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잉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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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應欽(하응흠) He Yingqin (1890년 4월 2일 구이저우 성 ~ 1987년 10월 21일 타이완 타이베이)

1 소개

중화민국군인, 정치가. 장제스의 최측근 출신으로 중화민국 육군 총사령관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서안 사건 때 장제스를 날려버려야 한다고 한 것이 걸려서 말년엔 천청 등에게 총애를 뺏기고 좀 추웠다. 그나마 생계 걱정까지 했던 성스차이 등에 비하면 말년까지 꽤 잘나갔다.

2 생애

2.1 유년시절

구이저우 토착민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은 책에 둘러싸여 보냈다고 한다. 1907년 귀저우 육군 소학교에 입학했고 1908년 우창 육군중학에 진학했다. 공부를 잘했던 모양인지 같은 해에 일본의 도쿄진무학교에 파견되는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보내졌다. 이때 역시 일본 유학생이었던 장제스와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반청 혁명사상을 접하여 동맹회에 가입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터지자 중국으로 돌아와 혁명에 동참했고 상하이 도독 천치메이의 혁명 활동을 보좌했다. 이후 위안스카이의 독재가 시작되자 위안스카이 타도활동을 하다가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고 거기서 현대식 군사교리를 배우기로 하여 일본군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학했다. 1916년 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구이저우의 군벌 류샨시(劉顯世)에게 스카웃되어 귀저우에서 병사들을 교련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는 그의 동기 중 한명이 류샨시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귀저우 군의 4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하지만 허잉친은 류샨시의 라이벌인 구이저우 군 사령관 왕웬화(王文華)를 지지했고 그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왕웬화의 인척이 된다. 왕웬화가 류샨시를 내쫓고 구이저우의 지배자가 되자 왕웬화는 허잉친을 구이저우 사관학교의 교장으로 임명했고 경찰권을 그에게 맡겼다. 하지만 왕웬화는 1921년에 암살당했고 허잉친은 구이저우에서 추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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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웬화(1887~1921)의 모습

2.2 장제스의 북벌과 30년대 중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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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허잉친.

이후 허잉친은 윈난 등을 떠돌면서 자신을 받아줄 군벌들을 찾아다녔는데 옛 친구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름아닌 장제스였다. 허잉친이 일본에 달아난 후에도 장제스는 천치메이를 보좌하여 혁명 활동을 했으며 천치메이가 암살된 후에는 쑨원을 보좌했고 군벌 천중밍의 반란에 쑨원이 위기에 처하자 군함 중산함을 몰고 쑨원을 구출하여 쑨원의 심복이 되었다. 이후 쑨원이 리쭝런, 쉬충즈 등의 도움으로 광저우를 점령하고 자체적인 무력을 확보하기 위해 황푸군관학교를 세우자 장제스는 그 책임자가 되었는데 장제스가 교관으로 허잉친을 지목한 것이다. 장제스에게서 허잉친을 추천받은 쑨원은 허잉친에게 전보를 보내 교관 자리를 받아줄 것을 요청했고 허잉친은 이를 수락, 황푸군관학교와 국민당에 몸을 담게 된다. 이후 그는 군벌 천중밍이 광저우를 되찾기 위해 3만의 병사들을 데리고 반격을 감행해오자 자신의 생도들을 데리고 크게 무찔러 소련 고문 바실리 블류헤르장제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지만 이때 몇차례 전술적인 허점을 보이기도 했다. 나중에 허잉친은 총교관 자리까지 승진한다. 이후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한 생도들을 중심으로 북벌을 위한 국민당의 군대가 만들어졌고 황푸군관학교 출신의 최정예 부대인 1군 사령관으로 허잉친이 임명되었다. 당연히 북벌군 총사령관은 장제스였다.

1926년 장제스가 북벌을 선포하자 허잉친도 1군을 이끌고 북벌의 길에 나섰다. 그는 광둥, 푸젠을 공격하여 천중밍의 잔여 세력을 완전히 섬멸했고 푸젠 성을 국민당 영역에 넣었다. 이후 저장 성의 쑨촨팡 세력을 공격했고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가 벌어지자 허잉친은 당연히 장제스를 지지했다. 하지만 허잉친의 충성심은 그리 완벽한 것은 아니라서 장제스와 왕징웨이 간의 갈등이 심해졌을 땐 왕징웨이와 장제스 사이를 저울질하면서 유리한 쪽에 붙으려 했고 장제스의 사직 때 그를 돕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장제스는 허잉친에 대한 신뢰를 잃어갔고 자신이 권좌에 복귀한 이후 장제스는 허잉친을 만나서 "나는 자네 없이 권력을 잡을 수 있지만 자네는 나 없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주제를 알라고 경고했고 허잉친은 찍소리못하고 장제스에게 복종했다. 이후 그는 국민혁명군의 훈련과 군벌군의 약화 작업을 맡았고 반장전쟁의 일부인 장계전쟁이 터지자 부친상도 무시하고 광시 파벌들을 토벌하여 장제스의 신임을 다시 얻는데 성공했다. 그는 1929년 국민혁명군 참모총장으로 승진했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1930년 3월 우한 행영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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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 시기의 허잉친

