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 17년 전투

영락 17년 (407년) 고구려광개토왕이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어떤 적을 섬멸하고 전리품을 획득함과 동시에 성 몇개를 점령한 전투. 영락 17년 전투라는 명칭은 당연히 공식 명칭이 아니다. 애시당초 고수전쟁도 일정한 명칭이 없는 판에 누구랑 싸웠는지도 모르는(....) 전투에 공식적인 명칭이 있을거란 생각은 버리는게.... 물론 전투 목록/한국사의 전투들도 통용되는 명칭 없이 적당히 제목을 붙힌게 상당히 많다. 특히 고대로 갈수록....

영락 17년 전투
날짜
407년
장소
?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고구려불명
지휘관불명불명
병력5만불명
피해 규모불명불명
결과
고구려군 승리. 갑옷, 군수물자 등을 획득. 사구성,루성 등 5~6개 성을 점령.
기타
비문이 훼손되어 교전 상대를 알수 없다.

1 상술

17년(407년)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과 마군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루성(婁城) ▨주성(▨住城) ▨城▨▨▨▨▨▨城을 파하였다. - 광개토왕비문출처

상세한 묘사는 아니나, 5만의 대군이 합전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대규모 회전을 벌인듯 하다. 더구나 획득한 적군의 갑옷이 만여 벌 이었다니 적군도 최소 수 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참전국이 대군을 동원하여 정면으로 충돌하는 회전은 명운을 걸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이 전투에서 깨진 모 세력의 명운은(....)

1.1 교전 상대

위에 나와있는 광개토왕비문 인용문이 이 전투에 관한 사료의 전부이다... 하필이면 그마저도 딱 교전 상대 부분만 파손되어 있어 누구를 격파했는지 알 수 없다.

교전 상대에 대한 학설은 크게 백제설,왜설,백제+왜설,후연설로 나뉘는데....
둘다 확실한 근거는 없고 이런저런 근거로 짜맞춘것....

1.1.1 백제 또는 왜 아니면 백제+왜와 싸웠다는 설

  • 비문에 보이는 사구성이 수년 뒤 백제 전지왕 대 기록에 등장한다. 물론 한자는 다르고, 여기서는 사구성을 쌓았다고 하고 있다.
  • 광개토왕비문의 문맥에서 파악하는 의견 : 407년 기록 바로 앞의 400년 ,404년 기록 모두 백제+왜를 상대한 기록이라 407년 기록도 그 흐름을 잇는다는 의견.

1.1.2 후연과 맞섰다는 설

  • 광개토왕비문의 주제에서 파악하는 관점 : 광개토왕비문은 숙신에 군사를 파견해 순찰한 일 같은 잡다한 사건까지 일일히 기재할정도로 광개토왕 시기 고구려가 상대한 세력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기재했는데, 왜 죽어라 싸운 후연은 없겠냐는 의견. 영락 17년 기록이 후연이 아니라면 광개토왕비문에서 후연은 없는게 된다. 다른 전투는 모두 누굴 상대했는지 명확하게 나와있다.
  • 406년 12월까지 후연과 싸우고 있었다는 점과 407년에 후연이 멸망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후연으로 추정한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407년의 전투가 후연의 멸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
  • 획득한 전리품(개갑 등)으로 볼때, 무장 수준이 떨어지는 왜나 백제에게는 힘든 수준의 무장이었고, 후연 관련 기록에 갑옷으로 중무장한 후연군의 모습이 자주 보인다는 것도 한가지 근거이다. 특히 북위와 후연의 전투에서 북위군이 후연군의 개갑 여러벌을 획득했다는 매우 유사한 기록이 보이거나 406년 12월 목저성 전투에서 후연군이 갑옷을 드랍하는 장면이 결정적.
  • 음상사의 관점에서 볼때 사구성과 숙군성이 발음이 비슷하여 동일한 성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 동원 병력을 바탕으로 후연으로 보는 근거 : 백제는 396년 이후로 백성들이 징병을 피해 도망가는 바람에 수만 대군은 커녕 병력 동원 자체를 못하고 있었다.

1.2 비슷한 시기 고구려,백제,후연의 기록

1.2.1 고구려

15년(서기 406) 가을 7월, 메뚜기떼가 출현하고 가뭄이 발생하였다.

겨울 12월, 연나라의 왕 모용희가 거란을 공격하기 위하여 형북(陘北)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병사가 많은 것을 겁내어 돌아가려 하다가, 수레의 무거운 군수품을 버리고 가벼운 몸차림을 한 병사들을 데리고 우리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연나라는 3천여 리를 행군하여 왔기 때문에 병사와 말이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는 병사들이 길에 줄을 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十五年 秋七月 蝗 旱 冬十二月 燕王熙襲契丹 至陘北 畏契丹之衆 欲還 遂棄輜重 輕兵襲我 燕軍行三千餘里 士馬疲凍 死者屬路 攻我木底城 不克而還

16년(서기 407) 봄 2월, 궁궐을 늘려 짓고 수리하였다.

十六年 春二月 增修宮闕

17년(서기 408) 봄 3월, 북연(北燕)에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으로서의 예를 베풀었다. 북연의 왕 모용운(慕容雲)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답례하였다. 모용운의 조부 고화(高和)는 고구려의 방계 혈족인데, 자칭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라 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 예전에 모용보(慕容寶)가 태자가 되었을 때 모용운이 무예가 뛰어나서 태자를 모시도록 하였는데, 모용보가 모용운을 아들로 삼아 모용씨라는 성을 주었다.

十七年 春三月 遣使北燕 且叙宗族 北燕王雲 遣侍御史李拔報之 雲祖父高和 句麗之支屬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 慕容寶之爲太子 雲以武藝 侍東宮 寶子之 賜姓慕容氏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권6##

407년 기록에는 궁궐 수리 기록밖에 안보이지만 그 전후 기록이 의미심장하다. 406년에는 후연의 침략을 격퇴하고, (407년에는 후연에게 반격을 가한 뒤) 408년에는 후연이 망하고 고구려의 방계 왕족이 왕으로 등극....

1.2.2 백제

3년(서기 407) 봄 2월, 이복동생인 여신(餘信)을 내신좌평으로 삼고, 해수(解須)를 내법좌평으로 삼고, 해구(解丘)를 병관좌평으로 삼으니 모두 임금의 친척이었다.

三年 春二月 拜庶弟餘信爲內臣佐平 解須爲內法佐平 解丘爲兵官佐平 皆王戚也

ㅡ 삼국사기 백제본기 권3##

407년에 백제에서 대대적인 내각교체를 실시한것을 두고, 407년 전투에서 백제가 고구려한테 갈려서 당시 지휘관이었던 귀족들이 세력을 잃고 경쟁 세력이 득세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해씨는 친고구려 성향의 귀족인데.... 아니지, 407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발라버리고 친고구려 귀족을 투입시켰다고 보면 되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보이는 407년의 기록은 이게 끝. 그것도 봄2월의 기록. 전투가 그 이후에 일어난거면 어쩌라고....

2 기타

  • 광개토왕비문 탁본이랍시고 떠도는 위조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부분 교전대상이 지워진 부분에 왜를 채워넣고 있다....일본을 공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