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三國史記》

1 개요

고려 인종의 명에 의하여 1145년에 김부식이 편찬한 역사서로, 삼국시대통일신라, 후삼국시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1] 동아시아의 고전적 역사 서술 방식인 기전체 형식을 따르고 있다. 본기 28권(신라 12, 고구려 10, 백제 6), 연표 3권, 지 9권, 열전 10권. 총 50권 9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라삼국통일을 이룬 이후부터 고려 초까지의 약 260여년의 역사도 다루었는데, 아무래도 당시 고려인들의 시각으로 봤을 때에는 고려가 후백제를 무찌르고 후삼국시대를 통일한 것을 진정한 의미의 통일로 여겼던 것에서 기인한 것 같다.

전거가 확인되는 인용 문헌은 다음과 같다.

화랑세기 필사본을 위작으로 판단할 경우 현존하는 국내 사료 중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며,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더불어 삼국시대 연구를 위해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필수 사료다.

《삼국사기》의 주요한 편찬자인 김부식은 이자겸이 금에 사대했을 때 찬동했던 인물인 동시에, 고구려 계승 세력인 서경파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과정에서 제거한 신라 계승주의를 주도한 동경파[7]의 대표자라는 점이 지적받으면서, 이전에는 고려의 입장과 동시에 김부식이 포함된 당시 문벌귀족들의 입장이 강하게 표현되어 고구려 계승 의식이 쇠퇴한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이는 타당한 사실이며, 이 이후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했을 가능성이 높은 《구삼국사》가 유실[8]된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김부식이 단순한 사대주의자가 아니고 자주적 역사관이 있는 인물이라는 근거도 있기에, 반론이 꾸준히 제기된다. 헷갈린다

조선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삼국사기》도 인터넷에서 무료로 검색, 열람이 가능하다. 불편한 원문에 가까운 것을 보려면 한국사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할 것을 권한다. 유료로 제공되는 KRPia의 것이 검색 기능도 좋고 이병도의 주석도 달려있어 우월하다. 이곳 네이버에서도 무료 열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현대에 남아있는 삼국사기 원서 중 김부식이 편찬한 원본은 없다. 삼국사기 서적 중 가장 오래된 원서는 보물 722호 성암본으로 13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성암본은 성암고서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 종류

2.1 보물 제525호 : 옥산서원본

총 50권 9책 완질본. 일명 옥산서원본(玉山書院本)이라 불린다. 조선 선조 6년인 1573년에 경주 옥산서원에서 찍어낸 것이다.

인쇄 상태가 깨끗하지 못하지만 현재 우리가 보는 삼국사기의 내용은 이 옥산서원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2.2 보물 제722호 : 성암본

권 44~50권 분량으로 총 7권 1책. 성암본이라 불린다. 고려 후기인 13세기 후기에 찍어낸 것으로 현존하고 있는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단 1책만 존재하고 있다.

권말의 끝부분 장(張)이 떨어져 간기나 발문이 없다. 또한, 복각할 때 사용한 초간본의 상태가 좋지 않다. 초간의 원각에서 탈락된 것을 그대로 판각한 듯한데, 초간본의 후쇄본을 가지고 복각한 것으로 보인다.

2.3 보물 제723호 : 정덕본

총 50권 9책 완질본. 명나라 무종(武宗), 즉 정덕제(1505~1521) 재위기간인 1512년(조선 중종 7년)에 경주부(慶州府)에서 간행되어 정덕본이라 통칭한다.

원판이 닳아서 복구할 수 없는 곳, 잘못된 글자, 빠져 있는 글자 등의 결점이 있지만 보물 제525호인 옥산서원본(玉山書院本)과 함께 현재까지 내려오는 유이한 완질본이다.

3 논란

신채호가 저자인 김부식과 삼국사기를 맹렬히 비난한 이후 이 주장에 동의하여 디스하는 사람과 이들을 역디스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결론적으로는 《삼국사기》는 누가 보아도 질과 양에서 신라 위주인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삼국사기》집필진과 김부식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은 옳지 못하지만 이들의 책임도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를 볼때에는 최대한 많은 자료를 들고와서 봐야지 하나만 보면 안되고 맹신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 서양사를 논하는데 있어서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저작은 빼놓을 수 없는 권위가 담겨있지만 이것만 믿고 쓰면 안된다는 것과 같다.

