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희지

1 서예가

王羲之
307~365

중국 동진 시대의 서예가.

자는 일소(逸少)로 우군장군(右軍將軍)의 벼슬을 하였다 해서 왕우군으로도 불린다.

사람 많은 중국 역사 중에서도 글씨 잘 쓰는 것으로는 고금 으뜸으로 꼽힌 사람이며, 후대에도 엄청난 존경을 받았다. 서성(書聖)이라고 불리우며, 대략 시쪽의 굴원, 이태백. 두보같은 위치라고 보면 될듯.

산둥성 린이현(臨沂縣)인 낭야(琅琊) 사람으로, 동진을 만드는데 공을 세운 왕도의 조카이고 아버지는 왕광이라는 사람이었다. 처음 글씨를 배운 계기가 특이한데, 위부인이라는 유부녀 여류 문인에게 글씨를 배웠다. 그 후에는 특별히 스승을 두지 않고 한나라나라의 비문을 보고 스스로 배우면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나중에는 벼슬 길에도 나아가 비서랑(秘書郞)으로부터 출발하여 유량의 장사(長史)가 되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의 내사에 이르렀다. 세상을 살펴보는 눈도 있어서 북벌을 요청하기도 했고 재상 사안에게 민간의 정치를 논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대 남조 지식인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놈의 속세를 내가 떠나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회계 땅으로 가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잡고 사안 ·손작(孫綽) ·이충(李充) ·허순(許詢) ·지둔(支遁) 등과 청담을 나누고, 도가 쪽에도 관심이 있었는지 도사 허매(許邁)를 따라 채약에 몰두하는등 유유자적하면서도 나름대로 분주하게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왕희지의 업적은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서예를 단순히 글씨를 쓰는것이 아니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오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왕희지는 예서(隸書)를 잘 썼는데 아직 성숙되지 못했던 해서 ·행서 ·초서를 예술로 만들었다. 왕희지의 남은 필적들도 다 이 세가지로 되어있다. 그의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미켈란젤로가 조각의 완성이자 끝판왕 격이라면, 왕희지는 서예(중국에선 서법, 일본에서는 서도로서 불린다.)의 완성이자 끝이라고 평가 받는다. '왕희지 체'의 특징은 유려하며, 기교적 측면에서 독보적이다. 현대에서도, 서예가가 자신의 서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왕희지의 서체를 기반으로 만들어가기 시작 할 정도로, 표준적인 모델이다. 물론, 예술의 범위에서 '왕희지 체'보다 '아무개 체'가 더 예술적, 심미적으로 좋다고 할 수도 있으나, '왕희지 체'는 이미 왈가왈부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격이 정립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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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론(樂毅論)》 활자로 찍어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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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경(黃庭經)》

행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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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정서(蘭亭序)》[1]

초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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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칠첩(十七帖)》

등등이 대표작이다. 그외 글씨로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등의 필적이 남아오지만 그의 온전한 필적과는 좀 다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왕희지 글씨가 많이 사라지게 된 이유 중에 하나는, 당태종 이세민이 워낙 왕희지를 좋아해서 죽을때 천하에 있는 왕희지의 글씨를 수집해서 자기 무덤에 끌고 가버려서 라고 한다.

왕희지에 관련된 당태종의 설화에는 재미있는것이 있는데, 바로 난정서에 관련된 것이다. 난정서는 동진 묵제의 영화9년(353) 3월 3일 회계산음(저장성 소흥) 난정에서 당시의 명사 41명이 모여 계추를 하고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유흥을 하고 시흥에 젖었을때, 왕희지가 쓴 시집의 서이다.

이 난정서는 왕희지의 7대손 지영에게 전해졌다고 하는데 지영은 승려라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을 제자인 변재에게 물려주었다. 당태종은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이걸 가지려고 했지만 당시 승려이던 변재는 "난 그런거 없음." 하고 오리발을 내미니 왕 체면에 글씨 하나 얻자고 때려 패고 뒤져올수도 없어서 전전긍긍했다.

그러자 당태종은 신하들에게 이를 의논했는데 그 중 방현령이 감찰어사 소익(蕭翼)[2]을 추천했다. 이에 당태종은 소익을 보내 이걸 가져오게 하였다. 소익은 우선 길손으로 위장해서 "지나가는 길인데, 스님이 바둑을 그리 잘 두신다면서요?" 하고 친해져서 계속 바둑을 붙었다. 변재도 바둑을 좋아해서 둘은 맨날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소익이 지나가는 말로 왕희지 이야기를 꺼내자 변재는 난정서를 꺼내서 보여주었고, 소익은 "이야, 쩐다." 하고 넘어갔다. 그래서 매일 바둑을 두고, 난정서는 꺼내서 보다가 옆에 두고 하는것을 반복했다.

