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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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 문서가 설명하는 국호의 유래인 고대 국가 : 고조선
  • 유사한 국명을 가진 한반도 북부에 위치한 국가/반국가단체 : 북한
  • 조선소에서 배를 건조하는 일 : 조선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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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px
1392~1897
건국1392년 8월 5일[2]
위치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
수도한성부[3][4]
정치체제전제군주제
국가원수(王) → 대군주(大君主)[5]
주요 국왕초대 태조 (1392년 ~ 1398년)
3대 태종 (1400년 ~ 1418년)
4대 세종대왕 (1418년 ~ 1450년)
7대 세조 (1455년 ~ 1468년)
9대 성종 (1469년 ~ 1495년)
14대 선조 (1567년 ~ 1608년)
16대 인조 (1623년 ~ 1649년)
21대 영조 (1724년 ~ 1776년)
22대 정조 (1776년 ~ 1800년)
26대 고종 (1863년 ~ 1897년)
국성전주 이씨
언어한국어, 제주어[6], 만주어[7]
종족한민족, 여진족(재가승) 등
종교유교(국교), 불교, 민속신앙[8]
주요사건1392년 건국
1446년 훈민정음 반포
1474년 경국대전 반포
1592~1598년 임진왜란
1636~1637년 병자호란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1894~1896년 갑오개혁
1897년 대한제국 선포[9]
통화문 (1633~1892)
양 (1892~1902)
(원 (1902~1910))
성립 이전고려
성립 이후대한제국
멸망 이후일본제국령 조선 / 대한민국 임시정부

1 개요

조선은 고려의 뒤를 이어 1392년부터 1897년(또는 1910년)까지[10] 505년(또는 518년)간 한반도와 부속 도서를 지배했던 왕국이다. 고려 말 황산대첩 등으로 무신으로서 명성을 얻은 이성계고려를 멸망시키고고조선에서 이름을 가져와 세웠다. 고조선은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후세에 고조선이라고 일컫는 거지, 본래 고조선이 존재하던 시절의 명칭은 조선이었다. 마찬가지로 후백제, 후고구려도 당대에 백제, 고려[11]로 불렸지만 편의상 후백제, 후고구려로 일컫는다. 1897년에 고종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조선이라는 국호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그 외에는 별로 바뀐 게 없기 때문에 대한제국을 조선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국호를 조선으로 한 것은 1393년 음력 2월 15일이며,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었고,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강점되기 때문에 약 13년 간의 차이가 발생한다.

후삼국시대를 거친 고려와 달리 이성계의 쿠데타로 만들어진 왕조이기에 고려를 그대로 계승한 것을 봐도 무방하다. 다만 고려 말 원나라의 몽골 황실이 내정을 간섭하던 시기 중원에서 들어온 여러 문물들과 당시 변화된 정국이 이전 고려와 이후 조선의 차이를 크게 결정지었다.[12]

가장 큰 차이는 숭유억불. 조선 이전의 국가들은 중원에서 유래된 종교적 색채의 학문인 유교를 정치적인 학문 정도로 봤지 종교로 보진 않았으며, 삼국사기 중기 이래 천년간 우세했던 전통적인 불교가 국교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고려 말 중원에서 성리학[13]이 들어오면서 여기에 크게 감화된 사대부들이 조선을 개국하면서 유교를 원리로 삼고 이후 조선 멸망 때까지 국가교학(國家敎學)[14]으로 삼았다. 이전 한반도 내 국가들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다.

또한 고려보다 한층 더 세련된 중앙집권화 관료제 국가를 완성했다. 이런 강력한 중앙의 힘은 "유교적 이상에 따라 통치되는 이상적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삼아 건국 100년 만에 나라 곳곳을 유교로 체득시키는데 거의 성공한다. 그런 유교화가 가장 정점이었던 것은 17세기의 조선 중기. 이는 다시 후기에 접어들면서 서학의 전파, 실학의 발흥 등과 함께 그 색채가 차츰 옅어져 갔으나, 산업화와 근대화가 진행된 현재의 남북한 모두에 그 잔재가 어느 정도 남아있다. 현재 "전통문화"라고 부르는 거의 대부분이 조선 시대(특히 18세기 이후의 중후기)에 형성된 것들이다.

한민족 역사상 가장 친숙한 왕조국가이나, 외세에 의해 멸망한 가장 가까운 시기의 왕조국가라는 점에서 그 인식이 좋지 못하다. 심지어, 일부 네티즌들은 전통과 역사에서 따로 분류하려는 인식까지 존재할 정도다. 대한민국은 조선의 영토와 민족, 문화 등을 그대로 계승하긴 하였으나, 국가의 정체성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 초기에는 과거 조선의 신분제와 왕족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 왕족의 입국을 불허하기까지 했을 정도이다.

2 국호

태조 이성계는 즉위 후 즉위 교서를 통해 '나라 이름은 이전대로 고려(高麗)라 한다'고 밝히고, 명나라에 새 나라의 개국과 태조의 즉위를 알리는 내용의 사절을 보낸다. 이때 명은 새 나라의 국호는 무엇으로 고쳤는지를 되묻는데, 이에 조선은 백관을 도당에 모아두고 국호를 논의해 고려라는 국호를 고집하는 대신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和寧)"과 고대에 존재하였던 국가명인 "조선(朝鮮)" 중에 하나를 택하여 달라고 청하고, 명이 조선을 택하여 국호가 확정되었다.

이 점은 두고두고 민족주의자들에게 까이고 있지만 반드시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15] 조선으로써도 역성혁명으로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만큼 왕씨의 고려 대신 새로운 국호를 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고, 조선이 내정한 '이름 후보' 중 하나를 명이 선택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얻는 외교적 이익까지 계산하지 않았겠냐는 해석도 있다.[16] 일단 "화령"이란 국호는 지역명에 불과해 국호로써의 정통성이나 당위성이 부족한데다 요동 정벌을 불러왔던 접경지역인 철령 지역의 이름을 명이 국호를 허락하기는 힘들다는 것[17]이라는 점을 조선 정부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기에 조선 정부는 조선이라는 국호을 내정하고 곁가지 후보로써 화령을 함께 제시한 것이 아니냐는 가설도 있다. 즉, 처음부터 조선으로 새 국호를 낙점하고 명에 사실상 보기가 하나밖에 없는 '선택지'를 제안했다는 것이다.

