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獻之
348~388
자는 자경(子敬)으로,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 출생이다. 서예의 본좌 왕희지의 일곱째 막내아들로 젊은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나 벼슬을 했는데 건위(建威)장군 ·오흥(吳興)태수를 거쳐 중서령(中書令)까지 역임했다고 한다.
왕희지의 아들이 일곱이지만 이 중에 왕헌지가 그 재주를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왕희지의 서법을 이어받아 호기가 넘치는 서법을 완성시켰다.
후세 송나라 사람 양흔이 《고래능서인명(古來能書人名)》에서 평가하기를, “예(隷) ·고(藁:草書)에 능하고, 골세(骨勢:筆勢)는 부친에 미치지 못하나 미취(媚趣)는 부친 이상”이라고 까지 평가하였다.
주로 왕희지를 대왕이라고 부르면서 왕헌지를 소왕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2왕(二王) 또는 희헌(羲獻)으로 병칭되어 서(書)의 표준으로 받들어진다.
《중추첩(中秋帖)》 《낙신부 13행(洛神賦十三行)》 《지황탕첩(地黃湯帖)》 《송리첩(送梨帖)》 등 많은 법첩(法帖)이 전해진다.
본인이 남긴 작품도 양과 질이 매우 훌륭하지만 아버지의 명성이 워낙 엄청난 탓인지 안습한 야사가 있다. 왕헌지도 아버지처럼 명필이 되기 위해 서예 연습을 열심히 했지만 단기간에 따라가기에는 역시 무리였다. 하루는 큰 대(大)를 써서 아버지 왕희지에게 평가를 부탁하자 왕희지는 "밑부분의 두 획이 너무 벌어져 있다. 이런 글씨 모양은 클 태(太)를 쓸 때에 더 어울린다"라고 말하며 직접 점을 찍어서 보여주었다. 왕헌지는 이후 어머니에게도 평가를 부탁했는데, 글씨를 본 왕헌지의 어머니는 왕희지가 대신 점을 찍은 것인줄 모르고 "아들아. 이제 겨우 아버지의 점찍는 법만 닮았구나."라고 말했다. 이에 창피를 느낀 왕헌지는 더욱 연습에 매진해 실력을 쌓았다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