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密
생몰년도 미상
명나라의 인물.
1374년 여름 4월에 예주부사를 지내다가 주원장의 명으로 채빈과 함께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중서성의 공문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원나라를 정벌할 때 길이 험하고 멀어 많은 군마를 잃었고 다시 원정길에 오르기에 고려가 원나라 때 말 2, 3만 필을 탐라에 남겨 번식했을테니 그 중에서 말 2천 필을 가려보내라는 것이었다.
채빈과 함께 문묘를 참배했고 이 때 생도들이 읍을 하자 채빈과 달리 임밀은 그 생도들에게 답례를 했고 6월에는 고려에서 채빈과 함께 잔치를 참석했으며, 가을 7월에는 채빈과 함께 자신을 접대한 조민수, 홍상재를 발탁해 밀직으로 임명하게 했다. 제주도에서는 말을 3백 필만 보내자 임밀은 공민왕에게 제주의 말이 2천 필에 미달하면 황제가 자신들을 도륙할 것이니 지금 왕의 손에 죽으려 한다고 뻗대었으며, 이에 공민왕이 제주도의 시데리비스를 토벌하기로 결정했다.
8월에는 제주의 말 수를 채우지 못했다면서 한방언을 처형하라고 요구했지만 한방언은 장형, 유배에 그쳤으며, 공민왕이 봉선사의 소나무 언덕에서 놀이판을 벌여 잔치를 열어주자 후한 대접을 받았으면서 서로 작별하게 되었다면서 아쉬움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9월에 채빈과 함께 귀국길에 올라 김의의 호송을 받아 말 3백 필을 수송했고 이르는 곳마다 지체해 머무르다가 개주참에서 김의에게 붙잡힌 채로 북원으로 끌려갔다.