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中國史 | ||||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 기원전 206 ~ 907년 | |||
907년 ~ 1644년 | 1616년 ~ 현재 |
중국의 역사 기원전 206 ~ 907년 | ||||
기원전 206 ~ 220 | 한(漢)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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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 ~ 619 | 수(隋) | |||
618 ~ 907 | 당(唐) 무주(武周) |
중국의 역사 | ||||
위진남북조시대/육조시대 | ||||
서진 | → | 오호십육국시대 | → | 남북조시대 |
동진 |
東晉
사마씨가 세운 왕조로 서진의 멸망 이후에 세워진 국가.
노란색이 동진. 파란색은 전진이다. |
목차
1 개요
서진이 영가의 난으로 흉노족이 세운 전조에게 한 차례 멸망당한 뒤 팔왕의 난에서 살아남은 사마씨 황족인 사마예(司馬睿)가 양쯔강 지역까지 도주한 후, 같이 도망나온 중원 호족과 현지 호족이 사마예를 옹립해 세운 왕조.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 속에서 강남을 지킨 한족 국가임과 동시에 화북과 중원에 있던 옛 서진의 피난귀족들과 예전부터 강남을 지키고 있었던 토착호족이 연합하여 세워진 국가이다. 통칭 동진. 간혹 남진(南晉)이라고도 한다.
화북에서는 전량, 서량, 북연, 염위가 한족 국가이었으므로 동진이 '유일한' 한족 국가라고는 할 수 없지만, 동진 외의 나라는 다른 나라에 칭신할 정도로 영향력이 극히 한정된 약소국인데다, 국왕 일족만 한족이지 나머지는 타 민족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는 등 한족 국가로 보기에는 문제가 많다.
2 역사
2.1 건국
사마씨가 삼국시대를 통일하고 얼마 안 있어 서진이 붕괴한 이후 동진은 조상이 멸망시킨 옛 오(吳)나라 땅으로 옮겨서 건업(建業)을 건강(建康)으로 고쳐 도읍으로 삼았고, 오와 더불어 이후의 송(宋), 제(濟), 양(梁), 진(陳) 4개국이 존속한 시기를 육조시대(六朝)라고도 부른다.
동진을 건국한 원제 사마예는 팔왕의 난 당시 혼란을 피해 강남으로 내려왔다. 영가의 난이 일어나고 서진 마지막 황제 사마업이 죽자 사마예는 황제에 오른다.
2.2 초기의 북벌과 반란
당시 북쪽은 한나라가 분열하여 후조의 석륵과 전조의 유요가 투쟁하는 구도로 전환되고 있었는데, 동진의 장군 조적이 이때를 틈타 사마예에게 상소를 올려 북벌을 실시했다. 조적은 예주 일대의 군벌들을 정리하면서 석륵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때 동진은 예주와 하남 일대를 수복한다. 그러나 동진 조정은 북벌에 관심이 없었고 이에 조적은 홧병이 나서 사망하고 만다. 조적이 죽자 예주 일대는 다시 석륵의 손에 들어간다.
당시 동진의 군사령관 왕돈은 사마예를 보좌하던 유외와 사이가 나빴는데, 견제가 심해지자 정변을 일으켰다. 왕돈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간단히 토벌군을 격파한다. 왕돈은 실권을 장악하고 횡포를 부리자 이에 사마예는 분사한다.
사마예의 아들 명제 사마소는 322년에 황제에 즉위한 뒤, 치밀하게 왕돈을 토벌할 준비를 마쳤다. 사마소에게 운이 좋게도 왕돈은 이때 병에 결렸다. 왕돈은 형인 왕함에게 군권을 주었으나 왕함은 왕돈의 반도 못미치는 인물이었다. 형만한 아우가 없다고? 사마소는 간단히 왕함을 격파하고 난을 진압한다. 형이 전투에서 패하자 왕돈은 화가 나서 죽어버린다.
사마소는 왕돈의 난으로 일어난 피해를 빠르게 복구했으나 즉위 3년만에 사망하고 만다. 이후 사마소의 아들 사마연이 어려 사마연의 외숙부 유량이 실권을 장악하는데 유량은 역양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소준을 경계했는데 소준에게 지나치게 압력을 가했다. 달리 방법이 없던 소준은 결국 정변을 일으키고 만다. 328년 소준은 유량을 가볍게 제압하고 건강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유량은 도주하고 온교, 도간과 손을 잡고 소준을 역관광시킨다.