가장 큰 문제는 전통적으로 동양 왕조들은 건국 후 바로 전(前) 왕조의 정사(正史)를 편찬하는 전례가 있어왔는데, 어떠한 이유에선지 고려시대에는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전대 왕조에 대한 정사를 편찬하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는 것에 있다. 그러다보니 17대 왕인 인종대에 와서야 《삼국사기》를 집필하는데 이를 근거했을 당시의 자료가 시기상 고구려나 백제가 멸망한지 수 백년이 지났고 이들의 기록을 상당수 가졌을 발해와 통일신라도 멸망한지 무려 200년은 된 시점이라 당시 동아시아 내에서 직접적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인데다, 그나마 구할 수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신라인들의 관점에서 재정리되어 있었거나 그것을 토대로 고려에서 재정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통일 신라 이전 파트는 당시에도 자료가 너무 없어서 중간중간 저자인 김부식조차도 "얜 갑자기 왜 나온거지?" 라고 한탄하는 주석을 달기도 했으며 사반왕처럼 아예 통으로 날려먹은 파트도 존재한다. 그나마 당시까지 남아있던 자료들은 그 수가 매우 부족해서 신라 편향적인 성격이 없을 수가 없는 삼국사기에서도 박혁거세부터 진평왕까지의 일을 기록한 책은 단 4권이다(...) 이해하기 힘들다면 고려의 승리에서 비롯되는 후백제 관련 자료의 한계는 7세기 이후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가 승리한 신라인의 관점에 충실한 형태로 재편되었던 사정과 다르지 않고 또한 멸망한 나라의 사서는 업데이트나 보존을 위한 노력을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알기 쉽다. 때문에 1100년대 중기에는 이미 신라, 백제, 고구려 등의 여러 국가들이 약 천여년 동안 기록하여 남긴 역사 사료들을 모두 긁어 모아 재정립해도 단 아홉권에 그칠 정도로 이미 이전대의 역사사료들이 상당수 사멸한 상태였고 이러다 보니 어느 정도의 비중 문제는 어쩔 수 없이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규보의 예를 보듯이 당시까지 멀쩡히 남아있을 책들까지도 당시 집권층이 가진 신라계승의식 등이 들어간 편향된 시각을 바탕을 바탕으로 검열을 했다는 것은 비판을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당장 '열전'의 경우 수록된 인물 69명 중에 고구려, 백제인은 합쳐서 11명에 불과하고 그것마저도 본서의 '본기'나 다른 문헌에서 전재하지 않은 독자적인 전기를 가진 사람은 단 둘, 온달도미뿐이며 또 '열권' 10권 중에 김유신 열전이 3권을 차지하고 있다. 아무리 당시에 기록이 적어졌다 하더라도 신라에 비해 두 국가 합쳐서 11명 밖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편향적이며 신라의 시각과 신라 편향적인 자세에서 글을 쓴 것은 도저히 피하기가 힘들정도로 비판받을 만한 거리이다.[9]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본다면 일단 삼국사기를 어떤 시점으로 봐도 고려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 신라의 지분이 가장 크며 삼국사기는 고려의 시점에서 역사를 재정비하는 것이 우선적이라 고려의 영토 대부분이 위치한 한반도 중부와 남부를 다스리던 국가인 삼한을 아우른 신라가 고려 태조에게 귀부하고 고려는 흉악무도한 후백제를 물리치며 그것을 이어받은 정통성있는 국가라는 인식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경순왕이 우리 태조께 귀의함과 같은 것은 비록 부득이하여 한 일이지만 역시 가상한 것이며, 오히려 만약 힘써 죽기로 싸워 태조의 군사에 저항하다가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하기에 이르렀다면, 필시 그 종족이 뒤집혀 멸망되고 그 해독이 무고한 백성에까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령을 여쭈어 기다리지 않고 미리 나라의 창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해 바쳐 왔으니, 그의 우리 조정에 대한 공로와 백성들에 대한 은덕이 매우 크다 하겠다. 옛날 전씨가 오월의 땅을 들어 송나라에 바치매 소자첨이 그를 충신이라고 했거니와,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훨씬 더한 것이다.

