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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고국양왕 고이련 | ← | 19대 광개토대왕 고담덕 | → | 20대 장수왕 고거련 |
광개토대왕, 일랑 이종상, 1977년[1] | |
생몰년도 | 375년 ~ 413년 음10월(39세)[2] |
재위기간 | 392년 음5월 ~ 413년 음10월(22년)[3] |
출생지 | (고구려 국내성 - 이련의 잠저)[4] |
시호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5] |
연호 | 영락(永樂) |
성 | 고(高) |
휘 | 담덕(談德) |
가족관계 | 아버지 : 이련(고국양왕) / 아들 : 거련(장수왕)[6] |
1 개요
“대왕의 은택이 황천(皇天)에 두루 미쳤고, 대왕의 위무가 사해에 떨치셨다. 또한 적들을 쓸어 없애셨으니 백성들은 평안히 자기 직업에 종사했고, 나라가 부강하니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마저도 풍성하게 익었다.”ㅡ 광개토대왕릉비
“내가 죽은 뒤에 내 묘지기는 내 친히 돌아다니며 잡아온 한(韓)인과 예(穢)인들에게만 맡겨서 무덤을 지키고 소제하게 하라.”ㅡ 광개토대왕이 살아 생전에 한 말
할아버지대에 멸망의 위기까지 치닫았던 고구려를 강대국으로 이끈 한국사 최강의 정복군주.[7]
전쟁에 대해서는 한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먼치킨, 세종대왕과 함께 한국사에서 진정 대왕으로 불리는 단 두 명의 군주[8]
시호 그대로 삼국의 전성을 이끈 군주들 가운데에서도 두드러지게 광대한 영토를 확장했고, 그만큼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치세 이후 고구려는 힘 좀 있다 싶은 산골짜기 국가에서 동방의 패자이자 동북아 국제 사회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다.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39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22년 동안 끝없이 고구려와 이웃한 모든 세력과 전쟁을 벌여 그들을 굴복시켰다. 하지만 그다지 드라마틱한 면모는 없다. 워낙 어린 나이에 즉위한데다 싸우는 족족 이기기만 해서 인생에 굴곡이 별로 없는 것. 단 한번 신라 구원전 때 후연의 모용성이 뒤를 치고 들어와서[9]곤란해진 적이 있지만, 곧바로 극복해버리고 무엇보다 이 사건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사료로는 금석문으로는 『광개토대왕릉비』, 문헌으로는 《삼국사기》와 중국의 사서를 중심으로 여러 사료들이 전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현전하는 한국 고대의 비문 가운데 그 내용이 거의 완전하게 전하는 거의 유일한 것으로, 내용도 당대 역사를 전하는 것이 많아서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크다.
《삼국사기》는 광개토대왕의 즉위부터 사망까지 고구려에서 일어난 사건이 연대순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광개토대왕릉비』와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여 광개토대왕의 치세를 정리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사료다. 중국 사서는 광개토대왕 시기 후연과 고구려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외에도 《삼국유사》나 《일본서기》에 단편적인 사건들이 전하고, 운 좋게 살아남은 모두루 묘지명과 호우명 그릇은 지워진 역사의 편린을 전해주고 있다.
광개토대왕 시기의 사료는 한국사 전반에 걸처서 봤을 때는 적은 편이나 한국 고대사에 한정해서 봤을 때는 무척 풍부한 편이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광개토대왕 시기의 통치와 전쟁 기록이 고구려의 다른 왕들의 기록에 비해 풍부한 편이고,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광개토대왕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무엇보다 『광개토대왕릉비』가 남아있다.
광개토대왕은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민족주의 사관에 의해 주로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평가되어왔다. 그의 생애가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객관적으로 이해되기보다 그의 정복 활동이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민족주의적인 자긍심을 고취시켜주는 것이었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식민지 경험 등으로 상처 입은 민족적 자부심을 광개토대왕의 대외 정복 활동으로 회복하려는 모습이 역력한 것. 그래서인지 광개토대왕을 소재로 한 각종 작품은 민족주의로 떡칠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광개토태왕의 정복활동으로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키려는 모습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 한참 동안 잊혀졌다가 근대 한국에 와서야 이런 민족주의적 자긍심 고취의 관점에서 다시 부각되었다. 때문에 고구려가 망하고 근대에 이르기까진 광개토대왕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끽해봤자 고구려의 왕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되면서 그 특징으로 싸움 좀 했다거나 땅 좀 넓혔다고 언급되는 것이 전부다.