명의 "조선 낙점"은 그렇다 치고, 왜 고려 시대에는 거의 잊혀진 나라였던[18][19] "조선"이란 명칭을 가져온 것일까? 여기에는 고려의 정통성에 대항하려는 신왕조 개창 세력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왕건의 고려왕조는 옛 고구려의 정통을 이었음을 표방했다. 조선은 그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설된 만큼, 고려의 정통성에 대항하기 위해 고구려와는 다른 "정통성"을 찾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비슷한 예로 고려시대의 반란자들은 자주 신라, 백제의 "정통성"을 끌어다 붙여서 고려에 대항하려 했었다. 하지만 신라나 백제는 이미 그 왕조가 자리잡았던 "연고지"에서나 상징성을 가질 뿐. 전국적인 정통성으로 끌어올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래서 그보다 더 오래된 고조선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명이 화령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대단히 재미있는 가설이 있다. 화령(和寧)은 함경남도 영흥의 지명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몽골 원나라의 옛 수도인 카라코룸의 한명(漢名)인 화림(和林)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라는 것.[20] 화령부는 공민왕쌍성총관부를 수복하면서 붙인 이름이니 그 자체가 친원적인 성향을 띈 것은 아니었지만.[21]

화령과 몽골이 관련되었다는 설은 이미 조선시대 실학자인 이익이 "설마 선대왕께서 몽고 오랑캐놈들 땅이름으로 국호 정해달라고 했겠어? 헛소리겠지." 라고 '성호사설'에서 한 단락을 할애해가며 따로 언급해서 깐 것을 볼 수 있다.[22]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화령, 조선 간택 요청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이익의 의견대로 태조와 백관들이 일개 지명에 불과한 화령을 국호로 삼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며, 이미 조선이라고 하기로 결정은 났는데 명나라에게 그대로 '통보'해 버리면 명나라 입장에선 불쾌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버리는 카드로 화령을 넣었다는 것. 앞서 말한대로 화령은 카라코룸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명나라에선 절대 선택할리가 없는 국호였고 말하자면 일종의 결재용 2안, 내지는 버리는 카드가 아니었을까 하고 이야기한다.

확실한 것은 이 사건만으로는 조선의 사대가 맹목적이었다고 보긴 어렵다는 점이다. 위화도 회군과 건국 때는 친명적 제스쳐를 취했지만, 명나라가 자꾸 간섭을 하려 들자 역으로 요동을 공격하려고도 했던 것이 바로 이 조선의 건국세력들이다. 상황이 꽤 심각해서 명나라 황제 주원장정도전을 잡아올리려고 했을 정도였다. 때문에 태조 치세때만 해도 조선과 명 사이에는 꽤나 험악한 공기가 흘렀었다. 하지만 정도전은 정안군 이방원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죽음과 함께 요동 공략은 취소되었다.

조선 외에 청구(靑丘/靑邱 - 푸른 언덕), 소방(小邦 - 소국이란 의미)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이것들은 일종의 별명으로 공식 명칭은 엄연히 조선이었다.

2.1 이조?

일본이나 북한, 중국에서는 이조(李朝)[23]라고 부른다. '이씨(李氏)의 조선' 또는 '이씨 왕조'라는 뜻. 대체로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 역사가 왕조가 바뀌어도 시대변혁이 없었다는 정체성론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말로써 조선을 까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일단 동양사에서 같은 국명을 가진 다른 나라를 구분하기 위해 이러한 명칭을 쓰는 예는 종종 있다. 예를 들어 남북조시대유유송나라조광윤이 세운 송나라를 구분하기 위해 유송(劉宋)/조송(趙宋)이라고 한다든가, 조조의 위나라를 춘추전국시대의 위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조위라고 부르는 것 등이 있다.

또, 현재 국내에서도 세계사 교과서에서 베트남/역사를 다룰 때 역대 왕조를 '대월국'이라는 정식 국호 대신 왕가의 성을 따서 '레 왕조', '리 왕조', '쩐 왕조'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구분의 용이성 때문이다.. 이렇듯 성씨를 통한 왕조 구분을 비하적 표현이라 생각할 여지는 없다. 당장 한국에서도 쓰는 방법이다.

한국에서 중국의 몇몇 국가를 왕조의 성씨를 들어 구분하듯 중국 역시 이조라는 표현을 통해 조선을 구분한다. 중국에게 조선도 Korea, 고려도 Korea다. 그래서 남북한을 포함한 모든 Korean을 조선족이라 부른다. 재중동포의 중국 공식 명칭은 정확히 '중국' 조선족으로 앞에 중국이 꼭 붙는다. 그냥 조선족이라 하면 한국사람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Korean. 중국이 우리를 가리키는 욕인 가오리방쯔의 가오리 역시 고려왕조가 아닌 Korea. 그래서 중국에서는 정확히 구분하기 위해 조선왕조를 이씨조선, 고려왕조를 왕씨고려로 구분하기도 한다. 역시 이를 비하적 표현이라 주장하는 이는 없다.

한국(조선) 내에서도 이조라는 표현은 널리 쓰인바 있다. 당장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나 열렬한 민족주의 사학자였던 단재 신채호도 그들의 저서에서 조선왕조를 가리켜 '이조'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는 이때까지는 고조선이라는 표현이 지금처럼 쓰이지 않은 것에 연유한다. 일례로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할 당시에는 정감록의 영향으로 성씨에 따른 왕조 구분이 영향을 끼쳐 이조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고 신채호는 본인의 연구가 고대사에 집중되어 있어 단군-기자-위만조선과의 구분하기 위해 이조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게다가 당시에는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으로 상해임시정부에서 국호를 한국으로 바꾸기 전과 바꾼 이후에도 임정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당대의 한반도를 조선으로 불렀기 때문에 왕조국가 조선과 당대의 조선을 구분할 방법이 필요했던 것 역시, 이조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가 된다. 이 와중에 묻혀버린 대한제국. 묻힌 게 맞잖아.

이렇게 이조라는 표현은 비하적 용어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왕조와 국가를 구분하기 위해 쓰인 용어에 불과하다. 다만 한국에서는 고조선이라는 단어는 정책적으로 잘 사용되지 않는다. 굳이 쓰겠다면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 등과 구분하기 위해 쓴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상술했듯 국내에서는 보통 단군조선을 고조선이라 하고, 이후의 조선에 기자와 위만의 이름을 붙여서 구분한다. 참고로 현재 일본 사학계의 경우를 보자면, 단씨조선/기씨조선/위씨조선과 그 약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북한에서 조선을 구태여 이조(리조)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 북한의 약식 국명이 '북조선'이기에 현재의 자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왕조를 구분하기 위한 사정이 있으며, 중국의 경우는 성씨로 전후대의 국가를 구분하는 습관 때문이다. 여기에 '한반도 땅'을 중국에서 '조선'이라 부르는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한반도를 조선반도라 부른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 그러면 저 윗동네는 김조.

아마 대한민국으로 한국이 통일될 시, 이 표현은 점차 정리 될 것이다.

따라서 이조라는 표현의 사용이 딱히 금기시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고조선이라는 표현이 널리 정착된 이후로 이 용어를 굳이 고집하는 것은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가급적이면 조선이라 표현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3 개괄적 역사

4 평가

5 정체(政體)

조선의 정체(정치체제)는 국왕 중심제의 전제군주제 국가이며 이는 바뀐 적이 없었다. 이는 1910년 대한제국 멸망까지 계속되어왔으나 1905년 을사조약 이후로 조선통감부의 간섭과 개입이 있었다.[24]

국왕의 호칭은 전하(殿下)로 불려왔다가 1894년 12월 17일 갑오개혁 이후부터는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로 바뀌어 불려졌으며, 1897년 대한제국 개국 이후에는 황제폐하(皇帝陛下)로 불렸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 후 이러한 경칭도 일제강점기 때 다시 전하로 격하되었다.

