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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西行長(こにし ゆきなが)
1558년[1] ~ 1600년 음력 10월 1일, 양력 11월 6일
고니시의 문장
1 생애
일본 전국시대 무장. 키리시탄(キリシタン) 다이묘로 유명하며,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Augustino).[2]
국내에선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 무장 중 가토 기요마사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인물. 당시 조선에서도 일본 장수 중에서 제일 유명한 인물 중 하나였다. 임진왜란 관련 조선측 사료에서는 소서행장(小西行長)이나 그냥 행장(行長)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한다. 다른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와는 앙숙지간이다. 가토는 바로 옆동네의 다이묘인데, 원래 이웃끼리가 더 사이가 안 좋은 법. 상시 접경에서 영토 문제로 다투었다고 한다.
다만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히데요시 집권후 지방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직신들을 각 지방에 골고루 분배했고 특히 둘의 영지가 있는 규슈는 시마즈가 자리하고 있고 옛 류조지 가문의 세력을 등에 업은 나베시마(鍋島) 가문[3]도 있었기 때문에 직신들 중에서도 제일 믿을 만한(혹은 능력있는)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간베에, 고니시 유키나가를 배치했다. 특히 가토와 고니시의 영지는 남북으로 붙어 있기 때문에 둘의 연계가 중요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히데요시의 권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영토로 싸운 기록은 없다. 오히려 히데요시의 구상에 걸맞게 서로 도와가면서 잘 지냈다. 다만 임진왜란 몇 년 전부터 가토가 영지 내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하면서 가토의 영지 내 신자들이 대거 고니시 측으로 도망, 그들의 처우 문제로 다툰 적은 상당히 많다. 둘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가토가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울산성 전투에서 고니시가 조선측과의 화친을 위해서 가토의 지원요청을 묵살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가토가 얼마나 한이 맺혔는지 귀국 후 만든 구마모토 성은 식수공급용 우물을 900개 정도 팠고 성내 다다미나 외벽재를 죄다 고구마 줄기로 만들어서 유사시 장기간 농성에 대비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훗날 시마즈 군대와 정부군이 격돌했을 당시 최대 격전지였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서남전쟁 항목이나 구마모토 성 항목 참조.
본래 사카이[4]의 상인의 아들이자 자신도 상인으로서 본명은 고니시 야쿠로였다고 한다. 최초 우키타 나오이에를 섬겼으며, 주로 외교시의 사자로 활동하였다. 1581년 우키타 나오이에가 사망한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발탁되었다. 히데요시 밑에서는 후나부교(船奉行)로서 수군을 통솔하였고, 다이묘가 된 것은 1585년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고니시는[5]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고,[6] 고니시의 휘하 병사들 다수도 천주교 신자였다. 고니시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그의 진중에는 로마 교황청이 파견한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신부인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했고,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특히 부장이자 사위인 소 요시토시에게도 가톨릭을 믿으라고 권해서 세례성사를 받게 했고, 요시토시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 고니시 만쇼는 훗날 신부가 되었다. 그의 사촌 역시 세례를 받아 안토니오란 이름을 받았다.[7] 고니시의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후에 시마바라의 난의 진원지가 된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대마도주인 사위의 무역문제와 자신의 가톨릭 신앙 등의 이유로 전쟁을 반대하던 쪽의 인물이었다. 이시다 미츠나리 등과 전쟁을 막기 위한 시도도 하였다.
하지만 실패하자 이에 초친 가토에게 보란듯이 가장 먼저 조선에 상륙, 한성을 가장 먼저 점령하고 평양에 주둔하였다.[8]
그러나 무리한 진격으로 공세종말점에 이르면서 평양서 시간을 허비하게 되면서 조선 육군의 승리로 어려워지는 전세 상황. 보급문제와 명나라군 등의 등장으로 물러나게 된다. 한성까지도 겨우 후퇴하였고, 행주산성에서 권율의 3천병사에게 대패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는 총대장인 우키타 히데이에의 잘못이 크다. 해당 항목 참조.
