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모즈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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友鶴事件

1 개요

제4함대사건과 같이 과도한 개함우월주의에 젖은 일본군 해군이 저지른 병크들 중 하나. 선체 설계 이론의 오류와 과도한 무장, 거기에 악천후 스케줄 강행이라는 병크 삼박자가 겹쳐져 일어난 해양사고. 토모즈루를 독음으로 읽은 우학사건이라고도 불린다.

2 본문

일본 해군은 워싱턴 해군군축조약에 의해 주력함의 숫자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보조함인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등을 충실시 하는 것으로 대응하려 했었다.

하지만 이후에 있었던 런던 해군군축조약 이후 보조함까지 제한이 가해지면서 기존 함선의 전력을 강화시키는 한편, 조약의 대상이 아니었던 기준배수량 600t 이하의 함정을 구축함만큼의 중무장으로 건조해서 조약을 회피하려고 치도리급 어뢰정을 만들었는데 기준배수량 544톤짜리가 12.7cm 50구경장 함포 연장, 단장 하나씩에 53cm 2연장어뢰 2개(어뢰는 8발 휴대)라는 엄청난 과적을 하였다.(배수량의 24%가 무장무게. 비슷한 시기에 건조된 구축함인 하츠하루급 구축함이 1530톤에 12.7cm 50구경장 함포 연장 2문 단장 1문, 90식 3연장 61cm어뢰발사기 3기(어뢰는 18발 휴대)인거에 비하면 엄청난 과적이다.) ) 이러한 함정의 한계를 넘는 과도한 무장은 함의 복원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해군본부의 건조 책임자 이었던 후지모토 기쿠오 소장은 해군의 요구사항을 어떻게 맞추어서 만들어 내고 있었다.

2.1 상황 전개

이 와중에 1934년 2월 경순양함 타츠타(龍田)를 기함, 치도리급 수뢰정 1번함 치도리(千鳥), 2번함 마나즈루(眞鶴), 3번함 토모즈루(友鶴)로 하는 사세보 경비대 제21수뢰대가 편성되었다. 제21수뢰대는 1934년 3월 12일 오전 1시 사세보항의 테라지마에서 출항해 치도리, 토모즈루의 순서로 오오타테시마(섬) 남쪽 바다로 향해 폭풍우를 무릅쓰고 기함 타츠타와 연습전투 훈련을 진행했는데 점점 풍랑이 거세졌다.

오전 3시 25분에 훈련은 종료되고 타츠타와 휘하 함대는 사세보에 귀항하였다. 그러나 풍랑이 거셌던 탓에 함의 동요는 심해졌고, 3시 58분에 이르자 토모즈루는 무전 불능상태가 되어 서로 발광신호로 연락을 유지하였다. 그로부터 14분 뒤인 4시 12분이 되자 토모즈루의 발광신호마저 끊어져 버렸고 다른 함선들은 즉시 토모즈루가 실종된 지점으로 돌아가 높은 파도 사이로 탐조등을 비췄지만 찾을 수 없었다.

7시 45분에 토모즈루가 행방불명 되었다고 판단, 제 1보를 발령한다. 타츠타는 기상이 악화되고 파도가 높아짐에 따라 탐색이 불가능 할 것 이라고 판단하여 오전 9시 45분에 임시 정박지에 입항한다. 11시 12분 타츠타는 탐색을 재개했으며, 사세보 진수부 소속 함선의 각 수상기들과 제21구축대와 함께 근해를 수색을 실시한다.

제 1보 발령이 된지 7시간 20분만인 오후 2시 5분에서야 전복한 채로 표류중인 토모즈루가 발견되었다. 타츠타가 토모즈루를 예항을 준비하는 도중 2명의 생존자가 해수면 위로 올라온 것을 타츠타에서 목격하였지만 이들은 바로 가라앉아 실종되었다. 구조된 승조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혹시 잘못되면 사세보에 있는 가족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외부 인원과 접촉을 시도한 인원으로, 탈출하는 중 시간을 너무 지체하여 체력이 다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여튼 이들의 희생으로 배 안에 생존자가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토모즈루 발견 30분 후 오후 4시 26분, 타츠타가 토모즈루를 예항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예항용 밧줄이 절단되어 교체하는데 시간을 소비했지만 다음날 오전 7시 15분 사세보항에 무사히 입항했다. 입항 후 생존자 확인을 진행 한 다음 함체를 부상 시킨 뒤 생존자 반응이 있던 제4병사실에 잠수부가 공기를 보냈다.

오후 8시에 도크에 입거시켜 배수시킨 후, 배 밑에 직경 50cm의 구멍을 뚫었다. 구조원은 구멍에 뛰어들어 겹겹히 쌓여 있는 시신들 사이에서 생존자를 구출했다. 구조 작업 중에 자력으로 탈출한 인원도 있었다고 한다. 113명의 정원중 13명의 생존자를 구출했지만 정장 이와세 오쿠이치 소좌 이하 100명이 사망, 실종되었다.

그 이유로 나오는 것이 과도한 무장으로 인한 무게중심이 올라감, 조함미숙, 탁상에서만 계산한 당시의 미숙한 복원성 기준에 맞춘 것 등이 있다.

이 사건으로 당시 건조되고 있던 모든 함선에 대해 전면적인 재설계 및 기존 함선의 개조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후지모토 키쿠오 소장은 자신이 설계한 함선들에 대한 전면적인 재설계중에 과로로 뇌졸중을 일으켜서 사망하였다. 지못미

여담이지만 이 사건은 당시 조선에서도 호외로 보도될 만큼 큰 사건이었다. 동아일보에서 3월 12일 토모즈루의 실종을 호외를 내보낸 이후,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구조 과정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