소익은 어느날 종이를 가져와서 바닥에 둔 난정서와 바꿔치기를 하였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곳을 달아났다. 변재는 나중에야 속은걸 알았지만 당나라 황제에게 따질수도 없고…… 변재는 비록 황제를 속였지만 80을 넘긴 고령이고 난정서의 값으로 비단과 쌀을 받았다. 변재는 이것을 3층 보탑 건립 비용으로 사용하고 스승의 유품을 잃은 것에 애통해 하다가 얼마 안되 숨을 거뒀다. 이것은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이야기다. 난정서는 그 후 당태종이 소장하고 있다가 자신의 무덤인 소릉에 배장해서 아예 무덤 속까지 가져갔다. 그러나 훗날 당나라가 멸망한 뒤 군벌 온도에 의해 소릉이 도굴되어 원본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으나 원체 유명했기 때문에 필사본이 여러 남아 전해지고 있다.

아무튼 이 왕희지는 삼국시대 종요와 인연이 있는데, 종요 역시 글씨로 중국 역사에 남은 인물이다. 왕희지가 글씨를 배운 위부인이 종요의 서풍을 이어 받았고 왕희지 본인도 종요를 존경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왕희지와 종요, 그리고 후한의 서예가인 장지를 고금의 가장 뛰어난 서예가로 꼽기도 한다. 아무튼 이렇게 살아있을때나, 죽었을때나 대단한 평가를 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왕희지 글씨의 진품을 얻으려고 핰핰 거리다 보니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남았다.

하루는 왕희지가 평복 차림으로 회계 거리를 다니다가, 부채 가게를 지나게 되었다. 부채 가게는 노파가 혼자 앉아있었는데, 그러자 왕희지는 아무 말도 안하고 부채에 쓱쓱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노파는 왠 이상한 놈이 낙서를 쓴다고 생각하고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부채 값이 얼마입니까."

"하나에 일문이외다."

"그럼 이 부채를 문 밖에 거시구려. 하나에 백문을 받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왕희지가 나가자 노파는 황당해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귀신같이 다른 사람이 나타나더니 백문을 주고 부채를 사갔다. 뒤에야 그 정체를 깨달은 노파가 다음날 왕희지에게 하나만 더 써주라고 했지만 왕희지는 그냥 지나갔다고 한다.

거위 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고기가 아니라, 관상용 내지 애완용으로. 어느 도사가 좋은 오리를 가지고 있어 팔라고 했는데, 도사는 돈 대신 도덕경을 한 부 필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왕희지는 기꺼이 도덕경 한 부를 써주고 오리를 데려왔다고 한다. 도사 땡잡았네 다른 야사로 어떤 집에서 키우는 거위가 유명하다길래 구경하기 위해 왕희지가 직접 찾아갔더니만, 정작 그 집 사람들이 명필께서 오셨는데 대접할게 변변치 않아서 그만 그 거위를 잡아다(...) 음식으로 대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왕희지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왕현지, 왕응지, 왕환지, 왕숙지, 왕휘지, 왕헌지 등도 모두 당시에 이름을 날렸는데, 일곱 번째 아들 왕헌지(王獻之)도 뛰어난 서예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 둘을 일컫어 ‘이왕(二王)’ 또는 ‘희헌(羲獻)' 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2010년 11월 10일, 사상 처음으로 경매에 나온 왕희지의 《평안첩(平安帖)》이 3억 800만 위안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이건 한국 돈으로 따지면 523억. 거기다 이건 왕희지 원본도 아니고 복제품인데…… 관련기사관련기사2

아래는 난정서와 해석이다.


永和九年, 歲在癸丑, 暮春之初, 會於會稽山陰之蘭亭, 修事也. 群賢畢至, 少長咸集. 此地有崇山俊嶺, 茂林修竹; 又有淸流激湍, 映帶左右. 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 雖無絲竹管弦之盛, 一觴一詠, 亦足以暢幽情.

영화구년, 세재계축, 모춘지초, 회어회계산음지난정, 수계사야. 군현필지, 소장함집. 차지유숭산준령, 무림수죽; 우유청류격단, 영대좌우. 인이위류상곡수, 열좌기차; 수무사죽관현지성, 일상일영, 역족이창서유정


영화 9년[3] 계축년 3월초 회계군 산음현의 난정에 모여 "수계"행사를 열었다. 많은 선비들이 모두 이르고 젊은이와 어른들이 다 모였다. 이곳은 높은 산과 고개가 있고 깊은 숲과 울창한 대나무 그리고 맑은 물이 흐르는 여울이 좌우로 띠를 이루었다. 흐르는 물을 끌어 잔을 띄우는 물굽이를 만들고 순서대로 자리를 잡으니 비록 성대한 풍악은 없어도 술 한 잔에 시 한 수씩 읊으며 또한 그윽한 정회를 펼칠 만 하였다.

