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동장유가


日東壯遊歌

1 개요

김인겸(金仁謙)이 1763년(영조 39년)에 일본 통신사로 갔을 때 지은 시이다. 연행가와 함께 대표적인 기행가사로 꼽히며[1] 일본의 문물에 대해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일본인에 대한 적대감 역시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2] 한문이 아닌 국문본이라는 점을 주목할 만 하다.

2 내용

일동장유가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를 국어 문제집에서 접하고 나서 이 시가 전문인 줄 아는데 일동장유가는 총 7158행, 3,500여구에 달하는 장편기행기사이다. 여기에 전문을 올려두고 싶지만 여백이 부족하므로 적지 않는다.
이 부분은 왜황(倭皇)의 사는 데라 사치(奢侈)가 측량없다. 라는 시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덴노가 살고 있었던 교토에서 화자가 본 것들을 서술한 것 같다.[3]

이십 칠 일 사상네가 관소(館所)에 잠간 내려

숙공 받고 잠간 쉬어,
저무도록 행선(行船)하여 청포(靑浦)로 올라오니,
여염도 즐비하며
물가에 성을 쌓고 경개(景槪)가 기이하다.
물속에 수기(水機) 놓아 강물을 자아다가
홈으로 인수(引水)하여 성안으로 들어가니,
제작(製作)이 기묘하여 법 받음직 하고나야.
그 수기(水機) 자세 보니 물레를 만들어서
좌우에 박은 살이 각각 스물여덟이오,
살마다 끝에다가 널 하나씩 가로 매어
물속에 세웠으니,
강물이 널을 밀면 물레가 절로 도니,
살 끝에 작은 통을 노으로 매었으니,
그 통이 물을 떠서 돌아갈 제 올라가면,
통 아래 말뚝 박아 공중에 나무 매어,
말뚝이 걸리면 그 물이 쏟아져서
홈 속으로 드는구나.
물레가 빙빙 도니 빈 통이 내려와서
또 떠서 순환(循環)하여 주야로 불식(不息)하니,
인력(人力)을 아니 들였어도
성가퀴 높은 위에 물이 절로 넘어가서,
온 성안 거민(居民)들이 이 물을 받아먹어
부족들 아니 하니,
진실로 기특하고 묘함도 묘할씨고.
지명은 하내주(河內州)요 사십 리 와 있구나.
이십 팔 일 발행(發行)할 새 수백 필 금안준마(金鞍駿馬)
중하관(中下官)을 다 태우니 기구(器具)도 장할시고.
각 방 노자(奴子)들도 호사(豪奢)가 참람(僭濫)하다.
좌우에 쌍견마(雙肩馬)요, 한 놈은 우산 받고
두 놈은 부축하고 담배 기구 한 놈 들고
한 놈은 등불 들고 한 놈은 그릇 메어,
한 사람의 거느린 수 여덟씩 들었구나.
나하고 삼 문사는 가마 타고 먼저 가니,
금안(金鞍) 지운 재고 큰 말 거듭말로 앞에 섰다.
여염도 왕왕 있고 흔할손 죽전(竹田)일다.
토지가 고유(膏)하여 전답(田畓)이 마이 좋이.
이십 리 실상사(實相寺)가 삼사상(三使相) 조복(朝服)할 제,
나는 내리잖고 왜성(倭城)으로 바로 가니,
인민(人民)이 부려(富麗)하기 대판(大阪)만은 못하여도,
서에서 동에 가기 삼십 리라 하는구나.
관사(館舍)는 봉국사요 오층 문루(門樓) 위에
여나문 구리 기둥 운소에 닿았구나.
수석(水石)도 기절(奇絶)하고 죽수(竹樹)도 유취(幽趣) 있네.
왜황(倭皇)의 사는 데라 사치(奢侈)가 측량없다.
산형(山形)이 웅장하고 수세(水勢)도 환포(環抱)하여
옥야천리(沃野千里) 생겼으니, 아깝고 애달플손
이리 좋은 천부(天賦) 금탕(金湯) 왜놈의 기물(器物) 되어,
칭제(稱帝) 칭황(稱皇)하고 전자(傳子) 전손(傳孫)하니,
개돗 같은 비린 유(類)를 다 몰속(沒屬) 소탕(掃蕩)하고,
사천 리 육십 주를 조선(朝鮮) 땅 만들어서,
왕화(王化)에 목욕(沐浴) 감겨 예의(禮儀) 국민 만들고자.

  1. 당연히 이 기준은 수능 국어 영역 출제 빈도에 근거한 것이다.
  2. 인용된 부분의 마지막 여섯 줄을 보면 아주 강하게 드러난다. 이건 뭐 솔직히 인종 청소 하자는 수준
  3. 본문에서 말하는 하내주(河內州)는 일본 기나이 지역의 카와치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