340년 도간이 죽자 형주의 군대까지 장악한 유량은 북벌에 나섰는데, 후조에게 대패하고 분사한다. 성제 사마연도 이때 사망한다. 강제 사마악이 즉위하나 곧 죽고 2살에 불과한 목제 사마담이 즉위한다.
2.3 실세 환온과 북벌 원정
유량의 동생 유익은 환온을 형주에 보내 서부군을 장악하게 했다. 환온은 이세가 다스리던 성한이 내전으로 연약해지자 좋은 기회라 여겨 성한 정벌에 나섰다. 347년 환온은 성한 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며 성도까지 함락시키고 이세의 항복을 받아냈다. 40년 만에 동진은 익주 일대를 수복한 것이다.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동진 조정은 이후 수차례 북벌을 실시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북벌을 실패한 은호는 죽마고우였던 환온에게 실각당하고 만다. 권력을 잡은 환온은 저족이 세운 나라인 전진을 공격했다. 동진 군은 초기에 강한 전투력을 보여줘 장안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전진의 반격을 받고 물러났다.
356년 환온은 사주 일대로 2차 북벌에 나선다. 환온은 은호를 패배시킨 강족의 요양을 격파하고 주성의 항복을 받아내어 낙양을 점령했다. 역시 40년 만의 수복이었다. 이때 환온은 대사마에 임명된다.
361년 사마담이 죽고 애제 사마비가 즉위한다. 3년 뒤에 전연의 모용각은 동진이 수복한 낙양을 재탈환하는데 성공한다. 5년이 지나고 환온은 다시 북벌을 준비한다. 사마비도 곧 죽고 그의 동생 폐제 사마혁이 즉위한다.
환온은 5만의 병력을 이끌고 전연을 공격했다. 환온은 수로를 이용해 군량을 운반하였다. 동진 군은 모용장이 이끄는 전연 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며 방두까지 진격했다. 전연의 황제 모용위는 이때 수도를 버리고 달아날 생각도 했다. 이에 모용수가 출정하여 동진 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진에서 구원군이 등판하자 환온은 결국 퇴각하였다. 이때 모용수가 동진 군을 추격하여 격파했다.
이후 환온은 석문을 점거하지 못한 원진에게 패전 책임을 묻는다. 원진은 노하여 수춘을 점거하고 투항했다. 환온은 전연과 전진의 지원군을 격파하고 원진의 세력을 제거한다. 환온은 사마혁을 폐위시키고 사마예의 아들 사마욱을 황제에 즉위시킨다. 환온의 권세는 이미 황제를 넘어섰고 자신이 황제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사안과 왕탄지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특히 사안은 초연한 태도로 그를 제거하려던 환온의 의지를 꺾었고 사마욱이 죽고 효무제 사마요가 즉위한다. 환온은 마지막 압박을 가했으나 사안의 저지로 실패하고 곧 병사한다.
2.4 비수대전
환온 사후에 화북을 통일한 전진의 부견은 천하통일을 노리고 동진을 침공한다. 우선 부비를 보내 형주를 공격했다. 부비는 양양을 점령하며 주서를 포로로 잡았다. 동진은 사현을 보내 우이에서 전진군을 격파했다.이에 동진은 명재상 사안을 사령관으로 삼고 전진에 대비했다.
383년 부견이 동진을 총공격하고자 했으나 신하들은 한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반대했다. 그러나 부견은 그 한사람의 말애 기운을 얻어 100만의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사안은 사현, 사석, 유뢰지 등이 지휘하는 5만명의 군대를 보내 전진 군을 크게 무찌른다. 자세한 전투 내용은 항목참조
사현은 전진이 패한 틈을 타 전진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수복한다. 명재상 사안은 훌륭하게 나라를 통치하다가 사마요의 동생 사마도자의 견제를 받고 정계에서 물러난다. 사마도자가 집권하자 동진은 급속도로 멸망테크를 탄다.
2.5 말기의 대혼란
권력을 잡은 사마도자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고 조정에는 왕국보 같은 간신배들이 들끓었다. 사마도자는 온갖 사치와 전횡을 부리며 간신배들의 아첨을 받았다. 효무제 사마요는 사마도자를 의식해 북부군을 왕공, 서부군을 은중감에게 맡긴다. 동생 죽이려고 집에 폭탄 설치하는 형
그러나 사마요는 부인 장씨에 의해 이불에 교살되고 이불 밖 아니, 이불 안이 더 위험하다! 안제 사마덕종이 재위에 오른다. 권력자 사마도자는 호족 타도를 계획했지만 397년, 환온의 아들 환현(桓玄)이 왕공, 은중감을 부추겨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사마도자가 왕공을 달래기 위해 왕국보를 주살하자 반군도 일단 철수했다. 다시 거병한 왕공은 섭정편에 붙은 부하 유뢰지에 의해 죽고 은중감과 양전기와 환현은 서로 싸웠다.
