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 배구/전현직 배구인
이름 | 이창호 (李昌浩) |
생년월일 | 1941년 10월 27일 |
신장 | 178cm |
출신지 | 평양직할시 |
출신학교 | 인창고 - 경희대 |
지도자 | 국세청-대농 코치 (1968~1975) 대한민국 여자배구 국가대표팀 상비군 감독 (1971) 대한민국 여자배구 국가대표팀 코치(1973/1975) 미도파-대농 감독 (1975~1994) 대한민국 여자배구 청소년 국가대표팀 감독 (1977/1987) 대한민국 여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 (1978~1979/1981~1982/1984~1985/1990/1991) 효성 감독 (1994~1997) |
1 소개
미도파의 184연승[1]을 이끈 주역이자 한의사 자격증을 지닌 배구인. 어릴 적 이름은 창일(昌日)이었다.
2 지도자 이전
1941년 10월 27일에 1남 4녀 중 외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나 6살때 아버지를 잃었고, 1951년 1.4 후퇴 당시 외삼촌을 필두로 온 가족이 3진으로 나뉘어 피난을 떠났는데, 결국 그보다 두 번째로 먼저 피난간 누나 두 명과 헤어지고 말았다. 이후 시흥에 이르러 중공군에 의해 짐을 빼앗겨 결국 빈손으로 안양의 피난민촌에 정착을 하게 되었고, 이후 큰누나가 안양유원지에서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위해 뛰어들게 되었다.
한편 이창호는 안양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인창고등학교에 진학, 키가 178cm였던 그는 배구부 코치의 눈에 들어 배구부에 들어가 라이트 공격수로 활약하여 배구에 재미를 들였고, 1960년에 그는 동양한의대학(현 경희대학교 한의대학)에 진학하여 배구부 활동을 하면서 한의학 공부를 하여 졸업 때 한의사 자격을 따서 한남동에서 1년간 한의사로 일하다 이후 '삼진한의원'을 열어 1968년까지 3년간 한의원을 운영한 바 있었다.
3 지도자 시절
1968년, 한의사로 일하던 이창호는 국세청 배구단이 창단되자 운영 주체인 국세청장 이낙선의 제의로 배구계에 복귀하여 코치로써 박만복 초대 감독을 보좌했다. 당시에는 김영자, 문경숙 선수가 중심인 제일은행[2]과 서한숙, 서현숙, 이경선 등이 중심이 된 산업은행[3]이 배구계를 독점한 상태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숭의여고와 중앙여고 졸업생을 중심으로 창단한 신생팀 국세청은 실업연맹전 첫 경기에서 0-3으로 졌지만, 이후에도 더욱 분발하여 결승에서 제일은행과 만나 3-0으로 이겨 금세 우승을 차지, 이후 2차 실업연맹전에서부터 연승기록을 시작하여 1980년까지 이어갔다. 이는 단장인 조사국장이나 징세국장인 이철승, 장태명 씨 등이 단장, 중부 세무소장 차영복 씨가 매니저 겸 부단장을 맡아 막강한 지원을 했고, 팀이 이길수록 우수한 선수들이 줄줄이 들어오다 보니 스카우트를 할 필요가 없던 점도 한몫했다.
1969년부터는 박만복 감독이 대한항공 배구단 창단으로 팀을 떠나자 후임인 최이식 감독 옆에서 막 해체된 제일은행의 에이스 김영자를 영입해서 최강으로 군림하기 시작하여 1970년에 조혜정(숭의여고)과 윤영내(덕성여고)를 영입했고, 감독직에 부임한 1975년에 김화복, 1979년에 박미희, 이운임, 유용순, 1980년 이명희, 1981년 김옥순 등의 우수한 선수를 연속으로 보유한 미도파는 1980년까지 여자 배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성적인 181연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1980년 광주 전국종별선수권대회에서 당시 약체인 선경합섬과의 경기 전에 주전인 김화복이 몸을 푸는 도중 공을 잘못 밟아 부상당한 게 화근이 되어 이때 이운임 등 초년병들을 대거 투입했는데 1세트를 18-20으로 내주고, 상대 사기가 오르면서 2세트도 내주고 3세트는 듀스 접전을 벌였지만 결국 0-3으로 지면서 181연승에서 멈추었으나 이후에도 승수를 계속 쌓아 현대와 라이벌 플래그를 형성하여 1983/84 시즌 첫 대통령배 전국남녀배구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현대와 우승컵을 다투면서 1987년에도 두 번째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렇다 보니 1980년대에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까지 현대와 미도파 양팀 감독이 번갈아 차지하기까지 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는 국가대표팀까지 맡아 1984 LA 올림픽에서 동메달,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그간의 공적으로 1981년에 모기업인 미도파는 감독인 그를 이사 자리에 앉히기도 했다. 이후 그는 감독 생활을 병행하며 상무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1989년에 이명희, 김옥순, 이운임이 은퇴하고 1990년에 박미희까지 은퇴하면서 미도파 왕조는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1980년대 후반부터 약진한 현대와 호남정유에 밀려 미도파는 주선진, 강신정, 박복례 등이 부상 등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여 과거의 영광을 잃고 중하위권으로 전락하다 1994년에 해체되어 선수단은 효성 배구단에 인수었고, 이창호 감독도 이들을 따라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효성에서의 활약은 별 볼일 없었고, 결국 이창호 감독은 1996/97 시즌 슈퍼리그 도중에 지휘봉을 내려놓아 29년간의 지도자 생활은 끝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