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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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팔성

1944년 2월 2일 ~

1 개요

대한민국의 금융인. 전 우리금융지주 대표이사.

2 생애

1944년 2월 2일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1963년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고, 1967년 졸업했다.

1967년 한일은행에 입행한 뒤 38년간 우리은행, 우리금융 등에 몸담아왔다.

1999년 한빛증권 사장, 2002년 우리투자증권 사장을 맡았다. 2004년 9월에는 금융계를 떠나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를 2년 반 정도 맡긴 했으나 2008년 이명박 정부 초기 ‘MB맨’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2008년 6월 제4대 우리금융지주 회장으로 취임했다. 말단 행원으로 입사해 회장까지 한 직장에서 40년 동안 일을 해왔기 때문에, 입지전적 인물로 불렸다.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맞이하여 고강도 긴축경영을 실시했다. 계열사 임원 급여를 10%씩 반납했고 2009년에도 임원 급여 10%를 추가 반납했다. 2008년 4분기 예산의 10%를 절감했고 2009년에도 변동성 경비의 20%를 깎았다.

우리금융의 실적은 빠른 속도로 회복됐다. 2008년 금융위기의 충격으로 순이익이 4545억 원으로 급감했지만, 2009년에는 1조 260억 원으로 회복하며 가장 빨리 금융위기의 후유증을 털어낸 금융회사로 평가받았다.

특히 2009년 3분기에는 ‘어닝 서프라이즈’에 가까운 실적을 올렸다. 2009년 3분기 순이익은 4838억 원으로 KB, 신한, 하나 등을 포함한 국내 4대 금융지주사 가운데 단연 최대였다. 2009년 9월 경에는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미국 뉴욕 맨해튼의 66층짜리 AIG그룹 빌딩을 계열사를 통해 사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민영화는 끝내 마무리하지 못했다. 회장 취임 이후 우리금융 민영화를 위해 정부지분 17%를 블록딜 방식으로 매각했고,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차에 걸쳐 완전 민영화를 최초로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신제윤 금융위원장과 최수현 금감원장이 여러 차례 사퇴를 종용하였으나[1] 사퇴를 거부하였다. 우리금융지주의 민영화 토대를 직접 쌓고 싶었기 때문이라나... 결국 2013년 4월 우리금융지주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1. 특히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2013년 4월 4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이 회장이) 알아서 잘 판단하실 것”이라며 “민영화 의지와 철학을 같이할 수 있는 분이 우리금융을 맡아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