관료는 수상(首相)격으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의 3정승 직위가 있으며 갑오개혁 이후로는 영의정이 총리대신 등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6 경제

조선시대 엽전 종류

조선의 통화(通貨)는 건국 초기에는 현물경제를 대체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실패했으며, 상평통보로 불리우는 엽전이 통용되는 17세기 후반 전까지 현물 화폐가 거래되었다. 통화로 사용된 주요 현물은 베(삼베. 나중에는 목화의 대중화와 생산량/교역의 증가로 면포로 대체)와 이었으며, 포화(布貨)로서의 베는 다섯 새 굵기의 섬유로 짠 중등품인 오승포(五升布)가 기준이었다.

상평통보 유통 이후 통화단위는 이 되었으나, 세금은 대동법이 유지되어 미곡 중심의 경제가 지속되었으며 지방에서는 물물교환이 지속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대외적으로는 청, 일본과 은 거래를 활발히 하였으나 거의 멸망 때까지 이것이 경제 체질의 변화로 이어지진 못했다. 후에 대한제국기에 전환국이 설치되어 백동화가 주조됨에 따라 통화단위는 냥에서 (圓)으로 바뀌게 되었으나, 화폐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폭락하여 일본 화폐가 더 많이 유통되었다.

사실 조선의 경제 성장을 지체시킨데는 상공업의 미진한 발달이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도 점차 소멸된 벼농사 위주 농본주의 경제가 무려 20세기 초까지 유지되었으니 말 다했다. 조선이 17세기에 들어서 상업이 발달하였다곤 하나 당대 중국과 서양 국가들을 보면 그다지 발달되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심지어 17세기에 과학혁명이 일어나고 조선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헬게이트였던 19세기는 산업혁명으로 서구권 전체가 호황이던 시기였다. 19세기 당시에는 인구도 주는 등 대체로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고 보이나, 개항 후에는 근대화에 따른 기술혁신, 인구 증가 등 그나마 플러스로 돌아섰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유통 및 수송을 위한 기반시설도 엉망이었다. 이러다 보니 늘 봄만 되면 진탕이 된 땅으로 인하여 식량수송이 늦어서 보릿고개를 겪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쌀은 인구부양력이 좋은 대신 유통경제의 발달을 저해하는 문제가 있다. 논으로 인해 길이 좁아지기 때문에 수레가 다니질 못했다. 고대 로마의 경우 도로를 잘 닦아 둔덕에 상업이 촉진되고 공업이 발달하면서 경제에 활력이 돌고 이후에 초강대국이 되었다. 영국과 미국의 발전도 철도의 개통이 큰 역할을 했다. 군비의 효율 또한 높아지고 군대에 들어갈 예산으로 경제 투자가 가능하다. 반면 조선과 같이 도로가 엉망인우 중장비 운반을 못하니 당연히 화물 운반이 어렵고 이러니 질적 성장 자체가 힘들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이젠 정말 수운 뿐이야. (…)"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교통 인프라에 온 힘을 쏟는 이유도 상공업과 제조업의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고대 로마에서 한 여행자가 런던에서 예루살렘까지 25일 정도가 걸렸고 로마에서 타란토까지 말타고 3일 보통 5일이면 갔다. 걸어서도 10일 내외였던걸로 알려져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가면 거의 15 ~ 20일이 걸렸다고 하는데 비슷한 거리임에도 시간은 두 배 수준이니 조선의 도로 환경이 얼마나 낙후되었는지 알 수 있다. 박정희 정부 시절 도로건설과 철도, 항만을 적극적으로 건설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라 할 수 있다. 길이 편하면 상공업이 발달하고, 창출된 부로 인해 소비가 늘고 물자가 돌아 민생경제가 튼튼해진다. 조선이 서세동점에 적응하지 못한것은 상업의 미발달의 영향도 크다.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몰락했을 것 같지만 중국농민은 매년 6억필의 면포를 생산했고 이는 영국도 1860년에 가야 따라잡는다.

고운 영국산 면포가 들어오자 인도에서 기계면포를 수입해 그것으로 옷을 만든것도 중국이 왜 아편전쟁을 패전한 이후에도 중화 특유의 우월감을 버리지 않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일본도 에도에 100만 인구에 따른 재정 집중을 바탕으로 근대화를 추진했다. 반면 조선은 이런 재정기반이 약했다.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 일본 전국공조액 1255만석 1871년, 중국 1000만석 1812년 조선 96만석 18-19세기)

이는 유교식 농본주의와 농업 생산력 부족으로 인한 자급자족 경제를 벗어나지 못한 조선이 상업 진흥과 유통경제를 확립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민본주의 사상으로 무리한 공사로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에 매우 부정적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전대의 한반도 왕조들도 그 수준은 마찬가지였겠으나 활발한 대외 무역을 보여주었던 통일신라고려에 비해 안좋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

7 생활 수준?

일본, 중국 등을 동시대 조선과 비교했을 때 전자의 경제적인 발달은 상당한 정도이나, 그걸 민생으로 끌고 가면 과연 그곳의 백성들이 조선보다 무조건 잘 살았는지로 곧바로 알 수는 없다. 일본 같은 경우는 가혹한 세금량 등으로 인한 민란이 많이 일어난 국가다.[25] 에도 시기 발달된 도시도 알고보면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 주변 지역이 당하는 착취가 굉장한 수준이었다.[26] 결국 저런 자료는 백성들의 삶을 비교하는데 있어 증거로 쓰기는 힘들다. 그래도 식사량을 보면 확실히 주변 이웃들에 비해 많이 먹기는 했으니 삶이 나은 편이었을지도 모른다.[27]

한국사 연구 "조선시대의 끼니"를 보면 조선 사람들이 가난뱅이도 빚을 내어서라도 실컷 먹고 류쿠 사람들이 너희 나라 풍속에 늘 큰 사밭에 쇠숟갈로 밥을 떠서 잔뜩 먹으니 어찌 가난해지지 않겠느냐?라고 할정도로 식탐이 심해서 많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외국인들 전문기에서도 조선 사람들의 큰 결점은 대식이라는 기록이 있다. 한민족의 식사량 문서를 참고해 보자.

다만 백성들의 식사량과는 별개로 조선이 이웃국가들에 비해 상공업의 발달이 지나치게 미진했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라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단적인 예로 국내 학계에서도 조선이 합병된 1910년도 당시의 GDP는 1인당 40달러 수준으로 보고 있다.[28] 일제강점기의 통계 자료를 봐도 비슷하다.[29] 반면 앵거스 매디슨 통계를 언급하여 이를 다시 반박하는 경우도 있는데 (매디슨 통계는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여러 학자들과의 협력을 통해서 계속해서 오류들을 고쳐 가고 있는 중이며 그나마 현재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통계다.) 이 또한 논쟁을 결정짓기에는 역부족이다. 앵거스 매디슨의 경우 통계학적으로 봤을 때 추론의 오류(Error of Extrapolation)를 저지르고 있는데, 언뜻 찾아서 봐도 "각국의 경제는 급작스런 변화상 없이 일정한 패턴 하에 전개되어 왔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이 사람 자료를 곧대로 받아들이자면 남한의 경제도 한강의 기적으로 고속성장한 게 아니라 대한제국 시기와 그 이전부터 꾸준히 발달했다는 결론이 나와버린다.[30]