ㅡ 《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 종결부의 사론

신라의 운수가 다하고 도의가 상실되니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은 돌아갈 바를 몰랐다. 이에 뭇 도적들이 틈을 타고 일어나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았거니와, 그 가운데 심한 자는 궁예견훤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이면서도 반란하여 주종의 나라를 원수로 삼아 멸망시킬 것을 도모해 선조의 화상을 베기에 이르렀으니, 그 어질지 못함이 심하였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으로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모반의 마음을 품고 나라의 위난을 요행으로 여겨 도읍을 침노하고 임금과 신하 베기를 마치 짐승 죽이듯 풀베듯 했으니, 실로 천하의 극악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당했고 견훤은 화가 그 아들에게서 일어났으니, 이는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들인지라 다른 누구를 허물할 것인가. 비록 항우이밀과 같은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서도 한나라당나라의 흥기를 대적하지 못했거늘, 하물며 궁예나 견훤과 같은 흉악한 이들이야 어찌 우리 태조를 상대해 항거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단지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준 이들이었을 뿐이다.

ㅡ 《삼국사기》권50 견훤전. 말미의 사론

김부식은 김부를 오월의 전씨에 비교하여 공덕이 월등히 크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보고 그러한 것인가? 오월은 송나라에 대하여 번병으로서 술직[10] 하니 그 군신의 직분이 정하여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고려에 대하여 이와 같지 않은즉, 태봉은 신라의 반적이요 고려 태조는 태봉의 신하였던 것이다. 비록 태봉이 이미 무너지고 고려의 국운이 날로 창성했다 하나 신라가 고려에 대해 일찍이 무릎꿇고 칭번한 적이 없었거늘 하루아침에 종묘사직을 버리고 토지를 바치며 북면하여 조회하는 것이 옳겠는가. … 뒷날 비록 부귀하고 외손이 번성하였으나 어찌 나라가 망하고 자신을 잃는 큰 수치를 씻을 수 있겠는가! 경순왕과 같은 자는 이미 큰 절의를 잃었으므로 그 나머지는 취할 바가 없는데, 김부식이 전씨에 견주어 경순왕의 우월함을 비교하니 도대체 무엇을 보고 그러한 것인가?

