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전투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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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포 해전 | ||
날짜 | ||
1593년 음력 2월 6일~3월 6일 | ||
장소 | ||
조선 경상도 웅천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조선 왕국 | 쇼쿠호 일본 |
지휘관 | 충무공 이순신 원균 이억기 | 구와나 치카카츠† 코우소카베 치카우지†[1] 하타 치카시[2] |
병력 | 전선89척 | 불명 |
피해 규모 | 불명 | 51척 격침 2500여명 전사 |
결과 | ||
조선 수군의 승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입국 저지. |
목차
1 소개
1593년 2월 10일부터 무려 1개월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왜 수군 간의 해전이자, 사상 최초로 이순신이 상륙전을 전개했던 전투.
2 전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옥포 해전을 비롯해 한산도 해전, 부산포 해전까지 승승장구하였지만 아직도 일본의 세력은 만만치가 않았다. 이는 일본의 수군의 배가 많은 것도 이유가 되지만 조선군의 함선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부산포 해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 수군은 재무장이 강화되어 낙동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호남지역 내륙으로 진출하고, 해상으로 병진하기 위해 웅포 연안에 전선 115척에 수군 1만여명의 전진기지를 설치하였으며, 부산포에는 또 다시 500여척의 함선이 정박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웅포의 적 수군이 부산가는 길목을 막고 있는 한, 이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부산 출격이 불가능하며, 또한 부산으로 초월 공격을 한다해도 일본수군의 양면 협격을 당할 경우, 열세한 통합함대가 중과부적으로 역공을 당하여 대패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순신은 웅포를 먼저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2.1 출격(2월 6일 ~ 10일)
이에 이순신은 2월 6일 낮 12시 42척의 전선을 인솔하고 출격하였다. 2월 7일 남해도 남단 미조목을 거쳐 사량도에서 일박하고 2월8일 정오에 견내량에서 이억기함대 전선 40척과 원균 함대 전선 7척과 합류하여 통합 함대 편성을 하였다. 총함정 세력은 89척이었다. (원균이 경상우수영 병력을 제대로 온존시켰다면 경상우수영 완편함대 기준 170척 가량이었을 것이다.. 원균 ㅅㅂㄹㅁ)
연합 함대는 2월 8일 오후에 견내량을 출범하여 저녁 늦게 칠천도의 외줄포[3]에 당도했다. 일기불순으로 2월 9일과 10일은 해상기동이 불가능하여 계속 그곳에서 유박 하면서 작전계획을 검토했다.
2.2 교전(2월 11일 ~ 3월 6일)
2.2.1 웅포지역의 특징
웅포지역은 웅천읍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웅포를 가기위해서는 ㄷ자의 웅천왜성(남산왜성)과 지금 전망대가 있는 곳(백석 말이고 지금은 남문 전망대)을 지나가야하나 그 폭이 600미터 내외로 조선 수군의 주력인 판옥선이 진을 형성하여 들어가기는 불리하였다.
폭은 600미터이지만 진입할 수 있는 거리는 200미터 내외이고 웅포까지의 거리가 1.5km인데 좁은 수로의 폭으로 형성되어있어서 접근하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왜군은 웅천왜성과 반대편 능선(백석말)에서 조총으로 무장하여 이동하기가 불리하였다.
그래서 이순신 연합 함대는 주력을 송도 서측 해안에 결진 대기케 하고 수심이 깊은 밀물 때를 이용하여 7∼8척이 교대로 진입하여 유격전식 전법으로 장기소모전을 펴면서 적을 격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웅포 해전은 8대 해전 중 최장기전으로 무려 1개월간 계속 되었는데, 2월 10일, 12일, 18일, 20일, 22일, 28일 그리고 3월 4∼6일의 7회에 걸친 맹공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2.2.2 해전
기간 중 해전은 2월 18일 웅포에서 5척, 3월 4일 저도(거제도)에서 8척, 3월 5일 저도(거제도)에서 17척, 3월 6일 청승에서 21척, 도합 51척을 분멸하였다. 국내 사료에는 구체적인 일자별 전과가 없이 20여척으로 돼있으나, 일본 사료에는 피해를 일자 별로 정확히 제시하고 있다. 웅포해전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마지막 단계인 2월 22일에는 이순신이 최초의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했다는 사실이다.
