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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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련 문서

2 조선의 왕들

3 조선의 왕비들

4 조선의 궁궐

5 조선의 유적들

6 정치, 행정, 군사 제도

6.1 법률

6.2 신분 계급

공식적으로는 양인과 노비 두 계급만 있었으나 이후 분화한다.

6.3 정치 행정 군사 조직

6.4 지방 행정 조직

7 교육, 학술

7.1 교육 기관

7.2 역사

7.3 사상

7.4 기타 서적

8 기타 당대 작품

9 조선을 배경으로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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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래 제도 상 양반, 서얼, 중인 모두 양인에 속한다. 즉, 양인 이상부터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으며 이론상 양인도 재능과 시간만 있다면 경전을 공부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는 소리.
  2. 이 계급은 공식적인 것도 아니었고 인조 이후에는 4대를 지나면 서자 딱지를 뗐다.
  3. 훗날 일제 강점기 및 대한민국 도청 소재지로 굳어진 곳도 다수 있다. 사실 감영이 현재의 도청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4. 돈의문 밖에 있었다.
  5. 상주에 있다가 선조 34년(1601년) 대구로 이전.
  6. 순조 때 2차례, 철종~고종
  7. 충주에 있다가 선조 35년(1602년) 공주로 이전.
  8. 이시애의 난 이후 예종 때 쓰다가 성종 1년(1470년) 다시 영안도로 복귀. "함흥 사람 이중호 등이 이시애의 당류(黨類)가 되어 차마 악역(惡逆)을 저질렀으므로 그 죄가 깊고 중한데, 그 고을 이름을 그대로 두었으니 악(惡)을 징계하는 뜻에 어그러짐이 있습니다. 영흥(永興)은 본래 계수관으로 우리 태조가 탄생하신 땅이고 어용을 봉안한 곳이니, 청컨대 길주(吉州)의 예에 의하여 함흥은 호를 강등하여 군을 삼아 전일에 나누어 붙인 토지와 인민(人民)을 각각 본고을에 돌려보내고, 영흥은 승격하여 부(府)로 만들어 부윤(府尹)을 차정(差定)하고, 다시 토관(土官)을 설치하고, 인하여 영흥(永興)과 초면(初面)의 대관(大官)인 안변(安邊)의 호를 들어서 본도를 개칭(改稱)하여 영안도(永安道)라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성종 1년 기사).
  9. 연산군 4년 함경도로 굳어짐.
  10. 함흥에 있다가 선조 33년(1600년) 영흥으로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