ㅡ 《동국통감》 권12 고려 태조 18년 사론

이것만 봐도 《삼국사기》가 어떠한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또한 후대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또 봐야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삼국유사》이다. 《삼국유사》에도 삼국사기와 어느정도는 비슷한 시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후백제견훤조는 기이편의 마지막 항목인 가락국기조 바로 앞에 자리한다. 《삼국유사》에서 기이편이란 단군의 조선에서 출발하여 고려 왕조 성립 이전까지를 대상으로 하여, 흥법편 이하 불교 신앙의 홍포와 신이한 이적에서 오는 감동의 공유를 위한 시공간적 배경 설정과도 같은 것이다. 즉 고려 태조에게 귀부한 경순왕의 행적을 마지막으로 하여 시간순서에 따른 기록은 완결되는 것이고, 아울러 사실상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 계승은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런데 김부대왕조 이후에 남부여전백제조, 무왕조, 후백제견훤조가 배치되었다. 이러한 배치는 일단 시간순서에 따른 기이편의 서술 체계와는 상반된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후백제 및 견훤 관련 자료의 분석에는 김부대왕조 이후 네 항목에 대한 편찬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때 가락국기조는 자료명 자체가 제목을 이루고 있다는 데서 일연 이후의 추가로 보는 시각이 있음을 환기하게 된다. 이러한 지적은 그에 대한 동의 여하와는 상관없이 본 문제에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즉 후백제견훤조는 기실 ‘삼국사본전’ 곧 《삼국사기》 견훤전에 주요한 바탕을 두고 있되, 고기(古記) 등의 정보를 제시하는 데 본의가 있었던 것이므로, 가락국기조의 맥락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또한 무왕조 자체가 고기에 근거했음은 물론이며, 남부여 전백제조 역시 고기 계통 정보를 담고 있었다. 다시 말해 후백제 견훤조를 위시한 네 조목의 편록은 유사를 자처한 《삼국유사》 저자 일연이 삼국의 ‘본사(本史)’로 간주한 삼국사기에서 배제된 고기류의 정보를 제시하는 데 주안했던 것이다. 덧붙여 《삼국사기》에 가장 자료 양이 풍부한 김유신전 역시 고기로 불리운 그의 행록을 크게 절삭한 것인데, 그 절삭된 부분이 바로 《삼국유사》의 김유신조나 가락국기조 등에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견해가 있다 즉 《삼국유사》의 김유신 설화는 그 서술 목적이 《삼국사기》의 열전과는 다르며 지배이념의 구현보다는 그 인물의 신이한 행각이라든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표기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고기에서 무왕은 용의 아들이며 견훤은 지렁이의 아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대비되어진다. 비록 이들의 출생담은 건국 신화적 요건을 갖춘 야래자신화(夜來者神話)로 파악되고, 이 ‘야래자신화’는 온조 등 백제 건국 주체 집단의 동명신화가 하늘에서온 아버지-지상의 어머니였던 것과는 달리 물에서 온 아버지-지상의 어머으로서 마한의 신화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기도 하나, 둘다 뭔가 비정상적인 일이라고 하는 것은 몰라도 적어도 신성한 이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남부여전백제조 말미에 고기의 전승으로 파악되는 이른바 용바위 전승은 사비하(백마강/백강)가에 한 바위가 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이 위에 앉아 물고기와 용을 낚아 냈기 때문에 바위 위에 용이 꿇어앉은 흔적이 있는지라 그로 인해 용바위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소정방의 이 행위가 백제의 멸망을 예비하는 조건으로 이해된 것처럼, 역시 부정적 예조(預兆)일 뿐이다. 요컨대 김부대왕조를 끝으로 마무리되어야 할 기이편의 구성에서 경순왕조 뒤에 위치한 전-후백제사의 세 조목은 고기의 편린에 자저자의 강조점이 있되, 그것은 백제와 후백제에 대해 우호적이지 못하였다. 또한 고구려사의 전말도 전혀 배려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로 보아야 할 사안이며 여기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집필되어지던 시기의 좀 배웠던 사람들의 주류시각과 고려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 생각건대 저 구려는 오늘날 발해로 되었는데, 비로소 근래 와서 계속 과거에서 분에 넘치는 성과를 거두었으니, 이는 곧 외방이 착함을 사모하는 정성을 기록하시고 대국의 공평한 덕화를 드러내심이나 …

최치원. 당나라 예부 배상서에게 보내는 편지(與禮部裵尙書瓚狀)

… 구려가 이윽고 미친 회오리바람이 잦아지자 간신히 불탄 나머지를 거두어 따로 고을들을 취합할 것을 도모하더니 문득 나라 이름을 도적질하였으니 곧 예전의 구려임을 알 것이요 이가 오늘의 발해인 것입니다. … 최치원이 요행히도 천박한 재주를 가지고 … 실로 지극한 공정함을 만나 이전의 치욕을 씻었으니 변화됨은 한 번 돌보아주심에 깊이 힘입었고 그 광영은 멀리 삼한에 퍼졌습니다.

