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 해전

漆川梁海戰

칠천량해전도[1]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날짜
1597년 8월 28일
(선조 30년 정유년 7월 16일)
장소
경상남도 거제도, 칠천도 사이 칠천량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조선 왕국쇼쿠호 일본
지휘관원균
이억기
최호†
배설
김완
배흥립
우치적
원균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시마즈 다다유타
구키 요시타카
고니시 유키나가
병력거북선 3척
판옥선 134척~ 180척
세키부네 1000여 척[2]
피해 규모거북선 3척 모두 침몰/
판옥선 최소 50척~
최대 100척[3] 침몰/
전사자 수천으로 추정
가토 요시아키 왼팔 경상/
100여명 사상(추측)
결과
쇼쿠호 일본의 날먹 결정적 승리
기타
별 전투 없이 조선수군이 공중 분해[4],
한반도의 흑역사, 조선판 임팔 작전
명량 해전 이후 재집결 할 때까지 조선수군이 와해됨.

1 소개

무능한 지휘관이 최정예를 어떻게 말아먹는지 보여주는 전투
독자적인 행동을 막는 지휘체계가 굉장히 안 좋은 쪽으로 적용된 예시

이는 현대 시점으로 말하면 전체 해군의 절반, 아니 전체 병력 중 90%가 무능한 장군에 의해서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 전멸한 것과도 같다![5]

임진왜란의 해전. 조선수군이 캐발린 굴욕의 전투로 한국 역사상으로도 비슷한 예시조차 없는 황당한 패배. . 흔히 인터넷 상에선 용인전투, 쌍령전투, 현리전투와 더불어 한국사 4대 참패로 인식되나, 나머지 세 전투는 아군의 규모만 컸을 뿐 오합지졸에 불과했으며, 규모만 큰 오합지졸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적군에게 전술/전략적으로 와해되거나 모랄빵이나 무너지는 상황은 역사적으로 꽤나 흔한 일이다.

그러나 칠천량 해전은 최대 규모의 정예군이 전투를 치르지도 못하고 전멸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전쟁에 끼친 영향도 엄청났다. 원균이 칠천량에서 와해시킨 수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재건되지 못했고, 하마터면 호남이 뚫리고[6] 적이 서해안을 통해 '해상으로 보급하는' 사태를 낳을 뻔했다.[7] 당시의 조선 수군이라면 공격하라고 명령만 해도 이길 수 있는 전력차에서 원균은 아군이 싸우지도 못하고 학살 당하도록 모든 전략을 틀어버린 것이다.

원균이 최정예 병력을 어떻게 탕진했는지를 요약하면, 휴전기간에 일본군에게 사기쳐서 욕을 먹고, 비무장 수송선을 추격하다가 해류에 병력이 떠내려가고, 병력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면서 개죽음 시키고, 150여척의 함대가 60여척의 적선에게 얻어맞다가, 뜬금없이 병력을 막다른 지형에다가 상륙시켜서 전멸당했고 절반만 살아남아 도주했다. 이건 조선과 일본 양쪽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는 기록이다.(...).

2 이순신의 파직, 그 후

정유재란으로 일본군이 다시 진주한 가운데, 평소 가토 기요마사와 으르렁대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눈엣가시를 남의 손 빌어 처리하자는 생각으로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간첩질을 하던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보내 "가토가 바다 건너서 온다니깐 빨리 처리해"라는 정보를 흘렸다.

김응서는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조정에 보고했고, 이 소식을 들은 권율은 조정에 이를 알림과 동시에 이순신에게 빨리 출전해서 바다 건너오는 가토를 잡으라 명령했지만... 권율이 직접 달려와서 한산도에 명령을 내렸을 때 이순신은 마침 전라좌수영의 공무로 인해 여수로 가 있었고, 여기에 풍랑이 들어 바로 한산도로 돌아가지 못해 남해도에 있을 때 가토가 도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8] 당연히 조정에서 가토 잡으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는 '이미 가토는 도착해 있는데요' 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고, 조정은 당연히 이를 이해했다. 물론, 이때까지는 큰 문제 없었다.

이후 조정은 다시 한번 공격 명령을 내렸고, 여기에 이순신은 마찬가지로 충실히 복종해 부산포까지 가서 일대를 들쑤시고 왔다.[9] 가토가 이미 상륙한 뒤지만 어쨌든 해상으로 압박을 주면 다른 부대는 함부로 못 건너올 것이다... 는 이유에서였는데, 이순신은 여기에 복종했다.[10] 물론 이때까지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1월 21일에 "이순신이라서 못 잡은 것임. 나라면 잡을 수 있었음" 이란 내용이 담긴 원균의 장계를 받아보더니 1월 23일 갑자기 선조"그때가 하늘이 준 기회였는데 가토를 왜 안 잡았냐 너 지금 나 무시하냐"맙소사 라면서 뜬금없이 화를 내기 시작한다.[11] 그 결과 2월 4일 선조의 눈치를 본 사헌부에서 이순신에 대한 탄핵에 들어가고, 선조는 딱 이틀 뒤[12]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하고 도성으로 압송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2월 26일,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었다. 조선 수군 : 아이고 맙소사, 우린 이제 다 죽었어 왜군 : 계획대로

3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

오늘날에는 선조가 이순신을 쫓아내고 무능력자를 임명한 멍청한 짓을 했다고 까지만, 사실 칠천량 해전 이전까지 원균은 대형 사고를 치지 않고 그럭 저럭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수준의 지휘능력을 보여 왔던 그럭저럭 평범한 장수라기 보다는 아직 걸린 것이 없는 장수였다.[13] 그래서 조정에서는 원균이 이순신과 비슷한 급의 활약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상유지는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당장 그 선조가 직접 "나도 저 정도로 무능할 줄 몰랐다"고 한탄했을 정도. 선조는 자신이 가진 사적 감정 때문에 유능한 인재를 쫓아내는 일은 많았어도 무능력자를 무작정 요직에 앉혀놓을 정도로 멍청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원균의 무능만큼은 정말로 몰랐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후 선무 1등공신으로 추대하느니 뭐니 한 것은 원균을 좋게 봤다기 보다는 당사자가 전사한 상황에서 자기 책임을 줄이기 위해서일 뿐이다.

전임 이순신은 134척의 배와 17,000명에 달하는 수군 병력,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 여분의 총통 300자루 등[14][15]을 후임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에게 넘긴 후 2월 26일 서울로 압송되었고 자신이 혐오하던 이순신을 내쫒고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오른 원균은 "나도 능력 있다능!"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1597년 3월 9일, 조선 수군은 거제도 기문포에 왜선 3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원균은 말아먹을 생각에 신이 나서 군사들을 이끌고 항왜를 보내 술과 먹을 걸 줘가면서[16] 안심시킨 적들을 돌려보내나 싶더니 뒤를 쳤는데 반격한 일본군에게 그만 임란 최초로 해상에서 판옥선 탈취를 당한다. 판옥선 안에 실린 화포와 화약, 기타 무기는 부록이다(...). 결국 그 판옥선을 부숴버리고 왜구의 목을 쳐서 장계를 써 올리니 선조는 매우 기뻐했다(...).