초공작전이 벌어지자 허잉친을 2차 초공작전과 4차 초공작전을 지휘했으나 시원찮은 성과를 거두어 장제스를 실망시켰다. 만주사변이 터진 데에 이어 1933년 러허 사변이 터지자 장쉐량은 버티지 못하고 사임하고 허잉친이 러허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그는 또 패했다. 결국 중국은 굴욕적인 탕구정전협정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허잉친-우메즈 협정을 맺어 일본과 관계 개선을 꾀했다. 장제스가 허잉친에 대한 신임을 결정적으로 잃어버린 것은 1936년 시안 사건이 터졌을 때였는데 허잉친은 무력을 통한 해결책을 주장했는데 이는 장제스의 목숨을 극도로 위험하게 하는 것이었고 허잉친은 설상가상으로 시안 폭격과 왕징웨이 복귀론까지 들먹였다. 이후 협상이 잘 풀려 살아있는 장제스를 마주하게 된 허잉친은 기겁하여 다시 장제스의 신임을 얻으려고 발광했으나 장제스는 싸늘해져 있었고 허잉친은 자신의 자리는 지킬 수 있었지만 전과 같은 권력은 누릴 수 없었다.

2.3 중일전쟁

1945년 9월 9일 난징에서 오카무라 야스지의 항복을 받아내는 허잉친.

중일전쟁이 터졌을 때 허잉친은 일본군을 이길 수 없다고 만주국 승인과 화북 할양으로 일본과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장제스는 이를 거부했다. 8월 15일 그는 군정부장에 임명되었고 1944년 천청에게 자리를 내줄 때까지 이를 역임했다. 국민당 정부가 충칭까지 밀렸을때 허잉친은 후방에서 병력을 징병하여 전쟁 수행을 돕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미국 고문 조지프 스틸웰과 마찰을 빚었다. 스틸웰은 그를 무능하다고 싫어했고 허잉친도 오만한 미국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틸웰이 중국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중국인이 허잉친이었다. 공항으로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 경례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허잉친은 1944년 중국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지만 여전히 실권은 없었다. 이후 그는 윈난에 파견되어 Y군 훈련에 관여했으며 전쟁이 끝나고 나자 오카무라 야스지의 항복을 받아내는 영광을 누렸다.

2.4 국공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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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장관 시절 사무실에서 집무를 보는 허잉친.

1946년 허잉친은 미국에 파견되어 트루먼 대통령을 접견했고 유엔 대표로 임명되었다. 이후 전략고문위원회가 창설되자 위원이 되었고 국공내전이 한창 중인 1948년 행정원 위원 겸 국방장관이 되어 내각을 지휘했으나 상하이가 함락된 이후 사퇴하였다. 후임은 옌시산이 맡았으나 그도 광저우 함락 이후 사퇴했다. 1949년에 행정원장으로 임명되어 광저우 정부를 이끌었지만 3개월 만에 사퇴하고 대만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2.5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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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허잉친. 저 미묘한 입꼬리는 말년까지 그대로...

이후 총통 전략고문이 되어서 부유한 노후를 보냈지만 실권은 이미 대륙 시절에 없어진 후라 별로 하는 일은 없었고 그나마 남은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자리도 1950년에 빼앗겼다. 장제스의 신임은 천청이 꿰어찼다. 1951년에 일본을 방문했고 골프와 농사일로 노후를 보냈다.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을 방문하며 삼민주의 중국 통일 등을 주장하는 활동을 했다. 장제스가 죽고도 11년이나 더 살다가 1986년 상태가 위독해져서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투병하다가 중풍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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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6대 총통선거의 폐막식에서 축배를 건의하는 허잉친.

3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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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업에 나온 허잉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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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에도 여러 영화에 나온다. 당연하겠지만....

4 참고문헌

5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