399년 오두미도 무리를 이끌던 손은이 반기를 들자 동진은 완전히 혼란에 빠진다.[1] 손은은 사안의 아들 사염을 죽이며 기세를 올렸지만 유유(劉裕)의 활약으로 크게 격파된다. 당시 일개 군인에 불과했던 유유는 뛰어난 전술로 손은 군을 무찔러 명망을 쌓아간다.
환현은 사마원현과의 눈치싸움에서 결국 선수를 쳤고 북부군의 유뢰지는 토사구팽을 염려하여 환현을 지지했다. 그덕에 환현은 건강에 손쉬게 입성한다. 이리저리 간보던 유뢰지는 환현이 빈 틈을 보이면 훗날을 도모할 생각이었으나 유뢰지의 부하들이 간에 붙고 쓸개 붙는 행태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비겁한 유뢰지의 모습에 정나미가 다 떨어졌고, 결국 환현에게 실각당하고 만다. 이 와중에 유뢰지의 부하였던 유유가 유뢰지를 떠났고 결국 환현이 사마덕문에게 선양을 받아 초(楚)를 세운다.
404년 전광석화의 속도를 보이며 권력을 잡은 유유는 환현 등이 저질렀던 실수를 범하지 않고 환온과는 다르게 과감히 행동했다. 환현 사후 끈질기게 저항하던 동진의 환씨 세력을 제거하고, 후진에게 형북의 12군을 외교로 뜯어낸다.
409년 남연이 동진에서 노략질을 벌이자 유유는 남연을 공격한다. 남연의 모용초는 유유에게 완전히 농락당하고 대패했다. 이로써 동진은 청주 일대를 거의 100년 만에 얻어냈다. 곧이어 410년에 손은의 잔당 노순이 하무기, 유의를 격파하고 기세를 올리자 유유는 재빠르게 건강으로 남하하여 노순을 쳐부순다. 411년 유유를 평소에 시기하던 형주의 유의는 유유를 반란을 일으키려다 역관광당한다. 다른 군벌 제갈장민도 이때제거된다. 이후 유유는 주령석을 보내 후촉을 점령한다. 415년 형주자사에 오른 사마휴지도 유유에게 반기를 들다 토벌당한다
유유는 이어 후진을 표적으로 제2차 북벌을 단행했다. 왕진악과 단도제는 낙양 일대을 장악하고 심전자는 무관에 입성하고 유유는 황하에서 각월진으로 북위를 격파했다. 후진 군을 격파한 왕진악, 심전자 등이 유유에 합류하여 장안을 함락시켰다. 결국 동진은 두 수도와 청주를 모두 장악한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새로 얻은 영토를 관리하기에는 유유의 병력은 턱없이 부족했고 언제든지 타국에게 잃을 수도 있었다. 사실 그보다도 자기 대신 내정을 맡긴 유목지가 사망하자 조정에서 영향력이 떨어져 실권을 잃을 것을 두려워했던 유유는 결국 동진으로 회군하여 단숨에 찬탈 직전까지 직행했다.
건강으로 복귀한 유유는 사마덕종을 죽이고 공제 사마덕문을 즉위시킨다. 결국 420년 마지막 황제였던 공제에게 선양받은 다음 공제를 죽이고 사마씨를 멸문했다. 그래서 구사일생으로 북조로 도망간 소수를 제외한 사마씨는 확실하게 처단되었다. 유유의 며느리라서 살아남은 공제의 딸 해염공주는 유유가 송을 세운 다음 무제의 장남이자 소제가 되는 유의부의 황후가 되었지만, 폭군이었던 그가 폐위되자 그도 폐위되었고 자손 없이 살며 천수를 누렸다. 이 때부터 선양받은 임금을 죽이는 살벌한 전통이 생겨났고 이것은 나중에 송나라의 조광윤 때 가서야 사라진다.
3 동진의 농업 발달 및 인구
강남 지방이란 게 인구도 별로 없고, 땅이 습하고 더워서 열대성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 겉보기에 비해 별로 좋지도 않은 땅이었다. 그러나 화북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뛰어난 농업 기술을 강남에 전파하고 활용하면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여 끝내 남송(南宋)시대 때 절정에 이른다. 이 때부터 강남의 경제력이 제대로 커지기 시작했다.