통제사 원균(元均)이 임명을 받자마자 곧 무용(武勇)을 떨쳐 적선 3척을 포획(捕獲)하고 수급(首級) 47급을 바쳤으니[17] 매우 가상하다. 원균과 공이 있는 사람을 즉시 논상(論賞)하고, 혹 관원을 보내 호군(犒軍)하여 장사(將士)들을 격려할 일을 의계(議啓)하라. 그리고 적의 수급과 계본(啓本)을 가지고 온 사람도 아울러 참작하여 논상할 것으로 비변사에 말하라.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3월 25일 2번째 기사##

글만 봐도 선조가 흐뭇한 아빠미소를 짓고 있는게 상상이 된다

그러나 왜군은 "아직 휴전기간인데 이렇게 뒤통수 치는게 어딨냐!"라며 항의를 했고, 조선 조정은 당황해 했다. 결국 원균에게 줄 포상은 없던 일로 되었다.

이후 원균은 선조의 기대대로 이순신과는 다른 행보를 보여주기 시작하는데, 작전은 고사하고 이순신이 만들어 놓은 조선 수군의 작전 회의실인 운주당(運籌堂)에서 기생을 불러다 술을 퍼마시기도 했다(...) 선조는 이걸 보고 나서야 이 자의 문제점을 깨달았는지 "너 부산 언제 공격할 거냐?"라고 압박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원균은 "저라면 당장 부산포를 때려 부수겠습니다!"라고 할 때는 언제고 말을 바꿔 "저 혼자서 부산포 공격은 무리고 30만 조선 육군이 안골포, 가덕도를 쳐주시면 제가 부산으로 달려가 적진을 모조리 소탕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했는데 원균이 자기 나라 군대의 병력 규모를 몰랐을 리는 없고, 현실적으로 부산포 공격이 어려워진 걸 알고 의도적으로 무리한 요구를 해서 출정을 피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3.1 원균의 억지 출전

하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원균에게 5,000명의 병력을 지원해주면서[18] "나가 싸워라. 안 그럼 뒈진다."라는 무언의 압박을 넣었고 결국 6월 18일, 원균은 100여 척의 조선 함대를 이끌고 부산포로 향했고 부산포로 가는 길에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안골포에서 적선 두 척을 빼앗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보성군수 안흥국이 전사하는 등 일본군의 저항에 부산포는 콧빼기도 보지 못하고 결국 귀환했다.

조정에서 까라는 부산포는 까지도 못하고 지휘관이 전사하는 등의 피해가 발생했으니 당연히 좋지 않게 볼 수밖에 없었고원균은 출전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음에도, 결국 선조 30년 7월,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경상 우수사 배설 등의 지휘관과 169척의 조선함대를 이끌고 출전, 7월 7일에 부산포 근처 다대포에 정박했다. 그리고 7월 8일에 왜군과의 첫번째 교전을 벌였는데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빈 배 8척을 불사르는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다음날인 7월 9일 서생포에서는 일본 수군이 공격하자 겁먹고 도망가다가 판옥선 20여 척 가까이 상실하는 패전도 겪는다. 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가장 많은 수의 판옥선을 잃어버린 것이다.(...)

7월 14일, 원균은 부산포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하던 도중 일본 본토에서 오던 수송선단과 마주치게 되었다.[19] 이때 수송선단이 꽁지 빠지게 줄행랑치자[20] 원균미쳤다고 "이게 웬 떡이냐!"라며 달려들었는데... 12척의 판옥선이 해류에 떠내려가버렸다. [21] 이는 바로 앞의 적선, 그것도 비무장인 적선을 잡겠다고 격군[22]들이 지칠 때까지 뒤쫓았다는 소리다.

원균은 이번 출전에서 (왜군 피해) 10척 : 32척 (조선 수군 피해) 라는 이순신이 지휘관으로 있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할 교환비를 보여주며 한산도로 돌아왔다.

3.2 무능한 지휘관 곤장을 맞다

결국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며 그간 무적에 가까웠던 조선 함대가 패퇴해 한산도에 갇혀 있는 상황에 이르자 화가 난 권율은 7월 14일 직접 원균을 불러 곤장을 쳤다.[23] 이때 곤장을 친 이유는 조정을 기만했기 때문이라고 실록에 기재되어 있다.# 권율쯤 되는 지휘관이 부산을 공격하지 않았다며 무작정 벌을 줬을 리는 없고, 통제사가 되기 전에는 부산포를 공격할 수 있다고 말했다가, 막상 자리에 오르고 나니 공격할 생각 없이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고 자기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사람을 모함하고 허풍에다가 거짓을 말하는 원균의 사람됨이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사형이었다면.... 사형은 기대도 안한다. 그냥 파직만 시켰어도..


아무튼 이 사건은 오늘날의 물색에 비유하자면, 해군참모총장이 장병들 다 보는 앞에서 합참의장에게 빠따질을 당한 격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원균 입장에선 참담한 노릇이었다. 이로 인해 더는 퇴로가 없어진 원균은 결국 부산으로 함대를 끌고 갔고, 부산 가덕도에 도착해 물을 길러 400명의 조선 수군을 보냈다. 그런데 이들은 가덕도에 위치해 있던 다카하시 나오쓰구가 이끄는 일본군의 기습을 당했고 원균은 "이게 뭐시여! 빨리 도망가자!"라며 400명의 병사를 가덕도에다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버려진 400명의 운명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러한 모습은 원균이 그토록 증오하던 이순신의 모습과 180도 다른 모습이다. 1597년 2월에 있었던 이순신의 부산포 출전 당시 가덕도에 물길러 갔던 조선 수군 5명이 왜병에게 붙잡히자 62척의 배[24]가덕왜성에 포화를 퍼부어 위협해 쫄은 요시라가 직접 내려와 포로들을 풀어주며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구걸하던(...) 사건을 생각해보면 원균이 얼마나 무능한 지휘관인지 알 수 있다.

한편 도주한 원균은 가덕도에서 거제도 북쪽에 위치한 영등포로 이동했으나 이곳에서 또다시 일본 수군의 공격을 받았다. 육지에 진을 치지 못하고 쫓겨난 원균의 조선 수군은 다음날인 7월 15일, 영등포 일대가 비바람이 몰아쳐 더이상 배가 정박하지 못하게 되자 폭풍우를 헤치고 칠천량으로 향했고[25] 그곳에 정박하며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이 조선수군의 무덤이 될 줄은...

4 전투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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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원균의 삽질로 병력을 찔끔찔끔 잃다가[26] 이렇게 된 이상 육지로 도망간다라는 어이없는 작전이 나오게 되고 그 후 수군이 흩어져 버렸다. 적에게 습격당해서 전멸한 게 아니다.[27] 조선 수군의 압도적인 군세가 제대로 된 교전 한번 없이 그냥 증발한 셈. 이순신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면 될 것을 숟가락을 얹기는 커녕 밥상을 엎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원균이기에 가능한 기적의 미라클. 병력의 수나 질적 면에서도 어택땅만 해도 이길 수 있었다.

