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후퇴


1.4 후퇴 당시 남으로 피난하는 피난민들의 행렬.

1 개요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1월 4일,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을 등에 업고 수도 서울을 탈환한 국군UN군한국-중국만주 국경을 향해 북진하던 중, 중국에서 내려오는 중공군의 대공세로 인해 다시 서울을 포기하고 대대적으로 퇴각한 사건.

2 진행과정

2.1 멸망 직전에 몰린 북한

인천 상륙작전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내리던 북한군은 삽시간에 거의 모든 북한 지역을 내주게 되었다. 북한 임시정부는 압록강변에 있는 임시수도 강계에 틀어박혔고, 지도부는 자녀를 중국으로 망명시켜야 했다. 한국군평양을 함락하고 압록강에 도달했으며, 미군은 장진호에 집결하여 북한의 임시수도 강계를 향한 마지막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애초에 김일성박헌영의 목적은 단기간에 전쟁을 끝내고 남한 지역을 공산권의 영향하에 두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거꾸로 자신들이 완전히 망해버릴 지경에 도달했다.

이미 거의 모든 병력을 상실하고, 인구밀집지역을 모조리 국군에 점령당해 병력을 더 징집할 영토조차 남지 않은 북한은 자력으로 점령지를 방어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북한 정권이 궤멸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으며, 외부의 도움이 없으면 압록강두만강을 넘어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2.2 소련의 외면

북한은 공산주의 두목후원국인 소련이오시프 스탈린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소련군이 참전한다면 한국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것을 우려한 스탈린은 이를 거절하였고, 소련군 전투부대의 직접적인 참전은 제한되었다. 소련공군압록강, 두만강 국경지대에서 활동하게 하는 것 외에는 북한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으며, 중국에게 북한에 대한 지원 의무를 현명하게무책임하게 넘겨버렸다.

스탈린은 미국과 직접 맞붙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최선최악의 경우 북한을 포기하려 했다. 1950년 9월 28일에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스탈린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를 열어 북한군을 남한에서 철수시키고 북한군의 향후 임무를 북한 본토 방어에 한정시키기로 결정했으며,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10월 5일에 다시 정치국 회의를 열어 설사 소련이 북한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미국과 직접 대결하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든 회피하기로 모든 정치국 위원들과 합의했을 정도다. 대신에 연변을 포함한 간도 지역에 북한 임시정부 같은 것을 만들어 북한을 돕겠다는 뜻을 전하긴 했다.

2.3 중국의 참전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직권[1]으로 중공군 파병이 결정되었다.

중국이 참전 결정을 내리던 당시의 논리는 이러하다.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고려해 보았을 때 북한이 존속하는 것은 중국에게는 필수적인 일이었다. 일단 북한 정권이 무너지면, 미국의 영향이 미치는 한국과 소련이 당장 국경을 맞대게 된다. 소련의 경우, 한반도가 남한에 의해 통일된다 해도 국가의 중심인 수도 모스크바와는 거리가 먼 구석 극동 지역이라서 조금 맞대도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중국은 수도 베이징이 한반도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경계심을 심하게 느낀 것이다.

또한 막 공산화가 되어 신생정권이 창출된 중국으로서는 파병할 경우 국가의 안정을 달성할 수 있었고[2], 소련의 원조를 획득할 수 있었으며, 아시아 내에서 중국의 역할이 증대되는데 이는 곧 국제사회에서의 지위 향상을 뜻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순망치한(脣亡齒寒)'[3]을 내세워 한반도 파병을 결정한다.

사실 중국이 한반도 파병을 한 또 다른 원인으로는 미국에 대한 중국의 적개심을 꼽을 수도 있다. 애초에 국공내전 때부터 장제스를 열심히 지원했던 미국에 대해 중국 지도부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리 없었다.