ㅡ 최치원. 당나라 고대부에게 편지(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

… 신이 삼가 발해의 원류를 살피건대, 구려가 아직 멸망되기 전에는 본래 사마귀만한 부락이었던 것이 말갈의 부류가 번창해지자 그 가운데 속말이라는 작은 번속이 있어 일찍이 구려를 따라 내지로 옮겨왔는데 그 수령 걸사비우와 대조영 등이…[11]

ㅡ 최치원.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못한 것을 보면 고려가 떨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 지방에 거하면서 고구려라 했고, 부여씨가 서남지방에 거하면서 백제라 했으며, 박씨․석씨․김씨가 동남지방에 거하면서 신라라 한 바 이것이 삼국이다. 이 삼국에는 마땅히 삼국에 대한 사서가 있어야 할텐데, 고려가 이것을 편찬했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한 다음 김씨가 남방을 차지하고 대씨가 북방을 차지하고는 발해라 했으니, 이것을 남북국이라 하는 바,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거늘,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유득공. 《발해고

이 사료들까지 본다면 신라가 나라가 망하고 있던 시기에도 통일전쟁시기부터 표방해온 삼한일통에 대해 얼마나 집작하고 있는지, 또한 건국 초에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뚜렷하게 표방하였으나, 중기에 이르러 신라 계승 의식이 강화내지 실질적인 주류가 된 것을 알 수가 있으며 당시 고려가 신라의 시각과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괜히 수능교재나 공무원 교재에서 《삼국사기》에 대한 정리 내용 중에 유교적 사관+신라계승의식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런 사대정신보다는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과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타협을 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무작정 사대라고 하기에는 분명히 대치되는 요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김부식의 삼국사기 신라는 안 좋게 표기하면 안 좋게 했지 절대 편향적이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그 근거로 허구헌날 외적에게 털리는 호구국가[12]라는 것과 정치와 사회가 혼란스러움[13] 신라에게 안 좋게 서술된 거싱 많다는 것. 삼국사기는 김부식 혼자 편찬한 것[14]이 꼽힌다.
이는 상단에도 언급되지만 죄다 반박이 가능하다. 신라가 털린 것은 기록으로 그대로 남아있다. 애초에 역사서에서 이론의 여지없이 빼지 못하는 것이 전쟁기록이다. 애초에 신라는 국가 형성도 늦었고, 오랫동안 강성했던 국가가 아니었다. 한타 치고 나가서 당의 힘을 빌려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을 뿐이다. 때문에 신라의 패배 기록 자체를 숨길 수도 있었다고 하는 것은 신라중시가 아니라 역사 왜곡이다. 그런 식으로 역사서를 쓰면 정사로 인정받을 수가 없다. 그리고 신라의 혼란스러움 묘사는 신라 후기인데, 신라의 혼란을 설명하지 않으면 후삼국시대의 시작과 고려의 건국을 설명할 수 없다. 김부식은 신라인이 아니라 고려사람이다. 신라의 흠을 가리고 고려 건국을 설명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한 사람은 김부식 외에도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김부식은 대표편찬자로 그 아래 있던 사람들은 김부식보다 아래 위치에서 일을 했을 뿐이다. 사론의 경우는 온전히 김부식의 의견이다. 무엇보다도, 삼국사기 내용이 신라 편향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삼국사기 편찬자가 김부식 외에도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면 그 신라편향적이지 않은 부분이 김부식의 의도가 아니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김부식에게 유리한 부분만 발췌해서 인용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기준인가.

3.1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수정하면 식민사관?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론 식민사관설

4 여타 문제점

  • 태조왕을 비롯한 삼국 초기 왕들의 재위 기간이 지나치게 길게 나타나는 문제등이 있어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설'이 비중있게 제기되기도 했다. 고구려, 신라, 백제 할 것 없이 《삼국사기》를 펼쳐보고 왕들의 재위 기간, 출생 연도를 하나하나 따져보면 왕들의 나이가 실로 예술이다. 석탈해와 같이 아예 태어나기 전부터 활동한 사람도 있고, 대무신왕처럼 어머니가 죽은 뒤 수년 뒤에 태어난 사람도 있다. 편찬자들의 실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김부식이 인용한 사료들부터 문제가 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이러한 불신론에 의거, 《삼국지》 위지 '동이전'[15]에서 70~80개의 소국이 병립된 것으로 묘사되는 2~3세기에 백제와 신라가 각각 한반도 서남부 지역과 동남부 지역을 석권한 집권 국가임을 드러내는 초기 기록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사학계 내부에 팽배했다. 이러한 기류는 풍납토성 발굴을 계기로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이후 신라의 나정/신궁 유적 발굴로 인해 어느 정도 학설이 수정되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해체 국면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16] 이를테면 최근의 발굴 조사 결과는 영산강 유역에 5세기까지 독자적인 정치 세력이 존립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시조인 온조왕대 이미 마한을 아울렀다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와 배치되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삼국의 초기 역사에 대한 기술은 건국자에 대한 미화 등을 목적으로 후대의 윤색이 들어갈 여지가 크기 때문에 신뢰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 《삼국사기》 제작 당시 사료가 매우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유신의 경우에는 그의 후손이 쓴 김유신 열전을 요약해서 기입해놓는 김유신 열전 초반 부는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과 술이부작(述而不作)[17]에 따라서 작성된 삼국사기의 내용과는 전혀 동떨어진 전설들이 등장하며[18], 당시 허구헌날 털렸다는 신라 본기의 기록과는 달리 김유신은 백전무패의 무장으로 소개되기도 하는 등 앞뒤 기록이 안맞는 경우가 발생했다.