역사서에서는 그의 성격을 주로 무인의 기질이 있고 웅대한 야망을 품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나마 이 가운데 꽤 재미있는건 두 조선 문인들의 평가인데, 권근은 삼국사절요에서 "삼년상도 다 안 치른 채 다른 나라로 쳐들어가고, 복수한답시고 지난 일이나 들추는 몹쓸 사람"이란 반응을 보였고,[10] 반대로 안정복은 "고작 22년 지난 할아버지 원수 갚는데, 그게 바로 도리"라는 주장으로 반박하고 있다.
2 명칭
현대 한국에서는 '광개토대왕'이라고 주로 불렸고, 가끔 '광개토태왕'이라고도 불리는데 비슷한 명칭은 아래에 설명하듯 이것저것 많지만 정작 '광개토대왕'이나 '광개토태왕'이라고 딱 떨어지게 쓴 기록은 없다. 광개토왕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현대에 임의로 대왕이나 태왕을 붙인 것이다. 참고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호태왕'으로 부른다.
역사서 등에서 그를 가리키는 명칭은 다양하다.
시호 | 출처 | 시기 | 비고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 광개토대왕릉비문 | 고구려 414년 | 고구려 공인 시호. 고구려 역대 국왕 가운데 유일하게 완전한 시호가 전한다. '국강상'은 능이 있는 지역, '광개토경'과 '평안'은 업적, '호태왕'은 일종의 미칭으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 | 광개토대왕릉비문 | 고구려 414년 | 능비문 1면에서 위의 공인 시호를 한번 표기한 뒤, 4면에서는 시호를 이렇게 축약해서 표기하고 있다. 시호의 '평안'이 탈락하였다. |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 | 호우명 그릇 | 신라/고구려[11] 415년 |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유물 중 하나. 시호의 '평안'이 탈락하고, '광개토경'이 비슷한 의미인 '광개토지'로 바뀌었다. |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 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 | 모두루묘지명 | 고구려 5세기 | 시호의 '평안'이 탈락하고, '광개토경'이 비슷한 의미인 '대개토지'로 바뀌었으며, '호태왕'이 더욱 강한 의미인 '호태성왕'으로 확장되었다. |
왕호 | 출처 | 시기 | 비고 |
광개토왕 廣開土王 | 삼국사기 | 고려 1145년 | 고구려 역대 국왕의 왕호가 《삼국사기》에 일괄적으로 전하고 있으므로, 다른 국왕들과 일관성을 갖추기 위해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주로 쓰인다. 시호의 '국강상'과 '평안'이 탈락하고, '광개토경'이 비슷한 의미인 '광개토'로 축약되었으며, '호태왕'이 미칭이 사라진 '왕'으로 축소되었다. 가장 축약된 형태. |
개토왕 開土王 | 해동고승전 | 고려 1215년 | 《삼국사기》 연표의 광개토대왕 사망 기사에도 개토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광개토왕'의 낙자로 본다. |
광개왕 廣開王 | 삼국유사 | 고려 1281년[12] | 《삼국유사》 왕력에 광개토대왕의 왕호가 광개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광개토왕'의 낙자로 본다. |
휘 | 출처 | 국가 | 비고 |
담덕 談德 | 삼국사기 | 고구려, 고려 | 《삼국유사》에도 본명 담덕으로 기록되어 있다. |
안 安 | 진서 | 중국 여러 나라 | 고려도경에도 안으로 기록되어 있다. |
호칭 | 출처 | 국가 | 비고 |
광개토대왕 廣開土大王 | - | 대한민국 |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는 '광개토왕'이라는 최대한 축약된 호칭에서 나아가, 광개토대왕을 영웅시하는 현대인들의 정서상 이를 다시 대왕으로 존칭하는 것. 대한민국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쓰이며, 이따금 학계에서도 사용되곤 한다. |
호태왕 好太王 | 광개토왕릉비문 | 중국, 일본 | 중국과 일본 학계에서 광개토대왕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하는 호칭.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서 전반부의 장지명과 업적 부분을 전부 생략하고 미칭만을 간단히 남긴 것으로, 국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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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해당 문서 참조.