2.4 UN군의 방심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의 위협을 과소평가하였다. 이미 전쟁 전인 1949년 3월 18일 북한과 중국은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했으며,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중국이 5차례나 전쟁 개입 선언을 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사령부와 미국 정부는 중국의 경고를 모조리 무시하고 북진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1950년 10월에 웨이크 섬에서 열린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중국의 참전을 우려하는 트루먼의 질문에 "중공군 그 까이꺼 뭐 대~충 그냥 우리 미군 만나기만 하면 쫄아서 지들이 알아서 튈 건데 걱정 안 해도 돼요"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아니, 오산 전투에서 그렇게 당하고도 사단장[4]을 포로로 잡히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하지만 웨이크 섬 회담이 열리고 있던 바로 그때 중국은 한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고 있었다. 나중에 미군이 중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자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속았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공군은 1차 공세시 6개 군 18개 사단, 2차 공세시 3개 군 12개 사단이라는 엄청난 물량의 군 부대를 남하시켰다.[5] 이들은 한반도로부터 유엔군을 축출할 목적으로 군사활동을 개시하였다.

이 무렵 평양-원산[6]을 넘은 뒤로 한반도 북부의 지형이 급격하게 동서(東西)로 넓어지고, 개마고원 같은 높은 산악지대가 나타나면서 상당히 무질서하게 진격하던 유엔군의 전선에 빈틈이 많이 생겨나 있었다. 전력의 대부분을 상실한 북한의 반격은 지리멸렬했고 패잔병들은 도망치기에 바빴기 때문에 유엔군사령부는 마음을 턱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부대는 중공군의 침투를 막기는커녕 중공군이 한반도에 침투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다만 이는 단순히 유엔군사령부의 병크만은 아니다. 중공군은 침투 사실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 설상위장을 철저하게 실시하고, 최대한 밤을 틈타서 이동하는 등의 전술적으로 뛰어난 부대기동을 보여주었다. 특히 중공군에는 장제스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이러한 위장과 은밀기동에는 이골이 난 병사들과 지휘관들이 매우 많았다. 유엔군도 중공군의 참전 가능성 자체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항공정찰을 실시하였지만, 이 당시의 항공정찰은 지금처럼 프레데터 같은 무인기를 날려서 정밀카메라로 찍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정찰기 조종사가 육안으로 관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산악지형으로 위장한 채 이동하는 병력을 발견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현대의 UAV도 산악지형으로 잘 위장한 채 이동하는 병력을 발견하기는 매우 어려운데 당시 기술수준으로야 뭐...

2.5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세

제1차 공세로 간을 본 중공군과 북한군은 제2차 공세를 펼쳐 청천강 전투에서 미군과 한국군을 격파하는 한편 미 해병대 제1사단을 포위하고 장진호 전투를 치렀으며, 그 결과 12월 4일에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다시 내주면서 38선까지 대대적인 후퇴를 하게 되었다. 그 뒤 12월 6일에는 북한군과 중공군이 평양을 재점령하였다. 서부전선에서 이렇게 물러나는 동안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에서는 한국군 12만과 피난민 10만이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해상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국군의 공격을 피해 간신히 빠져나온 미 해병 1사단 역시 12월 24일에 흥남을 통해 후퇴했다.

1, 2차 공세에서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게 된 유엔군을 보고 서방 국가들은 지레 겁을 먹고 중국과 협상하려 했다. 이때까지 서방 국가들이 주축이 된 유엔에서는 중국의 한국전 참전목적이 단순히 '자국의 국경선 방어 또는 북한을 도와 전쟁 전의 영토인 38선 근처 영토까지의 회복'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중국과 휴전협상을 하려 했으나, 중국이 유엔 측의 휴전협상을 거부하고 제3차 공세를 시작함으로써 전술(前述)했다시피 중국의 진정한 참전 목적이 유엔군의 한반도 축출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미국 및 서방 국가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중공군은 1950년 12월 31일부터 제3차 공세를 펼쳤으며 이 공격에 미군과 한국군은 맥없이 밀려났다. 유엔군의 경우, 38선에 방어선을 펼치긴 했지만 워낙 병력이 부족해서 1개 대대가 10km 정도를 담당해야 할 정도로 중공군에 비해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결국 방어선 곳곳이 대규모의 중공군 부대가 펼치는 인해전술로 뻥뻥 뚫리면서 무너지게 된다. 미8군사령관인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은 이대로 있다간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이 중공군에 의해 동서로 분단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 1월 3일에 서울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미8군에 내린다.