또 연개소문과 관련된 자료를 구하지 못햇는지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은 《당서》의 연개소문 관련 대목을 그대로 복사+붙여넣기를 한 덕분에 고조의 이름인 이연(李)을 피휘하느라 천개소문(蓋蘇文)이라고 적은 것을 그대로 가져와 버리는 실수가 있다. 덕분에 연개소문이 천개소문으로 통용되기도 하는 비극이 있었다. 본 열전이 기본적으로 적대국이 남긴 기록인 까닭에 연개소문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실상보다 훨씬 과장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된다. 거기다가 《삼국사기》와 더불어 양대 사서인 《삼국유사》는 지나치게 불교 중심적이어서 불교 세력을 억압하고 도교를 장려한 연개소문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이래저래 연개소문이나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기록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있다.

  • 정치적인 이유에서 직필하지 않고 어물쩍 넘긴 부분이 있는데 궁예는 901년 고려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혹은 사실상의 국가 상태에서 왕국을 선포하였)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궁예 열전에서는 901년 왕을 칭한 사실만 기록하였다.[19] 왕건의 정통성과 당시 고려인들의 역사관[20]을 생각하면 그렇게 서술한 것이 당연하긴 하지만 삼국사기를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은 곤란하다는 증거이다.편찬 목적이 아예 다른 삼국유사에는 연표에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로 901년 건국한 것이 명확히 기재되어 있다.

5 삼국사기의 구성

총 50권 9책으로, '권'은 내용 구성 상의 단락을 나눈 단위이고 '책'은 물리적으로 책 한권을 묶은 단위를 뜻한다. 즉 현대인의 관점에서 재구성해 말하자면 목차가 50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총 아홉권의 책인 셈.

5.1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

  • 《삼국사기》를 올리는(進) 표문(表)으로, 김부식이 썼다. 자세한 내용은 진삼국사기표 참조.

5.2 본기

5.3 연표

  • 연표
    • 권29 연표 상: 전한 선제 오봉 원년(기원전 57년)~서진 세조 무황제 태시 10년(서기 274년)
    • 권30 연표 중: 서진 세조 무황제 함녕 원년(275년)~양황제 대업 4년(608년)
    • 권31 연표 하: 수 양황제 대업 5년(609년)~후당 말제 청태 3년(936년)

5.4 잡지

  • 잡지
    • 권32 제사, 음악
    • 권33 색복(옷), 거기(車騎: 수레와 마구), 기용(器用: 그릇), 옥사(屋舍: 가옥)
    • 권34·35·36 지리 1,2,3 신라
    • 권37 지리 고구려, 백제
    • 권38·39·40 직관 상,중,하 : 관직에 대한 기록이다.

5.5 열전

5.6 편찬자

  • 참고(叅考)
    • 김영온(金永溫)
    • 최우보(崔祐甫)
    • 이황중(李黃中)
    • 박동계(朴東桂)
    • 서안정(徐安貞)
    • 허홍재(許洪材)
    • 이온문(李溫文)
    • 최산보(崔山甫)
  • 그외
    • 김충효(金忠孝)
    • 정습명(鄭襲明)
    • 김거두(金居斗)
    • 최득경(崔得冏)
    • 민개(閔開)

5.7 발문

사기와는 다르게, 우리나라는 제후를 봉하지 않았으므로, 제후들의 역사를 다루는 세가가 없다.