당장 땅에 물기를 어느 정도 빼니 벼농사를 짓기 최적화 된 땅에 거기다가 더워서 2모작, 3모작, 그러니까 1년에 벼농사를 2번, 3번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점이 발견되어 이는 강남의 경제력을 크게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다만 남북조 내내 남조는 열세에 있었는데, 당시에는 개간이 덜 됐으며, 벼의 품종이나 농법 등의 벼농사 기술도 덜 발달했기 때문. 훗날 수의 통일 직전 진나라의 인구는 8백만을 겨우 찍은 반면, 북주 혹은 수의 인구는 4천만을 넘겼다.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행정구역을 보면 장강 이북이 절반, 이남이 절반이었다가 송대에 들어 장강 이북에 비해 장강 이남의 행정구역 수가 두 배가 되었다. 실제로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강남과 강북의 경제력은 비슷했으나 안사의 난, 황소의 난, 오대십국시대를 거치면서 강북(정확히는 장안을 중심으로 한 관중 평야)은 전란으로 황폐화 되고, 장기간의 농사로 환경파괴가 일어났으며 벼농사의 발달로 벼농사와 생산력이 역전되기 시작한다. 결국 송대에 들어 완전히 강남이 강북을 압도하게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4 문벌의 발달과 남조 문화의 형성
전대미문의 대혼란과 군벌의 난립으로 현실정치에서 유교는 크게 쇠퇴하고 상대적으로 도교, 불교가 주목되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문화예술의 발전이 눈부셔서 늘 북쪽의 북조 국가들을 오랑캐라고 무시했지만 얘들도 막장.(...) 당최 하루도 나라가 편할 날이 없을 정도로 자기들끼리 아웅다웅 열심히 했다.
하지만 어떻게 명줄은 길어서 비수대전 등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 전쟁에서도 이겼다. 비수대전에서도 전진(前秦)의 87만 대군을 고작 몇 만으로 격파하는 등의 기적이 발생했는데, 이건 동진 출신이라서 도움을 줬던 주서 덕이 크지만 전진 국왕인 부견의 결정적인 실수가 주 원인이었다. 문제는 이를 교훈삼아서 나라를 발전시킬 생각은 안하고 전쟁에 이긴 덕분에 안심하고 더욱 더 막장짓에 탐닉했다는 것이다.
비수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광의 업적을 남긴 황제인 효무제는 기분좋게 이기고 기분도 좋겠다 후궁 장귀인 끼고 너 한잔 나 두잔 하다가 '야 너도 이제 늙었구나. 내일부터는 영계끼고 잘 거다.'라고 했다가 열받은 장귀인이 황제가 자고 있는 동안 베개로 눌러서 질식사했다.(...) 많고 많은 중국 왕조들의 황제들 중에서도 후궁에게 살해당한 황제는 동진 왕조가 처음 배출하는 영예(...)를 누렸다.
5 역사적 분석
동진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서진 정권이 매우 실망스러운 형태로 붕괴했고 이후 전중국은 마땅한 정통통일왕조 없이 혼란의 상태에 접어들었지만 그래도 동진이 과거 통일왕조의 저력을 이어받았던 것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석륵과 석호의 후조는 가장 강성할 때도 회수 일대를 지키는 옛 서진 군단의 후예라고 볼 수 있는 유민 군사 집단에게 막혀서 회수 이남으론 손을 뻗지 못했으며, 적어도 석륵 이상은 될 부견의 전진에게 한참 밀릴 때도 영토들을 그렇게 호락호락 내줬던 건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오호십육국 시대의 여러 정권도 동진의 이런 우위 정도는 인정했다. 전연이 상당히 눈치보면서 괜히 동진에게 먼저 사신 파견해가며 황제를 칭하고, 또 전진에서도 왕맹같은 대신이 '우리나라에 있는 한족은 아직 동진을 그리워하고 있고, 그 동진은 현재 위아래가 일치단결되었으니 부견의 남벌이 때이르다'고 한 이들이 괜히 있었던 게 아니다.