결국 1월 4일에는 수도 서울이 다시 공산군에 함락되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한 번 37도선(평택-원주-삼척 방어선)을 향해 대대적인 후퇴를 하게 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했고, 미8군사령부도 대구로 후퇴하게 된다.

3 결과

중공군의 2~3차 공세 동안 북한군과 중공군을 피해 피난민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고 그 대혼란 속에서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겨나게 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이 후퇴가 전략상 후퇴이며 다시 국군과 UN군이 전열을 정비하여 북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며칠 몸만 피하다 온다"는 생각으로 가장과 몇몇 자식들만 간단하게 피난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피난하기 힘든 어린 자식들을 친가 또는 외가에 맡겨두고 피난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 때의 이별이 평생의 이별(분단)이 되고 말았다.

엄청난 추위로 인하여 많은 피난민들이 고통받았지만, 역설적이게도 한강이 차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얼어붙었기 때문에 전쟁 초기와 달리 다리를 건너지 못해 피난하지 못하고 발이 묶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정부 또한 개전 초기의 교훈을 통해 신속하게 소개령을 내려, 서울시민들은 혼란스러웠던 개전 초기와는 다르게 그나마 미리미리 피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평양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 결과 신석기 시대 이래 줄곧 사람이 모여 살던 서울텅 비어버렸다. 1949년 제1회 인구주택총조사 기준으로도 140만의 인구가 살던 한반도 최대의 대도시가 텅 비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앞서 있었던 9.28 서울 수복 이후, 전쟁 초기에 피난을 가지 못했던 사람들이 전쟁 초기 정부가 서울시민들에게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해서 말 잘 듣고 서울에 남아 있었는데도 정작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했을 때 자신들이 북한군 부역자로 학대받은 기억이 남아 있었던 바람에, 너나 할것 없이 '가라 할 때 가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피난을 권장한 것도 있었고. 서울에 남은 것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노인들과 환자들, 그리고 그 가족 극소수뿐이었다. 그 극소수 안에 작가 박완서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속편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를 보면 빈집을 털어 입에 풀칠하는 등 텅 빈 서울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51년에 끝날 뻔했던 전쟁은 정전협정 체결까지 33개월간 연장되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심리전과 인해전술에 막대한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유엔군은 이때의 충격으로 인해 지휘부부터 사병들에 이르기까지 부대 전체에 패배주의와 절망감이 만연하게 되었다. 1951년 1월 말부터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의 지휘하에 유엔군이 재반격을 시작하여 2월 중순에 벌어진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는, 워싱턴도쿄극동군사령부에서 유엔군의 한반도 철수[7]에 관한 논의가 진지하게 진행되는 상황에까지 치달았다.

하지만 애초에 중국이 노렸던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재고와 이미지 개선은 늦게 진행되었다. 사실 중공군의 참전 이전까지 미국을 제외한 서방에서는 대륙의 진정한 주인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간주했다. 영국의 경우, 중국공산당의 베이징 점령 후 바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고 영연방을 중심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 가입을 추진할 정도였다.[8]

문제는 1.4 후퇴 직후에 유엔에서 제시한 정전요구를 중국이 보기 좋게 거부한 것이었다. 중국은 서방 국가에 무리한 요구, 즉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 군대를 철수시킬 것, 대만에서 미군이 철수할 것, 베이징 정부만을 유일한 중국 정부로 인정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미국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굴욕적인 요구였기 때문에 미국 등 서방 국가는 1951년 2월 1일,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항전하기로 결의한다.

그리하여 중국은 적어도 1950년대 중반까지 유엔의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1971년에 가서야 그 자리를 대만에게서 빼앗아 획득하게 된다. 더군다나 미 국무부 내의 일부 친중파들의 전략, 즉 대만과 중국이 분리된 상태에서 대륙의 공산정권을 미국이 승인하여 소련과 대립시키는 중국의 유고슬라비아화 전략도 무위로 돌아간다.