4.1 7월 15일 : 칠천량에 정박한 조선 수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

칠천량에 진을 친 후 원균은 그때까지의 삽질 경과로 인해 의욕상실 상태가 되어 술만 퍼마실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28] 이 때 조선 수군의 동태를 지켜보던 일본 수군은 기회를 눈치채고 칠천량으로 몰려갔다. 이순신에게 늘 패배하기만 했던 도도 다카토라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있는 배를 다 긁어모아 칠천량으로 향했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육군도 칠천량으로 향했다.

7월 15일 밤 10시, 조선 수군의 군량선에 불이 났다. 이는 일본 수군이 벌인 짓이었는데 조선 수군 함대가 기습을 당해 배가 불탄 적은 이 날이 처음이었다. 지휘관인 원균이 만약 제정신이었다면, 주위에 대한 감시를 더욱 철저히 하도록 명령했을 테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7월 15일, 왜장이 날랜 군졸들을 모집해 작은 배를 타고 우리 군사와 함대의 동태를 살폈다. 우리 병사들이 잠에 취해 코를 골고 있었으므로 적들이 포 두발을 발포했다. 우리 군사들은 몹시 당황하여 닻줄을 끊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자 적들이 병선을 타고 일거에 진격, 한산도가 마침내 무너졌다.

《해상록》

4.2 7월 16일 : 막다른 골목으로 향한 조선 수군, 그리고 불타는 칠천량

군량선에 불이 붙은지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7월 16일 새벽 4시. 일본군이 조선 수군을 향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29] 원균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비해 전력면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원균을 비롯한 지휘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밤중에 적이 가만히 비거도 10여척으로 우리 전선 사이를 뚫어 형세를 정탐하고 또 병선 5~6척으로 우리 진을 둘러 쌌는데, 우리 복병선의 장수와 군사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날 이른 아침에 이미 복병선은 적에게 불태워 없어졌다. 균이 놀라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고 불화살을 쏘아 변을 알리는데 문득 각 배옆에서 적의 배가 충돌하여 총탄이 발사되니 군사들이 놀라서 실색하였다.

《난중잡록》

이 말인즉슨, 일본군이 조선군 진영을 휘젓고 다녀도 아무도 모르는 지경이었다는 소리다![30] 이러한 상황 가운데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맞서 싸웠으나 기습공격으로 당황한 상태에서 교전을 벌여 불리한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김완의 《해소실기》에 따르면 초반 2척의 배가 기습 공격을 해왔을 때 조선 수군의 절반이 도망가 버렸고(...) 나머지 절반은 원균이 직접 군관 김대복을 보내 후퇴를 명령했다고 한다. 급박한 상황이긴 했으나 지휘권이 가동되기는 했다는 소리다. 어쨌든 원균은 후퇴명령을 내렸지만 당연히 기습해온 적선이 단 두 척밖에 안 되는데 김완은 거부했고 아군이 계속 본진 쪽으로 후퇴하면서 김완의 함선은 결국 점령당한다. 이때 김완은 물에 빠졌다가 일본군에 사로잡힌다. 다시 말하자면 이때의 후퇴는 정상적인 명령으로 작동했다는 것. 2척의 병력이 기습한 이후 본격적으로 참전한 적은 도도 다카도라의 병력으로 50척이 채 되지 않았다.

요시아키가 창과 포로 무장한 한 척의 거함에 뛰어 올라 몇사람을 참수하자 적[31]이 그를 공격하려고 했다. 요시아키의 조카 곤시치로 등이 분전하여 드디어 배를 빼앗았다. 요시아키는 또 적의 별선에 뛰어오르려 하다 발을 헛디뎌 바다로 떨어졌다.

《정한휘보》 권 4 30면

위와 같이 일본군의 전술은 군선의 돛대를 사다리로 이용해 전선에 올라타 백병전을 벌이는 것인데 이 때문에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는 배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32], 배설은 적선 8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으나 적선의 수가 너무 많아 결국 밀릴 수 밖에 없었다. 이쯤 되자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각 수사들에게 퇴각명령을 내렸고 전 수군이 퇴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칠천량 해전에서 포로로 잡혔던 김완의 해소실기에 나온 내용으로, 이를 통해 최소한 전투 초반 지휘 체계는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조선 수군이 한산도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통념상 칠천량 해전은, 아래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묘사한 것처럼 이 칠천량 해역의 전투에서 왜군에게 공격을 받아 섬멸당하고 이후 명량해전 때 참전한 판옥선 12척 만이 간신히 도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조선 수군의 주력 함대는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6일 오전 8시경 조선 함대가 양갈래로 나뉘었고 한쪽은 진해만으로, 한쪽은 거제도 해안을 타고 서남쪽으로 한반도를 향했다.[33]

《해소실기》 1권

최고 지휘관이 워낙 막장이었던 탓에 일본군의 공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 대면서 한산도 근처인 춘원포로 도망갔다가[34] 원균이 지상에 내려서 도망치자는 결정을 내려, 이순신이 힘들여 쌓아놓은 조선 수군을 제대로 된 교전 한번 없이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차라리 원균이 한산도로 퇴각해 견내량을 틀어막고 버티기만 했어도 이 정도의 피해는 입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원균의 명령을 듣지 않고 각기 도망치거나 아예 지휘권이 붕괴된 상황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견내량은 막히지 않았고 한산도로 충분히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원균의 지시로 조선 수군을 퇴각조차 할 수 없는 춘원포로 다 몰아 버렸으니. 물론 이 시점에 수군 지휘관들 상당수가 원균의 명령을 대놓고 무시하고 도망쳤기에 절반은 살아남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원균과 함께 전멸당했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선전관 김식의 보고.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7월 22일 2번째 기사##
“넓은 바다라면 패전하였더라도 혹 도망하여 나올 수 있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렇지 않아 비좁은 지역에 정박하였다가 갑자기 적선을 만나 궁지에 몰려 하륙하였으니 대체로 전군이 패몰되었을 것입니다.

선조 30년(1597년) 7월 21일 살아남은 병사가 없냐고 묻는 선조에게 이항복이 대답하길.

누누이 말하지만 차라리 원균이 맛이 가서 그냥 군대가 와해되어 뿔뿔이 흩어졌으면 대다수가 무사히 도망쳐 나중에 수습할 여지라도 있었지 원균이 군대의 절반 이상을 춘원포에 꼴아박은 덕에 조선 수군이 이 지경이 된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순신이 엄청난 노력끝에[35] 만들어 놓은 최정예의 조선 함대와 수군은 단 50척의 왜의 기습으로 와해되었고,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 1,000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 본함대가 칠천량에 도착했다. 이들이 춘원포에 고립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가토 기요아키는 약간 뒤에 도착했는데 전투는 이미 한참 전이었다.