정작 당시에 쓰인 기록으로 살펴볼 경우, 남한에선 산업화 과정에서도 굶주리던 일부 국민이 생선 내장을 얻어와서 먹다가 복어 독으로 사망하는 일이 간간히 있어 언론에서 이를 예방하자는 취지의 기사를 쓰는 일까지 있었다. # 게다가 앵거스 매디슨 통계는 통계 수집의 일관성에 있어서도 비판을 받는데, 이 사람 통계에서 이탈리아 반도의 GDP가 유독 높게 나오는 것은, 애초에 이탈리아 반도는 로마 제국 시절 당했던 반달리즘의 역사[31] 때문에 그 이후로도 대규모 파괴가 있을 때마다 그 피해액 등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문화가 생겼는데 앵거스 매디슨은 이 기록 내역들을 자기 통계에 그대로 반영해버렸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사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이거 자체만으로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기록 문화가 생기지 않은 다른 문화권들에 대해서는 이 요소 자체를 생략했기 때문에 "통계 수집에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다. (…)

8 계급

일반적으로 조선의 지배 계급으로 생각되는 양반은 건국 초엔 계급이나 계층이 아닌 조정에 녹을 받고 일하는 관료를 지칭하는 용어에 불과했다.[32] 사실 조선 초기의 계급은 전대 고려와 유사한 양천제(양인+천인)였다. 초기만 놓고 보면, 전대 고려의 귀족적 요소들[33]이 상당부분 제거되었기에 고려를 포함한 전대 어느 시대보다도 신분간 편차와 차별이 많이 완화된 사회로 볼 수 있다.[34]

더해 신분간의 상하 이동도 전대에 비해 한층 개방적이었다. 일반 양인의 경우,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과거에 합격만 하면 양반이 되어 출세를 할 수 있었다.[35] 과거제도는 결국 양반층의 계급 세습을 합법화시킨 것이라는 통념과 다르게 조선대의 평민출신 문과 급제자 비율은 초기 40~50%, 이런 초기 과거급제자 출신들이 문벌을 짓기 시작한 중기에는 점차 낮아져 10%후반대까지 이르렀으나, 양란 이후 다시 비율을 회복해 후기에는 다시 40~50% 비율을 유지했으며, 말기에는 60%에 육박했다는 최근 연구 결과도 있었다(한영우 교수 연구).[36] 물론 이들의 상당수가 명예직이나 하급직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과거에 급제한 것만으로도 출신 지역에서는 명사로 대우받을 수 있는데다, 여타 문명권에서 이런 법으로 규정된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놓아주는 것은 설령 보여주기용일 지라도 드물었다. 다만 문과 합격자를 배출한 750개 가문 중에서 36개 가문이 합격자의 53%를 차지하는 등 소수의 가문에 과거급제자가 몰려있었으며 1789년 당시 전인구의 2%를 차지하던 서울에서 43%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는등 지역과 가문의 쏠림현상이 발생하였다.[37] 이것은 교육 평등을 법으로 보장하는 사회인 현대와 달리 과거 합격을 위해선 필요한 경전을 구입하기 위한 재산과 이를 공부하기 위한 시간 그리고 출제경향을 위한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도 이러한 법률가문이나 정치가문등의 명문가문들이 있긴 하다. 일반 양인이 문과를 급제하여 바로 양반이 되는 매우 힘들었던것에 반해 무과라는, 좀 더 입관하기 쉬운 시험이 있었다. 무과에서도 유교 경전 시험이 있긴 했는데 문과처럼 깊게 파는 걸 요구하진 않았고, 그나마 문과에 존재하는 신분제약도 없었다.(서얼 차별같은 거), 다만 승마시험이 있었기에 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재산은 꽤 있어야 했다는 실질적인 제약은 존재했다.[38] 이렇듯 과거제도를 통해 소수의 귀족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기도 하였지만 새롭게 인재가 등용되는 측면 또한 분명 존재하였다. 에드워드 W 와그너 교수는 이러한 과거제도의 폐쇄성과 개방성을 조선왕조의 장기지속성의 주요원인으로 꼽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의 국가 체제가 어느 정도 잡혀가자, 신분 체계에 변화가 생긴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관료를 의미했던 양반이 차츰 세습계급에 가깝게 변모해 간 것. 과거 응시에 있어 재산과 관직이 있는 양반 가문들 및 지주층이 매우 유리했기 때문에 과거 합격과 관직은 세습적 성격을 띄기 시작했으며, 찍어내다시피 한 공신들을 축으로 이루어진 훈구파 성립은 이런 "양반의 계급화"를 고착화시켰다. 관직이 없어도 공신들에게는 토지가 주어졌기 때문. 그 결과 양반의 자손은 관직이 없어도 양반과 다름없는 대접을 받게 되고, 이것이 과거를 보기 위해 유학을 공부하는 지방의 사족들에게 확대 적용되면서 양반은 점차 하나의 지배계층으로써 고착화되어 간다. 이로 인해 조선은 제도적으로는 양천제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양반, 중인, 양인, 천인이라는 4계급 사회(반상제 사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양반'이 지배계급으로의 위치가 형성되고, 더 나아가 양반과 양인 사이의 중간 계층인 '중인'의 폭이 넓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반상제 체제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무너진다. 재정 확보가 절실했던 조정이 공명첩 등을 발행하면서 중인, 양인들도 재산만 있다면 양반으로 신분 상승이 이루어졌고, 더욱이 18세기 농업 생산력의 증진과 상업의 발달로 양인들 중 부농들이 나타나면서 이들이 돈을 이용, 편법으로 양반족보를 사들이면서 양반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일단 어떤 방식으로든 양반이 되기만 하면 어느 정도 조세 압박을 회피할 수 있었으니[39] 양인들이 부자건 아니건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한 것. 이런 양반 수의 급증은 결과적으로 국가 재정의 부족을 초래, 이후 19세기 삼정의 문란을 야기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40]

애초 관료를 일컫던 용어였던 양반은 세습계급화되어 양인 위의 지배계급으로 고착화되었으며[41], 조선 전기에는 총인구의 5%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철종 시대에는 전 국민의 70%가 양반이 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일본 학자 사카타 히로시가 유학이라는 품계를 양반으로 잘못 기재한 통계적 오류이며, 실제 양반 비율은 1910년의 전국 호구조사에서 확인이 되는데, 총 가구(家口) 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만 4,217호로 전체 인구의 겨우 1.9%에 불과했다. 그나마 충청남도가 전체 가구 수의 10.3%로 가장 양반이 많았고, 충청북도(4.5%), 경상북도(3.8%), 한성(2.1%) 그리고, 전라북도(1%) 순이었다. 여타 도는 모두 1% 미만이고 양반이 많았던 고을은 경북 경주군(2,599호), 충남 목천군, 경북 풍기군(지금의 영주), 충남 공주군 순이었다. 경상북도와 충청도, 한성(서울)에 양반들이 집중되어 있고 그나마도 전 인구의 5%를 넘지 못했다. 조선 후기의 화가 김득신(金得臣, 1754년~ 1822년)의 풍속도를 보아도 전형적인 양반-평민-노비의 모습이 보이는등 실제 양반이라 할 수 있는 대가세족(大家世族)은 큰 변동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단성호적을 살펴봤을 때 서얼, 잔반 등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양반층은 1910년의 호적보다는 많은 10~20% 내외로 추정한다.