고니시의 1달간의 체류에 대해서는, 상인 출신이기에 가진 한계[9]라는 설과 고니시의 반전 의사라는 설, 보급부족 등의 설도 있다. 하지만, 평양까지의 빠른 진격으로 인한 반대급부로 병력들이 이미 상당히 지쳐있다고 보는 것이 진정한 원인으로 보는 것이 최근 견해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조선군들을 계속 상대하면서 경상도부터 평양까지의 긴 거리를 보군으로 단기간에 돌파한다는 것부터가 상당한 부담이였고 평양성 점령 후도 부상자가 상당하였다. 이순신의 보급로 지연으로 보급 문제로 철수했다는 전의 서술과는 다르게 평양성 점령 후 상당수의 군량과 평양성이라는 요충지를 획득했기에 고니시군은 어느 정도 버틸 보급 능력이 있었지만 이순신의 활약에 의한 추가 지원 가능성이 없어지고 명군의 도착이 부담이 되어서 철수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전쟁이 늘어지기 시작하자 이시다 미츠나리와 함께, 명과의 강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고니시는 말빨로 한 이름 하는 명나라의 심유경과 함께 열심히 교섭을 해봤으나, 일본의 조공을 요구하는 명과 조선 8도 중 남쪽 4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를 요구하며 명의 황녀를 운운하는 일본 사이에 강화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결국 고니시와 심유경이 양쪽 정부 모두에게 거짓을 고하고 명에게는 모든 요구조건이 수락되는 대신 도요토미에게 일본 왕 책봉을 내리는 수준으로, 일본에는 명이 마치 일본을 인정한 것처럼 사기를 쳤다. 문맹인 도요토미의 성향을 이용한 대사기극이었으나… 결국 붕괴, 심유경은 목이 잘리고 고니시는 마에다 토시이에, 요도도노 등의 간청으로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다.
이후 고니시는 평소 원수같던 사이인 가토 기요마사를 조선의 손을 빌어 처리하고자 가토의 상륙 정보를 조선 조정에 흘렸으나, 이는 상상 이상의 수확을 거두게 된다. 고니시가 흘린 정보는 이순신이 받아들이지 않아, 가토가 이미 상륙을 한 뒤라서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선조가 이에 낚이는 바람에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하고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면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는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것이다. 이렇게 정유재란에 다시 참전하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노량해전에 대패하면서 후퇴. 다만 이 때 고니시군은 전장에서 벗어나 일본으로 철군하는 중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영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벌인 내전에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하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하여 잘 싸웠으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과 함께 공격당하여 패배, 1600년 쿄토의 로쿠조 강변에서 처형당했다. 가톨릭 신자라 할복을 하지 않고[10], 온갖 수모를 겪은 후 참수되었다. 죽기 전 같은 가톨릭 신자였던 쿠로다 나가마사를 통해 고해성사를 받게 해달라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요청했는데 거절당했다고 한다. 참수시 불교의 승려가 관례적으로 고니시의 머리 위에 불경을 얹고 염불을 했는데 고니시가 "나는 키리시탄이다. 어딜 불교의 것을 나에게 들이대느냐!" 하고는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죽었다고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동상
숙적 가토 기요마사의 공격을 받고 있던 우토 성은 끝까지 버티다가 고니시의 처형 소식이 들어오자 항복하고, 성을 지키던 고니시의 동생 유키카게는 할복하였다. 쓰시마 섬 도주 소 가문의 소 요시토시에 시집갔던 딸 마리아는 세키가하라 이후 이연당하여 갓 낳은 아들과 함께 쫓겨났으며,[11] 아들은 모리 가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후 고니시의 가문은 멸문되었으며[12] 고니시의 봉토는 가토 기요마사가 소유하였다. 고니시의 가신들 역시 많은 수가 가토 가문으로 흡수되었다. 고니시의 우토 성을 점령한 가토는 그 성의 망루 하나를 자신의 구마모토 성에 옮겨 설치하고 "우토 망루"라고 불렀다고 하나,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우토 망루는 원래부터 있었고, 우토 성 출신 가신들이 있는 곳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한다.
조선의 전쟁 고아들을 많이 양육했다고 하여 그중 유명한 인물로는 조선인 양녀 오다 쥬리아가 있다. 평양 혹은 순천에서 주운 고아를 양녀로 삼아 이름을 오다로 짓고 가톨릭에 입교시켰다. 고니시의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다가 막부의 천주교 박해로 유배되어 여생을 유배지에 보냈다.
