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다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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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명에바다학교
한자(에바다)學校
영문Ebada Schoo
개교1986년
유형특수학교
성별공학
운영형태사립
소재지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하북4길 129-23
홈페이지[1]

1 개요

에바다학교(에바다學校)[1] 경기도 평택시에 있는 사립 특수학교이다.

2 개교

1986년 3월 1일 개교했다.

3 연혁

  • 1970. 12. 01 맥신 스트로빗지 선교사에 의해 에바다 농아인 시설 설립
  • 1985. 09. 02 에바다농아학교 문교부 인가
  • 1986. 03. 01 에바다농아학교 개교
  • 1987. 09. 00 에바다농아학교를 에바다학교로 명칭 변경
  • 1988. 11. 00 고등부 인가(3학급)
  • 1996. 11. 27 에바다 민주화 및 투명한 운영을 위한 학생농성 시작
  • 2003. 06. 07 에바다사태 완전 정상화
  • 2014. 02. 14 초등부 제23회, 중학부 제26회, 고등부 제23회 졸업

4 건학이념 및 교훈

사랑과 믿음으로 꿈을 키우자

5 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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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학교 상징

교목: 은행나무
교화: 장미

7 졸업생

추가바람

8 기타

8.1 에바다 비리재단 퇴진과 정상화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사학 재단의 악행을 끊고, 학교를 정상화 시켰다는데 있어서 에바다학교는 우리나라 특수학교에 있어서 살아있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이다. 자세한 투쟁 과정은 홈페이지에 가면 확인 할 수 있다. 장애인과 특수교육에 관심이 있다면 상당히 장문의 글들이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한번 관심있게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진짜 피껏솟한 내용이 이어진다. 에바다학교 민주화과정[2]

8.1.1 에바다 사건[3]

농아어린이 70명 인신매매, 수박 겉핥기 식의 감사에서 6억7천만원대에 이르는 횡령, 강제노역 임금착취, 폭력 등 대표적 장애인 시설 비리로 알려진 에바다복지회 사건. 재단과 지역 토착세력이 뒤얽혀 전국의 양심들이 7년의 투쟁을 통해서야 해결했다. 96년 11월 27일 새벽 5시. 에바다학교의 학생들이 배고픔과 추위, 강제노역과 폭력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에바다 비리재단 퇴진을 위한 6번째 농성'을 시작했다.(이전에 학생 3차례, 농아원 보육사 1차례, 학교 교사 1차례 등 5번의 농성이 있었음)

장애인 시설 내의 조그마한 행정/재정비리로 여겨지던 이 사건이 일파만파로 확산된 것은 재단의 신고로 5분만에 출동한 평택경찰이 농성하던 아이들에게 권총을 들이대며 무력진압을 하면서부터이다. 평택경찰은 농아 아이들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마구 두들겨 패고 노끈으로 줄줄이 묶어 파출소까지 200미터를 끌고 가며 계속 구타를 가해 26명 중 23명이 다치고 3명이 입원하는 부상을 입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에바다는 크게 이슈화되었으며, 그 이후에 연이은 양지마을사건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 장애인 시설비리의 상징이 되었다. 여론에 떠밀려 실시된 각종 감사를 통해 에바다 재단의 국고 횡령금액은 공식적인 것만 6억7천여만원이다. 그러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이러한 국고 횡령은 원생 수에 따른 국가 지원의 맹점을 이용, 호적 및 주민등록 이중등재와 발급, 장애인수첩의 부당발급을 통해 이루어지거나 농아 학생들의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버젓이 가족이 있는 농아 학생 등은 친권포기 각서 등을 받아 고아로 기록, 국가 보조금을 부풀려 받아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착복은 바로 열악한 시설과 인권유린으로 이어져 농아 원생 70여명이 지난10년 동안 1인당 2~3만 달러에 해외로 강제 불법 입양된 사실이 밝혀져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겨울에 난방조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어린 아이들이 찬물로 목욕을 하고 아이들이 배가 고파 가게에서 식료품을 훔쳐 먹기도 하고 개밥그릇의 라면을 주워 먹기도 해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이 사건이 더욱 확대 되었던 것은 조사 중에 농아 원생 중 세 명의 아이들이 인근미군부대 미군(월리엄스 미 제7공군 소속)에게 성추행 당한 것이 밝혀지고 재단은 이를 알고도 방치한 후 매번 합의금을 받아 챙긴 사실이 드러나면서 더 큰 충격과 분노에 휩싸이게 했다. 이에 민주노총 평택지구협을 중심으로 한 에바다비리재단퇴진과정상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되기에 이른다.