적어도 동진은 북방 이민족에게 망하지 않고 사직을 지켜냈으며, 일방적인 열위에만 있지 않았고 몇 차례 큰 공세를 퍼부은 적도 있었다. 남조는 양나라 이전에도 여전히 북방 오호들의 불안정한 국가들보다는 안정되어 있었는데 이는 서진의 남은 기반을 긁어모은 동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치통감만 해도 삼국 시대에 대해선 무통으로 보면서도 위나라 위주로 기재하다가, 그 뒤엔 주로 동진-유송-제-양-진으로 가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동진을 비롯한 남조 정권들의 지배층들은 국가적 역량이 쇠퇴한 것을 무작정 무기력하게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6 역대 황제
총 11대 103년이다. 앞서 말했듯이 군약신강체제라 종(宗)같은 묘호가 붙지 않은 황제는 그냥 이름만 황제인 꼭두각시내지 허수아비며며 애제(哀帝)나 간문제(簡文帝)는 그 뜻 자체가 그냥 무늬만 황제라는 이야기다. 물론 해서공(海西公)같이 공(公)자가 붙은 황제는 폐위된 황제다. 그래서 역대 황제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아래의 표에서 대수가 1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5에서 시작하는 것은 서진과 동진은 황제의 혈통이 동일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원래 서진이나 동진이나 국호는 진(晉)이며, 황족도 변동이 없으나 주변정세와 국가의 영토변화가 너무 심해서 북송과 남송처럼 구분해서 부르는 것 뿐이다. 따라서 5대 이전을 알고 싶다면 서진/역대 황제 항목을 참고하라.
특이사항이라면 죄다 수명이 짧았다는 것인데 50살이 되고도 살아있는 황제가 사마욱 하나뿐이었으며 그나마도 과반수가 30대 이내에 사망했다.
대수 | 재위기간 | 묘호 | 시호 | 성명 | 약력 | 능호 |
5대 | 317-322년 | 중종(中宗) | 원황제(元皇帝) | 사마예(睿) | 사마업의 재종숙, 사마근(覲)의 아들. 276년 출생, 322년 사망. 향년 47세. | 건평릉(建平陵) |
6대 | 322-325년 | 숙종(肅宗) | 명황제(明皇帝) | 사마소(紹) | 사마예의 아들. 299년 출생, 325년 사망. 향년 27세. | 무평릉(武平陵) |
7대 | 325-342년 | 현종(顯宗) | 성황제(成皇帝) | 사마연(衍) | 사마소의 아들. 321년 출생, 342년 사망. 향년 22세. | 흥평릉(興平陵) |
8대 | 342-344년 | 강황제(康皇帝) | 사마악(岳) | 사마연의 동생. 322년 출생, 344년 사망. 향년 23세. | 숭평릉(崇平陵) | |
9대 | 344-361년 | 효종(孝宗) | 목황제(穆皇帝) | 사마담(聃) | 사마악의 아들. 343년 출생, 361년 사망. 향년 19세. | 영평릉(永平陵) |
10대 | 361-365년 | 애황제(哀皇帝) | 사마비(丕) | 사마악의 종형, 사마연의 아들. 341년 출생, 365년 사망. 향년 25세. | 안평릉(安平陵) | |
11대 | 365-371년 | 해서공(海西公) | 사마혁(奕) | 사마비의 동생. 342년 출생, 386년 사망. 향년 45세. | - | |
12대 | 371-372년 | 태종(太宗) | 간문황제(簡文皇帝) | 사마욱(昱) | 사마혁의 숙조부, 사마예의 아들. 320년 출생, 372년 사망. 향년 53세. | 고평릉(高平陵) |
13대 | 372-396년 | 열종(烈宗) | 효무황제(孝武皇帝) | 사마요(曜) | 사마욱의 아들. 362년 출생, 396년 사망. 향년 35세. | 융평릉(隆平陵) |
14대 | 396-418년 | 안황제(安皇帝) | 사마덕종(德宗) | 사마요의 아들. 382년 출생, 418년 사망. 향년 37세. | 휴평릉(休平陵) | |
15대 | 418-420년 | 공황제(恭皇帝) | 사마덕문(德文) | 사마덕종의 동생. 386년 출생, 422년 사망. 향년 37세. | 충평릉(冲平陵) |
6.1 군약신강
동진의 황제들은 원제 사마예가 강남에 내려왔을 때부터 상당히 위치가 불안했지만, 이유가 지방 호족들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동진은 그래도 지방 호족과 북방에서 내려온 귀족이 꽤 협력해서 통치한 양상인 손오 정권과는 달리, 애초부터 북방에서 내려온 호족 군사 집단들이 지방 호족 집단들을 찍어누르는 형태였고, 역시 서진 출신의 귀족들이 거의 그대로 귀족 사회를 형성해서 압박했다. 물론 토착 귀족들은 이런 현상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고, 서진 출신 귀족들과 역시 화북에서 내려온 유민 군사 집단들은 이해 관계가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토착 귀족들에겐 이런 틈을 파고들 역량이 없고, 그럴 사정이 아니어서 내내 눌려 지내야 했다.