참고로 말하자면 한반도 땅을 처음으로 밟은 네임드급 가톨릭 신자이다. (무명 신자가 교역상 이전에 왔을 가능성은 충분하므로…)
전쟁을 좋아하는 성향은 아니었지만 일단 전투에 임하면 돌아보지 않는, 소위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에 끼친 피해 자체는 가토보다 더 크다. 하지만 주군 히데요시를 속여가면서까지 강화를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본 창작물보다는 한국 창작물에서 대우가 조금 더 좋은 편이다. 일본에서는 한국에 잘 알려진 것처럼 가토 기요마사와 라이벌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인지도나 인기에서 가토에게 밀리고 대중매체에서도 잘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묘하게도 여성향에서는 인기가 좋은 편이다.
선봉장으로서 부산진성,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의 주력군을 괴멸시키고 한양과 평양을 점령해 조선을 불바다로 만들었다는 점과 전쟁 반대, 국서 위조, 조선인 양녀 등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한 인물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인물이기에 한국에서는 다른 일본군 장수들과 비교했을 때 대우가 미묘하다. 당대 조선 조정에서조차 가토는 불구대천 원수로 여기면서도 고니시에게는 비교적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강화회담을 주도한 것에서 엿보이듯 일단 조선이 좋아할 만한 학문적 소양은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일단 한자를 알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메리트다[13]
또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는 미리 조선 측에 알려 백성들을 대피시키자고 주장했다.
명나라와 일본이 화평조약을 맺은 와중에 뜬금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진주 공격을 명하자 일본 장수 어느 누구도 그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당시 명나라 사신 신분이었던 심유경이 부산에 있을 때 이야기한 대목이다. 물론 화평약속을 깨는 공격이기에 반대한 것이기도 하다.
고니시의 이익은 쓰시마의 이익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것은 분명하다. 순전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막으려 했다는 것도 물론 맞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려고 무진장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애초에 사카이 상인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일찍이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서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국력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이묘로서 전국시대를 통일한 히데요시의 명령에 하복하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허무맹랑한 조선과 명나라 정복에는 애초부터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일본에서도 그다지 언급도 없고[16] 높이 평가되지 못하지만 애초에 평범한 장수였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봉장으로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17] 여러가지로 생각해볼 점이 많은 인물임은 분명하다.[18]
2 대중문화
2.1 각종 소설들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숙적>이란 소설에 꽤 옹호조로 등장하고 있다. 엔도 슈사쿠가 <침묵> 등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작품을 많이 썼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니시에게 호의적인 시각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19]
<숙적>에서는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의 온갖 애증관계를 히데요시의 시종이던 젊은 시절부터 세키가하라 전투의 패배 후 고니시가 죽는 시점까지 묘사하고 있다. '면종복배'라는 고니시의 이미지는 여기서 형성되었다. 이 작품에서 고니시는 일본과 조선 양국을 파멸로 몰아갈 히데요시의 전쟁을 막기 위해 고뇌하다가 결국 신자로서도, 무사로서도 크게 부도덕한 행동인 주군 히데요시의 독살을 결심하고 아내 이토를 시켜서 히데요시를 오랜 시간에 걸쳐 증거가 남지 않게 독살하고 만다. 고니시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죽임을 당하자, 아내 이토가 살아남아서 승자인 기요마사마저 독살해 버린다. 시종일관 집요한 라이벌이지만 고니시의 사후 생전에 느끼던 적의를 상실하고 허무감에 빠지는 기요마사의 모습 등, 여러모로 허무주의가 감도는 줄거리가 특징.
임진록에서는 소서, 소섭, 소서비등의 이름으로 괴물화되어서 김응서와 대결한다. 잘 때 눈을 뜨고 잔다거나 목을 베어도 그 목이 날아와 도로 붙기 때문에 잘린 단면에 재를 뿌려야 한다는 식이다. 심지어 고니시의 수청을 든 평양 기생 계월향은 김응서가 소서를 죽이자 "내 뱃속에 소서의 자식이 있는데 마저 죽여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까지 죽이라고 청한다. 김응서가 계월향의 배를 찌르자 태아는 튀어나와서 허공을 날아다니며 맴돌다가 떨어져 죽는다. 태아가 "아비의 원수를 갚으려 했는데!" 하고 말까지 한다. 그런데 이 '소서비'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나오는 판본도 많다. 왜냐면 소서비라는 창작물의 캐릭터가 애초에 고니시 본인이 아니라, 고니시의 가신인 나이토 죠안이 교섭 과정에서 사용한 명의인 고니시 히다노카미(小西飛騨守)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20]
이우혁의 왜란종결자에는 나름 개념있는 악역으로 나온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향한 충성과 무의미한 살상 사이에서 갈등하며 많은 고뇌를 한다. 닌자를 통해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물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닌자양반이 불경 적은 속옷으로 마수 방어하는걸 보고 자신도 성모송을 속옷에 적어서 사용한다.