《정한휘보》

그나마 본 함대가 도착했을 시점에는 이미 삼도수군의 절반 이상이 전장을 빠져나간 뒤였기에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5 전투의 결과

"이 일은 어찌 사람의 지혜만 잘못이겠는가. 천명이니 어찌하겠는가."[36]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7월 22일 3번째기사##. 칠천량 패전소식을 접한 조정에서 이후의 수습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 중에 선조가 했던 말이다.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서는 이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인해 정유재란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는데 결코 빈말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정유재란은 1597년 1월에 시작됐고, 이 전쟁의 첫 회전(會戰)인 칠천량 해전은 동년 7월에 있었다. 그렇지만, 이 패배를 기점으로 정유재란의 전선(戰線)이 하삼도 전역으로 본격적으로 확대되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실패했던 수륙병진의 가능성이 열리면서 왜군이 한양을 노릴 수 있게끔 했다. 한마디로 정유재란 초반의 국면을 결정지은 전투.[* 이게 무슨 말이냐면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군은 파죽지세로 진격을 거듭하여 한양을 순식간에 점령하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군대는 평양성까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군대는 함경도까지 진출했다. 이 무렵 선조는 명나라와의 국경지대인 의주로 피난가있는 상황이었는데, 평양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선조에게 "우리 수군이 곧 서해로부터 10만명이 당도할 것이다. 이제 조선의 임금은 어디로 가시려나이까?"라는 글을 보내서 겁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지칠대로 지친 고니시의 부대는 더 이상 진군이 불가능했고 명군이 올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들리자 모험수를 두기 싫었던 그는 평양의 곡식을 사용하며 진군을 정지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육군들이 승리를 하고 명군까지 오면서 장기화되자 곤란에 처하게 되버린다.
일본이 초기에 서해안의 수륙 양면 작전을 처음에 고려한 것은 아니였지만 이 시기쯤가면 전황의 돌파구로 쓸만했으나 이순신 때문에 불가능해졌다. 이 작전은 정유왜란 초기의 왜군의 핵심 전략으로 채택되기도 한다.]"
169척의 조선 수군 중 절반 가까이가 살아남긴 했으나 대부분 개별적으로 후퇴했고, 끝까지 편제를 유지해 명량 해전 직전까지 수군에 남은 건 배설이 도망칠 때 끌고 간 12척 정도[37]로 조선은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사실, 제대로 된 전투없이 다 도망갔기 때문에 이억기, 최호를 제외하면 지휘관급 전사자는 거의 없었고 병력 손실도 규모에 비해 적었고, 노량 해전 당시 이순신이 이끌던 수군 전력을 고려하면[38] 적어도 절반 이상이 살아남았다고 보는 게 맞다. 즉 모두 죽었다기 보다는 지휘 체계고 뭐고 모조리 무너져서 뿔뿔이 흩어진 것.[39]

일본군 장계에 따르면 칠천량에서만 160여척의 전선을 탈취하거나 불태웠고 연안에 남겨진 전선들 또한 불태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합류한 전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는 과장된 면이 있다.

그리고 장수(배설)가 전장에서 도망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이 경우에는 그나마 명량해전 당시 12척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배를 남긴지라 비난만 받을 일은 아니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명량해전도 불가능했을 것이고 조선 수군의 80여 척이 넘는 판옥선 대부분은 각개격파로 궤멸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망가면서 한산도에 있던 물자들을 일본군 손에 넘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불태운 이도 배설이다. 난중일기 8월 13일에 전라 좌수사 시절부터 여수 본영의 우후로서 이순신을 보필해오던 측근이었던 이몽구가 여수 본영에서 피난해오며 병장기를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순신은 이몽구에게 곤장 80대라는 중형을 내렸으며, 난중일기 10월 24일. 조정에서 내려온 선전관이 이몽구를 처형하라는 유지를 갖고온 것을 생각하면 배설의 행동은 전술적으로 가치있는 행동이었다.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후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게 되면서 함선의 수가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하는데 시간상 보면 건조하는 속도로는 그렇게 빨리 불어나기 힘들다. 노량해전 당시 조선 수군의 전선은 판옥선 83척으로, 명량 해전 이후 1년 2개월 남짓이었다. 아무리 이순신이 수군 재건에 총력을 기울였다지만 조정의 지원도 어려운 상황에서 처음부터 이 전선들을 새로 만들었다고 보긴 힘들며, 이중 일부는 칠천량 해전 이후 도망쳤던 잔여 전선들이 합류했거나 뒤늦게 찾아낸 뒤 수리해서 다시 배치했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즉 살아남은 장수 대부분이 배와 휘하 병력을 데리고 숨어 있었다는 얘기이며(실제로 명량해전 이후 도망쳤던 장수들이 수군에 합류해서 도망친 죄로 처벌받은 기록이 존재한다) 그나마 배설만 자기 휘하 병력을 새로운 통제사 이순신에게 인계했다는 소리가 된다. 첨언하자면, 칠천량 해전시 유일하게 일본 수군을 격파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배설의 함대이며,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 습격시 최초로 응전한 것도 배설이었다. 그러나 배설은 이때 얻은 까임방지권을 명량해전에 참가 안하고 탈영하면서 써버렸다.[40]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잡혀와 목이 잘렸다. 단 배설의 도망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자세한 것은 배설 항목을 참조하자. 사실 항목을 잘 읽어보면 알겠지만, 선조의 뒤통수(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대신 품계를 낮춤)가 빛났던 부분이다

그것보다도 더 큰 문제는 이순신이 막아내어 유지할 수 있었던 남해의 제해권이 일본군에게 완전히 넘어가 버리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는 전라도가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는 일본의 침략을 받지 않은 인적으로든 물적으로든 조선의 보급고였던 곳이었다. 단적인 예로 도원수 권율의 병력은 자신의 부임지였던 광주(현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사람들이 태반이었으며, 수군도 마찬가지로 삼도연합수군이라고 해도 사실상 전라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이 핵심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약무호남 시무조선'은 이런 맥락에서 한 말이다. 일본의 입장에선 임진년 당시 한양 이북으로의 진격의 가장 큰 방해물이었던 해상 보급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압도적인 패배도 패배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조선 수군 대다수가 갓 뽑은 오합지졸 신병들이 아닌 임진왜란부터 약 6년간 왜군들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워오고 승리한 역전의 베테랑들이었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군관들을 비롯한 장교들 역시 6년간 이순신 밑에서 맹활약을 펼친 실력파 부장들이 많았는데 이 해전에서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도망쳤다. 한산도대첩을 비롯해 6년간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온 주역들이 이 해전 한 번에 죄다 몰살당한 것이다. 해군에서 숙련된 인력이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받는지 생각해보면 사기가 떨어지지 않는게 이상한 정도. 《난중일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순신이 말한 것은 아니고 이순신을 찾아온 이가 이순신에게 한탄하며 하는 말이다.

(중략) 나라 일이 이미 잘못되어 죽을 날만을 기다릴 뿐이다. (후략)

난중일기》 정유년 5월 20일, 5월 23일.

다만 일본군은 7월 말까지 주변지역을 소탕하고 약탈하는 모습만 보였고 8월에는 이마저도 중단하여 이순신이 수습할 시간을 주었다. 이후 남원과 전주를 공격하기 위해 일본 육군과 수군이 투입되는데 사천과 곤양을 거쳐 하동땅 두지진으로 이동하며 대대적인 살육이 벌어지기도 했다.[41]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온 것과 같았다.