조선시대는 서얼계층이 양반으로 편입되고 부유한 평민들이 서원과 향교에 출입하는등 양반의 폭이 넓어지는 등 신분간 편차와 차별이 완화되는 조심을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노비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기도 했다. 삼국시대에 전인구의 10%에 지나지않던 노비는 고려말을 거치면서 전인구의 30%가 넘게 되었는데 양란을 겪은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전인구의 50%가 넘게 되었다. 조선 후기로 들어가면서 노비의 비중은 서서히 줄어드어 다시 인구의 30%정도로 변화하는데 이는 단성호적에서 잘 드러난다.

노비가 이렇게 많았던 것은 대토지를 보유한 양반관료계층이 농사에 필요한 노비를 늘리기 위해 경국대전에 종천법을 명시화하였고 갖은 꼼수를 부려 농민을 노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양반들이 얼마나 노비에 집착이 심했는지 (다른 지배층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조선 초의 소송은 대부분 노비 송사였고 족보를 조작해 양민을 자신의 노비를 만드는것도 서슴치 않았다. 특히 가뭄과 같은 재해로 농사를 망치면 굶주린 양민들은 자발적으로 양반집 노비로 들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는데, 문제는 한번 노비가 되면 그 신분을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임진왜란 후에는 그나마 납속책으로 노비 신분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이전에는 노비가 양민이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같은 일이였다.

양민의 감소와 노비의 증가로 조선은 만성적인 세금부족과 병역자 감소에 시달렸고 왕실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를 타개하기 위해 종천법을 종모법이나 종부법으로 바꾸어 어떻게서든 노비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지배계층인 사대부들의 반발로 실패에 그첬고 일천즉천법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많게는 수천명에서 적게는 수십명까지 노비를 가지고 있었는데 세종의 8번째 아들인 영응대군은 무려 만 명에 가까운 노비를 거느리기도 했다. 다만, 이것은 금계필담의 내용이라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야사집을 제외한 상속문서를 살펴본다면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이맹현은 노비 757명, 퇴계 이황이 367명의 노비를 자녀에게 상속했으며 중소가문인 전의 이 씨 가문이 18세기 중반까지 노비를 100명 이상을 보유한 것으로 추론할 때, 유력한 사대부가는 천여 명 정도의 노비를 소유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간혹 노비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으며 사람이 아닌 사고 팔리는 물건 취급받았다고 오해, 혹은 곡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확히는 사고 팔리는 인간 취급이었다.

애초에 사고 팔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물건 뿐이라는 생각 자체가 지극히 현대적인 것이며 근대 이전에는 대부분 인간도 사고 팔릴 수 있다고 보았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보는 것은 현대에 와서나 보편적이게 된거고 조선시대에는 모든 사람은 뿌리는 같지만 가지고 있는 성품에 따라 귀하고 천함이 정해진다고 보았다. 비록 신분제도가 있었고 노비의 인권이 낮긴 했지만 노비도 역시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생각은 있었다. [2].

9 군사

조선군 항목 참조.

조선 초기의 군사제도는 1)오위(五衛)·금군(禁軍)으로 대표되는 중앙군과 2)익군체제(翼軍體制)·진관체제(鎭管體制)로 대표되는 지방군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중앙군은 고려의 제도를 대부분 받아들여 십위체제(十衛體制)를 유지하다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1457년(세조 3)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지휘하의 오위제도(五衛制度)로 정착되었다. 오위는 의홍위(義興衛)-중위, 용양위(龍驤衛)-좌위, 호분위(虎賁衛)-우위, 충좌위(忠佐衛)-전위, 충무위(忠武衛)-후위로 구성되어 있고, 각 위마다 5부(部)로 편성되고, 부마다 서울의 5부와 각 도의 진관군사가 소속2)되었다. 오위는 졸(卒)-오(伍)-대(隊)-여(旅)의 조직으로, 1오는 5졸, 1대는 5오, 1여는 5대로 하는 5진법에 의하여 편성되었다.

또 다른 중앙군의 하나인 금군은 국왕을 직접 호위하는 군대로 오위에 속하지 않았고,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우림위(羽林衛) 등으로 인원수는 적었으나 왕권강화와 직결되어 필요에 의해 설치되고 법제화되었다.

지방군은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곳에서 대체로 육수군(陸守軍)과 기선군(騎船軍)의 두 가지 형태가 있었다. 육수군은 다시 번상(番上)하여 시위하는 시위패(侍衛牌)와 지방의 여러 영(營)이나 진(鎭)에 부방하는 영진군(營鎭軍)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영진군은 각 도의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와 그 밑의 절제사(節制使)·첨절제사(僉節制使)가 지휘했다.

다른 지방군의 하나인 잡색군(雜色軍)은 영·진이 주로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설치되어 내륙지방에 방어할 군사가 없어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향리·관노·무역백성(無役百姓)·공사천(公私賤) 등을 망라하여 편성한 것이다. 잡색군은 마병(馬兵)과 보병(步兵)으로 나누어 25인을 1대(隊)로 편성하여 수령이 지휘하도록 하였으나, 평상시 군사훈련에도 참가하지 않아 유사시에 대비하여 전국적 군사조직체계를 갖추었다는 데 의의가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군사조직은 1455년(세조 1)에 진관 체제로 정비되었다. 먼저 전국적으로 내륙지방에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위의 여러 읍을 좌·우·중의 3익으로 분속시켜 군익도를 편성하는 한편 군익도체제가 불편한 곳에는 별도로 독진(獨鎭)을 두어 이원체제로 운영하게 했다. 1458년(세조 4)에는 행정구역상의 도(道)와 혼동하기 쉽던 군익도의 조직을 주진(主鎭)·거진(巨鎭)·진(鎭)으로 재편하여 각 진의 독자성을 살리면서 군사기지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하였다. 진관체제는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의 주진 아래 첨절제사(僉節制使)가 여러 진을 통할하는 몇 개의 거진을 두고, 여러 진의 절제도위(節制都尉)[42]·만호(萬戶) 등이 진을 중심으로 스스로 적을 방어하는 책임을 지는 자전자수(自戰自守)의 체제를 가지게 되었다. 1464년에는 번상군(番上軍)·영진군·익군 등으로 통일되지 않았던 명칭을 정병(正兵)으로 통일하여 균일한 국방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정병 외에도 봉족, 혹은 보인이라는 역종이 있었는데 이는 군대에 나가지 않고 대신 물품[43]을 내거나 일을 도와주어 군대에 나간 정병 집안의 생계를 돕는 역할을 하였다.

16세기에 이르러 진관 체제는 진관에 속한 정병이 군역과 요역을 함께 지면서 각종 폐단이 발생하자 포를 내고 군역을 지지 않는 방군수포(放軍收布)로 변질되고, 외세의 침입을 각 진관의 소수 병력으로 자전자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도내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합심방어하는 제승방략체제(制勝方略體制)를 강구하게 되었다. 제승방략체제는 많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적을 막는 총력방어태세로서의 이점이 있으나, 후방지역은 군사가 없어 방어선이 무너지면 적을 막을 방도가 없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왜란 때 이일상주 전투, 신립탄금대 전투에서 패전한 뒤 후방군이 없어 일본군이 한성으로 쉽게 진격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의 군사제도는 중앙의 오군영(五軍營)과 금군, 지방의 속오군(束伍軍) 체제로 특징지을 수 있다. 오군영은 조선후기에 수도 및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훈련도감(訓鍊都監)·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衛營)·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 등이다.[44]

훈련도감은 1598년(선조 31) 10월 서울 수복 후 포수(砲手)·살수(殺手)·사수(射手)의 삼수병(三手兵)을 중심으로 기민(飢民)구제와 정병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임시군영이었으나, 왜란 후에는 오위를 대신하여 후기 중앙군의 핵심군대로 자리잡았다. 훈련과 조직은 명나라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속오법(束伍法)에 따라 개혁하여 과거의 대부대 단위 전투형태에서 초단위(哨單位)의 소부대단위 전투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속오법은 부(部)[45]-사(司)[46]-초(哨)[47]기(旗)[48]-대(隊)[49]-오(伍)[50]로 연결되는 편제로, 대개 120~125인의 병력이 군사조직의 기본단위인 1초를 이루었다. 다른 군영과는 달리 정기적으로 급료를 받는 받는 직업군인 위주로 편성되었다.