2010년 타계한 故 김성한 작가의 소설 7년전쟁에 자주 등장한다.[21] 이 소설에서 고니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중요한 인물이며 분량도 많다.[22] 초반에는 쓰시마 사람들과 도요토미와 엮어서 자주 나오고 임란 이후 평양까지는 조선의 입장에서 서술되어 있어서 진격 상황만 묘사되었다. 이후 평양성에 주둔하면서 동시에 명나라의 심유경이 등장하고부터 비중이 많아진다.
작가는 임진왜란을 기존의 조선의 일국사(一國史)적 측면이 아니라 삼국 간의 국제전쟁(7년전쟁)으로 바라본다. 일본인이라고 깎아내리지 않으며, 조선인이라고 옹호하지 않는 중립적인 묘사가 두드러지는데 고니시 유키나가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나름 혜택(?)아닌 혜택을 본 인물이다.[23] 전쟁 자체보다 외교전에 주력하여 소설을 쓴 작가의 성향상 고니시나 심유경이 핵심 인물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 밖에 없다.
2.2 한국의 사극들
아마 한국 사극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일본인 중 한 사람. 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한자를 그대로 읽어 소서행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80년대 중순 당시 엄청난 제작비로 만들어 인기를 끌던 MBC의 사극 조선왕조 5백년-임진왜란편에서도 소서행장이란 이름으로 나온바 있다. 배역은 성우 정승현 씨[24]. 사실 16세기 조선인들이 그를 고니시라고 부를 이유가 없으므로 소서라고 부르는 게 고증에 맞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정승호가 상당히 절륜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초반부에는 배우가 그동안 자주 맡았던 배역처럼 소심하고 서민적으로 보이며, 이순신에게 매번 당하고 "이이이순신~ 이이이이이이순신"을 되뇌며 이를 가는 악역으로 나오긴 한다.
그러나 중반부에서 히데요시의 침략을 막으려는 일들이 비중있게 다뤄지며, 한산대첩에서 이순신의 승리가 단순한 한 전투의 승리가 아니라 조선군에게 전략적으로/심리적으로 희망을 줘서 전세를 바꿀 것이라는 대국적인 분석을 하고, 그리하여 이순신에 대한 반간계(삭탈관직)를 상당히 일찍부터 계획하는 등 이래저래 '지장'의 분위기를 풍긴다. 일본군 무장 중에서는 그나마 입체적으로 나오는 편.
특히 탄금대 전투를 앞두고 신립의 기병대에 대한 대책을 완벽히 준비한 후, 그에 대해 "조선 최고의 명장을 사무라이로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라는 ㅎㄷㄷ한 포스의 대사가 꽤 소름돋는다(…).
하지만 그래봐야 왜장은 왜장. 다른 왜장들처럼 이순신이순신 타령으로도 모자라, 후반부 왜교성 전투에서는 바닷물에 빠지는 굴욕을 겪기도 한다. 허우적대는 고니시를 보고 급흥분한 이순신이 그가 빠진 곳을 가리키며 "잡아라!! 소서행장을 잡아라!!!"며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압권(…) 그리고 연타로 "소서행장이 저기 있다!발사하라!!"
2015년 신작 징비록에서는 이광기가 이 역을 맡게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임진왜란 1592에서는 박동하가 배역을 맡았는데 꽤나 포스있게 나왔다. 일본의 연극무대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배우다. 이 드라마가 전반적으로 일본측에 대한 묘사는 절대다수에게 호평을 받고있지만 그중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의 김응수와 함께 평가가 가장 좋은편.3화가 너무 압도적이었다
2.3 임진록 시리즈
HQ Team 의 RTS 게임 임진록 시리즈에서 제작진이 애착이 있는건지(?) 대대로 등장하는데, 임진록에서는 시나리오 도중 '구출해야 하는' 장수로 등장한다. 대략 화친을 위해 동래성의 김시민을 만나 스스로 조선군과 접촉을 시도했는데 조선 신하들이 화친을 강력히 반대할까봐 고니시를 인질로 잡아 한성까지 데려간다.(...)