5 기타
5.1 오늘날의 광개토대왕
이 단락은 길기 때문에 따로 항목 분리한다. 자세한 내용은 이 항목을 참고한다.
5.2 야사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야사도 전해지는 것들이 있다. 물론 거의 출처 불명이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종종 정사인 것마냥 소개되고 있다는 건데 요즘은 예전에 비하여 한국 고대사가 많이 정립되면서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검열이 허술한(?) 상대적으로 학술적 접근이 관철되지 못한 동화책에는 이런 내용이 넘쳐나고 있다. 사실 동화 작가들이 지어낸게 설화마냥 퍼져나간 것들도 있을 것이다. 가장 유명한 설화로는 광개토대왕이 여자 때문에 싸움이 난 두 마을을 화해시켜 줬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야사라고 하기에도 민망하지만 《환단고기》에도 짤막하게나마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부분이 나오는데 의외로 중원을 호령하고 어쩌고 하는 이상한 내용은 없다. 그냥 정사로 통용되는 정복전쟁에 자잘한 과장과 미사여구를 덧붙인 수준... 그것도 중국계인 후연이나 만주 대륙의 국가들과의 싸움은 없고 왜와 연결되어 있는 한반도를 공격하는 내용인데...
당시 시대상이 일제강점기였음을 생각해보면 《환단고기》 저자의 친일 혐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어느 정도 시대상을 잘 반영했다. 참고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광개토호열제라는 이름으로 나와있다. 야사나 다름없는 《조선상고사》에도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이 대표 업적으로 생각하는 대륙으로의 진출(?)보단 왜군과의 격돌에 비중을 두고 있다.
그리고 《화랑세기》 필사본의 저자로 유명한 박창화가 남긴 다른 책 고구려사초의 영락대제기도 광개토대왕의 치세를 다루고 있는데 자잘한 내정 기록, 왕실 비사 등을 제외하면 새로운 내용은 별로 없고 정사로 통용되는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정복 전쟁과 관련해서는 탐라국(제주도)가 항복했다는것 말고는 새로운 게 거의 없는데, 『광개토대왕릉비』나 《삼국사기》 같은 정사로 통용되는 사료의 기록을 살짝 비틀어놓거나 전투 기록 한 줄 더 추가한게 전부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탐라가 항복했다는 내용과 거란과의 전투 기록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기존의 사료에 존재하는 내용들이다. (토욕혼을 정벌했다는 내용도 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대에 활동했던 것이 확실한 진이나 모두루가 고구려 사초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의 소설일 가능성도 높아진다. 진, 모두루 모두 박창화 사후에 확인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5.3 기타 학설
비려의 위치나 정체에 대해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몽골의 유연이라고 했으나 근거 자체가 해괴하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부산 밑에 와룡이 있었는데 와룡이 유연의 별칭인 유유와 발음이 비슷(?)하니 와려(비려)는 유연인것 같다...' 라는게 근거다.[13] 신채호가 해괴한 추론을 가끔 하기는 하지만 이건 매우 극악한 편에 속한다. 당시 유연은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던데가 유연과 고구려 사이를 '고구려도 쩔쩔매는 후연을 처바르는 북위' 가 가로막고 있던지라 말도 안된다.;; 아니, 거란이 선비의 후예라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현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시라무렌 강 상류에 위치한 세력으로 보고 있다. 훗날 비려가 거란의 일원이 된 것으로 보곤한다. 한 편 진서 동이전에 나오는 만주 중앙에 위치한 비리국이라는 설도 있고 중국 학계에서는 요동의 태자하 상류의 세력으로 보기도 하며 소수맥이라는 주장도 있다. 헌데 태자하 상류설이 말이 안되는게 광개토대왕이 비려를 격파하고 돌아오며 태자하를 거첬으므로 성립하기 어렵다. 더구나 소수맥은 수백년전인 유리왕 때 격파되고 이후로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이때 토벌한 비려는 391년 토벌한 거란과 같은 존재로 보기도 한다. 광개토대왕비문에 광개토태왕 때 상대한 적들은 모두 기재했다는 가설에 의하면 거란이라고 빠뜨렸을리는 없으니 아마도 비려는 거란과 같은 존재일수도 있겠다. 더구나 비려는 광개토대왕비문의 기로에 의하면 거란이 위치해있던 곳에 있었으니...
