呂師囊
생몰년도 미상
태주 선거 사람으로 1120년에 방랍이 강남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주언, 오방, 구도인, 진십사, 석생, 육행아 등과 함께 무리를 합해 방랍에게 호응했으며, 태주를 공격했다가 격퇴당했다.
1121년 6월 24일에 송나라의 공격으로 신흥종, 송강, 요평중 등이 각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자 석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양진의 공격을 받아 포로가 되었다.
수호지에서는 흡주의 부호였지만 방랍에게 금을 바쳐 동청 추밀사가 되었으며, 어릴 때부터 병서를 읽고 18척의 사모창을 잘 써 무예가 출중했다.
강남 12신이라 부르는 12명의 통제관사실 허세들이지만을 거느리고 윤주성을 지켰으며, 송강이 이끄는 송군이 이준, 목홍을 여사낭과 내통을 약속한 자로 위장했다. 이에 속아넘어가 들여보냈지만 여사낭은 어느정도 이들의 정체를 간파하고 성 수비를 강화하나 송군의 공격으로 성이 함락되자[1] 단도현으로 달아났으며, 통제관 6명을 거느리고 물러가서 상주 비릉군을 지켰다.
송군과 두 차례 싸운 끝에 불리한 상황이 되었으며, 김절의 말에 따라 소주에서 원군이 올 때까지 성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김절이 송군과 내통해 상주성의 서문을 통해 송군의 공격을 받아 성이 함락되자[2] 허정과 함께 무석현으로 달아났으며, 위충과 합류했다가 또다시 송군에게 패해 소주성으로 달아났다.
연달아 패한 것으로 인해 소주성에게 방모에게 참수당할 뻔 했지만 송강 휘하의 인물들이 싸움에 능하다고 말해 목숨은 건졌으며, 위충, 허정과 선봉이 되어 출진했지만 서령과 20여 합을 싸우다가 옆구리를 찔려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