임진록 2에서는 그냥저냥한 장수로 등장한다. 많은 한국계 창작물이 그렇듯이 상인이라는 지적 이미지는 거의 없고, 검을 사용하며 가토와 비슷한 돌격무장 컨셉의 영웅. 그런만큼 적절한 체력과 적절한 공격력을 보유했다. 물론 업그레이드를 하면 사용할 수 있는 풍백술은 지상군과 해군 유닛, 그리고 건축물들에게 꽤 위협이 된다. 회오리 바람을 소환하는데 범위 내로 들어가기만 하면 데미지가 후두룩…. 한마디로 건물에 데미지가 들어가는 사이오닉 스톰. [25]처음엔 없었다가 나중에 패치로 추가됐지만 밸런스 붕괴를 막기 위한 것인지 초반에 뽑을 수 있는 본체와는 달리, 가장 마지막 테크에 있는 세이쇼오의 등용과 기술을 완료해야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다.
후속작인 스탠드 얼론 팩 임진록 2+ 조선의 반격에서는 명의 이여송, 조선의 곽재우 다음가는 흉캐가 되어서 돌아왔다. 검 영웅이라서 폭마혈도[26]를 장착할 수 있는데 또 마법 영웅이라고 기본 마나도 있어서 악세서리칸의 마법력을 퍼센트 단위로 올려주는 아이템을 장착하고 죽지만 않으면 영구적으로 늘려주는 용왕탕도 몆번 먹여 적진에 투하시킨 다음 폭뢰격 두세번만 쓰면 본진이 거의 원폭을 맞은 수준의 시망…. 일본 동족전이라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나마 이여송이나 곽재우마냥 말을 타고 다니지는 않아서 스피드는 느린데 어차피 수송기를 탈 것이기 때문에 스피드 그런 것은 안 중요하다. 테러만 잘 하면 됐지...그리고 풍백술도 여전하다. 검중에 용비늘검이라는 마법력을 200 추가시켜주는 아이템이 있어 이걸 장착하고 원거리서 풍백술 좀 쏴주고 도망가면, 쉽고 빠르게 적의 자원채취와 보병 유닛 학살을 겸할 수 있다. 처음에는 풍백술의 가치가 과소평가되어 잘 안쓰였지만 이후 초반부터 고니시를 빨리 띄워 정면교전과 자원채취를 방해하는 게릴라를 겸하며 용비늘검을 포함한 아이템빨을 기다려 그 아이템빨로 정면교전에서 압승하는 운영이 개발된 이후 지금은 일본의 유일신으로 거듭났다.
2.4 거상
천하제일상 거상에선 말을 탄 채로 쌍검을 사용하는 장수로 등장한다. 기마무사 레벨 50부터 경우 전직 가능. 쌍검난무라는 기술을 사용하는데, 자기 주위의 적들을 지속적으로 타격하는 기술이다. 중복사용이 가능하여 스타크래프트의 지우개처럼 쓸 수 있다. 요즘은 고니시가 몹보다 먼저 지워진다 레벨 90부터 2차장수 세쓰노카미[27]로 전직시킬 수 있다. 일직선으로 돌격하여 적들을 관통하면서 일격을 가하는 기술을 쓰는데 상당히 강력하다.
여담으로 이 2차장수 세쓰노카미의 배경 스토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고니시가 고향으로 내려가 은둔하다가 용마를 보고 전 재산을 털어서 그 용마를 샀다는 내용. 배경스토리가 역사를 뒤엎는 것으로도 모자라 판타지 소설 수준이다...