에바다 사안이 평택 전지역으로 퍼져 나간 것은 에바다 비리재단과 관과의 유착, 심지어 경찰, 검찰과의 지역 토착비리의 의혹이 짙어지면서부터인데 재단에서 행해진 대부분의 횡령 수법은 사실상 관과의 유착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장애인시설이라는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주민등록증을 이중 발급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미발급상태의 장애인수첩이 농아원 사무실에서 대량 발견된 것도 이러한 의혹을 더욱 짙게 하고 있다.

미발급 장애인수첩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관청 밖에 없다. 이런 유착 의혹은 97년 7월 농성 과정 중에 농아원 근처 하천에서 최미선(당시 나이9세) 학생이 익사체로 발견되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더구나 최미선 사건 이후 에바다 재단에서는 매년 크고 작은 농성이 빈번했으며 강제성추행과 폭행 사건은 비일비재했음이 많이 증언되고 있어 이에 대한 진상 조사가 시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제까지 드러난 의문사로는 재단에 의해 강제 결혼을 당하여 최씨 일가의 가정부로 있다가 탈출했으나

다시 잡혀 와서 머리를 삭발당한 상태의 알몸으로 천정에 거꾸로 매달려 무자비하게 폭행당하고 얼마 후 죽은 1992년의 오미숙 사건과 1994년에 있었던 곽은미 학생 실종사건, 성재동 학생의 실종, 오문철 학생의 실종, 성명 미상의 농아인 아주머니 실종 사건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에바다 재단의 고착된 비리와 인권유린의 가장 큰 원인은 재단운영이 한집안, 최씨일가의 혈족 족벌운영으로 이루어지면서 20년 동안 지역 토착비리로 굳어졌다는 점이다. 에바다 재단은 최성창 이사장과 최실자 원장을 중심으로 한 최씨 일가가 이사를 포함하여 9명이 포진해 있었다. 또 하나의 가장 큰 원인은 이러한 비리가 장애인시설을 포함한 모든 사회복지시설에 만연하여 마치 관례처럼 되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보건복지부 관계자조차 이러한 재정비리의 상납구조가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며 97년 6월 감사원 감사에서는 전국 83개 복지시설에서 허위로 서류를 작성, 공금을 횡령한 사실을 지적되기도 했다. 그러함에도 정부가 이를 척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설장들의 로비가 막강한 것으로 알려진 데다 에바다로 하나의 선례를 남기면 뒤따를 모든 부담을 감당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였다. 언론에 공개되어 파문이 일었던 김선기 평택시장과 비리재단과의 비밀합의각서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중앙 정부의 관리 소홀로 말미암아 감사원의 특별감사조치조차 이행되지 않았고 평택시청은 대부분 에바다와 관련하여 허위보고를 일삼은 것으로 드러나 주무부서인 보건복지부마저 최씨 일가의 로비에 넘어간 것이 아니냐는 의심마저 받았다.
에바다 비리재단 퇴진 운동은 중앙정부의 개입이 없이는 사태 해결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게 했고, 그래서 98년 5월 10일 ‘金大中(김대중)대통령 국민과의 대화’에서 에바다 문제가 또다시 제기됨에 따라 보건복지부와 교육부 등 정부부처와 경찰 등 관련당국이 사태파악에 나섰으나, 아무 것도 정상화된 것이 없었다는 데서 한계를 드러냈다.

왜 해결이 안 되나? 청년이 되어 다시 길거리로 나선 농아 학생들, 김대중 대통령의 대선 공약 사안이었고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 당선이 그 누구보다도 설레였던 에바다 농아 학생들. 대통령의 바쁜 일정 때문이라는 서운함속에서도 '장애인 대통령'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던 아이들. 이러한 기대감은 지난 98년 5월 10일 오후 열린 ‘金大中(김대중) 대통령국민과의 대화’에서 에바다 문제가 또다시 제기됨에 따라 완전한 희망으로 아이들에게 받아 들여졌다.

