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라

要時羅/要矢羅
(? ~ 1598)

전국시대의 인물.

'요시라'라는 이름은 조선 측에서 기록한 이름으로 일본 이름은 가케하시 시치다유. 요시라를 음차로 보아 이름을 요지로, 혹은 요시로로 보기도 하며, 요시라가 처형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조선에 파견되었다가 행방불명이 된 카게하시 시치다유로 추정된다.

대마도 사람으로 평소에는 부산에 왕래하면서 장사를 해 조선의 말, 언어를 잘 알았으며, 사람됨이 흉악하면서 간사했다고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에서 간첩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에 일본군의 정보를 누설해 이중간첩 활동을 한 인물로 김응서의 진영에 자주 드나들었으며, 조선에 여러 번 정보를 전해준 것으로 인해 1596년에는 조선으로부터 첨지의 실직에 임명되었고, 관직은 절충장군에 이르렀다.

1597년에는 요시라가 김응서에게 화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가토 기요마사 때문이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가토를 매우 미워하며, 가토가 어떤 날에 반드시 바다를 건널 것이므로 조선의 군사는 수전에 능해 바다 가운데에서 기다리면 능히 쳐부숴 죽일 수 있어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했다. 김응서가 이를 알리자 조선 조정에서 믿어 이순신에게 싸우라고 재촉했지만 이순신은 적군의 계책이라 여겨 의심해서 나아가지 않았다.[1]

요시라는 조선에 가토가 벌써 상륙했다면서 어째서 요격하지 않냐고 거짓으로 후회하는 척을 했으며, 조선 조정에서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이순신을 잡아오도록 했다가 원균을 통제사로 삼으면서 칠천량 해전의 패배를 불러오는 결과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1598년에는 조선에서 요시라에 대한 처리 문제가 논의되었고 그 와중에도 요시라는 조선이나 명나라의 장수들에게 드나들기도 했으며, 조선에서 비변사가 요시라에 대한 문제를 논의해 요동으로 보냈다가 그를 접대하는 자를 시켜 주선해 처리해야 한다고 하자 선조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요시라는 명나라에게 끌려간 후에 죽임을 당했다.
  1. 다만 이 때 이순신은 가토를 잡지 못했을 뿐이지 부산포로 왜군을 요격하러 출정하기는 했다. 자세한 정황은 칠천량 해전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