어영청은 번상하는 향군으로 편제된 중앙군으로 인조반정 뒤 후금에 대한 대비책으로 설치가 논의되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계기로 중앙군으로 정착되었고, 1652년(효종 3) 어영청으로 개편되었다. 금위영은 1682년(숙종 8) 병조에 직속되어 있었던 정초청(精抄廳)의 정초군과 훈련도감에 속하여 있던 훈련별대(訓鍊別隊)를 합쳐, 6도 향군을 근간으로 조직·편제되었다. 총융청은 1624년 이괄의 난 이후 경기도 일대의 방어가 중요하게 되어 경기도 내의 정군·속오군(束伍軍)·별마대군(別馬隊軍)으로 조직·편제되었고, 군사는 2만여 명에 달하였다. 수어청은 1626년에 남한산성을 개축하고, 이를 중심으로 경기도 남방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친위군은 호위청(扈衛廳)[51]과 용호영(龍虎營)으로 정비되었다. 호위청은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김류(金瑬)·이귀(李貴) 등이 반정에 사용한 사모군(私募軍)을 거의 그대로 궁궐숙위에 충당함으로써 설치되었다. 용호영은 조선전기의 금군을 모아놓은 금군청(禁軍廳)을 1755년(영조 31)에 개칭한 것이다.[52] [53]

조선후기 지방군사제도의 두드러진 변화는 속오군 조직의 등장과 영장제도의 설치였다. 속오군은 훈련도감과 같이 왜란시 임시로 설치된, 양반에서 공·사천에 이르는 총동원체제로 서 지방의 핵심군이 되었지만 쌍령 전투로 대표되는 운영의 미숙함과 연이은 패배로 붕괴되었다.[54] 이러한 속오군은 병자호란 후 양(良)·천(賤)으로 편제되어 본역 외에 속오역을 지는 일신양역(一身兩役)의 폐해가 발생하였고, 1729년(영조 5)을 전후하여 천례화(賤隷化)되었으며, 말기에는 수포(收布)·수세군(收稅軍)으로 존재하여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영장제도(營將制度)는 문신수령이 가지고 있던 군사권을 무신이 담당하도록 한 것으로 1627년(인조 5)에 후금에 대비해 속오군을 강화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수령의 반발·재정부족·유능한 무장 결핍 등의 이유로 병자호란을 계기로 문신수령 중심의 훈련체제로 바뀌었다. 이밖에도 해안과 내륙지방의 요지에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여 방어사가 집중적으로 지키게 하였다. 또한 산성의 중요성이 높아져 별장을 배치했으며, 해안·강안의 요해처에 도(渡)·진(津)을 설치하여 방어망을 구축했다.

10 인구

14세기태조5,500,000~5,700,000명
15세기태종5,700,000~6,200,000명
세종6,200,000~7,100,000명
세조7,300,000~7,900,000명
성종7,900,000~9,100,000명
16세기연산군9,100,000~9,700,000명
중종9,700,000~11,700,000명
명종11,700,000~12,800,000명
17세기선조11,500,000~14,100,000명
광해군11,200,000~11,500,000명
인조10,600,000~11,200,000명
효종10,900,000~11,400,000명
현종11,400,000~13,200,000명
18세기숙종13,100,000~16,500,000명
영조16,800,000~18,700,000명
정조18,000,000~18,400,000명
19세기순조16,200,000~18,600,000명
헌종16,500,000~16,600,000명
철종16,500,000~16,900,000명
20세기고종16,800,000~17,300,000명

출처: 인구대사전 <표 3-4> 연도별 조선시대 인구 추정치, 1392-1910

전근대의 인구자료를 정확하게 통계낼 수는 없으므로 위 자료는 모두 추정치다.

세종실록지리지 경기도조에 의하면 조선왕조실록에 적힌 조선의 인구수는 실제 인구 수의 10분 1/2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며 조선 세종 시기의 조선의 인구는 최대 800만까지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즉,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호구를 통해 계산한 인구 수는 그 수치의 8~10배 이상을 곱해야 실제 인구 수에 가까운 수치가 나온다는 것이다.

역시 송사, 고려도경을 기초로 12세기 고려 인구가 210만구였다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으나 조선시대 구수 기록과 마찬가지로 고려대의 호구/인구 기록의 완정성에도 의문을 제기해 봄직하다.

11 외교

초창기의 조선은 고려시절 적대지간을 맺어왔던 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으며 임진왜란 때는 명군이 파병되어 참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금을 주축으로 한 여진족이 명을 붕괴시키고 을 세우면서 조명관계가 끊어지게 된다.

청과는 명을 붕괴시킨 원수지간이라 조선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 다만 광해군 때에 와서 명청간의 등거리 외교를 통한 중립외교를 통해서 어느 정도 온전한 관계를 맺어왔으나 인조반정으로 오르게 된 인조 때부터 관계가 급변하여 청을 주적으로 지정하면서 정묘호란병자호란을 겪게 되었고 인조는 청에 항복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근대화 발전으로 인해서 이후로 청과의 관계가 긴밀해지게 되었으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청일전쟁 이후 관계가 소원해졌고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청과의 유대 관계가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일본과는 임진왜란 이후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 정권이 수립된 후 통신사 파견을 통해서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이토 히로부미,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고 운요호 사건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불평등한 조일관계가 수립되었고 문호개방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일전쟁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1905년에는 을사늑약으로 조선통감부의 감독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가 1910년에는 마침내 일본의 식민지배권에 들어갔다.

미국과는 수호통상조약 요청을 계기로 대면한 적은 있지만 흥선대원군의 반대로 맺어지지 않았고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 호가 평양 입항을 시도하다가 화재가 발생하게 되고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면서 다소 악화되었으나 결국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에 따라 단교되었다.

러시아와는 명성황후가 일본을 견제할 목적으로 다소 긴밀한 관계를 맺은 적이 있으며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을 계기로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 때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전하게 되고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게되면서 관계가 끊어졌다.

이외에도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덴마크 등과도 수호통상조약을 통해서 수교를 맺어왔으나 모두 1905년 을사늑약 때 단교되었다. 단 프랑스와는 선교사들의 처형과 병인양요로 인해서, 독일과는 오페르트의 흥선대원군 부친 남연군 묘소 도굴 사건으로 관계가 소원해졌던 적이 있으며 영국과도 거문도 사건으로 한때 관계가 소원해진 적이 있다.