《조선일일기》[42]

여튼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결국 선조"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요"[43]라면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했고[44][45][46] 이순신은 원통함과 울분을 뒤로한 채 조선 수군 재건에 나서게 된다. 패전 후의 상황이 얼마나 암담했는지 당시 체찰부사 한효순은 "밤낮 눈물로 배를 만들었다'라고 기술할 정도.

그해 여름 사이에 수군이 싸움에서 패하고 군사들이 궤멸했다. 주상께서 애통해하며 ‘한산도 수군의 일이 일시에 무너지고 전선이 1척도 없으니 경이 급히 30척을 만들어 수군을 도우라’고 하명하셨다. 명을 받은 이후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주야를 가리지 않고 배를 만들어 변산 지역의 배 태반을 입수했다.

《월탄연보》

그리고 세계 해전사 사상 유례가 없는 말도 안되는 전투로 이순신은 칠천량에서 패한 조선 수군을 수습하는데 성공했다. 사실상 이 전투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이득은 명량대첩을 통해 이순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칠천량 해전과 명량 해전의 대비가 없었다면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함선 성능차를 들면서 그 정도 격차가 있으면 이순신이 아니라 어떤 졸장이라도 큰 전공을 세웠을 거다라는 개드립퍼들이 지금보다도 훨씬 활개쳤을 것이다. 역사적 사건의 원인은 개개인의 능력이나 성향보다 구조적 흐름에서 봐야 한다는 말을 아무데나 적용하면서 자기가 객관적인 줄 아는 인간들도, 이순신에 대한 존경을 영웅주의 사관 쯤으로 취급하며 거기에 한몫했을 것이고. 또다른 이득은 원균이 죽었다는 것 정도(...).

6 패배의 원인?

선조: 하늘이 잘못했다
하늘: 충무공을 줬는데 왜 써먹질 못하니
정 충무공이 싫으면 이억기라도 썼어야지
일단 원균 자체의 무능함이 가장 큰 원인이다.난중일기》에 따르면 기생을 끼고 살았다. 이 때문인지 원균에 대한 반발로 인해 밑의 부하들이 말을 듣지 않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난중일기에서도 이순신과 원균의 부하들이 같이 원균을 까는 장면이 자주 나올 정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원균의 부하들마저 대놓고 원균을 깠다. 작전 중에도 경계조차 제대로 시행하지 않고 움직이다가 다급해지자 부하들을 헌신짝처럼 내팽겨 쳐놓고 도망쳤다.

(중략)이때까지 이순신 휘하에 있던 여러 장수들은 원균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통제사가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부체찰사 한효순이 이 문제를 체찰사에게 보고하여 해결해보려 했지만 이것은 미처 조처를 취하기 전에 칠천량 해전이 일어났다.

이덕형이 올린 보고서. 《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 1월 병진 기사.

이러한 이야기는 칠천량 해전이 벌어지기 한달 전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도 나온다.

(중략)휘하의 여러 장수 중 다수가 다른 마음을 품은 사실과, 통제사가 장수들과 더불어 의논하지 않는 상황으로 볼때 일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다.

난중일기》 정유년 6월 17일

전투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대자면, 아군의 행동을 그대로 노출시킨 것, 적진 한가운데를 들이침에도 적정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여 왜선의 대대적인 기습을 허용한 것과, 그 때문에 왜군들의 장기인 백병전을 허용한 것, 제대로 된 퇴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엉뚱한 곳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수륙 양쪽의 협공을 허용한 것 정도가 되겠다. 총체적 난국이었던 것.

그리고 통제사의 권한보다 체찰사의 힘이 컸다. 권율이 삼도수군통제사에게 곤장을 치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니 통제사는 윗선에서 내린 작전 명령에 대해 아무것도 토를 달 수가 없던 상황. 원균 자신도 머리를 쓸 줄은 알았으니(...) 부산포 공격은 무리라는 것을 판단했지만 그 자리에 앉고 나니 비로소 뭔가 좀 보였나 보다 그 이전에 자신이 이순신을 모함할 때에는 부산포 공략이 가능하다고 큰소리쳤었기에 억지로 끌고 나갔고 결국 패배로 이어졌다. 사기꾼의 몰락

한편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는 싸우지 말라'라고 명령할 정도로, 본래는 조선 수군을 두려워했다. 해안 지방 곳곳에 왜성을 쌓아 오로지 방어와 최소한의 보급로 확보에만 주력했을 뿐, 조선 수군과의 정면 충돌은 극구 피했다. 다만 그럼에도 조선 수군이 외해로 나가 부산포로 진격해서 싸우는 것은 장수 김완이 무리수라고 간할 정도로 무모한 작전이었다. 이 작전이 그대로 시행되었다가 처참히 실패한 전투가 바로 칠천량 해전. 이 덕분에 도도 다카도라가 조선 수군 궤멸의 1등 공신이 되어 버렸다. 전사자가 얼마나 많이 났으면 칠천량 주변 섬에 '혈도(血島)'라는 이름이 붙었겠는가.

7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7.1 조선왕조 500년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46회에 아주 간략히 나왔다. 평상시엔 이순신에게 빨리 출전안하냐고 대들던 다혈질로 나왔던 원균이 정작 권율이 출전 명을 내리자 출전 못한다고 버티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이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뜬금없이 나온 태도변화인 만큼 원균명장론을 내세웠던 이 작품이 가진 한계를 잘 보여준다. 원균을 용장처럼 묘사해놓다보니 정작 칠천량 해전때 머뭇거린 이유가 설명이 안되는 것... 정작 전투 장면은 그냥 원균이 배타고 나가는 장면에서 해설로 때워버리면서 임진왜란을 다룬 다른 사극들과 마찬가지로 원균이 전사한 것으로 조용히 마무리했다.

7.2 불멸의 이순신

1597년 7월 칠천량
</br>적은 날카롭게 달려들었다
</br>삶이 부스러지고
</br>찢긴 희망이 피로 흘렀다
</br>살아서 지켜라
</br>칼이 울었다
</br>가야한다
</br>죽음같은 세상의 중심으로
</br>ㅡ 불멸의 이순신 칠천량 해전 예고1, KBS

참혹한 어둠
</br>죽음들이 쏟아졌다
</br>해묵은 상처에서
</br>새 피가 흘렀다
</br>살아있으라
</br>절망 속에 이는 불꽃
</br>울음같은 부활을 위해
</br>ㅡ 불멸의 이순신 칠천량 해전 예고2, KBS

주소 영상 참고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91회 ~ 92회에서 나왔다. 여기서는 일본군 함대가 한꺼번에 투입된 데다 칠천량에 정박해 있던 조선군이 일본군의 기습 포격전을 맞아 포 한방 제대로 쏘지도 못하고 처참하게 발려버렸고 일본군의 화포 사격과 접현전투로 대다수의 배를 격침당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당연히 사실과는 거리가 좀 있지만[47] 무적 무패 신화의 위용을 자랑하던 무적의 조선 수군이 정말 허망하게 무너져내리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며, 보고 있노라면 끓어오르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음 한구석에서는 어차피 전투전에 이순신 휘하에 있던 기존 지휘관들이 3명[48] 빼고 다 사직해버리고 안티 이순신 원균이나 새로 부임된 뭣도 모르는 신참들이 허벌나게 박살나는게 거봐 이순신 장군 말을 안들으니까 이렇게 되지하는 생각이 들면서 꼴좋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분전하다 전사한 이억기, 사로잡힌 김완,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베테랑이 된 병졸들이 허무하게 죽어가고 거북선이 불타는 것을 보면 고증 오류는 둘째치고라도 안타까우면서도 분노를 느끼게 한다. 특히 거북선이 불살라지며 조수창이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은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린다. 게다가 예고편에서 나오는 글귀가 찢긴 희망이 피로 흘렀다. 말 다했다.