한편 서진의 귀족 집단은 유민 군사 집단을 천하다 여겨 무시했지만 그 군사적 실력을 두려워했으며, 후자는 전자를 전통과 학식 외엔 아무 것도 아닌 집단이라고 내심 비웃었지만 자기네에게 통솔에 있어 필수인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건 바로 그들이었기에, 전자에게 함부로 정면도전하진 못했다.
사마예의 경우 황제로 즉위할 때 즉위식에서 승상 왕도에게 같이 용상에 올라달라는 말을 할 정도로 황권이 취약했고, "'임금(王)과 말(馬)[2]이 천하를 공유한다."'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긴 했지만, 감히 지방 호족 따위에게 무시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스스로 주도적으로 나라를 세운 게 아니라, 위에서 언급되는 화북 출신 귀족 집단, 화북 정예 군단 출신이 상당수 섞인 유민 군사 집단, 토착 호족 집단[3] 등에게, 일종의 편한 최대공약수로서 옹립된 한계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이런걸 감안해도, 사마예가 심하게 현실안주적이었던 데다 군주로서의 역량이 뛰어나지 않아, 형주의 군권을 잡고 있던 왕도의 동생 왕돈이 반란을 일으켜서 사마예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벌어진다.
이어서 즉위한 명제 사마소가 왕돈의 반란을 진압 하고, 그동안에 이런 사회 갈등도 북방으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역설적으로 일시 봉합된다. 명제 자체는 꽤 괜찮은 군주여서 어떻게든 뭔가 일을 많이 해보려 했지만, 27세로 요절하고 만다. 이런 요절은 대대로 이어져서, 아들 성제 사마연은 5세로 즉위해서 22세로 사망. 사마연의 동생 강제 사마악은 역시 23세로 사망. 사마악의 아들 목제 사마담은 2세로 즉위해서 19세로 사망. 사마담의 사촌 애제 사마비는 21세로 즉위해서 25세로 사망(...)예전에도 본 듯하다[4]
이렇게 되는데, 때문에 왕조가 상당히 불안정해져서 중앙이 허약해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게다가 처음에 북쪽에서 내려왔을 때는 강남의 풍토병에 걸려서 그렇게 일찍 죽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미 토착세력이 된 몇십년 뒤에도 나름대로 건강관리를 가장 많이 받는 황제와 황족이 이렇게 일찍 죽는 일이 많다는 것은 역사서에는 병사했다고 써놓고 실제로는 암살당했을 확률이 높다고 볼 수도 있다. 심각한 지체장애가 있어서 누가 보더라도 위협적이지 않은 꼭두각시인 안제 사마덕종은 20년 이상 황제자리를 유지했다. [5] 간문제 사마욱처럼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오래 살던 인물이 막상 황제자리에 오르니 몇 년 살지도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더구나 폐제 사마혁처럼 황제 자리에서 폐위된 사람은 또 오래 살았다.
이렇게 왕실이 부실해서 통제를 제대로 못하는 사이, 귀족들인 왕씨(王氏)·환씨(桓氏)·사씨(謝氏) 등이 각 지방의 하층민 군사 집단 및 호족 집단과 서로 각축을 벌이고 합종연횡하는 상황이 진행된다. 그러나 이를 동진만의 특성으로 보는 건 대단히 잘못된 시각. 하층민 군사 집단 및 호족 집단의 문제는 북조들도 겪는 문제였고, 5호16국은 아예 나라 자체가 갈리고 찢겨지며 황제를 칭하는 자들이 사방에서 속출했다.
6.2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의 대두
국가적 대사업인 북쪽 영토 수복을, 황제가 모은 관군은 실패하는데 유력자나 장군이었던 조적, 환온, 유유가 사비로 모은 군대는 일격에 성공하는 상황이 3번이나 일어난다. 다만, 황제가 모은 관군은 실패하는데 각 장군이 사비로 모은 군대가 성공하는 상황은 놀라워도, 화북을 차지한 오호들에게 동진의 체제를 앞서는 어떤 뚜렷한 장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동진이 환온이나 유유를 통해 옛 수도이자 중심지인 낙양과 장안을 탈환한 것 자체는 그렇게 이상한 일까진 못된다. 문제는 조정이 점차 유명무실해지고, 귀족 집단은 실무 능력을 잃고 점점 형해화되어 가는데 조정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각 지방 군단들은 저마다 수장을 내세워서 부귀영달을 누리는 국가 해체 현상의 단초가 이때부터 보인다는 것.
