宇都宮廣綱
(1545 ~ 1576?)
히사츠나가 나스 타카스케와 소토메자카 전투로 싸웠지만 패하고 사망하자 6살에 하가 타카사다에게 보호를 받아 가독을 상속받았는데, 미부 츠나타케의 공격으로 우츠노미야 성을 탈취당했다.
1551년에 하가 타카사다의 모략으로 나스 타카스케를 센본 성에서 암살했고 1555년에는 하가 타카테루가 암살당한 후에 미부 츠나타케가 사망했는데, 히로츠나는 사타케 요시아키의 둘째 딸을 아내로 맞이해 혼인 동맹을 성립시켰다. 1557년에 사타케 가문의 도움을 받아 우츠노미야를 되찾았으며, 1558년에 우에스기 겐신이 공격하자 분전해서 이를 막았다.
1559년에 겐신이 오다와라의 호죠 가문을 공격하자 이에 가세해 유키 하루토모가 있는 곳을 공격했지만 빼앗지 못하고 퇴각했으며, 1561년에 겐신의 오다와라 정벌에 사타케 가문 등 관동의 제후들과 함께 겐신에게 가담했다. 또한 반 우에스기로 호죠 가문에 가담한 사노 마사츠나, 오야마 히데츠나 등의 공격에도 참전했으며, 1564년에 호죠의 세력이 늘어나자 인질을 보내는 것으로 형식적으로 항복했다.
1570년에 우에스기, 호죠가 에츠소동맹을 맺자 사타케 요시시게와 함께 다케다 신겐과 고소동맹을 맺었지만 별 효과는 없었으며, 에츠소동맹으로 인해 우에스기 가문의 협력이 사라지면서 호죠 가문의 공격으로 위협받았고 겐키 연간[1]에는 병으로 눕게 되었다. 1572년에 미나가와 토시무네, 오카모토 소케이가 외교를 둘러싼 시비를 하다가 토시무네가 소케이를 살해하면서 토시무네가 반란을 일으켜 우츠노미야 성을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토시무네를 미나가와 성으로 퇴각하게 만들었지만 미나가와 가문이 적대 행동을 해 호죠 가문을 따르자 사타케 요시시게와 함께 여러 번 공격했으며, 1577년에는 차남인 하루토모를 유키 가문에 양자로 보내고 1578년에는 기온성에서 쫓겨난 오야마 히데츠나와 호죠 가문의 화목을 중개했다. 덴쇼 연간[2]에 호죠 가문이 세키야도 성, 코야마 성을 탈취하고 겐신이 사망하면서 관동 지역을 호죠 가문이 패권을 잡게 되자 사타케, 나스, 유키 등의 가문들과 반 호죠 연합을 형성해 대항했다.
1576년에는 호죠 가문의 공격을 상정해 타케야마성을 짓기 시작했으며,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1576년에 사망하면서 1580년까지 그의 사망을 비밀로 했다거나 1577년, 1580년에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 창작물에서
1.1 전국 바사라 3
파일:Attachment/Sengoku basara 3 uchnomiya hirochna.png
성우는 요시다 타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