분명 고증 오류가 넘치는 묘사였지만, 오히려 그 고증 오류 때문에 칠천량 해전에서 얼마나 어처구니없게 조선 수군을 말아먹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들이 많이 나왔다. 덧붙여서 수군 병졸들 중에서 이전까지 콤비나 트리오로 나오던 멤버들이 하나둘 죽어나가는 장면도 있는데 보고 있으면 슬픔과 분노가 같이 올라온다(...).

7.3 징비록

징비록에서는 48화에서 간략하게 묘사한다. 원균이 죽는 장면은 안나오고 나레이션 처리. 그대신 권율에게 곤장맞는 장면이 나왔으니 이순신 입장에선 속이 시원할 것이다. 물론 보고있는 시청자들도.

7.4 명량

직접적인 전투 묘사는 나오지 않지만 전후의 전멸한 판옥선들을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하고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 꽤 자주 거론 된다. 작중 배설이 칠천량을 언급하여 왜군의 전력이 강해졌음을 얘기하고 잡혀온 탈영병은 자신의 동료들이 칠천량에서 모두 죽었다며 울먹거리지만....[49]

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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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제시 칠천도 옥계마을에 칠천량해전공원이 위치해 있다. 이름만 보면 원균 기념시설로 오해할지도 모르나 철저히 패전으로 접근하여 패배도 기억하자는 의미가 크다. 칠천량 해전의 배경인 이순신의 파직 과정도 부산포로 진격하지 않아 하옥됐다는 통념이 아닌 실제 사실을 충실히 설명하고, 기문포 해전 등의 통제사가 된 원균의 실책이나 출진 과정의 책임에 대해서도 잘 정리하여 이해를 돕고 있다. 다만 정작 칠천량 해전은 이 문서의 내용이 아닌 통념에 가까운 내용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이 문서의 2번 부분까지는 이 전시관에서도 잘 다루고 있으나,3번 부분의 칠천량 해역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의 공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궤멸당했다는 통념에 가까운 구성이다. 공원이 위치한 칠천량 해역을 강조하다 보니 생긴 일로 추정한다.

9 말말말

사관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目擊時事, 胸欲裂而骨欲銷也。)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 99권, 31년 4월 2일 2번재 기사.

"하나의 통영인데도 원균이 장수가 되니 군대 전체가 패망하고, 이순신이 장수가 되니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

박문수, 《조선왕조실록》영조 71권, 26년 7월 3일 3번째 기사.

1597년 7월 칠천량

적은 날카롭게 달려들었다
삶이 부스러지고
찢긴 희망이 피로 흘렀다
살아서 지켜라
칼이 울었다
가야 한다
죽음같은 세상의 중심으로
불멸의 이순신 칠천량 해전 예고1, KBS

참혹한 어둠

죽음들이 쏟아졌다
해묵은 상처에서
새 피가 흘렀다
살아 있으라
절망 속에 이는 불꽃
울음같은 부활을 위해
불멸의 이순신 칠천량 해전 예고2, KBS