6 번역본

삼국유사와 더불어 한국고대사 연구의 필수 자료답게 여러 학자들의 손을 거쳐 번역된 바 있으며, 번역본의 출판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위의 링크에도 있듯이 이미 네이트 한국학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등 여러 사이트에서 무료로 열람이 가능하므로 이를 참고해도 좋다. 누구든지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최강의 장점.

서적으로 출판된 것 중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1997년에 간행한 5권의 《역주 삼국사기》가 가장 좋은 평을 받고 있는데, 노중국 등을 비롯한 한국 고대사학계의 권위자들이 참여하여 상당한 퀄리티를 자랑한다. 2012년에는 개정판을 내놓았는데 이 역시 좋은 평을 받았다. 단점은 5권[23] 으로 이루어져 있는데다가 한권의 가격이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4~5만원에 육박하는지라 전부 소장하려면 돈이 꽤 많이 깨진다는 것이다(...).[24]

참고로 '상고사학회'[25]라는 단체에서 펴낸 삼국사기는 대륙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봉의고등학교의 이병곤 영어교사가 삼국사기 전체를 영어로 번역했다.[26] 영문 제목은 'The History of Three Kingdoms'. 관련 기사

  1. 그 외 삼국사기에서 가야부여, 발해 등은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2. 《삼국사기》와 대비시키기 위해 《구삼국사》라 칭한 것이다. 본래 이름은 그냥 《삼국사》였지도 모른다.
  3. 최치원통일신라대에 쓴 책이며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에 존재하는 책은 위서다.
  4. 다만 현대에 발견되어 남당 박창화의 위작설이 유력한 '화랑세기 필사본'은 마지막에 '記'가 아닌 '紀'자를 쓴다. 어차피 별 차이는 없지만.
  5. 이상 세 문헌은 김대문이 쓴 것들이다. 편찬자들이 서명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학계에서는 도미 설화 등을 같은 저자의 《한산기(漢山記)》 내용을 일부 인용한 것으로 본다. 더하여, 국내 계통 사료로 고구려의 《신집(新集)》도 인용하지 않았을까 보는 이들도 있다.
  6.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쓴 책이라고 하며 법흥왕 본기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7. 3경 체제라고는 하지만, 고대 국가에서 수도의 위상은 엄청난 것이었기에 지방 유력자들은 끊임없이 중앙으로 진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5소경을 세웠다느니 해도 결국에는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판치는 신라 말의 상황이나 무신정변 이후 서경, 동경을 비롯한 각지에서 삼국을 계승한다는 분립적인 상황은 수도와 지방의 위상 차이와 별개의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열적인 의식은 대체적으로 몽골 침입기에서 조선으로 들어가는 시기 해소된 것으로 본다.
  8. 이규보의 '동명왕편' 서문을 보면 이규보는 동명왕의 설화를 우연히 얻은 《구삼국사》를 통해 알게 되었으며 그때까지 이 책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동명왕의 사적이 더 자세하게 남아있다는데서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숙종 때 편찬된 《대각국사문집》에서 《구삼국사》로 추정되는 《해동삼국사》라는 책을 인용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까진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는 새로 성립된 《삼국사기》와 양립할 수 없어 유실로 이어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고려는 툭하면 수도가 함락되고 문화재와 사료가 대량분실될 정도로 대전쟁이 잦은 나라였기 때문에 속단할 수는 없다. 고려 왕조의 가장 중요한 사료였던 고려왕조실록의 초기 기록조차도 요나라에게 개경이 함락당했을 때 불타버렸을 정도였다. 이규보의 시대에도 이미 몽골한테 털리는 중이었고 이후로도 왜구, 홍건적이라는 2단 콤보가 들어왔다.