2.2.3 수륙병진 작전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순신은 수륙병진 공격을 주장해왔는데, 웅포 일대에는 그 당시에 적 육군 1만 6천여명의 대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부산포 해전이후 관하에 1,600여명의 승군과 의병으로 하여금 적 접근예상 통로를 차단·방어케 하고 있었던 바, 웅포의 적을 포위 섬멸키 위해 이들 중 1,100명을 2월 22일 남양리(웅포 동쪽)에, 600명을 제포(웅포 서측방)에 각각 상륙시켜 수륙 3방향에서 포위공격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웅포 주위에 왜성이 많이 있어서 왜군들의 입장에서는 수비를 하기가 좋았다. 또 왜군의 입장에서는 물러 설 수 없는 위치적, 지리적 특성때문에 1만6천여명이 포진 하였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이는 웅천 왜성,웅천 읍성,제포성, 왜성이 있어서 수비에 대한 부담을 들기가 편했을 것이고, 또 웅천도 요지에서 도공을 데려가기 위해서는 물러설 수 없지 않았을 것이다.
2월 22일, 웅포를 공격한 공격함대는 화포로 많은 적선을 파괴했고, 상륙한 의병과 승병은 다수의 적을 무찔렀다. 이순신의 당시 장계를 보면 상륙군의 결정적인 역할과 활약상을 알 수 있다. 「...... 의 승병들은 창을 비끼고 혹은 활과 총통으로 종일 돌격전을 감행하여 무수한 적을 쏘아 죽였다. 비록 참두는 못했다해도 우리 군사는 부상당한 사람이 없었다.」 이 날 수륙합동작전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적 수군과 육상의 육군을 완전 격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웅포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수로를 이용해야 했는데 이는 사화랑에서 제포까지 거리가 가까운 이유도 있었지만 사화랑에서 제포까지 산들이 막혀있어서 육로로 갈 형편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사화랑에서 제포까지는 5리 정도되고 조선 수군의 배로 이동을 해도 30분안에 도착할 수 있다. 조선군들이 제포에 상륙을 하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 간길은 제포에서 제포성 방향이다. 조선 수군이 삼포왜란때 왜군이 갔던 그길로 똑같이 갔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이는 길이 하나이기 때문인 이유이다.
특히 적 수군은 통합함대의 접근을 막기 위해 목책을 설치하여 당파 당하지 않도록 아군함의 기동을 저지했고,[4] 양안(남산과 백석말)의 조총진지에서 사격으로 엄호하였다.
명군의 합류를 했다면 제포에서 웅천왜성 방향과 웅천읍성 방향 두 방향으로 들어간다면 왜군의 입장에서는 세 군데를 막아야 하기때문에 곤란했을 것이었다. 웅포 방향으로 오는 조선 수군과 양갈래로 오는 명군과 조선군을 막으려면 병력이 분산해야하기 때문이다. 다만 명군이 합류했다고 해서 승리를 가져오지 못했을 것 같다는 의견도 있다. 이는 지휘체계 문제도 있고 명군의 소극적인 자세도 이유가 된다.
2.2.4 재정비 그리고 재공격(2월 28일 ~ 3월 6일)
연합함대는 2월 28일 일단 칠천도의 외줄포로 물러서서 부대를 재정비 한 다음 주력을 이곳에 두고서 일부 공격부대로 하여금 2월 28일 당일은 물론 3월 6일 재차 공격을 감행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5]
2.3 통제영 복귀(3월 10일)
이순신이 건의한 바 있는 조·명 연합군의 공격기동을 더 이상 기대할 수도 없고, 온다던 명나라 수군은 나타나지 않으며 농민들의 파종 시기가 늦지 않아야 함으로 3월 10일 웅포 해전을 마감하고 본진으로 귀환하였다. 무려 1개월이 넘는 장기원정 작전으로 장병들의 피로는 극도에 달했고, 군수지원 문제도 벽에 부딪혔다. 더 이상 적의 영향권내에서 머무를 수가 없었다.
3 전과
1개월여의 7회에 걸친 장기 지구전에서 이순신 통합함대는 적선 51척을 당파·분멸 했으며, 적군 2,500여명을 수륙협공으로 사살한 대전과를 올렸다. 이순신이 웅포해전에서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겨준 승리를 얻는 동안 다행히 2월 12일 행주산성에서 권율장군이 대승을 거둠으로써, 적은 더 이상 서울을 사수하지 못하고 4월 18일부터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4 평가
흔히 웅포 해전은 별로 중요한 해전이 아닌 것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으나, 명·일 강화 교섭기에 행하여진 중요한 일전이었다. 특히 선조가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기 상당 기간 이전에 정식 명령에 모든 수군을 총동원하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봐 삼도수군통제사 직제를 창설할 구상을 하고 있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 척의 배도 돌려보내지 말라」(片帆不退)는 강력한 왕의 지시는 적의 퇴로차단과 추격소탕 의지를 내포하고 있었던 바, 이순신은 최장기간인 1개월 3일간의 힘겨운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작전권을 쥐고 있는 명나라 군대가 일본과의 강화교섭을 진전시키기 위해 육군은 물론 수군에게 전투중지 지시를 하달하였다.