  1. 거제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에 위치.
  2. 단 60여 척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투가 마무리될 시점에 도착해 조선 수군에 대한 추격 섬멸 작전만 수행했다.
  3. 이순신이 함대를 재건했을 때 83척이었고 새로 판옥선을 건조할 여력이 사실상 없었기에 이 정도 피해로 보는 게 타당하다. 그나마 막판 원균의 지휘가 붕괴되면서 도망간 함선이 많았기에 절반이나마 건질 수 있었다.
  4. 문자 그대로 최고의 정예군이 전투 하나 없이 공중분해되었다. 물론 격침된 함선이 많지 병력은 다수 살아남아 이순신이 복직한 뒤 합류했지만, 이들은 원균의 명령에 따라서 만으로 상륙하지 않고 함선에 남아 있었던 병력이다. 즉 원균의 지휘를 충실하게 따랐던 병사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전멸당했다.
  5. 그것도 임진왜란 초기부터 한산도 대첩을 포함한 여러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온 실전경험 풍부한 주력 정예군이 이 전투 한번에 괴멸당했다.
  6. 사실 호남 전체는 아니지만 어느정도는 뚫렸다. 왜군은 남원성을 함락시켜 성 안의 백성들을 도륙한 뒤, 도원수 권율이 지킬 수 없다고 버리고 간 전주성까지 함락시킨다. 이후 왜군은 충청도까지 진격하기 때문이다.
  7. 이후 충무공이 명량해전에서 상술한 최악의 사태를 막기는 했지만, 충무공 스스로도 하늘이 도와 이겼다고 할 정도로 압도적인 불리함 속에서 싸워야 했다. 이제 와서 보면, 충무공이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야말로 하늘이 도운일이지만
  8. 요시라가 김응서에게 첩보를 흘린 건 1월 11일, 그런데 이순신은 1월 10일에 이미 가토가 가덕도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육지로 올라온 건 1월 13일) 즉 요시라는 이미 가토가 바다를 건너온 상황에서 "헐 가토 건너오기 전에 막아야 함"이란 떡밥을 흘린 것(...). 여기에, 김응서의 보고가 한양에 도달했을 때는 1월 19일이며, 당연히 이때 가토는 부산에 도착해 있었다.
  9. 선조가 이순신을 파직을 명한건 2월 6일이었고, 이순신이 부산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날짜는 2월 9일~2월 10일이었다. 이후 파발이 한산도 본영에 도착한 날짜가 2월 26일이었고 이순신은 파직당하자마자 압송당했다.
  10. 권율과 김응서가 이때 일에 대한 장계를 올렸고, 원균도 나중에 이순신을 무조건 까기 위해 관련 장계를 올렸다. 이순신이 이때 부산포로 진격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11. 이런 민감한 반응은 바로 전해인 1596년에 일어난 이몽학의 난으로 인해 심해졌다. 의병을 모집한 후 나라를 전복시키려던 이몽학의 난을 겪은 선조는 나라를 구한 무인들이 백성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가지게 되면 "그들이 병력을 이끌고 나라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라는 지나친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무인들을 철저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희생된 대표적인 인물이 이순신, 김덕령이다. 사실 조선이 세워진 계기 또한 이성계라는 걸출한 무인이 백성들의 인기를 등에 업고 나라를 엎어버린 것이라 걱정할 만 했다. 문제는 그 의심증을 사람 안 가리고 시전해 버렸다는 것.
  12. 아무리 왕이 대신을 정리하려고 마음먹어도 보통 탄핵을 두어번 반려하는 모양새를 취하던 시대였다. 이틀 만에 파직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
  13. 자국 백성을 죽여 일본군으로 포장하는 짓을 하기도 했지만, 당시 이런 짓을 한 조선군 장수는 수없이 많았다. 오히려 적의 수급에는 큰 관심 없이 전투함의 격침을 통해 무력화시키는 데만 주력했던 이순신이 예외적인 경우.
  14. 참고로 이 병력과 물자들은 대부분 이순신이 중앙정부의 어떤 지원도 받지 않고 만들어낸 전력이었다. 실제로 이순신은 중앙정부에 손을 벌린 일은 조정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관리들의 인사에 관한 일들을 제외하면 역병이 돌아 병사자가 상당수 발생하자 "의원의사 양반 좀 보내주세요."라고 부탁한 것 뿐이었다. 그리고 이 병력을 원균이 칠천량에서 허비하고 난 뒤, 이순신이 복귀해서 노량해전 때까지 이 악물고 재건한 병력은 이 때의 70%에 불과하다.(전선 85척, 병력 16,000여명) 병력은 어찌 모을 수 있었다지만, 정작 이들이 탈 군선 수는 채울 수 없었던 것. 이것 외에도 군량미조차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모두 모두 둔전, 통행증 발급 같은 정책으로 채워넣었고, 염초도 자체적으로 만들어냈다. 심지어 조선 조정이 물자 부족으로 종이가 모자란 지경에 이르자 이순신은 직접 종이를 중앙정부에 바치기도 했다. 물자 면에서 중앙정부의 손을 빌린 건 최전방 환경에서 구할 방법이 없던 석류황을 보내달라고 부탁한 것 뿐이다.
  15. 심지어 조정에서는 수군의 돈줄인 우수영 관할소속의 14개 고을들 중 무려 9개 고을을 육군 소속으로 징발하는 병크까지 터뜨렸으며, 이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사변 초기부터 수군소속 고을의 군량을 육군에서 징발하거나 명나라 군사 뒤치다꺼리하느라 써버리는 막장에 이르렀다. 결국 이순신이 1593년 11월 17일자로 보낸 "연해안의 군사와 양곡과 병기를 전부 수군에 소속시켜 주기를 청하는 장계(請沿海軍兵糧器全屬舟師狀)에서 '지난번 장계에 해군력 증강계획안을 보냈는데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전라 좌도에 고을 5개, 우도에 14개 고을이 있었는데 9개 고을이나 육군에 전속시키고, 그것도 모자라서 수군소속 고을에서 군량미까지 계속 징발하고 앉아있고, 경상우도 연해안 고을은 다 털리고 백성들은 숨어살고 있는데 수군이랑 육군이 병력 뽑겠다고 착취하고 앉아 있고, 충청도 애들은 몇 번이나 도와달라고 했는데 오지도 않고 진짜 답답하고 걱정된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느그들처럼 매사를 임시땜질식으로 처리하다가 또 망하면 어떻게 되돌릴 건데?'라고 대놓고 까며 항의할 정도면 말다한 거다.(장계가 너무 길어서 본 항목에 서술하지 못하고 요약본을 서술한 내용이다. 본 내용은 훨씬 심각하다.) 상기한 물자들은 조선정부의 행정적인 병크가 터지는 와중에도 피땀흘려 어렵게 만들어낸 물자들이다. 여담으로 이 9개 고을은 저 물자들을 모두 말아먹고, 명량해전 이후에야 조선정부에서 수군 육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1597년 12월 25일 수군소속으로 돌려줬다. 하지만 임진왜란 초 이순신이 주장했던 해군력 증강계획은 이미 물건너간 데다 기껏 모아놓은 건 날려먹었으니 말 그대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일 뿐이다.
  16. 아직은 휴전기간 중이다.
  17. 참고로 이 해전에서 조선수군의 피해는 고성 현령 조응도와 140여명의 병력이었다. 고로 왜군보다 아군의 피해가 더 크다는 소리(...)
  18. 참 아이러니한게 이순신 장군이 통제사일땐 단 1명의 병사도 지원해준적이 없다. 오히려 수군 소속을 육군으로 돌리는 일까지 발생한다. 하지만 선조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던 원균에겐 지원을 못해줘서 안달인데 대표적으로 도원수 권율 휘하의 병사들을 수군 소속으로 보내준 일이 있다.
  19. 임진왜란 당시 종군한 승려인 케이넨이 쓴 《조선일일기》에 수송선단이라고 밝히고 있다.
  20. 선전관 김식의 장계에는 수송선단이 바다로 유인한 후 뿔뿔이 흩어졌다고 밝혔지만 일본측 기록에는 "조선 수군이 있으니 도망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21. 5척은 도모포에, 7척은 서생포로 표류했고 서생포에 표류한 인원들은 모두 전멸했다.《난중일기》 정유년 7월 14일과 16일 기사에 기록.
  22. 노를 젓는 병사들을 뜻한다.
  23. 권율이 때마침 조선 육군 주력을 이끌고 한산도 근처에 있어서 빠른 배로 잡아다 두들겨패고 돌려보내는 게 가능했다(...). 《난중잡록》에서는 7월 11일에 곤장을 맞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징비록》에서는 14일에 두들겨 팼다고 기록되어 있다.
  24. 김응서의 육군도 협력했다.