그리고 이것은 장애인 직능 대표인 이성재 의원이 에바다 이사장을 자임함으로써 현실로 구체화되었다. 그런데 그 희망의 이사장은 지난 99년 6월 1일로 임기가 완료되어 에바다 정상화를 이루지 못한 채 물러났다. 96년 농성 당시 어리게만 느껴졌던 농아 아이들이 청년이 되어 온도 40도가 넘은 아스팔트 위에 다시 텐트를 쳤다. 농성 초기에 내걸었던 구호인 최씨일가 반대와 그 일가와 결탁한 김선기 평택시장 퇴진을 외쳤다. 왜일까? 평택 지역의 단순한 민원 사항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에바다 사건 무엇이 그리 대단한 사건이길래 대통령도 해결하지 못했던 것일까? '장애인 국회의원'도 '장애인 대통령'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 처음에 이성재 의원이 이사장을 할 때는 깨끗이 이 문제가 해결 될 줄 알았다. 이성재 의원은 에바다 문제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정상화 투쟁 주체들의 주장대로 에바다의 최씨 일가에 대한 족벌운영 체제 혁파를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재 전 이사장은 결국 에바다복지회의 운영을 정상화 하지 못했고 그 가장 큰 원인은 최씨 일가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이성재 이사장은 부임 초기에 재단에 의해 농아원에서 쫓겨 나오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정작 최씨일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최씨일가의 혈족이자 비리의 핵심이었던 양봉애가 행정실장으로 그대로 있고, 거기다가 이성재 의원은 양씨를 농아원 원장 직무대행으로 앉혔다. 이성재 전 이사장은 임기 만료때까지 정상화를 위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오히려 최씨 일가의 영향력을 통제하라는 에바다 공대위의 주장을 너무 과도하고 타당하지 못하다며 이미 에바다는 정상화 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언론에 입장을 밝히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성재 전 이사장이 약속했던 객관적인 이사진도, 비리발생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복지회의 지역사회로의 통합과 공개도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또다시 아스팔트 위로 나섰다. 믿었던 이성재 의원마저 에바다를 정상화 시키지 못하고 물러나자 비리 재단측의 복귀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사건이 장기화 되고 에바다 사건 자체가 정권을 압박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자 명분적으로 농성측 입장을 편들었던 청와대에서 조차 최성창, 최씨일가를 받아들이라고 에바다 농성측을 얼르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당시에 에바다연대회의에서 이사장 후보로 추천한 김칠준 변호사는 청와대 신필균 비서관으로부터 최성창을 받아들일 것을 종용 받기도 했다. 최성창은 목사로서 에바다복지회를 건립하고 비리 사건 당시 대표 이사장이었던 인물이고 아직도 농아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현실적으로나 개념적으로도 최성창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에바다의 원점회귀를 의미하며 사실상 에바다 투쟁의 패배를 의미한다. 당시 공대위측의 김칠준변호사는 “최씨는 에바다 사태 전까지 이사장으로서 에바다 비리의 핵심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관선 이사진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최씨를 이사진에 편입한다는 것은 에바다 문제를 해결하는 본질과 맞지 않다는 의사를 평택시청에 분명히 표시했다"고 밝혔다. 최씨를 포함한 관선이사진의 발표가 있었던 2000년 6월 28일 14시 45분경 에바다 해아래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장양(남, 54, 청각장애인)씨가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분신을 기도 하려다 공대위 회원들에게 저지를 당하기도 했다. 장양씨는 평소 비리재단 일가가 에바다에 복귀할 경우 분신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었다. 29일 새벽 1시 20분 에바다 공대위가 시청측의 '에바다복지회 임시이사 예정자명단 발표'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에바다 공대위는 성명서에서 "28일 최성창, 최성호 형제가 포함되어 있는 에바다복지회 차기 이사진 예정자 명단을 접하고 끓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며 "김선기시장이 결정한 이번이사 개편안이 에바다 비리주범 최씨 일가의 영원한 기득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 규정하며, 이를 뒤집기 위하여 전국의 양심세력과 함께 사생결단의 각오로 투쟁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에바다 정상화투쟁은 이제부터 시작이고 이사진 개편안은 김선기-최씨일가간의 유착관계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라며 "기만적 이사개편을 계기로 시작된 투쟁은 김선기가 퇴진하고 에바다재단이 정상화되는 날까지 굽힘없이 계속될 것이다"라고 했다. 공대위는 "이제 평택시청은 장애인권의 성지로 자리잡을 것이며 에바다 투쟁은 전국 4백만 장애인들의 미래가 달린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싸움이기 때문에 계속될 것이다"라며 굳은 의지를 보였다. 7월12일 평택시 사회과장이 공대위측으로 분류되는 김종인 나사렛대 교수와 권선진 평택대 교수에게 “공대위측에서 이사승락서를 다 보내왔는데 교수님만 빠졌다.”며 사기를 쳐 이를 믿은 두 교수가 임원취임승락서를 급히 시청으로 보냈고, 평택시는 즉시 등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 결과 공대위측 2, 비리재단측 5 구도의 이사진이 구성되었다. 김종인 교수는 대표이사에, 비리주범 최성창의 친동생 최성호는 상임이사에 임명되었다. 평택시는 일단 이사회가 구성되었기 때문에 이사진 개편의 모든 권한은 이사회에 있다며 형식적 공문을 통해 이사진을 개편하라고 촉구하는 기만행위를 계속했다. 이렇게 비리주범들이 절대적 과반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민주적 이사진이 구성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희망의 불씨는 아이러니하게도 최씨일가들이 제공해 주었다. 최씨일가는 형제간에도 철천지 원수 같이 서로를 헐뜯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형제간 내분을 예의주시하며 상황을 체크해 나가던 중 5명의 최씨일가측 이사 2명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2001년 3월 2일 이사회에서 공대위측 추천이사 3명을 추가로 선임하게 되었다. 당시 4명을 추가하여 6 : 5로 과반을 점하기 위해 노력을 집중했으나 협조에 응한 2명의 이사들이 과반을 점하도록 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버텨 5 : 5로 된 것이다.