2.5 코에이 게임
지휘봉의 행방에서는 상인 출신이라 주판을 들고 있다. 비주얼 신장 150cm, 비주얼 연령 43세, 취미는 돈계산. 꽤나 계산적인 성격이나 그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이묘로서 가신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한 것. 패색이 짙어지자 불필요한 희생을 막기 위해 항복한다. 세키가하라 후 역사대로 처형당하지는 않고 안코쿠지 에케이와 함께 상인으로 해운업을 운영하게 된다.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한국인들에게 흔히 알려진 무관의 이미지보다는 주로 정치력이 B급인 문관 타입으로 등장하는데, 전투나 지모도 크게 낮은 편은 아니지만 반대로 특화된 능력치도 없다. 노부나가의 야망 창천록에서도 각 능력치가 50~60대 사이를 오가는 고만고만한 무장이라 참 써먹기 애매했다.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에서는 후나부교를 맡았던 경력 때문에 수군 적성이 S를 찍기도 했다. 다른 시리즈에서도 그랬는지 추가바람. 천도에선 수군이 없어졌기 때문에 쓰기 힘든 수준으로 떨어졌다. 다만 철포능쳑치가 괜찮기 때문에 군소 다이묘에 후반 시나리오를 한다면 쓸만하다(특히 후반부 모리 가문이나 우키타 가문으로 플레이 한다면 중요한 인재풀중에 한명이다).
문제는 능력치 인플레가 심한 코에이 게임에선 어정쩡한 수치를 가진 만능형 케릭인 고니시가 설 자리가 없다(합산 능력은 낮지 않지만 특화된 능력이 없다. 차라리 능력치 총합으로는 고니시보다 딸리는 후쿠시마가 더 쓸모가 있다). 게임에선 50-50-50보다 100-0-0이 더 쓸모있다. 쉽게 말하자면 장비의 무력을 잘라서 지모나 정치에 줄 미친 사람은 없다. 차라리 지모, 정치를 잘라서 무력에 올인할지언정...
전 시리즈에서는 숨겨진 능력인 종교는 가톨릭으로 나온다.
알다시피 혁신에서는 수군적성이 S이다. 능력치는 77/63/70/84의 정치만 +B급이고, 나머지는 -B의 무장. 적성들은 철포,게략이 B이고, 병기,내정이 A이고, 전법이 창금 1단계, 철포 1단계 매성을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B급이다. 그대신 병기, 내정이 A이라 어느정도 굴려갈수가 있고 수전에서는 한 A급정도 되고, 철포1을 가지고 있고 적성도 B이라서 육지에도 부장용으로 쓸만하다.
태합입지전 5에서도 그럭저럭 쓸만한 문관. 상인 출신이라 그런지[28] 산술과 변설 적성이 높아서 군자금조달이나 매입, 매각 등 재정 관련 주명을 수행하기 딱 좋다. 가신으로 두고 있으면 돈도 잘 벌어오는 편. 하지만 전투 쪽으로는 능력치가 좋지는 않고 병과적성 중 수군 적성은 높지만 해적을 하지 않는이상 별 쓸모 없는 능력치라... 천주교 신자임을 보이는 듯 여기서는 목에 십자가를 걸고 있다.이 게임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아버지인 고니시 류사도 상인 직업으로 등장하며 플레이도 가능하다. 근데 어째선지는 모르지만 사카이가 아닌 주고쿠 지방의 히메지의 상인으로 나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플레이 할 경우엔 유키나가가 직속 부하로 들어오는 이벤트가 있다. 사족으로 패도의 장에서 상인으로 플레이 할 경우 당주인 아버지와 혈연 관계라 독립이벤트를 볼 수 없으니 주의. 아버지가 병사해서 본인이 이어받거나, 평정때마다 상인사분쟁이 뜨기만을 바라야 한다.
전국무쌍 시리즈에는 4편까지 출연하지 않은 상태. 가토도 3편에서 등장했는데 안습. 미쓰나리, 기요마사와의 관계 덕에 출연을 원하는 인물을 투표할 때 십위 안에는 들고, 미쓰나리 주변 인물이 거진 다 나왔으니 앞으로 못 나올 법은 없다. 이제 서군에 추가할만한 사람은 그 아니면 바다를 헤엄쳐 오사카 전투와 엮을 수 있는 우키다 히데이에, 모리가와 엮을 수 있는 안코쿠지 에케이 뿐이다.
100만인의 전국무쌍에는 출현했는데, 서양풍의 복장을 하고, 주판을 들고 있는 채로 나왔다.