다만 이걸 딱히 실증할만한 또렷한 결정적인 근거는 없다. 주요 근거는 비려와 거란의 위치가 비슷한것같고 거란의 부족중에 필혈부가 있었는데 비려와 발음이 비슷하다는것. 위서에는 필혈부라고도 읽는 필결부(匹絜部)·려부(黎部), 통전에는 필려부(匹黎部), 북사에는 다시 필결부(匹潔部)·려부(黎部)라고 적혀 있는데[14], 근데 이건 아예 당시부터 물길의 필려이국과 헷갈리고 있었으니(...) 더구나 발음이 비슷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리스크가 매우 크다. 당장 고구려를 의미하는 무구리와 말갈만 해도 발음이 비슷한데 완전히 남남인 것을 보면. 발음이 비슷한데 남남인 경우가 매우 흔하다.
비려와의 전쟁터였던 부산,염수등의 위치를 고증하면 대강 실마리가 잡히겠으나 그마저도 힘든게 현실. 염수가 고유명사일수도 있고 소금이 많이나서 붙은 이름일수도 있는데 만주지방에 소금이 나는곳이 한둘인가... 부산같은 경우도 고유명사라는 해석이 있는가하면 고구려인들이 이름모르는 산을 아무개라고 부르거나 큰 산이라고 부른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쨋든 비려는 고구려 국경에 근접한 거란을 먼저 토벌한 점이나 광개토대왕비문에 장거리 원정이 있던것마냥 기술한 점으로 보아 거란보다 서쪽의 내몽고 어딘가였던것 같다.
아니면 진서 동이전에 기술되어 있는 비리국일수도 있는데, 진서가 광개토대왕 시기를 기록하고 있고(이상한건 정작 고구려는 없다.) 진서 동이전에서 서술하는 비리국의 위치가 광개토대왕비문의 비려처럼 고구려의 북쪽 어딘가이기 때문에 비리국일 가능성도 무시할수 없다. 또한 비리국이 광개토대왕 시기인 진서 동이전에만 잠깐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도 묘하다. 광개토대왕대에 고구려에게 먹혀서 이후로 등장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뭐 학계에서는 이 주장이 사장되긴 했다만...
비려의 인구는 35만 정도로 추정된다.[15] 기껏 3개 부락 격파했는데, 어떻게 35만이라는 숫자가 나온지 의아할 수 있는데, 부락이라는 단위는 고정된 수치를 갖고있는게 아니라 쓰일 때마다 다르다. 마을 하나를 부락으로 칭할 수도 있고 부족 하나를 부락으로 칭할 수도 있다.
근데 이것도 비문의 판독에 따라 부락이 아니라 부(부족)으로 판독할 수도 있어서... 참 애매하다. 3개 부의 의미를 부족이나 부락 3개를 격파했다는 게 아니라, 거란족이 스스로를 칭할 때 관용적으로 쓰는 3개 부라는 의미로 해석한 연구 결과도 있다. 하지만 그건 훨씬 후대의 일이라...
영락 6년에 점령한 58성 700촌은 대강 현재의 강원도, 충청북도와 경기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이다. 58성 700촌의 위치 비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데, 일각에서는 충청남도까지 남하한 걸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 비류백제설로 이어지곤 하니 문제.