是日也,天朗氣淸, 惠風和暢; 仰觀宇宙之大, 俯察品類之盛; 所以游目騁懷, 足以極視之娛, 信可樂也.

시일야, 천랑기청, 혜풍화창; 앙관우주지대, 부찰품류지성; 소이유목빙회, 족이극시지오, 신가락야.


이 날은 맑은 날씨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머리를 들어 세상의 넓음을 우러르고 고개를 숙여 사물의 흥성함을 살피니, 경치를 둘러보며 정회를 펼침은 족히 보고 듣는 즐거움을 다하기에 참으로 기쁘기 한이 없었다.

夫人之相與, 俯仰一世, 或取諸懷抱, 悟言一室之內; 或因寄所託, 放浪形骸之外. 雖趣舍萬殊, 靜躁不同; 當其欣於所遇, 暫得於己, 快然自足, 不知老之將至. 及其所之旣倦, 情隨事遷, 感慨係之矣. 向之所欣, 仰之間, 以爲陳迹, 猶不能不以之興懷; 修短隨化, 終期於盡. 古人云: "死生亦大矣. " 豈不痛哉!

부인지상여, 부앙일세, 혹취제회포, 오언일실지내; 혹인기소탁, 방랑형해지외. 수취사만수, 정조부동; 당기흔어소우, 잠득어기, 쾌연자족, 부지노지장지. 급기소지기권, 정수사천, 감개계지의. 향지소흔, 면앙지간, 이위진적, 유불능불이지흥회; 황수단수화, 종기어진. 고인운: "사생역대의. " 개불통재!


무릇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서 한 평생을 살아가되, 어떤 사람은 벗을 마주하여 서로 회포를 나누고, 어떤 사람은 정회를 대자연에 맡기며 유람을 한다. 비록 나아감과 머무름이 서로 다르고, 고요함과 시끄러움도 같지 않건만, 자신의 처지를 만족하며 잠시나마 득의 하면 기쁘고 흡족하여 장차 늙어 죽으리라는 것도 모르는 법이다. (그러나) 흥에 겨우면 다시 권태롭고, 감정이란 세상사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감흥이란 단지 그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예전의 기쁨도 잠깐사이에 곧 시들해지니 더더욱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사람 목숨의 길고 짧음이 비록 하늘에 달려있다 해도 결국에는 죽어야 할뿐임에랴. 옛사람이 이르기를 "삶과 죽음은 역시 중대한 일이다" 라고 했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은가.

每覽昔人興感之由, 若合一契; 未嘗不臨文嗟悼, 不能諭之於懷. 固知一死生爲虛誕, 齊彭敵爲妄作. 後之視今, 亦由今之視昔, 悲夫! 故列時人, 錄其所述, 雖世殊事異, 所以興懷, 其致一也. 後之覽者, 亦將有感於斯文.

매람석인흥감지유, 약합일계; 미상불림문차도, 불능유지어회. 고지일사생위허탄, 제팽상위망작. 후지시금, 역유금지시석, 비부! 고열서시인, 록기소술, 수세수사이, 소이흥회, 기치일야. 후지람자, 역장유감어사문.


매번 옛사람들이 감흥을 일으켰던 까닭을 살펴보면 마치 계약문서가 들어맞듯 일치하여, 그들의 문장을 보면 탄식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가슴에 와 닿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즉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말이 얼마나 헛된 것이며 장수와 요절이 똑같다는 말이 거짓임을 알겠다. 후세 사람들이 오늘의 우리를 보는 것 또한 오늘의 우리가 옛사람을 보는 듯하리라. 슬프도다. 오늘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그 술회를 시로 적었으니 비록 후세에는 세상이 달라져도 정회가 일어나는 까닭은 한가지인즉 뒤엣 사람이 이 글을 보면 또한 느끼는 바가 있으리라.|}}

2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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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김경아. 1971년 9월 27일생. 주요 배역으로 아현동 마님의 백시향이 있다.
  1. 도장이 많이 찍힌것은 이 글씨를 본 사람들이 기념으로 찍은 것이다. 참고로 원본은 사라젔으며 이것은 필사본이다.
  2. 남북조시대 나라 원제 소역의 증손자다.
  3. 서기 353년을 가리킨다. 중국 동진(東晉) 5대 황제인 효종(孝宗) 목제(穆帝) 사마담이 사용한 연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