2.6 마계전생
마계전생 OVA에서는 고니시의 비참한 최후에 원한을 품은 고니시의 가신이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를 배후조종하여 시마바라의 난을 일으키고 반란 실패 후 죽어가던 아마쿠사에게 마인으로 전생할 것을 제안하고, 어린아이들마저도 학살한 야규 쥬베이에 대한 원한[29]에 사무친 아마쿠사가 이를 받아들여, 아마쿠사를 사랑하던 가신의 딸을 제물로 마인으로 전생하는 내용이 나온다.
2.7 효게모노
9권에서 첫 등장. 외모는 현존하는 초상화나 동상의 이미지를 거의 그대로 따르며, 어딘가 한군데씩은 똘끼가 있는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비교적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 기질이 호방한 다른 다이묘들과 달리 신중하다 못해 소심해보이기까지 할 정도.
명의 심유경과는 함께 상인의 독립국을 건설하기로 의기투합한 베프 수준이며, 심유경과 함께 기본적으로 주전보다 주화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이시다 미츠나리와 같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간계로 구워삶아보려다 실패하는 장면도 잘 묘사되어 있다.
가토 기요마사와는 은근한 알력을 보인다. 가토가 포로 상태에서 도망치려던 임해군, 순화군과 마주쳐 싸닥션을 날리며 위협하자 간지나게 나타나서 왕자님들에게 사과하라며 훈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로는 등장이 좀 뜸해진 상태. 아마 역사적 수순대로 이시다 미츠나리 편에 붙어 상인 독립국의 야망을 불태우다 비장하게 최후를 맞을 듯하다.- ↑ 『선조 실록』 선조 28년 절에 "행장 올해 서른 여덟." 이라는 설명이 유일한 기록이다. 역산하면 로쿠 원년(1558년)에 태어난 것이 된다.
- ↑ 공교롭게도 칼의 노래를 집필한 소설가 김훈 선생과도 세례명이 같다.
- ↑ 이방자 비의 외가.
- ↑ 지금의 오사카. 이것 때문에 칸사이벤을 사용한다는 동인설정이 붙기도 한다. 사카이 쪽이 아니라 산요 지방, 현재 고베, 히메지, 오카야마 지역이라고도 한다.
- ↑ 사실 어린 시절에는 신앙심이 깊지 않았으나, 독실한 가톨릭 무장인 다카야마 우콘과 친교를 맺고 나서 신앙심이 깊어졌다고 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거의 사람이 달라져서, 거만했던 행동이 사라지고 온화하고 겸손한 성격이 되었으며 오사카에 한센병 요양원을 세우고 고아원 사업에 힘썼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이는 고니시 자신의 세례명의 유래가 된 인물과도 비슷한 부분이다. 항목 참조.
- ↑ 칼의 노래에도 고니시의 열십자 깃발과 그가 믿는 야소교의 교리(이 세상 인간의 죄를 누군가가 대신 짊어진다는)에 대해서 이순신이 포로로부터 전해듣고 의아해하는 대목이 있다. 이순신은 물론 그 십자 깃발이 세워진 자리가 적장의 자리고 화력을 집중시켜야 할 곳이라고 다시금 인식하시게 되지만(...).
- ↑ 고니시 안토니오는 제 4차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한다.
- ↑ 평양에 주둔하면서 조명연합군과의 전투 도중 동생과 사촌을 잃기도 하였다.
- ↑ 단, 당시의 상인은 재력을 바탕으로 한 무력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고니시 자신도 '전투에서는 선봉에서 싸워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 ↑ 가톨릭에서 자살은 금기사항. 같은 가톨릭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그 자리에서 자결하지 않고 재판을 통해 사형당한 것도 이 때문이다.
- ↑ 고니시 마리아의 아들은 외가의 성씨를 따라 고니시 만쇼가 되었고, 훗날 신부가 되었다. 그러나 고니시 만쇼 신부 역시 1644년에 에도 막부의 천주교 박해에 걸려들어 순교하였다.
- ↑ 다만 직계는 아니지만 그의 후손들이 어느 정도 살아남긴 했던 것 같다. 경복궁 궁궐 지킴이 중 하나로 한국인과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둔 고니시 다카코(小西貴子)씨가 그의 후손 중 하나이며, 2007년에는 후손들이 한국을 방문했다는 기사도 있다.
- ↑ 당시 일본에선 히데요시는 물론이고 거의 대부분의 무장들은 한문을 몰랐다. 아니 한문은 고사하고 자기 이름도 일본어로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일본 무장들이 본격적으로 교양을 갖추게 된 건 에도 시대였는데 에도 시대는 일본의 이전 시대들에 비해 유교의 영향이 강했다.