그래서였는지 동진은 고토 수복이란 괜찮은 명분이 있었음에도, 촉한은 고사하고 손오만도 못한 현실에 안주하는 답답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환온, 유유 등이 등장하는 시점이 되면, 영토는 계속 넓어지고 국력도 꽤나 강해진다. 중앙 정부가 그로기 상태였다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황실 기준이었지, 유력한 장군들의 통제가 통하는 한은 그럭저럭 기능을 하고 있었다. 유유가 낙양과 장안 모두 회복했을 당시, 고위 귀족 가운데 아무도 거기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어서 약간의 수비병만 남긴 채 그냥 버리고 돌아왔다지만, 그건 로마와 라벤나, 카르타고를 모두 회복했던 동로마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동로마 제국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원로원급 귀족을 일부러 차출해서 보내는 건 생각지도 하지 않았다. 다른 점은 동로마 제국의 경우는 오히려 멸망시킨 동고트 왕국의 정예병들을 모두 로마군으로 통합해서 어느 정도 방어전에 성공했고, 유스티니아누스가 지휘 계통의 일원화란 대원칙을 저버리지 않았던 반면 동진의 유유는 여러 사정상 그럴 수 없었던 차이 밖엔 없다.
6.3 백적 문제
북방에서 내려온 귀족이 아닌 이상 현지 호족이더라도 한미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차별을 받는 등 그리 좋지 못한 대접을 받았다. 양상은 다음과 같다. 아예 호적에서부터 하북 출신 귀족들은 하얀색 호적인 백적을, 강남 출신 호족들은 노란색 호적인 황적을 써서 차별화시켰고, 또한 강남 지역과 피난 온 강북 사람들은 서로 다른 말을 써, 강북 사람들이 강남 사람들을 "에휴... 저 촌것들... 니네는 세련된 표준어도 몰라?"라고 무시하기 일쑤였다.[6] 게다가 같은 하북 출신이라도 동진이 갓 건국할 당시에 사마예와 같이 강남으로 내려온 귀족들은 권력의 중심이 되었지만 동진 건국 이후에 내려온 귀족들은... 그런 거 없었다(...) 결국 강남 토착 호족들이었던 소준, 환현 등이 몇 차례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환온과 유유 같은 실력자들이 토단령을 내려 백적 철폐를 단행하여 국가 재정 확충 및 군사력 확보에서 대단히 큰 이득을 발견하게 되고, 이와 같은 문제는 송제양진의 왕조를 거치면서 서서히 해결된다. 조위 말부터 서진까지 이어져 내려온 근본적인 문제인 문벌귀족이 좌지우지하는 정치나 청담사상, 구품중정제같은 건 그 자체로 악이 아니다. 다만 운용이 잘못되었을 뿐. 지배층의 도덕적 해이와 무기력함 같은 것도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크다. 환온과 유유시대에 한문 출신들이 실권을 잡긴 했으나 이 시절에는 아직 문벌귀족 세력 역시 강했던 건, 적어도 그때까진 실력 있는 관료가 문벌 귀족층에서만 배출되었던 아주 중요한 배경이 있었다. 동진의 뒤를 이은 유송의 한문 출신 황제들은 이들을 보면서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으나, 문벌 귀족층 또한 점점 유리되어가는 실권을 보고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7 자치통감 기준으로 동진은 과연 정통인가?
남조시대를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 가운데에선 저명한 역사서인 자치통감의 권위를 빌어서 삼국 시대에 대해선 무통으로 보면서도 위나라 위주로 기재하다가, 진부터 유송, 남제, 양, 진까지의 연호를 사용했으니 이들을 정통으로 본 것이고 따라서 동진이 정통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정통론은 시대와 역사가들의 입장에 따라 달라져 왔다. 당장 북송초기 정통론에 많은 영향을 미친 구양수의 책부원구에선 주, 진, 한, 위, 서진, 북위, 북주, 북제, 수, 당을 정통으로 보았다. 즉 서진이 멸망하고 이후 생긴 동진은 정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구양수는 남조보다 오히려 북조왕조들을 정통으로 보았다. 이것은 북송초기에 '동진에 중국의 아름다운 풍속이 남았으니까 정통 아니겠느냐?'는 인식에 대한 정면 반박의 성격으로 나온것이다. 거기다가 구양수는 '정통은 단절될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는데 구양수는 심지어 정당성의 원류를 엄격하게 밝히면 한, 당, 송 외엔 정통이 없다고 까기까지 했다.
