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사변

1 개요

1932년 8월 22일, 일본군이 관동군 스파이 총살사건을 빌미삼아 만주국의 영토라 주장해오던 러허 성을 공격하여 만주국에 합병시킨 사건. 이 사건으로 장쉐량은 마지막 기반까지 날아가고 낭인 신세가 되었다가 서안 사건을 일으킨다.

2 배경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손에 넣은 일본은 괴뢰국 만주국을 세우고 자신들이 장악한 동삼성은 물론이고 러허 성까지 만주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원래 러허 성은 장쉐량이 동북역치 이후 자신의 세력권으로 넣었던 곳인데 만주사변으로 본거지인 만주에서 축출당한 후에는 그의 유일한 거점[1]이 되었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한 여세를 몰아 러허 성까지 점령하려는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장쉐량은 만주 상실 이후로 권토중래를 꿈꿨지만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렸고 장제스와의 관계도 악화되었으며 왕징웨이 등에게는 만주를 잃은 책임을 지고 하야하라는 공격을 받았다. 장제스는 러허 성의 지배자인 탕위린이 한간이라면서 그를 해임할 것을 요구했지만 장쉐량은 이를 거부했고 러허 성의 방비를 증강하고 중앙군을 보내 돕겠다는 장제스의 제안도 거부했다. 중앙군의 파병이 일본군에게 공격의 구실을 제공할 것이라 생각했으며 실추된 자신의 권위가 더욱 실추될까봐 우려했기 때문이었지만 결국 러허까지 날려버리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3 사변의 시작

난징 정부와 장쉐량이 대립하는 가운데 관동군 스파이 한 사람이 비적떼에게 살해되는 일이 벌어졌다. 관동군은 이를 장쉐량의 소행으로 몰아서 1932년 8월 22일, 8사단을 보내 러허를 침략했다. 장쉐량은 그제서야 장제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장제스는 4차 초공작전을 위해 병력을 투입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최선을 다해 러허를 사수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6개 사단의 파병을 약속했는데 실제론 4개 사단을 보내주었다. 대신에 그중 3개 사단이 장제스의 직속 정예부대였다. 이에 장쉐량도 러허에 5개 여단을 보내어 총 23만 5천명의 중국군이 러허에 집결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무장상태가 더 좋은데다가 일본군은 만리장성의 여러 요충지를 점령하고 있어 전략적으로 유리했다.

그러다가 1933년 1월 1일, 산하이관의 일본군 헌병초소에 습격이 벌어졌는데 관동군은 이를 중국군 소행이라며 중국군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구축함, 야포, 항공기, 전차를 동원한 우세한 화력을 앞장세워 중국군을 격퇴하고 산하이 관 주변의 요충지들을 점령해 러허 성으로 가는 물자를 끊었다. 2월 10일 장쉐량은 사령부를 베이핑에서 러허 성의 성도인 청도로 옮기고 러허 성 사수 의지를 곧추세웠고 관동군은 관동군 나름대로 러허가 만주국의 영토라며 야욕을 드러냈다. 관동군은 만주국군 4만 2천명과 2개 사단, 1개 독립혼성여단, 1개 기병여단, 1개 비행대대와 전차 중대까지 동원하여 전투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일본군은 만주국군까지 합쳐 10만에 달했다.

4 러허 함락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과 만주군 앞에서 원래도 형편없던 장쉐량의 병사들을 순식간에 섬멸되었고 2월 24일에 카이루를 지키던 추이싱우가 투항해버렸으며 차오량의 수비군은 적전도주했다. 3월 2일 링위안이 함락되었고 링위안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130사단은 일본군의 습격으로 전멸했다. 3월 3일 탕위린은 재산과 가족을 데리고 달아나버렸다. 동북군의 사기가 더욱 떨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3월 4일에 일본군은 청더를 점령해버렸고 러허 전 지역이 일본군에게 장악되었다. 장쉐량은 만리장성으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3월 10일 구베이커우가 함락되어 마지막 남은 베이핑마저 잃을 처지가 되었다. 결국 보다 못한 장제스가 초공작전을 중지하고 병력을 인솔하여 바오딩으로 북상했다. 장쉐량은 장제스와 회담한 이후 사퇴하고 유럽으로 떠났다. 동북군 사령관으로 허잉친이 임명되었으나 이미 일본군을 막을 순 없었다. 일본군은 3월 26일에는 만리장성 이북을 모두 함락시켰다.

한편 제네바에 파견된 구웨이쥔은 일본에 대한 경제제재를 요구했지만 중국과 일본이 단교하지 않았단 이유로 거부되었다. 이에 빡친 구웨이쥔은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단교를 할 것을 주장했지만 왕징웨이는 열강은 그래봐야 중국을 돕지 않을 것이라며 그랬다간 화북 전역이 일본 손아귀에 들어간다고 반대했고 대일 개전은 무산되었다.

5 탕구 정전협정

러허 성을 장악한 일본 정부는 더 이상 사태를 확대하지 말 것을 지시했지만 이쯤되면 일본군이 이 말을 들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안봐도 블루레이로 아주 잘 알것이다.(...)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는 3월 27일에 491호 명령을 발동하여 장성 이남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고 4월 11일, 관동군이 장성 이남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허잉친은 5만명의 병력으로 맞섰고 쑹저위안의 29군이 가세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5월 7일에 장성을 돌파, 베이핑과 톈진 북쪽 50킬로미터 지점까지 진격했다. 결국 중국은 굴복하고 5월 25일 정전을 요청하여 5월 31일 탕구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으로 일본은 만리장성 이북을 모두 장악했으며 만주국의 존재를 난징 정부가 묵인한 셈이 되었다. 또한 산하이관을 비롯한 만리장성의 요충지에 일본군 주둔권을 내주었다. 베이핑 북쪽 전역도 비무장지대가 되어 중국군은 허베이 동북부에서 남부로 물러났다. 이것으로 30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와 600만명의 인구가 일본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중국 대표단은 일본군들 앞에서 홀대를 받으며 큰 모욕을 받았다. 유일하게 쑹저위안이 약간의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결과적으론 중국의 대참패였다.

6 여파

러허 사변에서의 참패는 장제스가 군 현대화와 공업화에 투자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장제스는 일본을 미친 개라고 불렀고 10년 안에 이 치욕을 갚겠다고 맹세하는데 중일전쟁이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5년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왕징웨이의 비관주의는 더욱 심해졌고 그는 대놓고 중국을 병자라 부르며 한탄하게 되었다.

탕구 정전협정의 결과에 쑹칭링은 국민당이 배신을 저질렀다고 성토했지만...다른 수가 있었냐고 물으면 별 수 없는게 맞다.

펑위샹은 동북군 패잔병을 수습하여 일본군에 대한 반격을 기획하기도 했지만 펑위샹의 세력 확대를 우려한 다른 파벌들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다.

유럽에서 돌아온 장쉐량은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되었고 이후 산시에서의 공산당 토벌에서 연이어 무능함을 드러냈는데 그래서 일어난 일이(...)

7 참고 문헌

  • 중일전쟁(권성욱)
  • 장제스 평전(조너선 펜비)

8 관련 항목

  1. 따지자면 허베이 일부도 그의 영토였지만 화북 군벌들의 공세로 인해 위태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