만약 중국이 국군 및 유엔군을 37도선까지 몰아낸 1.4 후퇴 직후, 서방과 적절히 타협을 보았더라면 한국전쟁을 공산권에 유리한 쪽으로 끝맺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박명림은 1.4 후퇴 당시 중국 지도부의 결정을 '더글러스 맥아더 VS 해리 S. 트루먼'의 중국판이라고 분석한다. 다만 이 경우에는 한반도에서 미국의 완전한 축출을 주장하는 행정부(마오쩌둥)와 전략적 목표 달성[9] 후 정전을 달성하자는 군부(펑더화이)의 대립으로써 미국과 정반대의 입장이었고, 결과는 역시 완전한 통일을 주장하여 무리한 진격을 했다는 점이다.

하여간 차후에는 중국이 한국전쟁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기고만장한 나머지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이 두려워한 전쟁에 우리가 참전했는데 이쯤 되면 우리도 소련이랑 붙어볼 만하지 않나?'하는 망상을 품게 되었고, 이는 1960년대 후반에 벌어진 중국-소련 국경분쟁의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

4 여담

당시의 참상을 빗댄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가 크게 유행하여 국민의 애창곡이 되었다. 이 곡은 흥남 철수를 배경으로 한 곡이다.

1.4 후퇴로 생겨난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계속 몰려드는 바람에, 1951년 3월 부산의 인구가 120만 명을 넘어서게 된다. 이때는 거리, 골목 구석마다 사람이 빼곡히 차 있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정부는 전국 곳곳에 피난민 수용소를 만들어 피난민들을 수용하려 했으나 이도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윌리엄 R. 포르스첸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1초 후>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한 명인 돈 바버가 한국전쟁 당시 공군 비행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1.4 후퇴를 경험했다. 당시 그는 서울 상공을 비행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작중에서 일어난 전자기 펄스 공격 이후 헬게이트가 열린 블랙마운틴 주변 도시의 상공을 비행하면서 목격한 상황들을 설명하면서 마치 1951년의 한반도같았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1. 그렇다고 마오쩌둥이 이 당시에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단지 그가 중국 공산혁명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가장 권력과 카리스마가 강한 것뿐이었다. 실제로 한반도 파병을 위해 마오쩌둥과 다른 지도자들은 몇 번이고 회의를 열어 토론을 했다. 그만큼 한반도 파병 문제는 마오쩌둥 한 사람이 내리기엔 너무나도 중대한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2. 하지만 당시 중국 지도부 내에서는 국공내전으로 황폐화된 상황에서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무모하다는 반론이 압도적이었다. 그러자 펑더화이가 한반도 출병을 '중국 공산혁명의 연장'으로 보자고 주장하면서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지도부의 마음을 찬성 쪽으로 돌려놓았다.
  3. 입술(북한)이 없으면 이(중국)가 시리다는 의미이다. 이는 중국 정부가 한반도를 자국의 대외안보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4. 윌리엄 F. 딘 소장.
  5. 단순히 '꽹과리, 나팔 부대'의 물량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일전쟁국공내전을 치르면서 많은 경험을 쌓은 팔로군 출신 병사와 장교들이 요소에 배치된 중공 정규군도 다수 섞여 있었다. 근데 이미 개전 때 북괴군에도 꽤 섞여 있지 않았나?
  6. 이 선은 한반도 북부에서 동서(東西) 간의 폭이 가장 좁은 지역이다. 또한 통일신라의 국경이기도 했다
  7. 당시 미 합동참모본부와 미 극동군사령부에서는 중공군이 37도선의 평택-원주-삼척 방어선을 돌파한다면 유엔군과 국군을 다음 방어선인 금강 방어선과 소백산맥 방어선으로 후퇴시켜 항전하기로 계획해 놓았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중공군이 금강 방어선에 도달(돌파가 아니라 말 그대로 도달)하게 된다면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 이를 때까지 중공군에 맞서다가 부산 등 남한의 여러 항구를 통해 유엔군은 일본으로 철수시키고, 대한민국 정부와 한국군제주도로 망명시켜 항전을 계속하게 한다는 계획을 극비에 부치고 의논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대한민국대만이 될 뻔 했다는 이야기다
  8. 영국은 중국을 정식국가로 승인함으로써 중국 영토에 있는 자국의 식민지홍콩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했다.
  9. 미군을 38선 이남으로 몰아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