실상 사마광의 자치통감도 구양수의 논리를 어느정도 이은것으로서 자치통감이 삼국시대에 대해서만 정통이 없다고 생각하고 서진 이후부턴 서진을 이은 왕조들인 남조가 정통이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사마광이 연대를 잇기 위해서 조위, 남조, 오대를 기년에 끼워넣은거지 사마광이 본 정통왕조는 주, 진, 한, 진(서진), 수, 당 뿐이었다. 즉 사마광 입장에선 삼국시대 건 남북조시대건 간에 정통이 없는 시대로 보았고 일단 연도를 서술하려고 해당왕조들의 연호나 기년을 이용한거지 동진이 포함된 남조의 정통성 같은건 인정한적이 없다는 거다. 한 마디로 중국이 통일된 왕조시대라면 쉽게 어디가 정통이라고 말할수 있겠지만 엄연히 분열된 시기에 어느 한 왕조만이 정통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후대의 정통론)은 자신의 한쪽으로 치우친 논의이며 공정한 통론이 아니다. (중략) 어찌하여 일국만을 존중하여 정통으로 삼고, 그 나머지를 참위라 할 수 있겠는가. (중략) 위·송·제·양·진·후량·후당·후진·후한·후주의 연호로써 각각 나라들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지, 귀함과 비천함을 구별하여 정윤(정통과 비정통)을 따로 구분한 것은 아니다. -《자치통감》권69 위기일 황초이년 -
결국 자치통감에 따르면 동진이 특별히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보기 어렵다, 사마광의 기준에 따르면 서진이 멸망함으로서 서진의 정통성은 끝났고 중국 대륙은 또 다시 여러 나라가 난립함으로서 어느 나라를 정통으로 삼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걸 가지고 동진과 이후 남조왕조들을 사마광이 정통으로 인정했다는 것은 사마광의 진의를 곡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8 기타
이 시대부터 습착치의 한진춘추 등 촉한정통론을 다루는 서적들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민중들 사이에서 삼국시대, 특히 촉한에 대한 동정적인 민담이나 설화등이 퍼지기 시작했고 그 반대편에선 조조, 사마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이미 세설신어나 북조의 석륵의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삼국시대 이후 보편화되기 시작하여 북송 무렵에는 상당히 대중화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바탕하에서 이후 촉한정통론은 주자가 성리학을 완성한 남송 시절에 확실히 정립되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 결국 동진에 형주의 은중감, 양전기, 환현, 경구의 유뢰지, 회계의 손은, 예주자사 유해, 초왕 사마상지, 강주자사 왕유 등 군벌이 할거한 난세가 찾아왔다. 왕공을 중심으로한 반란을 일으킨 군벌은 은중감, 양전기, 환현, 유해가 있었고 토벌을 맡은 군벌은 사마상지, 왕유가 있었다. 손은은 독자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 ↑ 또는 왕씨와 마씨(사마씨)
- ↑ 앞서 말했듯 화북 출신 떨거지들이 대단히 맘에 들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걸핏하면 사람 목을 날려대는 오호들의 노예가 될 순 없었다.
- ↑ 이 덕에 사마담 시절부터 권력을 잡은 환온은 효무제 사마요까지 5황제를 꼭두각시를 삼는다. 환온이 실권을 잡은 때가 5대 황제 사마담 재위 시절인데 환온이 사망한 때가 9대 황제 사마요 재위 시절이다. 즉, 환온이 정권을 잡을 동안 4명의 황제나 교체된 것이다. 게다가 동진의 모든 황제 중 환갑을 넘겼던 환온보다 오래산 황제가 없었고 사마소 이후의 황제는 모두 환온보다 어렸다.
- ↑ 일부에선 유유가 사마덕종을 죽인 것을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하나 유유가 아닌 누가 되더라도 결과는 대동소이한 것이 사마덕종이란 인물이 똑같은 바보황제로 유명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지능은 되었던 사마충보다도 덜떨어지는 지능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골치아픈 존재였다. 선양이 아무리 정치적 쇼였지만 그래도 기본 지적 능력은 있는 황제가 해야 자연스러운데 사마덕종처럼 자기 몸도 간수 못하는 1급 지적 장애자가 갑자기 선양한다고 하면 부자연스럽다.
- ↑ 하지만 더 웃긴 것은 그로부터 굉장히 오랜 시간 뒤, 국공내전 이후의 대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데, 대만의 원주민인 본성인들은 그들만의 사투리를 쓰고 있었는데 국민당군이 대만을 점령한 이후, 표준어를 모른다고 멸시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