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혜왕

魏襄王
(? ~ 기원전 319년)

전국시대위나라 제3대 군주. 위무후의 아들. 재위 기간은 기원전 369년 ~ 기원전 319년.

양혜왕(梁惠王), 혜성왕(惠成王)으로도 불린다. 이름은 앵(罃).

1 즉위 초기

기원전 370년에 공중완과 태자 자리를 두고 싸웠는데, 이로 인해 조나라와 한나라가 공격했다가 조나라에서 위나라의 땅을 나눠갖자는 한나라의 제안을 거절해 한나라의 군사가 이탈하면서 위나라를 무사히 보존할 수 있었다.

기원전 362년에 공숙좌가 한나라, 조나라와 회수의 북쪽에서 싸워 조나라의 장수 악조를 사로잡아 공을 세우자 밭 1백 만을 상으로 내렸는데, 공숙좌가 사양하면서 오기의 가르침, 파녕, 흔양 등에게 공을 돌리자 위혜왕은 오기의 후손을 찾아 밭 20만을 상으로 내리고 파녕, 흔양에게 밭 10만을 내리면서 공숙좌에게는 밭 40만을 더해 모두 밭 1백 40만을 상으로 내렸다.

기원전 366년에 택양에서 한나라의 군주와 회동하고 무도에 성을 쌓았으며, 기원전 357년에 조나라의 군주와 호 땅에서 회동했고 기원전 356년에는 노, 위, 송, 정 등의 군주에게 조현을 받았다.

기원전 355년에 진(秦)효공과 두평에서 회동했고 기원전 351년에 한단을 조나라에 돌려주면서 장수에서 맹약을 맺었으며, 기원전 349년에는 진나라 군주와 동 땅에서 회동하고 기원전 343년에 중산군을 위나라의 재상으로 삼았다.

기원전 361년에 공숙좌가 병에 눕자 공숙좌를 문병갔는데, 공숙좌가 상앙을 천거했지만 위혜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상앙이 진(秦)나라로 도망가 진나라를 강하게 해줬다. 기원전 356년에 제후들을 범대에 모아놓고 주연을 베풀었고 노공후가 나라를 망치는 요소에 대해 이야기하자 위혜왕은 노공후를 칭송하면서 노공후가 말한 것을 경계로 삼게 했다.

2 대외 원정

기원전 341년에는 위혜왕은 태자 신을 시켜 제나라를 공격하게 하자 어떤 세객이 태자의 출정을 만류하기 위해 유세했지만, 위혜왕이 태자 신을 출정시키는 바람에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태자 신을 잃었다. 이에 제나라에게 복수하려 했다가 혜시의 계책에 따라 제나라에 신하가 되길 청하고 입조해서 초나라를 분노하게 해서 초나라가 제나라를 치도록 조장하게 만들었으며, 초나라가 조나라에 연합해 서주에서 제나라의 군사를 격파했다.

기원전 340년에 진, 조, 제 등의 공격으로 공격받았고 여러 차례 패해 서하 지역을 빼앗기자 진나라가 수도인 안읍과 가까웠으므로 대량으로 천도하고 공자 혁을 태자로 삼았다. 기원전 336년에 제선왕과 평아의 남쪽에서 회동했고 여러 차례 대외 정벌의 실패로 국력이 피폐해지자 여러 현자들을 초빙해 추연, 순우곤, 맹가 등을 불러들였다.

3 외교

기원전 336년에 방총이 태자와 조나라에 인질로 가게 되자 방총이 자신을 헐뜯는 사람을 믿지 않도록 당부했는데, 이는 삼인성호의 일화로 방총이 조나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방총에 대한 참언이 돌았다. 훗날 태자가 인질이 풀려 귀환했고 위혜왕이 참언을 들었기에 방총이 위혜왕을 만날 수 없었다.

기원전 335년에 제나라의 견 땅에서 제위왕과 회동했고 기원전 333년에는 공손연에게 제나라와 연합하면서도 은밀히 초나라와 결속해 제, 초 두 나라가 싸우게 하고 이긴 국가에 편승해 어부지리를 취하라는 말을 들었으며, 친교의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혜시를 초나라, 공손연을 제나라로 사신으로 보냈다.

기원전 332년에는 제위왕이 연, 조, 초 등과 위(衛)나라에서 만나 위(魏)나라를 제외시키려 하자 공손연을 불러 상의해 4국 회동을 막을 수 있었으며, 전수와 공손연이 사이가 나빴고 계량으로부터 공손연을 장수로 등용해 놓고도 전수의 계책을 쫓으라고 한 것은 잘못됐다는 말을 들었다.

위나라의 공손연, 제나라의 전반이 위, 제 두 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이를 원하지 않았는데, 공손연이 전반을 설득해 위, 제의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자 군사들이 국경을 넘어 조나라에게 패할 것을 우려해 제위왕과 함께 전군을 이끌고 그 뒤를 따라가서 조나라의 군사를 격파했다.