5.3.1 기년 수정론
17세 후손 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2·9에 등극하니 부르길 영락태왕이라 ……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 39세에 나라를 버리고 돌아가셨다. - 호태왕비문
광개토대왕의 탄생년도에 대해서는 능비를 통해 추론할 수 있으나, 《삼국사기》와 1년의 차이가 있고 또 사망연대와 맞춰 볼 때도 의아한 점이 있어 학계에 이론이 있다. 학계의 중론은 대체로 374년인 듯하나, 375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능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18세 되던 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설은 즉위년에 대한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광개토대왕은 392년에 즉위한 것이 되는데, 연표에 따르면 이 해는 바로 임진년이다. 그런데 능비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을 신묘년이라 하고 있다. '영락 5년 을미(395)', '영락 6년 병신(396)' 등으로 정벌 기록마다 확인이 되고, 덕흥리 고분 등에서 교차검증도 되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주류 학계에서는 능비문에 《삼국사기》를 맞추어 《삼국사기》의 기록을 한 해 앞당김으로서 광개토대왕이 신묘년 즉 391년에 즉위한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즉위년만 앞당기게 되면 광개토대왕의 재위년 자체가 23년으로 40세에 사망한 것이 되어 《삼국사기》 본래의 기록은 물론이고 능비와도 그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되며#, 혹시 전체 재위년을 한 해씩 당겨서 391년 즉위해 412년 사망한 것으로 한다면 중국 사서와 교차 검증되는 《삼국사기》의 연표 자체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문제점이 생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일각에서 '사서의 연도에 능비의 간지(干支)를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도 한국 고대사에서 유일하게 잘 정리된 연표의 간지를 무시하고 연대를 끼워맞춰야 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양 사료 간에 미묘하게 일치하는 부분도 있는 데다가 앞서 수정론의 오류에 비추어 볼 때 무시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알아서 판단하자 차후의 연구를 기대한다.
이상의 문제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능비의 '신라 구원 요청(9년 기해)-신라 구원군 파견(10년 경자)'에 비정되는 사기의 '신라 내구마 울음(9년 경자)-실성 귀환(10년 신축)'를 굵은 글씨에 주목하며 비교해보자.
5.3.2 유사역사학
민족을 숭배하는 한국의 유사역사학과 엮이기 좋은 소재이다보니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유사역사학적인 주장들도 많다.
광개토대왕이 죽고 나서 아틸라가 등장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이 유럽으로 건너가서 아틸라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틸라는 선대의 계보가 명확해서 당연히 말이 안되는 소리다. 인지도는 후달리지만 한국판 요시츠네=징기스칸설이랄까...
광개토대왕비문에 등장하는 '식신토곡'이라는 세력명에서 토곡만 떼와서 토곡이 토욕혼과 발음이 유사하여 광개토대왕이 토욕혼을 정벌했다는 주장도 있다. 식신토곡이라는 말은 식신땅의 곡이라는 의미지 토곡 자체가 어떤 세력명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더구나 당시 토욕혼은 백란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토욕혼이 고구려의 웬수인 모용씨의 나라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어느정도 그럴싸하기도 한데 환빠들은 토곡=토욕혼 주장을 할때 이런 근거는 들지 않는다. 식신토곡이라는 세력명은 판독자에 따라 백신토곡도 되는데 신자를 어거지로 란자로 판독해서 백란정벌설을 내세우면 꽤나 그럴싸한데 아직까지 그런 괴인은 안보인다.
398년 북위의 수도 업에 고구려인 46만과 기술자 10만이 가득차서 수도를 평성으로 옮겼는데 사실은 고구려가 북위 수도 업을 함락해서 북위가 불가피하게 수도를 평성으로 옮긴 거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다. 사료에서 확인되는 고구려와 북위의 최초 접촉은 장수왕 때다. 둘다 공동의 적으로 후연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굳이 동맹을 맺을 만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지도 않았고(서로 눈치보면서 후연을 공격하는 수준) 국경이 닿아있지 않은 관계로 직접적으로 접촉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후연과 백제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고구려가 무슨 수로 북위까지 처리할까? 과장일 여지가 있지만 북위가 후연을 칠 때 기병 40만을 동원했는데 겨우 5만 보기를 박박 긁어모으고도 병력이 없어 후방을 털렸던 고구려다.- ↑ 실제 초상화는 아니고 상상화이다.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다만 이 그림은 갑옷이 고증오류가 심해 문제가 있다. 삼국시대 갑옷 고증이 제대로 된 케이스로 예를 들면 이사부 표준영정이 있다.