그런데 7년 투쟁의 획을 그을 수 있는 민주이사진이 과반을 넘기는 역사적인 사건의 단초를 또 다시 최씨일가들이 제공했다. 공대위측에 잠시 협조를 해 준 2명의 자기들 측 이사들에게 엄청난 욕설과 협박이 이어졌다. 이렇게 되자 이중 한명의 이사가 도저히 못 견디겠다며 사표를 제출했다. 그래서 5 : 4로 공대위측이 과반수가 되었다. 이에 대해 최씨일가 측에서는 추가 선임한 이사회의 결정 자체를 문제 삼으며 법원에 이사회결정무효가처분신청을 냈으나 법원은 이사회의 결정이 적법하다며 이들의 신청을 기각했다. 이어서 2001년 8월 7일 이사회에서 공대위측 인사 4명을 추가로 선임했고, 관선이사로서 역할을 마무리했다며 사임한 김종인, 권선진 두 이사의 후임으로 8월21일 2명의 공대위측 추천이사가 추가로 선임되었다. 이때 평택시 안중면의 안세치과 원장으로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활동을 하고 있는 윤귀성이사가 대표이사로 선임되었다. 그런데 이사회는 민주적으로 개편이 되었지만 이사들이 법인 시설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은 계속되었다. 특히 학교에서는 2001년 10월 26일부터 농아원생들을 이용하여 교장, 교감, 권오일 교사에 대한 출근저지와 폭력이 시작되었고 급기야 비리재단에 반대한 모든 교사들까지 강제로 밀어내고 출근저지를 하였다. 이런 상황이 14개월 이상 지속되자 공대위와 이사진들은 2001년 1월 10일 에바다학교에 대한 진입을 시도했지만 학교를 불법점거하고 있는 자들과 평택경찰이 합세하여 합법적인 인사들을 끌어내는 어처구니없는 작태가 자행되었다.

결국 민주이사진에서는 2002. 2. 9. 자로 불법점거자들에 대한 출입금지가처분, 업무방해금지 및 출입방해금지가처분 신청을 하여 법원으로부터 승소판결을 받았다. 2월28일 법원판결문을 공시하러 갔던 집달관이 판결문을 공시하던 중 폭행을 당하고 심지어 당시 법인사무국장인 남정수 사무국장과 권오일 교사가 최씨일가의 사주를 받은 15명으로부터 20분 동안 집단폭행 당하여 코뼈와 다리가 부러지고 이가 부서지는 중상을 입고 입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의 폭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3월 16일 새벽 0시45분에 고요히 잠들어 있는 해아래집에 10명의 최씨일가 하수인들이 들이닥쳐 온 집안을 부수며 행패를 부렸는데, 이 과정에서 해아래집 이경훈과 이성존 두 명이 집중적으로 폭행을 당하여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비리주범 최씨일가들을 편들어 왔다고 비난을 받던 경찰과 검찰은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한(설령 같이 시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잠자는 방에 신발을 신고 들어와 폭행을 하는 것에 대한 방어이므로 정당방위라는 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상식이다.) 이성존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였는데 야간기습폭행을 한 구재단 하수인들 3명과 함께 구속영장을 청구하였고, 4명 모두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다. 이는 명백히 폭력을 행사한 비리주범들의 하수인들을 풀어주기 위한 방편으로 피해자인 이성존을 함께 기소하였던 것이라 본다.

결국 이성존은 폭력행위자들과 함께 벌금 300만원의 처벌을 받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야간주거침입과 폭력을 행사한 10명 중 7명은 아예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이런 정도로 일방적인 비리주범 편들기 의혹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던 것이다.
  1. 경기도의 특수학교 목록 중 첫 번째로 작성된 항목이다.
  2. 어떤사이트에서 와전되게 민주화가 쓰여서 인터넷상에서 민주화란 단어 쓰기가 조심스럽지만 실제 학교 홈페이지에 민주화과정이라고 써있다.민주화를 민주화라고 하는데도 해명해야하고...
  3. 이하의 내용은 학교 홈페이지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