  25. 칠천량은 임란 초기부터 조선 수군이 비바람을 피해 정박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임진장초 선조 25년 7월 15일 계본. "7월 9일 맞바람이 세게 불어 항해할 수 없음으로 거제땅 온천도(칠천도)에 정박했다."
  26. 그래도 여전히 일본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상태였다.
  27. 물론 상륙 후 일본군에게 습격을 당하긴 했으나 조선 수군의 절대 다수는 적에게 죽은게 아니라 말 그대로 흩어졌다(...).
  28. 칠천량 해전에 참전했던 김완이 쓴 해소실기에 기록되어 있다.
  29. 김완의 해소실기에 따르면 초기에 기습한 적선은 겨우 두 척이라고 한다. 1천 척에 달한다는 일본 수군은 기습이 성공한 뒤 한참 후에야 차례대로 도착했기에 조선 수군에 대한 수색 섬멸 작전만 수행했고, 육군은 거제도 등으로 도망오는 조선 수군을 잡았을 뿐이었다.
  30.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소리냐면 군대에서 초병 세우고 주기적인 정찰을 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에 가까운 것이다. 난중일기나 이순신의 장계에서 허구한 날 탐망선을 띄웠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게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이상한 것은, 원균같은 똥별 말고도 이억기나 최호 같은 개념인들도 있었으나, 이런 실수를 할 위인들이 아님에도 뚫렸다는 것.이억기, 최호: 우리가 개념인이면 뭐해! 모시는 상관이 x병신인데! 난중일기에서 좌수영 본영의 진흥국이 백의종군 상태인 이순신에게 찾아와 원균이 못되게 군다고 눈물을 뿌리며 이야기한 것을 감안하면, 원균이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막대한 불이익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이억기나 최호같은 개념인들의 명령권이 극도로 제한되었을 수도... 이순신의 경우 통제사 복직 후 서해쪽으로 후퇴하면서도 정박할 때마다 탐망선을 띄웠고, 이를 통해 어란포의 왜선을 확인한 뒤 벽파진에서 싸워 이겼으며, 그날 밤 더 많은 전선으로 야습을 한 일본군을 엿먹여줌으로써 원균과는 격이 다름을 재확인시켜 주셨다.
  31. 조선 수군
  32. 기록상 싸우다가 자결했는지, 아니면 정말로 전사했는지 명확하지 않다. 보통은 자살 행위를 연상할 정도로 처절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것으로 판단하는 편이다.
  33. 이 서남쪽으로 도주한 함대가 배설을 위시로 한 훗날 합류하는 함대로 추정한다. 하지만 원균 등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주력함대는 죄다 진해만으로 달려갔고 그 결과...
  34. 곤장 사건에서 보듯 권율이 그 근처에 있었다. 그러나, 만이 채 안되는 병력의 조선 육군이 일본군 수만을 막아주리라 본 것부터가 실수다.
  35. 이순신은 전시중 조정으로부터 단 한번도 지원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여러 물품을 조정에 바쳤으며 심지어 조정에서 사용할 종이가 부족한 상황이 벌어지자 이순신이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 수군 육성과 이들을 먹여살릴 보급, 그리고 말도 안되는 전투를 동시에 해냈다는 소리...(...)
  36. 쉽게 말해 "칠천량의 패전은 원균의 잘못이 아니라 하늘이 한 일이다!" 라는 말이다. 이순신을 잡아다 고문하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 자신을 변호하는 것(...). 하늘을 죽입시다 하늘은 조선의 원수 , 지금 당신 나라에서 그나마 군대다웠던 군대가 반파당했는데 씁, 어쩔 수 없지라는 반응이 제정신으로 나오는거요?
  37. 한산도에 남겨둔 배, 또는 건조중인 배가 다수 있었으나 적의 손에 넘기지 않기 위해 모두 불태워버렸다.
  38. 육군의 경우 징병만 해도 수를 늘릴수 있지만, 해군의 경우 함선은 단시간에 늘어나지 않는다.
  39. "이때 한산도의 여러 장수들은 각자 도망쳐서 본도(本道)의 피란민 등과 함께 여러 섬으로 들어갔으므로, 공이 날마다 편비(褊裨)를 보내어 여러 섬에 통유(通諭)하여 흩어진 군졸들을 불러모으게 해서, 전함을 수리하고 기계를 준비하며 소금을 구워 판매하게 하니, 2개월 이내에 수만여 석의 곡식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장사(將士)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서 군성(軍聲)이 크게 떨치었다."(이항복, <백사집>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유사)
  40.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서는 지휘에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배설이 자발적으로 먼저 떠난 것으로 묘사했다.
  41. 영화 명량에서도 칠천량 해전의 이러한 상황을 잘 묘사하였는데 영화 초반 일본군에게 끝까지 분전하다 참혹하게 잡혀 끌려다니다 사살된 장수와 조선 군영에서 탈영을 시도하다 이순신에게 참수당한 공포에 실성한 병졸이 설정상 임란 초기 부터 이순신 밑에서 여러 해전에 참전한 부장과 병졸이라는 설정이다. 칠천량 해전의 패전이 얼마나 조선 수군에게 절망적인 결과를 불러 일으켰는지 잘 알 수 있는 장면이다.
  42. 일본 규슈의 우스키성 성주의 의무관이자 주지였던 케이넨이 쓴 종군일기. 케이넨은 주군을 따라 임진왜란에 참가해 《조선일일기》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43.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선 이를 두고 '임금이 신하에게 싹싹 비는' 상황으로까지 비견하는데, 다소 과장이긴 하지만 중앙집권국가에서 왕이 신하에게 저 정도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파격적이긴 하다. 그만큼 급박했다는 소리.
  44. 이 과정에서 제대로 한 것도 아니다. 선조가 잘못한게 많아서 직접적으로는 말하진 못했지만, 노골적으로 이순신을 다시 기용하기 싫다는 내색을 팍팍 했다. 그럼에도 신하들이 이를 씹고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킬 것을 요구하자 그때서야 승인했다. 게다가 그 와중에 실제 품계는 원래보다 훨씬 강등된 절충장군 품계를 주어 뒤통수를 쳤다. 그러니까 중장이 억울하게 누명쓰고 해임되었는데, 정작 같은 직책으로 복귀할때에는 소장이 된 셈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이순신은 다른 수군절도사와 같은 품계 즉 계급이 같게 되기에 지휘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휘하 수사들이 통제사 명령을 잘 따랐기에 이후에 문제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배설은 도망, 김억추는 전근간 이후 임명된 수사들이 권준, 무의공 이순신, 안위로 이 세 사람은 이전부터 이순신의 부장이자 최측근들이었다.
  45. 추가로 적어두자면 이순신의 절충장군이라는 품계는 명량해전이 끝난지 7개월이 지나도 유지 되었다. 이것도 선조가 쩔쩔매는 명나라 경리 양호, 제독 마귀등이 선조한테 빨리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주라고 다그치자 올려준것이고, 그나마 다시 올라가긴 했지만 원래의 정 2품을 돌려준 것이 아닌 종 2품 가선대부(...).
  46. 그런데, 패전 소식을 들은 선조대왕 가라사대, "아놔 정찰 안했나요? 왜 후퇴해서 한산도도 못 지킨거예효? 한산을 지키면서 호랑이가 버티는 듯한 형세를 지키며 우주방어 했어야 하는데 괜히 출동해서 이렇게 발렸으니 이건 사람이 한게 아니라 하늘 때문이야." 이봐.. 네가 빨리 공격 안하냐면서 이순신 잡아와 고문한 거잖아! 아마도 선조는 이순신을 시기한 것 같다(...). 상급자의 질투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47. 안택선 항목을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당시 일본 함선은 그 설계 및 제작법상 한계 때문에 화포를 탑재해 봤자 뱃머리에 2문 정도가 고작이었다. 일본군함 X 2의 포를 보유했다 쳐도 주력은 포가 없는 세키부네이고 안택선은 수가 얼마 없다. 연출을 위해 과장한 셈.
  48. 전라우수사 이억기, 조방장 김완, 장흥부사 이영남이었는데, 김완은 사직하려 했으나 권준의 만류로 포기했고 이영남은 이후에 원균과 마찰을 일으키다 역시 짤렸다.
  49. 따지고 보면 전쟁중이면서 부대 내 사기가 뚝뚝 떨어지는 판이다. 불쌍하지만 군법으로 따지면 엄중처벌로 다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