히 분석하고 이에 개입하여 상식을 노동자 계급의 새로운 질서로 전화하게 할 수 있을 때에야 세계는 비로소 변혁될 것이라 주장했다. 이런 변화는 무척이나 길고 지난한 과정이기에, 결과상으로 그람시는, 생물체처럼 전부를 구성하는 각부가 밀접히 관련된 지식인이 노동자 계급의 상식에 익숙해지고 이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진지를 반드시 형성해야 한다고 역설하게 된다.

이런 그람시의 주장을 계승해 시민사회와 진지전을 강조하면서 노동계급의 자생하는 투쟁과 이것을 지원하는, 생물체처럼 전체를 구성하는 각부가 밀접하게 관련된 지식인의 역할, 문화론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두고 그람시주의자라 부르기도 한다. 최근 유명세를 타는 어네스토 라클라우와 상탈 무페는 신그람시주의자로 분류되고 안토니오 네그리도 크게 볼 때 여기에 포함되기도 한다.

최다로 언급되는 어록으로 위의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와 더불어
나는 무관심을 미워한다.[12] 산다는 것은 어느 한쪽을 편든다는 것이다.가 있다.

엉뚱하게 한국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핵심어로 등장한다. 극중에서 소지섭하지원에게 그람시의 계급론을 어설프게 들먹이면서 하지원과 조인성의 사랑도 계급 때문에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라고 미숙하게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이 드라마 때문에 이름조차 생소하던 이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의 책이 잠시 특수를 맞은 적도 있었다. 그람시가 뭐땀시?

최근에 그람시 분석서인 "그람시의 군주론 : 그람시 마키아벨리를 읽다", "그람시와 한국 지배계급 분석 : 그람시의 역사적 블록 개념과 한국적 적용을 중심으로",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 그람시 산문선"이 연달아 나왔으니 가볍게 그람시에 대해 알아볼 사람은 이쪽도 참고해볼 것.
  1. 그런데 키 큰 러시아 미인 바이올리니스트와 혼인. 그람시는 신혼 초부터 정치상 바빴고 이후에 투옥되어서 아내와 두 아들은 계속 러시아에서 살았다.
  2. 후일 그람시가 상당히 유명해진 후, 실물을 본 적이 없던 사람이 그람시가 인사했을 때 "그럴 리 없어, 안토니오 그람시는 거인이라야 해, 이렇게 작지 않다고!"절규했다는 에피소드가...그람시가 쓴 편지에 나온다.
  3. 이탈리아의 대학은 학년제가 아니고 시험이 전부 통과되어야 졸업.
  4. 베니토 무솔리니가 맞다. 무솔리니도 처음엔 사회주의를 신봉했다.
  5. 그람시의 정치상 라이벌인 아마데오 보르디가는 파시스트 정당을 듣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떼로 잡혔는데 좋은 말발 덕분에 배심원을 녹여서 나왔다.
  6. 의회에서 만난 무솔리니가 그람시와 친한 척해 보겠답시고 악수하려 손을 내밀었을 때 냉랭하게 무시했다는 일화가 있다.
  7. 팔미로 톨리아티는 모스크바에, 안젤로 타스카는 프랑스에 있었다.
  8. 담당판사에게 이탈리아에서 가장 위험한 두뇌라고 평받았다.
  9. 총 29권, 2848페이지. 48년부터 일부 간행되기 시작했고 최초 편집본은 신질서 동인인 팔미로 톨리아티 판본이다. 현재 널리 알려진 것은 75년 제라타나 판본. 그람시의 저작으로 출판된 것의 대부분이 이것의 발췌본이다.
  10. 그러나 제3인터내셔널에도 참가했고(그때 아내를 만나서 혼인) 비엔나에도 들락거렸으며, 무솔리니가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을 무렵에도 열심히 도망 다녔다.
  11. 여담으로 1997년 대선 당시 그람시를 전공한 동국대 교수라는 황태연이란 자는 '남부 문제'를 원용해 '지역 등권론'이란 개념으로 DJP 연대를 옹호했다. 물론 대다수 좌파 지식인들은 어이 상실...
  12. 산레모 가요제에서 낭독되어서 최근에 갑자기 더 유행하게 되었다 :http://www.youtube.com/watch?v=4PKC-COvG2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