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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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Roman Gary
가명Émile Ajar[1]
생몰년1914년 5월 8일 ~ 1980년 12월 2일
국적프랑스
출신지빌뉴스[2]

생애

로맹 가리는 1914년 빌뉴스에서 태어난 유대계 프랑스인 소설가이며, 본명은 로망 카시유(Roman Kacew)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난 뒤인 1917년에 어머니와 함께 서유럽으로 떠났고, 이후 1927년에 프랑스 니스에 정착을 한다. 1933년에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 연수를 받았으나,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프랑스 공군에 입대하여 로렌 비행 중대 대위로 참전하였다. 이 공으로 종전 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이후 1941년부터 1961년까지 외교관으로 일을 하면서 여러 소설을 발표하였다.[3] 이 당시에 발표한 소설들 중 1945년에 발표한 『유럽의 교육』[4]으로 비평가상을 수상하였고, 1956년에 발표한한 『하늘의 뿌리』으로 공쿠르상[5]을 수상하였다. 이후 로맹 가리는 프랑스 문학계의 스타가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이후 발표한 작품들마다 평론가들의 극심한 비판을 받아 심적 고통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959년에 영화배우 진 세버그(Jean Seberg)와 결혼을 하였다. 그후 점차 사이가 틀어져 1968년에는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각방을 사용하였으나[6], 1970년 별거 중인 진 세버그가 임신하자 로맹 가리는 태어날 아이의 법률적 아버지가 되어 그녀와 화해한다. 이후 진 세버그는 여자아이를 출산하지만, 태어난 아기는 이틀 후 사망하고 만다. 이후 로맹 가리, 샤탕 보가트, 에밀 아자르 등으로 여러 소설을 발표하다가, 1975년에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으로 공쿠르상을 또 수상하였고. 에밀 아자르는 당시 프랑스 문학계에서 엄청난 찬양을 받았다. 공쿠르는 같은 작가가 두번 받을 수 없는 것이 원칙인데도 수상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에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문학계에 없었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는 자신의 오촌조카인 폴 파블로비치[7]를 내세워 수상을 거부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공쿠르 아카데미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여전히 수상자는 에밀 아자르라고 하였다. 이후 1977년에 로맹 가리의 이름으로 『여인의 빛』과 『영혼의 짐』을 발표하였으나, 비평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조카 에밀 아자르를 표절하려 든다."며 혹평하였다.

1979년에 진 세버그가 실종되었는데, 같은 해 9월 8일에 실종 10일만에 그녀의 차 뒷자석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이후 로맹 가리는 레일라 첼라비라는 40세의 이혼녀와 사랑에 빠져 아들인 디에고와 셋이서 함께 지내개 되지만, 1년 뒤인 1980년 12월 2일에 자신의 입 안에 권총을 쏘고 생을 마감한다. 죽기 전에 유서를 남겨두었는데, 이 유서는 로맹 가리 사후 6개월 뒤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8]이란 제목의 소책자로 발간되었고, 여기서 바로 자신이 에밀 아자르였음을 밝히게 된다. 이 책에서 로맹은 평론가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프랑스 문학계는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1. 에밀 아자르 이외에도 사용한 가명도 많았다
  2. 리투아니아의 수도로, 로맹 가리가 태어날 당시에는 러시아 제국이 점령하고 있었다.
  3.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첫 소설은 1935년에 출간한 『폭풍우』이다. 그 이전에 뤼시앵 브륄라르(Lucian Brulard)라는 이름으로 『죽은 자들의 포도주』라는 소설을 투고하기도 했었다.
  4. 1944년에 런던에서 출간한 『분노의 숲』의 프랑스어본이다.
  5.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으로, 원칙상 한 번 수상한 사람은 다시 받을 수 없다.
  6. 아들인 디에고는 로맹 가리와 생활하였다.
  7. 로맹 가리의 부탁으로 에밀 아자르를 연기했던 사람이다. 이후 1980년에 폴이 에밀 아자르를 연기하길 거부했고, 둘의 관계는 틀어진다.
  8. 국내에는 『자기 앞의 생』의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