- ↑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이번에 진주로 가는 우리 일본 군대가 30만 명이나 되니 아마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편지를 보내어 은밀히 알려』 진주 백성들로 하여금, 미리 예봉(銳鋒)을 피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우리 일본 군대도 성이 텅 비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는 곧 철병(撤兵)하여 동쪽으로 돌아올 것이다.
- ↑ 선조 40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10일(임술) 8번째기사
- ↑ 언급이 없진 않다. 적어도 동상이 세워질 정도면 꽤 지명도 있는 무장이다. 다만 동상이 세워질 당시 우토시에서조차 반대 의견이 많았다. 그만큼 400년간 평가절하되었다는 이야기다.
- ↑ 육전에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히데요시가 수군을 동원할 때는 항상 선봉에 섰으니, 군사적 재능도 뛰어났을 것이다. 키이의 사이가 정벌, 시코쿠의 초소가베씨 정벌이나 큐슈의 시마즈씨 정벌에서 수군을 이끌고 큰 활약을 했다.
- ↑ 고니시가 참여한 전투중에 패전이나 성과가 크지 않은 전투는 대부분 본인이 주도적으로 역량을 발휘할 만한 기회가 없었던 경우 아니면 압도적인 우위에 밀려난 경우 둘 중 하나였다. 4차 평양성 전투는 조선군과 명군 등 5만이 투입되어 단순 비교로도 고니시군의 3배에 달했고, 오토모가 원군을 보내주지 않아 이미 3차에 걸친 전투로 지친 고니시 군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행주대첩 등 다른 전투는 모두 주요 지휘관이 아니라 그 일원으로만 참여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세키가하라 전투조차 고니시 군은 주축이 아니었다.
- ↑ 엔도 슈사쿠는 고니시 이외에도 오토모 소린 등 키리시탄 다이묘를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주로 현실정치와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거나 신앙인답지 못한 자신의 행동 때문에 고뇌하는 등장인물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것이 특징.
- ↑ 유키나가의 관직명은 셋츠노카미(攝津守)라서 구분할 수 있다.
- ↑ 이 소설은 사실 90년대 초반 이후 절판되었다가 2012년 이십여년만에 5권으로 재출간되었다. 전쟁 자체보다 외교 문제를 많이 다룬다. 임란 수년 전부터의 일본과 쓰시마의 상황이라든가, 1593년즈음부터 정유재란 직전까지의 심유경과 고니시의 행적등을 집중적으로 다룬 책이다.
- ↑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선조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부터 힘없는 백성들까지 객관적으로 묘사된다. 등장인물도 엄청많다. 그중에서도 고니시의 비중이 많다.
- ↑ 오히려 작가는 고니시나 가토같은 무장들보다는 '무능한 통치자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임'을 밝히며 당시 삼국의 지도자들, 즉 조선의 선조, 명의 만력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 ↑ 용의 눈물에서 정몽주 역,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정승화 참모총장, 왕의 여자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을 맡았다.
- ↑ 사실 데미지 자체가 잘 박히는건 기병인데 보병 유닛들의 맷집이 워낙 약하고 물량위주로 운영하는데다 풍백술의 지속시간이 길어서 보병학살용으로도 잘 쓰이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일꾼에게도 잘 먹힌다. 해상전에서도 장수가 나서는건 제한되어 있으므로 쏠쏠하게 도움이 되겠지만 건물 자체를 터뜨리기 위해 쓰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 ↑ 폭뢰격, 즉 범위 내 메카닉과 건물들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기술이 생기는 검 무기다.
- ↑ 고니시 유키나가의 관직이 셋츠노카미였다.
- ↑ 1575년 패도의 장 플레이 시에는 아예 직업이 상인이다. 아버지 아래에서 일하게 된다.
- ↑ 사실 쥬베이는 아이들을 죽이지 않고 그냥 지나갔지만 그 직후 나타난 가신이 아이들의 목을 친 후 아마쿠사에게 쥬베이가 죽였다고 거짓말을 한 것인데 이로 인한 분노로 폭주하는 아마쿠사의 초능력에 위기에 빠진 쥬베이가 아이들의 목을 이용해 그를 쓰러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