제나라의 세객 진진이 위나라의 공손연을 설득해 제후국들에 관한 외교를 주관하도록 해서 공손연이 진진의 말대로 공손연을 연, 조 두 나라에 사신을 보낼 것을 청하자 위혜왕이 허락했는데, 공손연이 조, 연 두 나라에 사자로 가게 된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자 이 이야기를 듣고 제나라가 위나라와 수교가 늦을 것을 우려해 공손연에게 제후국들에게 대한 외교를 맡겼다.

제나라에 이어서 초나라, 연나라, 조나라도 공손연에게 맡기자 위혜왕은 공손연이 조, 연 두 나라로 가는 것을 중지시켰으며, 공손연이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사자로 보내지 않으려 했다가 공손연이 조, 연, 초, 제 등 네 나라의 외교에 대한 것을 맡게 되자 공손연에게 위나라의 외교를 맡겼다.

기원전 324년에 공손연이 전수가 자신을 모함한다면서 전수가 망명하면 대왕을 섬기지만 전수가 망명하면 자신이 망명하겠다고 하자 사이가 나쁘다는 이유로 죽이거나 내쫓을 수 없다면서 전수가 일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고 또다시 개입하면 죽이거나 내쫓겠다고 말했다. 소대가 전수를 위해 공손연, 전수 사이에서 중립을 지킬 것을 설득하자 위혜왕이 이를 받아들이고 전수를 곁에 두었으며, 전수, 주소가 사이가 좋아 공손연을 모함하려 하자 공손연의 설득으로 공손연과 사이가 좋은 전문을 불러 재상으로 삼았다.

기원전 322년에 사거가 공손연을 헐뜯자 공손연이 장의를 통해 사거가 자신을 자주 찾아오도록 했는데, 사거가 공손연을 헐뜯으면서도 자주 공손연을 찾아가는 것을 알고 사거를 신임하지 않았다.

장의가 진, 위 두 나라의 재상을 겸임하기 위해 진나라를 통해 삼천을 치도록 요청하면 위나라에서는 그 틈을 이용해 남양을 제압하면 한나라는 망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장의를 상국으로 삼으려고 했다. 한나라의 한공숙이 한나라가 침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나라에서 공손연이 공을 세우도록 만들어서 위나라에 땅을 떼어주자 위혜왕은 공손연을 재상에 임명했다.

시기는 불명이나 한나라, 위나라의 친교를 위해 태자 명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넀다가 위혜왕은 태자 명을 보고싶어 했는데, 병에 걸린 척 해서 초나라가 공자 고를 돌려보내도록 조장하면 제나라에서도 보낼 것이라고 해서 태자 명을 돌려보내는 방법을 들었다.

4 기록 문제

기원전 333년에 소진이 조나라를 위해 합종을 성사하기 위해 유세하자 위양왕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년도상 시기로는 위양왕이 아닌 위혜왕이고 위혜왕의 재위 기간은 소진의 활동 시기와도 맞지 않기에 아닌 다른 군주로 보인다.

기원전 322년에 장의가 위나라를 진, 한 두 나라를 연횡시켜 제, 초 두 나라를 치려 했는데, 혜시는 위나라를 제, 초 두 나라와 합종시켜 군사 동원을 저지하려 했다. 대신들이 모두 장의를 지지하자 혜시는 위양왕에게 어떤 사안에 대해 한 쪽만 지지하게 된다면 다른 견해가 전혀 용납될 여지가 없어 어느 한쪽 견해만 받아들여질 것이라면서 이는 군주의 대권을 상실하는 것으로 나아간다고 경계한 것을 들었다.

또 동일한 해에 제나라의 세객 진진이 위나라의 공손연을 설득해 제후국들에 관한 외교를 주관하도록 해서 공손연이 진진의 말대로 공손연을 연, 조 두 나라에 사신을 보낼 것을 청하자 위양왕은 허락했으며, 공손연이 조, 연 두 나라에 사자로 가게 된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자 이 이야기를 듣고 제나라가 위나라와 수교가 늦을 것을 우려해 공손연에게 제후국들에게 대한 외교를 맡겼다.

제나라에 이어서 초나라, 연나라, 조나라도 공손연에게 맡기자 위양왕은 공손연이 조, 연 두 나라로 가는 것을 중지시켰으며, 위양왕은 공손연이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사자로 보내지 않으려 했다가 위양왕은 공손연이 조, 연, 초, 제 등 네 나라의 외교에 대한 것을 맡게 되자 위양왕도 공손연에게 위나라의 외교를 맡겼다.

그런데 기원전 322년은 년도상으로는 위혜왕의 재위 기간이고 기원전 322년에 대한 다른 기록에서는 위혜왕으로 나온 것으로 보면 군주가 잘못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