- ↑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기준, 『광개토대왕릉비』의 향년을 적용.
- ↑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기준.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에 따라 연도를 가감하여 즉위한 해를 391년으로 보는 주장은 '기년 수정론' 항목 참조.
- ↑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광개토대왕이 태어난 때는 소수림왕 재위 기간으로, 아버지 고국양왕이 아직 즉위하기 전이었다.
- ↑ 『광개토대왕릉비』가 발견되기 전에는 단지 광개토왕으로만 전해져 내려왔다. 기타 광개토태왕과 같은 현대의 호칭은 '명칭' 항목 참조.
- ↑ 《삼국사기》 문자명왕 원년조에 "종숙 승천"의 존재가 나온다. 문자명왕의 종숙은 조다의 사촌으로 장수왕의 조카가 된다. 즉 광개토대왕에게 장수왕 외에도 다른 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 아닌 게 아니라 고구려의 역사는 광개토대왕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 '삼국시대'라며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세 나라를 꼽지만, 사실 고대 한국에는 부여라든가 삼한이라든가 가야 등 다른 고대 국가들도 많았고 오히려 이 나라들이 흔히 부르는 '삼국'보다 더 중요하게 세를 떨치던 시기도 있었는데, 광개토대왕이 부여 등의 국가를 관광 보내며 만주를 개척하고 고구려 국력을 닦고 동북아 국제사회의 한 축으로 올려놓았기에 우리의 뇌리속에 고구려가 남을 수 있었다. 만약 광개토대왕 이전의 고구려가 계속 이어졌다면,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고구려는 그저 그런 산골짜기 국가로 남았을 것이며 당연하지만 한국사 뿐만 아니라 아시아사-세계사까지 바뀌었을 것이다.
- ↑ 사실 개인적인 면만 보아도 충분히 먼치킨이라 부를 만하다.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생 나이에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기반을 닦았다는 것을 감안해도) 한 국가의 운명을, 그것도 경제력이나 국력도 어중간하고 주변 여러 나라와 불안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를 덜컥 이어받은 후 집권하자 마자 백제나 거란 등 걸리적거리는 국가와 세력들을 완전히 때려부숴 나라를 안정시키고 고구려를 강대국으로 세웠다. 물론, 광개토대왕의 이런 업적에는 광개토대왕 전후의 소수림왕,고국양왕, 장수왕 등의 성군들이 나라를 안정시키면서 토대를 닦은 것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광개토대왕 본인의 능력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 ↑ 원인은 당시 후연의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대거 고구려로 이주한 것을 빌미로 한 것이었다. 당시 백제 아신왕이 고구려와의 강화를 위반하고 가야, 왜와 동맹을 결성했기 때문에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삼국동맹을 격파하는데 상당한 기간이 걸려 군사들을 한반도 남부에서 신속히 철수할 수가 없었고, 그로 인해 신성과 남소성이 고스란히 후연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 ↑ 막상 권근은 고려의 멸망 이후 조선을 섬겨서, 유교의 기본 이념인 불사이군을 위배했고, 애초에 자기 스승인 정몽주를 참살한 작자를 섬기면서 사돈까지 맺었던 작자다.
- ↑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되었으나,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신라로 전래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 ↑ 편찬 시기에 약간의 논란이 있다.
- ↑ 원문 : #
- ↑ 애시당초 ㄱ(ㅋ)음과 ㅎ음이 유사한 거야 주지의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몽골어의 칸과 여진어의 한이 있고, 오랑캐 즉 우랑카이는 중국에서 우랑하이라 불렀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올량합(兀良哈)으로 적혀있다.
- ↑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