12 이야기거리

나라 이름이 조선이라서 배 만드는 기술(조선)이 앞서있다는 드립이 존재한다(...)노잼
요재지이》 등에서는 근처에 신선들이 사는 움직이는 섬이 있다고 나온다. 그 외에 조선에서 온 히로인이 등장하는 등, 중국에서도 은근히 인기있는 곳이었던 듯.

이미 구운몽에서 모에하렘을 깨우치고, 호질 등에서 현실은 시궁창의 이치를 깨달았던, 어떤 의미에서는 앞서가던 나라. 일지매에서는 여자들이 뻑갈법한 여자 뺨치는 미모의 성격 더러운 미남 캐릭터를, 임꺽정을 통해서는 느와르물의 뿌리를 보여주었으며, 홍계월전에서는 남장여자 용자물을, 방한림전에서는 남장여자 동성결혼[55], 금오신화에서는 인간과 귀신의 귀접현상을 연상시키는 끈적한 사랑을 그려냈다. 심지어는 실제로 후타나리마저 존재했으며(예: 사방지) 민담에 따르면 결박 플레이를 즐긴 사람도 있었다. 거기에다가 수간을 즐긴 사람들도 실록에 존재, 또한 성군 세종의 며느리 봉씨는 레즈비언이었다. 그 외에도 작자 미상의 춘화에는 3P 플레이가 나오고, 성애신이 엄청나다(…). 역시 선비의 나라답다! 거기에 영이 사람에게 빙의된 유명 공포영화의 내용이 이미 이때 여기에서 씌여졌다 (예: 설공찬전)

또한 조선사람들은 흰옷을 좋아하여 예로부터 백의민족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각종 흉흉하고 음침한 이야기도 많았다. 조선 초기 일본인만 골라 죽인 살인마 이야기라던가 조선 중기에 어린아이가 잔혹하게 살해당한 이야기 등이 기록되는 등, 여하간 기록하나는 정말 넘치도록 남긴 시기였다. 물론 기록이 많으니 끔찍한 이야기도 많은 법이겠지만.[56]

조선의 왕은 엄청난 업무량을 감당해야하는 고노동 직책이었다. 가히 우리가 아는 바티칸의 교황을 뺨친다. 조선의 국가 분위기상, 늘 끊임없이 공부하고 강론받고 하는 등의 자기 수련을 해야했다. 게다가 정책 하나 정하려면 먹물 좀 꽤나 먹은 양반들이 덤비는데, 조정에 있는 양반들도 수두룩 빽빽인데, 지방에서도 꽤나 한다 하는 먹물들이 상소로 태클을 걸어왔다. 위에 설명했듯이 왕이 그냥 추진하면 추진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상적인 정치로 신하들 뜻을 존중해야하니 이를 논리적으로 논박해야하는 등의 부담도 심했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 반열이었던 태종, 세종, 세조도 왕권으로 찍어눌렀던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면…….[57] 게다가 왕은 늘 몸가짐을 바르게 해서 모범이 돼야했기 때문에 누가 없는 자리에서도 딱히 편하지 못했으며, 밥 먹는 시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해야 했다(…). 한글 만들고, 과학 기술을 점검하고 농업 정책 연구하는 등의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의 건강이 여러모로 좋지 않았던 것이 이해가 간다. 다만 세종은 본인이 자초한 면도 없진 않다. 항목 참조

13 그 외 : 조선의 XXX

조선의 간디 - 조만식#
조선의 나폴레옹 - 김경천#
조선의 레닌 - 박헌영#
조선의 모스크바 - 대구#,#
조선의 모파상 - 이태준#,#
조선의 발렌티노 - 임화#,#
조선의 안톤 체호프 - 현진건
조선의 예루살렘 - 평양#
조선의 콜론타이 - 허정숙