  9. 다만 김유신 열전의 경우에도 기록이라고 남아있는게 적어서 김유신의 후손이 쓴 김유신 행장록을 그대로 베낀 수준이라 신뢰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당시 신라는 백제에게 일방적으로 개털리는 상황이었음에도, 김유신 열전에는 김유신이 가는 곳마다 승리를 이끌어 낸다고 나와 있다.(...) 김유신과 같이 통일신라 시대의 주역의 자료도 빈약한 상황이었다는걸 알수가 있다.
  10. 중국에서, 제후가 조회에 나아가 천자에게 직무의 상황을 아뢰던 일. -네이버 국어사전-
  11. 이 내용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긍정하는 쪽에서는 '표'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당나라 조정에 보낸 공식적인 문서이므로 개인적인 편지보다 신뢰성이 높다고 본다. 반면 부정하는 쪽에서는 발해를 디스하려는 내용일 뿐이니 믿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12. 백제에게 패배(해론, 눌최, 김흠운, 죽죽 열전, 본기 등등) 고구려에게 패배(태종왕 본기, 필부전 등등) 말갈에게도 패배(문무왕 하의 탈기, 소나 등등) 당에게도 패배(석문 전투)
  13. 장보고 등 귀족들 땜에 허구헌날 왕위 교체가 심함(김양,장보고), 개혁안을 올려도 안들어 먹음(최치원), 골품제 땜에 출세길이 안 열려서 당나라로 망명(설계두), 흉년이 들자 곡식 빼돌리고, 안참여하면 독살(검군 열전) 등등
  14. 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최산보(崔山甫)·이온문(李溫文)·허홍재(許洪材)·서안정(徐安貞)·박동계(朴東桂)·이황중(李黃中)·최우보(崔祐甫)·김영온(金永溫) 등 8인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정습명(鄭襲明) 2인의 관구(管句) 등 11인의 편사관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인종 23년(1145) 을축년
  15. 《삼국사기》가 12세기 기록인데 반해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는 3세기의 인물. 거의 천 년이 앞선다. 게다가 삼국지는 위진 시대에 한국과 교류한 중국 국가들의 분명한 당대 기록이다.
  16. 일반인들의 이러한 흑백론적 사고방식은 역사 이해에 큰 걸림돌이 된다. 역사는 모 아니면 도가 아니다.
  17. 군자는 괴상한 것(무속신앙, 전설등)을 기입하지 않으며, 없는 사실을 지어서 작성하지 않는다.
  18. 물론 삼국사기 초반부에 김부식이 "중국에도 탄생설화가 기이한데 우리라고 없는법 없냐!"라며 쓰긴 했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곤 원칙에 충실히 작성되었다.
  19. 왕씨 고려의 정통성이 훼손되니까.
  20.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송나라에서 나온 책이다.) 고려인들은 고려는 주몽이 세우고 내려오다 중간에 왕씨로 바뀌었다는 역사 인식을 갖고 있었다. 또 몽골 침략에서 쿠빌라이 칸마저 만주벌판을 제압하던 그 고구려가 자기한테 친히 항복했다고 기뻐하고 있다.
  21.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조회해보면 현재 남아있는 것은 조선시대에 필사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부식이 살아있던 시기에는 혜종의 이름인 무(武)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호(虎)라고 썼을 것이다.
  22. 문무왕과 마찬가지로 당대에는 호왕이라고 기록했다.
  23. 번역본 1권+색인 1권+감교 1권+주석 2권
  24. 교양서 수준에서 읽는다면 이강래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번역한 삼국사기1,2(한길사), 한국인문고전연구소에서 발간한 삼국사기-신라본기, 고구려&백제본기, 잡지&열전으로 분리해서 번역하였음-도 나쁘지 않다.
  25. 한국연구재단에 등록된 학회 가운데 학회명에 '상고사'가 들어가는 학회는 '대한상고사학회'와 '한국상고사학회'가 있으며, '상고사학회'는 없다. 따라서 이 '상고사학회'는 앞의 두 학회와 다른 유사 학회일 가능성이 높다.
  26. 이미 해외에서 본기를 개별적으로 번역한 바가 있지만 전체를 번역한 것은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