아무튼 이순신의 웅포 해전은 도요토미의 특별명령에 따라 적 수군이 웅포에 구축한 해상전진기지 겸 육상전초기지를 반신불수로 대파함으로써 일본과 명나라간의 강화협상에서 조선에 불리한 조건들을 일방적으로 일본이 관철치 못하도록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
특히 강화기간 중의 웅포 해전 승리는 도요토미의 조선 입국을 멈추게 하고 일본군의 서울철수를 불가피하게 강요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물론 2월 12일의 행주 대첩을 가능케 한 간접적 요인도 됐다.
이순신이 전라도를 지켰기에 권율이 3천명의 의병을 전라도로부터 동원하여 상경할 수 있었고, 충청수사 정걸이 판옥선에다 화살과 쌀을 싣고 한강 하류에 갖다 대어 행주 산성의 전투원들에게 추진 보급할 수 있도록 보장한 것 역시 이순신의 전라도 해역 제해권 확보 덕분이었다.
웅천 해전이 진행 중이던 1593년 2월 27일 서울에 모인 일본 장수 15명은 논의 끝에 다음 사항을 결정했다.
① 식량이 부족하므로 부산까지 철수한다.② 부산에 가서 도요토미에게 건의하여 본국 철수 여부를 결정한다.
그리하여 그후 3월에 서울에 왔던 도요토미의 특사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선 현지 주둔군 장수들의 의견을 수렴한 건의문을 갖고 귀국하기에 이른다.
① 병사들에게 잡곡밥을 먹이면 4월 11일까지는 견딜 수 있다.② 서울까지 식량 추진이 불가능하다.
③ 전라도를 치는 일은 신중한 계획이 필요하다.
④ 전라도와 경상도를 치고 난 다음 해안가에 튼튼한 성을 쌓을 것이다.
이리하여 강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다음 사항이 비밀리에 합의됨으로써 명나라는 조정과 수군에게 공격중지 지시를 하달하게 된다.
① 일본군은 부산방면으로 철수하되, 명군과 조선군이 도중에 공격 못하도록 보장한다. 일본군도 도중에 약탈과 살인을 하지 않는다.② 일본군은 서울철수와 동시에 두 왕자를 돌려보낸다.
③ 일본군은 4월 18일 서울을 떠난다
이 정도의 강화교섭이라도 성사시킬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한 것이 이순신이 그 동안 이룩한 수군의 전과 덕분이었다.
5 패전?
백지원의 조일전쟁은 웅포 해전을 패전이라고 주장하는데, 전선이 암초에 걸려 좌초해서 그 배에 있던 수군 병사들이 육지로 올라가 도망치거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 걸 300명을 잃는 참사라고 하였다. 웅포해전은 해상대결을 피하는 일본때문에 임진년 해전만큼 당장 눈에 띄는 전과는 안 보이지만, 그럼에도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조선 수군이 철수한 것도 상술한 거처럼 조명연합 육군의 지원은 없고 파종시기가 다가와서 한 것이지 조선 수군의 피해가 커서 그런 게 아니다. 그리고 웅포를 함락시키지 못했다지만, 애당초 수군만으로 웅포 수복까지는 무리였고, 그래서 육군의 도움이 필요했으나 그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지, 이순신의 패전이라고 할수는 없다. 결정적으로 조일전쟁에서는 졍유년 초 이순신이 파직당히기 직전의 부산포 출동에 대하여 원균이 통제사가 되고 올린 장계 내용을 웅포해전에서 그 때의 상황이라고 적고 있다. 즉, 사료인용 자체가 잘못됐다.- ↑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조카, 쵸소카베 모토치카 대신으로 참전하였으며 교전기간중 병사하였다고 한다.
- ↑ (波多 親) 또는 노부토키(信時)로 불렸다. 임진왜란시 2000명 혹은 750명을 이끌고 도해하였으며 진주성 전투나 웅포 해전에서 소극적으로 행동했다고 비난을 받아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유배당했다. 유배지에서 죽었다는 얘기도있고, 낭인이 되어 명량해전에 참전했다는 얘기도 있다.
- ↑ 외줄포에 대한 기록은 있으나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견내량전투에서 패한 지역이 외줄포가 아닌가 추청됨.
- ↑ 목책은 바로옆 제포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출입하는 선박을 관리하기 위해서 였다면 웅포에는 조선함대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 주 목적이었다고 보임
- ↑ 칠천도와 외줄포로 이순신 함대가 간 이유는 임진왜란 동안 조선 수군의 숙영지이기도 하지만 육안상으로 거제도에서 웅포가 보이고 웅천왜성에서도 거제도가 보인다. 사화랑에서 철수했던 원인이 일본군의 병력이 사화랑을 넘어서 기습공격할 가능성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