14 참고 자료

  1. 조선(朝鮮), 조선국(朝鮮國), 대조선국(大朝鮮國). 이 세 가지가 쓰였으며, 갑오개혁 이후에는 주로 대조선국이 공식명칭으로 쓰였다.
  2. 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았다.
  3. 지금의 서울 강북일대
  4. 조선 태조정종개경이 수도인 적이 있었다.
  5. 대한제국부턴 칭제하여 황제(皇帝)로 바뀌었다.
  6. 현대 언어학계에서 제주도의 말을 제주 방언이 아닌 제주어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므로 이를 반영했다.
  7. 물론 만주어가 조선시대의 주류 언어, 또는 제2의 언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 함경도 지방에는 만주인들의 마을이 있었으며 이는 북한정권 초창기까지도 존재했을 정도로 지속적인 것이었다. 이성계도 만주인들과 관련이 많은 인물이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영토내에서 사용된 언어의 하나로서 만주어는 자격을 갖는다. 물론 현재는 모두 한민족에 동화되었다.
  8. 샤머니즘.
  9. 칭제건원, 즉 왕을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하자는 것이다. 1897년 고종은 칭제건원을 추진하여 연호를 광무라 하고,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선포했으며, 황제즉위식을 거행했다.
  10. 대한제국을 조선의 일부로 본다면 1910년.
  11. 다만 궁예의 고려는 태봉으로 바뀌었다가 마진으로 또 바뀌는 등 변천사가 많다.
  12. 예를 들어 궁에 고자인 내시가 일하는 걸로 확립된 게 고려 말 중원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다. 이전까진 내관이라 하여 하급 문관이 내시의 역할을 대신했으며, 사고로 인해 (가령 개에게 중요 부위가 물렸다던가……) 고자가 된 인물만을 내시로써 사용했다. 그외 적자와 서자, 정부인과 첩의 개념이 확고히 정립된 것도 고려 말.
  13. 당시 원나라 유학 중 가장 성행하던 학문. 북송주희(주자)를 거치면서 완성됐으며, 불교와 도교의 심성론과 종교적 요소를 유학에 도입했다. 그로인해 유학에 종교적 성향이 강화됐다.
  14. 성리학은 절대로 종교가 아니며 단지 종교적인 요소를 반박하지 않았을 뿐이다. 실제로 당대 사대부들도 위급상황에는 자주 도교나 불교에 의존했다.
  15. 베트남도 원래 국호가 남월이었던 것을 19세기청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월남으로 바꾼 일이 있다.
  16. 명 스스로가 국호를 선택해줬다는 것은 신생국을 대외적으로 승인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쿠데타로 왕조를 교체한 조선의 정통성을 흠집내기 힘들어진다. 대내적으로도 천조가 인정한 국위라는 점을 정치적으로 활용해 새 왕조의 정통성에 힘을 싣는 것은 덤.
  17. 명은 이성계의 즉위를 인정하면서 '변방의 흔단(釁端)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그만큼 조선이 중원을 공격하는 것을 견제했다는 의미.
  18. 고조선이 멸망한 것은 조선 개국 시대를 기준으로 무려 1500년 전이다.
  19. 다만 고려 중기의 권신 이자겸이 조선국공(朝鮮國公)에 올랐던 것 등 조선이라는 이름은 당시에도 고려를 달리 부르는 이름으로 종종 쓰였다. 엄밀히 말하면 중세 조선왕조 이전에 조선이라는 단어는 한반도 전체보다는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을 위시한 북부지방에 한정하는 의미가 강했다. 그리고 어쩌면 십팔자위왕 예언을 실현시킨 이성계가 조선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은 과거 이자겸을 보고 참고했을 수도 있다. 당연히 공식 기록에는 그런 거 없다지만.
  20. 백과사전에서는 카라코룸을 화령이라고 한다고 하지만 원사 지리지에 나와 있는 정식 명칭은 화령로(和寧路)였다. 정확히는 화령로가 화령로도총관이 관할하는 상위 행정구역이었고, 그 아래에 화림, 즉 카라코룸이 있다. 사실상 둘을 병용하기도 했고.
  21. 물론 공민왕 역시 카라코룸을 욕보이기 위해서 화령을 썼을 가능성은 낮게나마 존재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원래 이 지역이 고려의 화주(和州)였다는 역사적 배경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22. 성조(聖朝, 이성계)께서 천명을 받아 화령과 조선으로써 명나라에 주청하니 이에 황제가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였다. 무릇 화령의 뜻은 일찍이 듣지 못하였다. 영락제가 북방을 정벌한 것은 아로태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한 것이니, 화령은 원나라의 옛 땅이다. 원나라의 위소(危素)는 "원태조(칭기즈칸)가 창업한 땅이라 하여 《화령지(和寧誌)》를 지었으니, 족히 그 증거를 삼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오랑캐의 지명으로 국호를 주청할 리는 없을 듯하다.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고려 우왕(禑王) 9년에 태조가 변방을 안정시킬 계책을 올린 가운데, "동쪽 경계에 있는 화령의 땅은 도내(道內)에서 가장 땅이 넓고 풍요합니다."라고 한 말이 있다. 그 다음해에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화령부(和寧府)에 오매, 임언충(任彥忠)을 파견하여 간곡히 효유하여 보냈는데, 길이 막혀 반년을 머물렀으니, 대개 화령은 쌍성(雙城)에서 요동(遼東)의 개원부(開原府)로 직통하는 요충지이다. 그러니 그 땅은 실로 성조가 창업한 땅으로서 이른바 '적전(赤田)'이 이곳이니, 국호를 화령으로 주청한 것은 혹 이 연유가 아니겠는가? - 성호사설 권15, 화령.
  23. 북한은 문화어 어문 규정에 따라 이조가 아닌 '리조'
  24. 갑신정변때 정강14조와 관민공동회때 헌의 6조에서 입헌군주제를 지향한 적이 있긴 하다.
  25. 역사학자들이 추정하길 무려 3천회나 된다고 한다.
  26. 특히 참근교대의 높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다이묘들의 착취가 전국시대랑 아즈츠-모모야마 시대보다 더 심해졌다.
  27. 관련논문 링크.
  28. [1]
  29. 단 20세기 초반은 조선이 국가 붕괴 직전까지 갔다가 회복되던 때였다는 것을 놓치면 곤란하다.
  30. 여담으로 통일부 장관 출신인 이종석에 의하면 북한 사람들의 경제력은 앵거스 매디슨의 조선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다. # 상당한 과학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OTL... 북한마저도 조선 왕조에 비하면 많은 과학기술 발전을 이루어 생산력이 상승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북한 정권은 경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북한 사람들의 키만 봐도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데, # 물론 조선시대의 키는 표본의 선별을 제대로 하기 힘든 현실과 표본 숫자가 적어 신뢰성이 높지는 않고 실제로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 자료를 바탕으로 보면 사실상 조선보다 북한의 정부 수준이 더 떨어질 수도 있다. GDP 등에는 실물이 아닌 서비스 등도 들어가게 되는데, 북한 정부는 과학기술에 따른 생산량 증가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보다도 각지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적절한 운반, 저장도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여 나타난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31. 애초에 로마 제국이 당했던 이 현상이 "반달리즘"이라는 말 자체의 어원이다.
  32. 양반이라는 이름 자체가 무신 관료를 일컫는 무반(武班)과 문신 관료를 일컫는 문반(文班)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33. 고려도 제도적으론 양천제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양인 내에 권세와 지위에 따라 귀족, 향리가 지배계층으로 존재했다.
  34. 고려가 귀족 사회로 일컬어지지만 전대의 통일신라나 삼국시대처럼 귀족이라는 계급이 확고불변한 계급은 아니였다. 사실 고려도 그 이전 시대에 비하면 신분간 상하 이동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다. 자세한 건 고려 항목 참조.
  35. 이는 고려도 보장하긴 했으나 '실질적'인 면에서는 조선대의 유연성이 더 높았다. 고려의 지배층들(후대에 문벌귀족이라 불리는)의 결집도가 높았던데다 고려의 직접적 행정력과 법제적 기반이 조선처럼 전 국토에 미치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36. 조선사 전체로 확대하면 평민 급제자 수는 전 과거 급제자 중 1/3에 이른다.
  37.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 일조각, 2007.
  38. 참고로 고려는 무과시험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군공을 세우기는 더 쉬웠는데, 이는 조선에 비해 전쟁과 변란이 많았기 때문이다.
  39. 조선 초기의 조세는 조용조 체계였는데, 이중 전결에 매기는 '조'를 제외한 나머지 둘은 인두세다. 그런데 양반은 이런 인두세가 면세다.
  40. 양반 수의 증가 등으로 재정이 악화되자 조정은 인두세가 아닌 재산세 중심으로 조세를 개편하였으나 이 또한 완전치 못했으며, 결국 18세기에는 고을별로 세금액을 규정하고 그만큼 거둬가는 총액제가 실시된다. 이에 부족한 세금은 피지배계층인 상민층에게 집중되어 갔고, 이후 19세기 세도정치까지 겹쳐 삼정의 문란을 이끌게 된다.
  41. 관료를 지칭하는 건국 초에는 그 수가 2천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조선의 평균적인 추정 인구치가 4~500만인 점을 감안하면, 전체 인구의 0.1%도 되지 않았던 것.
  42. 거의 각 현의 현감이 겸임하였다.
  43. 보통 베나 무명을 내었다고 한다.
  44. 이 중 도성의 경비를 맡아보았던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을 삼군문(三軍門)이라 하였다.
  45. 현재의 연대급으로, 지휘관은 천총이라고 했다.
  46. 현재의 대대급으로, 지휘관은 파총이라고 했다.
  47. 현재의 중대급으로, 지휘관은 초관이라고 했다.
  48. 현재의 소대급으로, 지휘관은 기총이라고 했다.
  49. 현재의 분대급으로, 지휘관은 대장이라고 했다.
  50. 다섯명으로 이루어진 편제로, 지휘관을 오장이라고 했다.
  51. 350명의 호위군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52. 금군청을 내삼청(內三廳)이라고도 하였다.
  53. 금군청 예하에는 내금위 300명, 우림위 200명, 겸사복 200명이 있었다.
  54. 병자호란 이후에는 조선 국방체계는 모병제를 중심으로 한 중앙군(오군영)으로 개편되었다.
  55. 다만 서로를 향한 감정이 '애정'이라기보다는 '우정'에 가깝다는 점은 감안되어야 할 부분이다.
  56. 조선의 기록 기술은 현대 기준으로 보아도 최고 수준이다.
  57. 다만 정조의 경우는 신하들을 가르치고 논박하는 것을 꽤 즐긴 편이었다고 한다(…). 타고난 키배꾼 呵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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